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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우리나라(東國祖師) 法脈 系譜

제 72조 용암 혜언(龍巖慧彦)

by 산산바다 2022. 11. 21.

산과바다

용암 혜언(龍巖慧彦) 진영 (통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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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2 용암 혜언(龍巖慧彦) (1779 ~ ? )

 

 

스님의 법명은 혜언(慧彦). 법호는 용암(龍巖). 율봉청고의 법을 이었다. 월송 성일 안행과 더불어 청봉거안의 손자뻘이다. 호암체정의 증손. 일찍이 율봉 노스님과 청봉스님의 문에 참배하였다. 山山水水 밟고 마시고 경경율율 듣고 지니니 눈은 이미 푸르고 귀는 이미 익어 율봉(栗峰)의 무딘 도끼를 받았다.

청하면 바로 달려갔고 구하면 무두 이루어졌다동은 즉 통도사 해인사, 서는 구월산과 묘향산, 남은 조계산과 지리산, 북은 금강산과 오대산, 중앙은 삼각산과 용문산등 곳곳마다 깃들고 쉬어가니 교화를 입지 않은 이가 없었다.

만일암에 주하니 물정이 오히려 좁아 백운당으로 옮겼으나 외부의 풍토병이 더하여 침노하니 보광당회 원각산중하였다.

 

그에게 투향한 두 제자가 있었는데 이르자면 설월원민포운윤경이었다. 포운에게 제가가 있었는데 이르자면 화운관직 보봉이선 응허보신 우담유언 등이다. 그 시대는 순간이니 행장은 문손처에 있다.

 

스님의 휘는 상언, 성은 조씨, 여주사람으로 조성국의 아들이다어머니는 여산 송씨, 진사 송일성의 따님이다.

꿈에 한 마리의 청용이 품에 날아들어 왔는데 이로부터 임신하여 달이 차 스님이 태어나셨다. 때는 건륭 44(1779) 계묘(기해) 팔월 초 닷새였다.

14살 때 큰아버지를 따라 모악산(도갑사)에 들어가 수업하였는데 학업성적이 하나가 열을 대적하였다.

행동거지가 타인의 의표를 뛰어넘어 사람들이 모두 법기라고 일컬었다.

스님은 속을 벗어나 제방의 선지식을 뛰어넘을 뜻이 있어 나이 17세에 용천사에 들어가 무인장 노처에서 머리를 깎았다.

장노는 크게 이룰 그릇임을 알지 못했다. 풀 베고 방아 찧고 나무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부처님과 스님 주변의 일은 더욱 미숙하였다.

이에 세간의 무상함을 생각하고 신유(1801)년 정월에 용진산으로 들어 가 글을 읽으니 금성(전라도지방)에서 유독 뛰어났다.

 

대중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곳저곳 시주를 다녔는데 아무리 힘들어도 지팡이 하나 의지하지 않았고 이엉을 역고 쌀을 빌고 천호만호에 밥을 비는데도 마음이 기뻤고 사람들의 지위가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다.

 

이는 자신의 복녹을 모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대중들의 배가 부르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생구류를 형제로 삼았고 마음에 다툼이 없는 삼계의 장소가 있었을 뿐 그는 불이의 문에 헛된 명문을 바라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계해(1803)2월 모후산 유마사에 이르러 제를 올리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사람에게 덕화를 입힐 수 가 없으며 다만 고인의 거죽만을 읽고 자리이타의 원성한 행이 없어 중생들이 이 세상에서 부질없는 죽음에 처해 있으니 또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하산하여 양식을 빌어 제불에게 공양하였다.

 

여름 사월에 원응선사를 따라 조계산 선암사에 이르러 정해와 더불어 생사교를 맺고 가을 구월에는 팔영산 서불사에 이르러 십일간 제를 올렸다.

갑자(1804)년 시월에는 칠불암에 들어가 금허화상의 법석에서 선수업을 받았고 을축년 유월에는 천축산에 이르러 율봉화상을 배알하였다.

가을 팔월에는 율봉스님을 따라 금강산 유점사에 들어가 백일 불공행사로 몸을 정중인의에 처 하였다.

