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夷陵縣歐陽永叔至喜堂(이릉현구양영숙지희당) : 소식(蘇軾)
이릉현에 있는 구양영숙의 지희당
夷陵雖小邑,自古控荊吳。
形勝今無用,英雄久已無。
誰知有文伯,遠謫自王都。
人去年年改,堂傾歲歲扶。
追思猶咎呂,感嘆亦憐朱。(時朱太守為公築此堂。)
舊種孤楠老,新霜一橘枯。
清篇留峽洞,醉墨寫邦圖。(三遊洞有詩,《夷陵圖》後有留題處。)
故老問行客,長官今白須。
著書多念慮,許國減歡娛。
寄語公知否,還須數倒壺。
夷陵雖小邑(이릉수소읍) : 이릉이 비록 크지 않은 고을이지만
自古控荆吳(자고공형오) : 예로부터 초楚와 오吳를 장악했는데
形勝今無用(형승금무용) : 지금은 그 형세 쓰일 데 없고
英雄久已無(영웅구이무) : 영웅들도 오랫동안 나지 않았네.
誰知有文伯(수지유문백) : 그 누가 알았을까 문단 어른이
遠謫自王都(원적자왕도) : 도성에서 멀리까지 유배 온 것을
人去年年改(인거연년개) : 사람들은 떠나고 해마다 달라지고
堂傾歲歲扶(당경세세부) : 집을 갈수록 기울어져 받쳐놓았네.
追思猶咎呂(추사유구려) : 돌이켜보면 재상은 잘못하였고
感嘆亦憐朱(감탄역련주) : 태수의 배려 생각할수록 감탄스럽네.
(時朱太守爲公筑此堂.)(당시 태수였던 주경기가 공을 위해 이 집을 지어주었다.)
舊種孤楠老(구종고남로) : 그때 심은 녹나무 두 그루 홀로 되었고
新霜一橘枯(신상일귤고) : 서리 내린 감귤나무 시들어 가는데
淸篇留峽洞(청편류협동) : 청아한 시 한 편이 서릉협 동굴에 남아 있고
醉墨寫邦圖(취묵사방도) : 술 취해 쓴 글씨가 ⟪이릉도경⟫ 뒤에 남아 있네.
(三遊洞有詩,夷陵圖後有留題處) (삼유동에 시가 있고, (이릉도경) 뒤쪽에 남겨둔 글이 있다)
故老問行客(고로문행객) : 마을 사는 노인에게 한 번 뵙기 여쭸더니
長官今白鬚(장관금백수) : 태수는 지금 수염이 하얗게 셀 정도로
著書多念慮(저서다염려) : 책 쓰고 글 짓느라 생각이 많고
許國減歡娛(허국감환오) : 진충보국 하느라 즐길 시간 없다하네.
奇語公知否(기어공지부) : 말 전해주면 공께서 알아보실 수도 있고
還須數倒壺(환수수도호) : 공과 함께 술 몇도 기울일 수 있을 텐데
* 夷陵(이릉) : 지명. 후베이(湖北) 의창(宜昌) 동쪽에 있으며 예로부터 ‘물은 이곳에 이르러 흐름이 완만해지고, 산은 이곳에 이르러 구릉이 된다(水至此而夷, 山至此而陵).’고 하여 ‘夷陵’이라 하였다. 장강(長江) 중하류의 분계점인 동시에 삼협(三峽)의 문호에 해당하는 곳이다.
* 形勝(형승) : 지리적 위치가 좋고 지세가 험한 것을 가리킨다. 풍경이 빼어난 것을 가리킨다. 차세나 경치가 뛰어난 것을 가리킨다.
* 文伯 : 저명한 문인(文人)에 대한 경칭으로 구양수(歐陽修)를 가리킨다.
* 追思 이하 두 구절 : 구양수가 이릉으로 유배 가게 되었을 때 재상이 여이간(呂夷簡)이었고 주경기(朱慶基)가 이릉을 관할하는 협주(峽州) 태수로 있었다. ‘咎’는 책망하다.
