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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東坡居士 蘇軾 詩

夷陵縣歐陽永叔至喜堂(이릉현구양영숙지희당) : 소식(蘇軾)

by 산산바다 2022.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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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夷陵縣歐陽永叔至喜堂(이릉현구양영숙지희당) : 소식(蘇軾)

           이릉현에 있는 구양영숙의 지희당

 

夷陵雖小邑自古控荊吳

形勝今無用英雄久已無

誰知有文伯遠謫自王都

人去年年改堂傾歲歲扶

追思猶咎呂感嘆亦憐朱(時朱太守為公築此堂)

舊種孤楠老新霜一橘枯

清篇留峽洞醉墨寫邦圖(三遊洞有詩,《夷陵圖後有留題處)

故老問行客長官今白須

著書多念慮許國減歡娛

寄語公知否還須數倒壺

 

 

夷陵雖小邑(이릉수소읍) : 이릉이 비록 크지 않은 고을이지만

自古控荆吳(자고공형오) : 예로부터 초와 오를 장악했는데

形勝今無用(형승금무용) : 지금은 그 형세 쓰일 데 없고

英雄久已無(영웅구이무) : 영웅들도 오랫동안 나지 않았네.

誰知有文伯(수지유문백) : 그 누가 알았을까 문단 어른이

遠謫自王都(원적자왕도) : 도성에서 멀리까지 유배 온 것을

人去年年改(인거연년개) : 사람들은 떠나고 해마다 달라지고

堂傾歲歲扶(당경세세부) : 집을 갈수록 기울어져 받쳐놓았네.

追思猶咎呂(추사유구려) : 돌이켜보면 재상은 잘못하였고

感嘆亦憐朱(감탄역련주) : 태수의 배려 생각할수록 감탄스럽네.

(時朱太守爲公筑此堂.)(당시 태수였던 주경기가 공을 위해 이 집을 지어주었다.)

舊種孤楠老(구종고남로) : 그때 심은 녹나무 두 그루 홀로 되었고

新霜一橘枯(신상일귤고) : 서리 내린 감귤나무 시들어 가는데

淸篇留峽洞(청편류협동) : 청아한 시 한 편이 서릉협 동굴에 남아 있고

醉墨寫邦圖(취묵사방도) : 술 취해 쓴 글씨가 이릉도경뒤에 남아 있네.

(三遊洞有詩,夷陵圖後有留題處) (삼유동에 시가 있고, (이릉도경) 뒤쪽에 남겨둔 글이 있다)

故老問行客(고로문행객) : 마을 사는 노인에게 한 번 뵙기 여쭸더니

長官今白鬚(장관금백수) : 태수는 지금 수염이 하얗게 셀 정도로

著書多念慮(저서다염려) : 책 쓰고 글 짓느라 생각이 많고

許國減歡娛(허국감환오) : 진충보국 하느라 즐길 시간 없다하네.

奇語公知否(기어공지부) : 말 전해주면 공께서 알아보실 수도 있고

還須數倒壺(환수수도호) : 공과 함께 술 몇도 기울일 수 있을 텐데

 

 

* 夷陵(이릉) : 지명. 후베이(湖北) 의창(宜昌) 동쪽에 있으며 예로부터 물은 이곳에 이르러 흐름이 완만해지고, 산은 이곳에 이르러 구릉이 된다(水至此而夷, 山至此而陵).’고 하여 夷陵이라 하였다. 장강(長江) 중하류의 분계점인 동시에 삼협(三峽)의 문호에 해당하는 곳이다

* 形勝(형승) : 지리적 위치가 좋고 지세가 험한 것을 가리킨다. 풍경이 빼어난 것을 가리킨다. 차세나 경치가 뛰어난 것을 가리킨다.

