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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詩聖 杜甫 詩

당성(堂成)

by 산산바다 2020. 12. 24.

산과바다

두보 완화초당

두보 시(杜甫 詩) HOME

 

 

 

               당성(堂成) - 두보(杜甫)

                  집이 다 지어지다

 

 

背郭堂成蔭白茅(배곽당성음백모) : 성 밖에 띠풀로 덮은 집 한 채를 짓고 보니

緣江路熟俯靑郊(연강로숙부청교) : 강가에는 길이 나고 푸른 들이 발아래 있네.

榿林礙日吟風葉(기림애일음풍엽) : 해를 가리는 기림의 나뭇잎들은 바람을 노래하고

籠竹和烟滴露梢(롱죽화연적로초) : 연무 속 죽림의 댓잎 끝에서는 이슬방울이 떨어지는데

暫止飛烏將數子(잠지비오장수자) : 까마귀는 잠깐 쉬었다 새끼들을 데리고 날아가고

頻來語燕定新巢(빈래어연정신소) : 뻔질나게 찾아와 지저귀던 제비는 새 둥지를 틀었네.

旁人錯比楊雄宅(방인착비양웅댁) : 사람들이 잘못 알고 양웅의 집 같다 하는데도

嬾惰無心作解嘲(난타무심작해조) : 게을러서 해조같은 글 쓸 생각 하지도 않네.

 

 

* 堂成(당성) : ‘은 초당(草堂), ‘은 낙성(落成), 즉 건축물이 완공된 것을 가리킨다.

* 背郭(배곽) : 성곽을 배경으로 한 것을 가리킨다. 두보가 지은 초당은 성도(成都)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 緣江路熟(연강로숙) : 초당을 지은 곳이 완화계(浣花溪) 위쪽에 초당을 지었는데 완화계에서 가까운 곳에 금강(錦江)이 흐르고 있었다. ‘숙로(熟路)’는 강변에 원래 길이 없다가 초당이 지어진 후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길이 생긴 것을 가리킨다. ‘부청교(俯靑郊)’라고 한 것을 보면 초당이 들녘보다 조금 높은 곳에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 () : 자작나뭇과의 낙엽교목이다. 어린잎은 차()의 대용품으로 쓴다. ()에서는 대죽(大竹)을 농죽(籠竹)이라 불렀다.

 

* 揚雄(양웅) : 인명. 서한(西漢) 말기의 사부가(辭賦家)로 그의 집이 성도(成都) 서남쪽에 있었는데 당호를 초현당(草玄堂)이라고 했다. 그는 항상 문을 닫아놓고 태현경太玄經의 초안을 작성했는데, 사람들이 초안을 쓰고 검은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것을 놀리는 소리를 듣고 해조解嘲란 글을 쓰기도 했다. ‘착비(錯比)’라고 한 것은 양웅이 죽을 때까지 촉에서 살았던 것과 달리 두보는 봉송엄공입조십운(奉送嚴公入朝十韻)이란 시에서 이번 생을 어떻게 촉에서 늙을 수 있겠는가 / 죽지 않으면 반드시 중원으로 돌아가리라(此生那老蜀, 不死會歸秦)’고 했을 만큼 촉에서 오래 머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 解嘲(해조) : 양웅揚雄이 쓴 글의 제목이다.

 

건원乾元 2(759) 세밑에 동곡(同谷)에서 성도(成都)로 온 두보는 백화담(百花潭) 북쪽 만리교(萬里橋) 옆에 초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 시는 이듬해인 상원(上元) 원년(760) 봄 초당을 다 짓고 나서 지은 것이다.

시문 중 기림애일(桤林碍日)’이나 농죽화연(籠竹和烟)’ 같은 표현을 들어 초당을 짓고 나서 시간이 좀 흐른 뒤에 쓴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두보가 복거(卜居) - 살곳을 정하다란 시에서

완화계 시냇물 서쪽 언덕에(浣花流水水西頭)

숲과 못이 고요한 곳에 살 곳 정했네(主人爲卜林塘幽)라고 한 것에 더해

 

남목위풍우소발탄(柟木爲風雨所拔歎) - 녹나무가 비바람에 뽑힌 것을 탄식하며 란 시에서도

초당 앞 강가에 서 있던 녹나무가(倚江楠樹草堂前)

전해지는 나이로 이백 살이라네(故老相傳二百年)라고 한 것을 보면

 

이미 숲이 조성되어 있는 곳에 초당을 지은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첫 두 구절에서는 초당이 자리한 위치와 지세를 말하고 있고

다음 네 구절은 초당 주변의 정경을 그리고 있는데

吟風葉滴露梢는 각각 葉吟風梢滴露를 도치시킨 것이다.

 

마지막 두 구절 旁人錯比揚雄宅, 懶惰無心作解嘲에는 두 가지 함의가 담겨 있다.

하나는 초현당(草玄堂)으로도 불리는 양웅의 집이 있던 자리와 두보의 완화초당이 지리적으로 상관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양웅이 두문불출하며 태현경太玄經의 초안을 작성했던 것처럼 두보도 초당에서 시를 지으며 쓸쓸한 나날을 보내는 상황이 닮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지만 두 사람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양웅이 자신을 놀리는 사람들에게 과시하듯 解嘲란 글을 쓰고, 그 속에서 벼슬길에서 뜻을 펼쳐보지 못한 울분과 불만을 토로했던 것과 달리 두보는 자신이 단지 난을 피해 잠시 성도에 와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해조를 쓴 양웅처럼 교만에 가까운 자부심을 가진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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