그에게 투향한 두 제자가 있었는데 이르자면 설월원민과 포운윤경이었다.

포운에게 제자가 있었는데 이르자면 화운관직, 보봉이선, 응허보신 우담유언 등이다.

그 시대는 순간이니 행장은 문손처에 있다

 

청산에 비구름 기운이 덮으니

대천세계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하는구나.

 

만물은 봄빛을 머금었고

마른 나무에 날로 새잎이 돋는구나.

 

달이 금산에 걸리니 만민이 올려다본다.

 

봄이 오니 꽃이 피고

풀들이 향기롭고 아름다워라.

 

이것은 우리 비로자나부처님의

인행시의 과보로다

 

그러나 이는 부처에게만

유독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 본래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져 있으며

 

개개가 다 본래 스스로 구족하다

 

풀끝마다 금털의 사자가 출현하며

한 오락의 털끝마다 무위진인이 돌출한다.

 

어제는 술에 취해

부처를 꾸짖는 이 누구며

 

오늘은 향을 사루고 예불하는 이 누구냐?

 

무명이 실성이며 곧 불성이니

망인들 어찌 버리며

진인들 어찌 구할 것인가!

 

왕이 인정한 화엄종주’(御賜不壞法雲華嚴宗主)

 

太古東來漢碑屹 五傳淸虛有勳有才 爰及喚惺栗峯 師受敎統其道崔嵬

“태고가 동쪽으로 와서 한비로 높이 솟아/ 다섯 번 청허에게 전하여 공훈과 재주가 있었고/ 환성과 율봉에 미쳐 더욱 밝아졌으니/ 스님에게 받은 가르침 크고 그 길 높고 높다.”

 

통도사에 모셔진 용암혜언(龍巖慧彦, 1783~1841) 선사 진영에 실린 풍은부원군(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 1776~1846)의 영찬이다. 조만영은 순조 때 문신이며, 그의 딸은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오늘날 조대비로 널리 알려졌다. 조만영이 용암스님의 영찬을 짓게 된 연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동사열전(東師列傳)>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811년에 순조가 병이 나자 생모인 가순궁(嘉順宮) 순빈 박씨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남쪽 봉()자가 들어가는 절에 도인에게 축원을 올리면 쾌차한다는 말을 듣고 봉접사(鳳接寺, 봉서사(鳳棲寺)의 오자로 추정)의 용암스님에게 축원을 청해 왕의 병환을 나았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을 증명하듯 용암스님 진영에는 임금이 하사한 어사불괴법운화엄종주(御賜不壞法雲華嚴宗主)’가 영제와 더불어 부원군인 조만영의 찬문이 실려 있다.

 

조만영은 영찬에서 조사(祖師)들의 높은 공덕을 이어받은 용암스님을 찬탄했다. 찬문에서 언급했듯 스님은 태고보우와 청허휴정에서 이어진 환성지안의 후손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환성지안-호암체정-청봉거안(靑峰巨岸)-율봉청고(栗峰靑)의 법맥을 계승했다. 스님은 율봉스님에게 법통을 인정하는 돌부(, 무뎌진 손도끼)를 전해 받았고, 스승의 허락을 받고 통도사 해인사 묘향산 조계산 지리산 금강산 오대산 삼각산 용문산 등 전국에서 가르침을 펼쳤으며, 말년에는 해남 대흥사에서 수행하다 금강산 마하연에서 입적했다.

 

스님이 교화를 펼친 사찰 가운데 통도사는 용암의 후손들이 번성한 곳이다. 통도사에 모셔진 용암스님의 진영은 1846년에 조성됐다. 진영 제작을 주도한 이들 가운데 포운윤경(布雲潤)은 용암스님이 상족(上足)으로 선암사 출신이면서 통도사에서 활동했다. 진영 제작은 호암체정의 후손인 응월선화(應月善和)스님이 맡았다. 용암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환성스님의 진영이 모셔진 통도사 극락영당(極樂影堂)에 스님의 진영을 모셔 환성문중에서 스님이 지닌 위상을 갖추고 예우를 다하고자 했다. (불교신문) 3186/20163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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