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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우리나라(東國祖師) 法脈 系譜

제 69조 청봉 거안(靑峰巨岸)

by 산산바다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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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 거안(靑峰巨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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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69 청봉 거안(靑峰巨岸) (1730~?)

 

 

청봉 거안(靑峰 巨岸)스님의 비문이나 문집이나 혹은 행장이 보이지 않는다.

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조선시대의 고승 채영(采永)17621764년에 편찬, 간행한 책.)

喚惺을 이은 虎巖門派淸虛下第五世 虎巖體淨의 법을 이은 청허六世 靑峰巨岸이라 기록되어 있다.

 

몽암대사문집중에 海印寺佛糧契序에 그의 생몰연대는 없고 장경각 보전을 위한 계를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모집하여 돈과 전답을 상당 모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 서문을 쓰신 몽산스님도 생몰 년대를 알 수 없다. 다만

 

상주 목사에 올린 글 癸巳년 겨울(1773),

민판서에게 올린 글 辛亥 가을(1791),

無量寺十王殿重修記當宁(정조)六年壬寅(1782)등의 년대가 보인다.

특히 지리산 水聲臺重修記 癸丑王春(1793)을 쓸 당시에는 병으로 기력이 소진되어 자리에 누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매우 노쇠한듯하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1770년대를 전후하여 상당한 활약을 하신 분으로 보이며 또한 해인사 불량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청봉 거안스님의 활약을 서문으로 기록한 것을 보면 1520세 정도 높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한 유망록(應雲空如찬술)의 ᅠ金剛山摩訶衍重創上樑文淸虛·虎岩·靑峰으로 이어진 禪脈嫡派라는 기록이 보인다.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永安府院君(김조순 [金祖淳, 1765 ~ 1832] )에게 올린 편지글도 보이는데 이를 보면 응운스님은 청봉거안 스님보다. 20세 정도 적은 것 같다.

 

이들을 종합해보면

몽산스님1710년대에 태어나 175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1770년대에는 저술에 몰두한 것 같으며

청봉 거안스님은 1730년대에 태어나 1770대를 전후하여 왕성한 수행과 행각이 있은 것 같다.

응운 공여스님은 1750년대에 태어나 1800년을 전후하여 활동하시고 1830년 전후에 저술에 몰입하신 것 같다.

 

호남의 청봉화상은 성품은 부드러웠지만 서원은 견고하여 마치 쇠를 끊는 듯하였다.

해인사 대장전을 위한 불량의 계를 절집이나 세속에 관계없이 모집할 것을 마음으로 굳게 맹세하고는 나에게 물어 가로되 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말에 정취가 가득하였다.

가로되 팔표산에는 수승한 이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야산 최고 사찰의 크기와 대장경 경판이 얼마이겠습니까?” 하였다.

 

유독 화상이 이 대장전의 청정한 공양이 결핍함이 애석하여 아침저녁으로 수호하고 청소하는 이가 없음을 분개하여 의발을 팔아 뭍 인연들을 모집하였다. 사람의 고하 빈부를 논하지 않고 재물의 풍섬 경중을 묻지 않고 돈을 기부하는 이는 모두 책에 기명하였는데 전국 어디든 부르는 곳이 있으면 천리라도 응하였다. 몇년 안되어 돈이 백단위가 넘었고 밭이 경(3000)을 넘었다.

향화를 받듦으로서 명부의 길에 노잣돈으로 쓰이겠다.’ 하니,

나에게 궐연히 일어나 비웃어 말하기를 그대는 가위 껍질만 말하고 골수는 망각한 사람이로다.” 하였다.

 

순박함이 흩어짐으로부터 사람의 욕심은 더욱 치연하여 돈은 알고 몸은 망각하였고 몸은 알되 마음은 매하였다. 그러므로 화상은 평등심을 발하여 대원을 움직여 이 일을 밀어붙여 사람들을 이끌고 불량계의 책을 만들어 시주자로 사람들을 이어 받아 유인하고 사람들을 계로서 적시고 반연들을 잊고 본성을 덮음에 이르러 즉 이 작은 공양이 운문의 호떡과 앙산의 밥보다 못하지 않다.

이 공양은 삼세여래에 가하며 이 공양은 시방법계 일체 무앙수겁의 허기진 중생들에게 모두 이 공양이 더해질 것이다.

 

내가 이에 상래의 봉향화와 자명로의 갖가지 이야기는 알되 모두가 화상에 대해서는 알지는 못하였다. 만약 화상의 마음이 자명로에 있지 않았음을 알았더라면 대체로 불량계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스님이시여! 계원들에게 말하니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夏雲白 春峰靑

雲白非是白 峰靑不是靑

廣行頭陁兮 月白雪白道心白

遍懺華嚴兮 天靑海靑慧眼靑

 

여름 구름 희고 봄 산봉우리 푸르다. 널리 두타행을 행하니 달도 희고 눈도 희고 도심도 희다. 화엄참을 펼치니 하늘이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지혜의 눈도 푸르다.

 

불갑사에 소장된 청봉거안(靑峰巨岸, 18세기 후반 활동) 선사 진영에 실려 있는 영파성규(影波聖奎, 1728~1812)의 영찬이다. 이 글은 영파스님이 80세인 을축년 봄인 1805년에 지은 것이다.

 

진영의 주인공 청봉스님과 찬자(撰者) 영파 스님은 모두 호암(虎岩) 스님의 손상좌이다. 스승으로 청봉스님은 호암체정(虎岩體淨 1687~1748)을 모시고 영파스님은 함월해원(涵月海源, 1691~1770)을 모셨다. 청봉스님은 행장이나 비문이 전하지 않지만 그의 법맥은 율봉 청고(栗峰靑杲, 1738~1823)를 거쳐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로 이어져 현대 한국 불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단편이지만 청봉스님의 수행 생활을 유추할만한 기록들이 18세기에 활동한 스님들 문집에서 찾을 수 있다. <몽암대사문집(夢庵大師文集)>에는 해인사 대장전에 올리는 공양이 부족하고 새벽과 밤에 대장경을 수호하고 청소할 이가 없자 청봉스님이 불량계(佛糧契)를 모집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스님은 호남에 주석하면서 해인사 대장전을 위해 자신의 의발(衣鉢)을 팔고 빈부고하를 막론하고 천릿길을 나서 계원을 모집할 정도로 서원(誓願)을 이루기 위한 강인한 의지와 활동을 펼쳤다. 또한 뛰어난 제자들을 양성할 정도로 수행자로서의 역량 또한 뛰어났다.

 

함월 스님은 나의 거문고가 서쪽에서 온 곡조를 연주하자(吾將三尺琴 彈出西來曲), 그 소리를 아는 이 세상에 없고 오직 스님만이 알고 되돌아보네(塵世少知音 惟師還識得)”라는 글을 청봉 스님에게 주며 그의 자질을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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