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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고정서대장군장사맹부군전(晉故征西大將軍長史孟府君傳) - 도연명(陶淵明)

by 산산바다 2021.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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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고정서대장군장사맹부군전(晉故征西大將軍長史孟府君傳) - 도연명(陶淵明)

          진나라 고 정서대장군 장사 맹부군의 전

 

 

君諱嘉字萬年江夏鄂人也曾祖父宗以孝行稱仕吳司馬祖父揖 元康中爲廬陵太守宗葬武昌新陽縣子孫家焉遂爲縣人也

君少失父奉母二弟居娶大司馬長沙桓公陶侃第十女閨門孝友人無能間鄉閭稱之沖默有遠量弱冠儔類咸敬之同郡郭遜以淸操知名時在君右常嘆君溫雅平曠自以爲不及遜從弟立亦有才志與君同時齊譽每推服焉由是名冠州里聲流京邑

太尉潁川庾亮以帝舅民望受分陜之重鎭武昌並領江州辟君部廬陵從事下郡還亮引見問風俗得失對曰:「嘉不知還傳當問從吏。」亮以麈尾掩口而笑諸從事既去喚弟翼語之曰:「孟嘉故是盛德人也。」君既辭出外自除吏名便歩歸家母在堂兄弟共相歡樂怡怡如也旬有餘日更版爲勸學從事時亮崇修學校髙選儒官以君望實故應尚德之舉

大傅河南褚裒簡穆有器識時爲豫章太守出朝宗亮正旦大會州府人士率多時彥君在坐次甚遠裒問亮:「江州有孟嘉其人何在?」亮云:「在坐卿但自覓。」裒歴觀遂指君謂亮曰:「將無是耶?」亮欣然而笑喜裒之得君奇君爲裒之所得乃益器焉

舉秀才又爲安西將軍庾翼府功曹再爲江州別駕巴丘令征西大將軍譙國桓溫參軍

君色和而正溫甚重之九月九日溫遊龍山參佐畢集四弟二甥咸在坐時佐吏並著戎服有風吹君帽墮落溫目左右及賓客勿言以觀其舉止君初不自覺良久如廁溫命取以還之廷尉太原孫盛爲諮議參軍時在坐溫命紙筆令嘲之文成示溫溫以著坐處君歸見嘲笑而請筆作答了不容思文辭超卓四座嘆之

奉使京師除尚書刪定郎不拜孝宗穆皇帝聞其名賜見東堂君辭以腳疾不任拜起詔使人扶入

君嘗爲刺史謝永別駕會稽人喪亡君求赴義路由永興髙陽許詢有雋才辭榮不仕每縱心獨往客居縣界嘗乘船近行適逢君過嘆曰:「都邑美士吾盡識之獨不識此人唯聞中州有孟嘉者將非是乎然亦何由 來此?」使問君之從者君謂其使曰:「本心相過今先赴義尋還就君。」 及歸遂止信宿雅相知得有若舊交

還至轉從事中郎俄遷長史在朝隤然仗正順而已門無雜賓嘗會神情獨得便超然命駕徑之龍山顧景酣宴造夕乃歸溫從容謂君曰:「人不可無勢我乃能駕御卿。」後以疾終於家年五十一

始自總髮至於知命行不茍合言無誇矜未嘗有喜慍之容好酣飲逾多不亂至於任懷得意融然遠寄傍若無人溫嘗問君:「酒有何好而卿嗜之?」君笑而答曰:「明公但不得酒中趣爾。」又問:「聽妓絲不如竹竹不如肉?」答曰:「漸近自然。」中散大夫桂陽羅含賦之曰:「孟生善酣不愆其意。」光祿大夫南陽劉耽昔與君同在溫府淵明從父太常夔嘗問耽:「君若在當已作公否?」答云:「此本是三司人。」爲時所重如此

淵明先親君之第四女也。《凱風》「寒泉之思實鐘厥心謹按采行事撰爲此傳懼或乖謬有虧大雅君子之德所以戰戰兢兢若履深薄云爾

贊曰:「孔子稱:『進德修業以及時也。』君淸蹈衡門則令問孔昭振纓公朝則德音允集道悠運促不終遠業惜哉仁者必壽豈斯言之謬乎!」

 

 

부군께서는 존함이 가이고, 자는 만년으로 강하군 맹현 사람이다.

증조부 종은 효행으로 칭송되었고, 오나라의 사공 벼슬을 맡으셨다.

조부 읍은 원강 연간에 여릉 태수를 지냈다.