* 三遊洞(삼유동) : 의창(宜昌)으로부터 10km 정도 떨어져 서릉협(西陵峽) 밖에 있는 풍치지구로, 당조(唐朝) 때 시인 백거이(白居易), 백행간(白行簡), 원진(元稹) 등 세 사람이 함께 이곳을 다녀간 것을 전삼유(前三遊)라 하고, 송대(宋代)에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등 삼부자가 다녀간 것을 후삼유(後三遊)라 하는데, 주요 풍경으로는 삼유동(三遊洞), 지희정(至喜亭), 초새루(楚塞樓), 고군루유지(古軍壘遺址), 장비뇌고대(張飛擂鼓臺), 육유천(陸游泉) 등이 있다.
* 舊種孤楠(구종고남) : 구양수가 일찍이 지희정에 직접 남목(楠木), 즉 녹나무를 심었다. 구양수는 「지희정 북쪽에 새로 집을 짓고 녹나무 두 그루를 심은 뒤 바로 지방에 있는 원진에게 시를 지어 보내다(至喜亭新開北軒, 手植楠木兩株, 走筆呈元珍表臣)」란 시를 짓기도 했다.
* 淸篇 이하 두 구절 : 동파가 자주에서 ‘三遊洞有詩, 夷陵圖後有留題處((구양수가) 삼유동에 시를 지어 남겼고, ⟪이릉도경⟫ 뒤쪽에 글을 써서 남겼다).’라고 하였다. ‘邦圖’는 ⟪이릉도경夷陵圖經⟫을 가리킨다.
* 行客 : 소식(蘇軾) 자신을 가리킨다.
* 著書 이하 두 구절 : ⟪회남자淮南子⋅설산훈說山訓⟫에서 ‘念慮者不得臥, 則有爲其所止矣(생각하고 걱정하는 사람은 잠들 수 없으므로 생각을 그쳐야 한다)’라고 했다. ‘許國’은 나라에 몸을 바쳐 충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 倒壺(도호) : 항아리가 바닥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을 가리킨다.
동파(東坡)의 나이 24살인 가우(嘉祐) 4년(1059) 작이다.
모친상을 마친 동파가 부친 및 아우 자유(子由)와 함께 집을 나서 셋이 함께 배를 타고 도성으로 향했다.
己亥之歲, 侍行適楚, 舟中無事, 雜然有觸於中, 而發於詠嘆. 蓋家君之作與弟轍之文皆在焉, 謂之南行集.
기해년에 부친을 모시고 옛 초나라 땅을 향해 가는 동안 배 안에서 할 일이 없어 이것저것 마음에 걸리는 것들을 시와 글로 읊조렸는데, 부친께서 쓰신 글과 아우 철이 쓴 글을 모두 넣어 ⟪남행집⟫이라 하였다.
- 소식蘇軾의 ⟪남행전집南行前集⟫(서문) 중에서
세 사람이 도성 변량(汴梁)(현재의 카이펑開封)으로 가는 길은 집에서 강릉까지는 배편으로, 강릉에서 변량까지는 육로를 이용하는 두 단계로 이루어졌고, 배 위에서 쓴 시문들은 ⟪남행전집⟫으로, 그리고 육로를 이용하는 동안에 쓴 것들은 ⟪남행후집⟫으로 묶였다.
두 번째로 이뤄진 소씨 삼부자의 변량행은 동파 형제의 출사와 문단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경우(景祐) 3년(1036) 10월, 범중엄(范仲淹)이 직언을 한 것 때문에 유배된 뒤, 선덕랑(宣德郞)이었던 구양수가 이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다가 이듬해 이릉현령으로 좌천되었는데, 당시 협주태수로 있던 주경기가 구연(舊緣)이 있는 구양수를 위해 지희당을 지어주었고, 이 시는 그런 내력을 알고 있는 동파가 지희당을 찾아와 감회를 노래한 것이다.
경우 5년(1038) 3월, 영숙(永叔)이 건덕현령(乾德縣令)으로 부임해가면서 그가 이릉에 유배된 기간은 1년 3개월로 그리 길지 않았지만, 부임했던 동안에 쓴 이릉 관련 문학작품은 시(50)와 문장(30) 등 도합 140편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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