* 文伯 : 저명한 문인(文人)에 대한 경칭으로 구양수(歐陽修)를 가리킨다

* 追思 이하 두 구절 : 구양수가 이릉으로 유배 가게 되었을 때 재상이 여이간(呂夷簡)이었고 주경기(朱慶基)가 이릉을 관할하는 협주(峽州) 태수로 있었다. ‘는 책망하다

* 三遊洞(삼유동) : 의창(宜昌)으로부터 10km 정도 떨어져 서릉협(西陵峽) 밖에 있는 풍치지구로, 당조(唐朝) 때 시인 백거이(白居易), 백행간(白行簡), 원진(元稹) 등 세 사람이 함께 이곳을 다녀간 것을 전삼유(前三遊)라 하고, 송대(宋代)에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등 삼부자가 다녀간 것을 후삼유(後三遊)라 하는데, 주요 풍경으로는 삼유동(三遊洞), 지희정(至喜亭), 초새루(楚塞樓), 고군루유지(古軍壘遺址), 장비뇌고대(張飛擂鼓臺), 육유천(陸游泉) 등이 있다

* 舊種孤楠(구종고남) : 구양수가 일찍이 지희정에 직접 남목(楠木), 즉 녹나무를 심었다. 구양수는 지희정 북쪽에 새로 집을 짓고 녹나무 두 그루를 심은 뒤 바로 지방에 있는 원진에게 시를 지어 보내다(至喜亭新開北軒, 手植楠木兩株, 走筆呈元珍表臣)란 시를 짓기도 했다

* 淸篇 이하 두 구절 : 동파가 자주에서 三遊洞有詩, 夷陵圖後有留題處((구양수가) 삼유동에 시를 지어 남겼고, 이릉도경뒤쪽에 글을 써서 남겼다).’라고 하였다. ‘邦圖이릉도경夷陵圖經을 가리킨다.

* 行客 : 소식(蘇軾) 자신을 가리킨다

* 著書 이하 두 구절 : 회남자淮南子설산훈說山訓에서 念慮者不得臥, 則有爲其所止矣(생각하고 걱정하는 사람은 잠들 수 없으므로 생각을 그쳐야 한다)’라고 했다. ‘許國은 나라에 몸을 바쳐 충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 倒壺(도호) : 항아리가 바닥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을 가리킨다

 

동파(東坡)의 나이 24살인 가우(嘉祐) 4(1059) 작이다.

모친상을 마친 동파가 부친 및 아우 자유(子由)와 함께 집을 나서 셋이 함께 배를 타고 도성으로 향했다.

己亥之歲, 侍行適楚, 舟中無事, 雜然有觸於中, 而發於詠嘆. 蓋家君之作與弟轍之文皆在焉, 謂之南行集.

기해년에 부친을 모시고 옛 초나라 땅을 향해 가는 동안 배 안에서 할 일이 없어 이것저것 마음에 걸리는 것들을 시와 글로 읊조렸는데, 부친께서 쓰신 글과 아우 철이 쓴 글을 모두 넣어 남행집이라 하였다.

- 소식蘇軾남행전집南行前集(서문) 중에서

 

세 사람이 도성 변량(汴梁)(현재의 카이펑開封)으로 가는 길은 집에서 강릉까지는 배편으로, 강릉에서 변량까지는 육로를 이용하는 두 단계로 이루어졌고, 배 위에서 쓴 시문들은 남행전집으로, 그리고 육로를 이용하는 동안에 쓴 것들은 남행후집으로 묶였다.

 

두 번째로 이뤄진 소씨 삼부자의 변량행은 동파 형제의 출사와 문단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경우(景祐) 3(1036) 10, 범중엄(范仲淹)이 직언을 한 것 때문에 유배된 뒤, 선덕랑(宣德郞)이었던 구양수가 이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다가 이듬해 이릉현령으로 좌천되었는데, 당시 협주태수로 있던 주경기가 구연(舊緣)이 있는 구양수를 위해 지희당을 지어주었고, 이 시는 그런 내력을 알고 있는 동파가 지희당을 찾아와 감회를 노래한 것이다.

 

경우 5(1038) 3, 영숙(永叔)이 건덕현령(乾德縣令)으로 부임해가면서 그가 이릉에 유배된 기간은 13개월로 그리 길지 않았지만, 부임했던 동안에 쓴 이릉 관련 문학작품은 시(50)와 문장(30) 등 도합 140편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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