증조부인 종께서 무창군 신양현에 묻혀서, 자손들이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마침내 그 현의 사람이 된 것이다.

 

부군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모시며 두 아우와 함께 살았다.

대사마 장사 환공 도간의 열째딸을 아내로 맞이하셨는데 안채에서 효도하며 우애했고, 사람들이 흠잡을 수 있는 것이 없었으니 마을 사람들이 칭송했다.

 

담박하고 과묵하면서도 원대한 도량이 있어서 약관의 나이에 주위 동료들이 모두 그를 공경했다.

같은 고을의 곽손은 청렴과 지조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당시에 부군의 윗자리에 있었다.

항상 부군의 온화하고 고상하며 공평하고 관대함에 탄복하며, 자신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손의 사촌동생 립 역시 재주와 뜻을 지니고 있어, 부군과 더불어 동시에 명성을 나란히 했는데 매번 존경하고 탄복했다.

이로써 이름이 지방에서 으뜸이었고 명성이 수도 고을까지 흘러갔다.

 

태위를 지내셨던 영천 출신 유량은 황제의 외삼촌이자 백성이 존경하는 자로서, 섬 지역을 나눈 중책을 맡았고 무창을 진수 하면서 아울러 강주를 거느렸는데 여릉 지역의 부국군종사자로서 부군을 불렀다.

대답해 말하기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역참으로 돌아가 종리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유량은 먼지떨이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여러 종사들이 이미 돌아가자, 동생 익을 불러 말하길 맹가는 본디 크고 아름다운 덕을 지닌 사람이구나.”라고 했다.

부군께서 이미 사직하고 밖으로 나올 때, 스스로 관직의 이름마저 없애 버렸다.

 

곧장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니, 모친은 집에 계셨고 형제들은 함께 즐거워하며 기뻐했다.

10여일이 지나 다시 직을 받아 권학종사에 임명 되었다. 당시 유량은 학교 세우는 것을 숭상하고 가다듬어 유관들을 높여 뽑았는데 부군의 명망과 실재 내용은 본디 덕을 숭상하는 천거에 응하는 것이었다.

 

대부를 지낸 하남출신 저포는 단출하고 의젓하여 도량과 식견이 있었다.

때마침 예장 태수를 지내고 있어서 조정을 나와 유량을 만났다.

정월 초하루에 고장의 인사들을 크게 모았는데 대체로 당시의 명사들이 많았고 부군이 앉은 수서가 매우 멀었다. 저포가 유량에게 묻기를 강주에 맹가라는 사람이 있다던데 그 사람은 어디에 계십니까?”

유량이 말하기를 이 자리에 있으니 경께서 다만 스스로 찾아보시오.”

저포가 두루 보더니 마침내 부군을 가리키며 유량에게 일러 말하길 혹시 이 사람이 아닙니까?”

유량은 기쁘게 웃으면서 저포가 부군을 알아본 것을 즐거워했다. 유량은 부군을 저포가 알아본 것을 기이하게 여기며, 이에 부군을 더욱 인재로 여겼다.

 

수재로 발탁되어 또한 안서장군인 유익 막부의 공조를 지냈고 다시 강주의 별가 벼슬을 지냈으며 파구의 현령을 지냈고 정서대장군인 초국 환온의 참군이 되었다.

부군께서는 안색이 온화하면서 단정해 환온은 그를 매우 중시했다.

99일 환온이 용산에서 노닐었는데 막료와 부하들이 모두 모였으며 네 명의 동생과 두 명의 조카도 함께 자리에 있었다. 그때 막료들은 아울러 군복을 입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부군의 모자가 땅에 떨어지자 환온은 좌우와 빈객들에게 눈짓을 해 말하지 않도록 하고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부군은 애초부터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더니 한참 지나서 변소에 갔다. 온이 명하기를 모자를 집어서 돌려주도록 했다.

정위 벼슬을 지내고 있던 태원 사람 손성은 자의참군을 지내고 있었는데 당시 자리에 있었다. 환온이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해 그를 놀리도록 시켰다.

부군이 돌아와 놀림을 당하자 붓을 청해 담을 하고자 했는데 전혀 생각할 틈 없이도 문장이 탁월해 사방 자리의 사람들이 탄복했다.

명령을 받들고 수도에 사신으로 갔는데 상서산정랑 관직에 제수한다고 했지만 받지 않았다.

효종 목황제께서 그 이름을 듣고서 동당에서 알현하도록 허락했다. 부군은 다리의 병으로 인해 절하고 일어나는 예를 행하기 어렵다며 사양하자 조서를 내려 사람을 시켜 부축해서 들어오도록 했다.

부군께서 일찍이 자사인 사영의 별가를 지낸 적이 있었다. 사영은 회계 사람이었다. 그가 죽자 부군께서는 문상에 대한 허락을 요청했는데 길은 영흥현을 지나게 되었다.

고향 출신인 허순은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었으며 영화를 사양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마음 내키는 대로 홀로 다녔다.

영흥현 경계에 나그네로 머물고 있었는데 일찍이 배를 타고 근처를 지나다 마침 부군이 지나갈 때에 마주치니 탄복하며 말했다.

도웁의 멋진 선비들은 내가 모두 알고 있는데, 유독 이 사람만은 모르겠다. 듣자니 고을 가운데 맹가라는 자가 있다는데, 혹시 이 사람이 아닐까? 그러나 또한 무슨 이유로 여기에 왔을까?”

심부름시켜 부군의 시종에게 물어보게 했더니, 부군은 그 심부름꾼에게 일러 말했다.

본래 마음은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지금은 먼저 문상을 가니, 며칠 후에 돌아오면서 당신을 찾아뵙겠습니다.”

돌아올 때 마침내 이틀을 머물렀는데, 맹우 서로 잘 알아보고 마음이 맞아 마치 오래 사귄 벗과 같음이 있었다.

 

돌아온 뒤 종사중랑으로 전임되었다가 곧 장사로 옮겼다. 관청에서는 온화했으며 바름과 순리에 기댔을 따름이고 집에는 잡된 손님이 없었다.

늘 마침 마음에서 홀로 느끼며 초연하게 수레를 명해 곧장 용산으로 가서 경치를 돌아보고 얼큰하게 잔치하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이에 돌아왔다.

온이 느긋하게 부군에게 말하기를 사람은 권세가 없으면 안 되겠소. 나라야 비로소 경을 거느릴 수 있으니까요.”했다. 후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1세였다.

 

처음 머리 묶던 시절부터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도록 행함에 구차이 영합하지 않았고, 말에는 자랑이나 뻐김이 없었으며, 일찍이 기뻐하고 성내는 얼굴빛이 없었다.

얼큰하게 술 마시기를 즐겼고, 주량을 크게 넘겨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생각에 맡겨 뜻을 얻음에 이르면, 화락하게 세상 밖으로 몸을 맡겨 마치 곁에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온은 일찍이 부군에게 물었다. “술에 무슨 좋은 점이 있기에 그대는 그것을 좋아 하는가?”

부군께서 웃으며 답하시기를 훌륭하신 대감께서 다만 술 속의 운치를 느껴보지 못하셨을 따름입니다.”라고 하셨다.

또 묻기를 기녀의 풍류를 듣는 경우 실은 대나무만 못하고 대나무는 사람의 몸만 못한 것은 어째서 인가?”

답하기를 점점 자연에 가깝습니다.”라고 하셨다.

 

중산대부인 계양 사람 나함이 읊어 말하길 맹 선생은 실컷 술 마시기를 잘 했지만 평소의 생각에 어긋나지 않았다.”라고 했다.

광록대부인 남양 사람 유탐은 옛날에 부군과 더불어 함께 환온의 막부에 있었다. 연명의 숙부로 태상 벼슬을 지내신 도기께서 일찍이 유탐에게 묻길 부군께서 만약 계셨다면 당연히 이미 삼공이 되지 않았겠습니까?”라고 했다.

답해 말하기를 그분은 본디 삼공감입니다.”했다. 당시에 중시 되었던 바가 이와 같았다.

 

연명의 돌아가신 어머니는 부군의 넷째 딸이었다.

<기풍>편의 <한천>과 같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진실로 이 마음에 모여든다. 삼가 행적을 살피고 채집해 이 전기를 적는다.

혹시 어긋나고 그르쳐, 크고 고상하신 군자의 덕을 망가뜨림이 있을까 두려워, 그래서 전전긍긍하며 깊고 얕은 얼음을 밟듯 할 따름이다. 찬해 말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덕을 증진하고 학업을 닦아서 때에 맞춘다.”라고 하셨다.

부군께서 누추한 집에서 발걸음 맑게 하실 때에는 훌륭한 소문이 크게 빛났고, 관공서에서 갓끈 흔들 때는 덕이 있다는 평관 진실로 모여 들었네.

길은 아득한데 천운이 촉박해 큰 업을 마치지 못하셨으니 애석하도다.

어진사람은 반드시 장수한다 했는데 어찌 그 말은 어긋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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