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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書/論語

論語 集註序說(논어 집주서설)

by 산산바다 2016.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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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 集註序說

 

史記世家曰 孔子 名丘 字仲尼 其先宋人 父叔梁紇 母顔氏 以魯襄公二十二年 庚戌之歲 十一月庚子 生孔子於魯昌平鄕邑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이름은 구()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다. 그 선조는 송()나라 사람이다.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이고 어머니는 안씨(顔氏)이니, ()나라 양공(襄公) 22년 경술년(B.C. 551 ) 11월 경자일에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공자를 낳았다.

 

 

爲兒嬉戱 常陳俎豆 設禮容 及長 爲委吏 料量平 爲司職吏 畜蕃息 適周 問禮於老子 旣反而弟子益進  

아이일 때 놀이를 함에 늘 제기(祭器)를 늘어놓고 예모를 갖추었다. 자라서 곡물창고 담당 관리가 되었을 때에는 셈하는 것이 공평하였으며, 희생가축 기르는 관리가 되었을 때에는 가축이 많이 번식하였다. ()나라에 가서 노자(老子)에게 예()를 물었으며, 돌아온 뒤에는 제자가 더욱 늘어났다.

 

 

昭公二十五年甲申 孔子年三十五 而昭公奔齊 魯亂 於是 適齊 爲高昭子家臣 以通乎景公 公欲封以尼谿之田 晏不可 公惑之 孔子遂行 反乎魯  

소공 25년 갑신년에 공자의 나이 35세였는데, 소공이 제()나라로 망명하고, 노나라가 어지러웠다. 이에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高昭子)의 가신(家臣)이 되어 경공(景公)과 통하였다. 경공이 니계(尼谿)의 전지(田地)를 공자에게 봉해주려 하였는데 안영()이 안 된다고 하니 경공이 그 말에 미혹되었다. 공자는 드디어 그곳을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定公元年壬辰 孔子年四十三 而季氏强僭 其臣陽虎作亂專政 故孔子不仕而退 修詩書禮樂 弟子彌衆  

정공(定公) 원년 임진년에 공자의 나이 43세였는데, 계씨가 강성하고 참람하였으며, 그의 가신인 양호(陽虎)가 분란을 일으켜 국정을 전횡하였다. 그 때문에 공자는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서 시, , , 악을 정리하였다.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九年庚子 孔子年五十一 公山不以費畔季氏 召孔子 欲往而卒不行 定公以孔子爲中都宰 一年 四方則之 遂爲司空 又爲大司寇  

9년 경자년에 공자의 나이 51세였다. 공산불뉴(公山不)가 비읍(費邑)을 근거지로 하여 계씨를 배반하고 공자를 불렀는데, 가려고 하다가 결국은 가지 않았다. 정공이 공자로 중도(中都)의 읍재(邑宰)를 삼으니, 1년 만에 사방에서 공자를 본받았다. 드디어 사공(司空)이 되고, 또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十年辛丑 相定公 會齊侯于夾谷 齊人歸魯侵地  

10년 신축년에 재상(宰相)의 일을 섭행하여, 협곡(夾谷)에서 제()나라 임금과 회맹을 하는 정공을 보좌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이, 침략해 빼앗아갔던 땅을 노나라에 되돌려주었다.

 

 

十二年癸卯 使仲由爲季氏宰 墮三都 收其甲兵 孟氏不肯墮成 圍之不克  

12년 계묘에 중유(仲由)로 하여금 계씨의 가신이 되어 세 도읍(都邑)의 성()을 헐고 그 갑옷과 무기를 거두게 하였다. 맹씨(孟氏)가 성읍(成邑)을 헐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포위를 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十四年乙巳 孔子年五十六 攝行相事 誅少正卯 與聞國政 三月 魯國大治 齊人歸女樂以沮之 季桓子受之 郊又不致俎於大夫 孔子行  

14년 을사년에 공자의 나이 56세였다. 재상(宰相)의 일을 섭행하여 소정묘(少正卯)를 처형하고 국정에 참여하니, 석 달만에 노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제나라 사람들이 여악(女樂)을 보내어 저지하니 계환자(季桓子)가 그것을 받아들였고, 교제(郊祭)를 지낸 뒤에는 또 제사 고기가 대부(大夫)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공자가 떠났다.

 

 

適衛 主於子路妻兄顔濁鄒家  

()나라로 가서 자로(子路)의 처형(妻兄)인 안탁추(顔濁鄒)의 집에 거처하였다.

 

 

適陳 過匡 匡人以爲陽虎而拘之 旣解 還衛 主伯玉家 見南子  

()나라로 가려고 광()땅을 지날 적에 광땅 사람들이 양호(陽虎)인 줄로 알고 포위하여 길을 막았다. 풀려난 뒤, ()나라로 돌아와 거백옥(蘧伯玉)의 집에 거처하였다. 남자(南子)를 만났다.

 

 

去適宋 司馬桓魋 欲殺之 又去適陳 主司城貞子家 居三歲而反于衛 靈公不能用  

떠나서 송()나라로 갔는데, 사마환퇴(司馬桓魋)가 죽이려고 하였다. 또 떠나서 진()나라로 가서 사성정자(司城貞子)의 집에 거처하였다. 3년을 지내고 위()나라로 돌아왔다. 영공(靈公)이 등용하지 못하였다.

 

 

晉趙氏家臣佛以中牟畔 召孔子 孔子欲往 亦不果 

()나라 대부 조간자(趙簡子)의 가신 필힐()이 중모(中牟) 땅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불렀다. 공자가 가려고 하다가 또한 결국은 가지 않았다.

 

 

將西見趙簡子 至河而反 又主伯玉家 靈公問陳 不對而行 復如陳  

장차 조간자를 만나려고 서쪽으로 가다가 황하(黃河)에 이르러 돌아와 거백옥의 집에 거처하였다. 영공이 진법(陳法)에 대해서 물으니, 대답하지 않고 떠나서 다시 진()나라로 갔다.

 

 

季桓子卒 遺言謂康子必召孔子 其臣止之 康子乃召 冉求 孔子如蔡及葉 

계환자(季桓子)가 죽을 때에 유언을 하여 강자(康子)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공자를 불러들이라 하였는데, 그 신하 공지어(公之魚)가 반대하였다. 강자가 이에 염구(冉求)를 불러들였다. 공자가 채()나라로 가서, ()땅에까지 이르렀다.

 

 

楚昭王將以書社地封孔子 令尹子西不可 乃止  

()나라 소왕(昭王)이 서사지(書社地)로 공자를 봉해주려 하였는데 영윤(令尹) 자서(子西)가 반대하자 이에 그만두었다.

 

 

又反乎衛 時靈公已卒 衛君欲得孔子爲政 而 冉求爲季氏將 與齊戰有功 康子乃召孔子 而孔子歸魯 實哀公之十一年丁巳 而孔子年六十八矣  

또 위나라로 돌아왔다. 이때에는 영공은 이미 죽었고, 위나라 임금 첩()이 공자를 불러 정치를 함께 하고자 하였는데, 염구(冉求)가 계씨(季氏)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와 전쟁을 하여 공을 세우니 계강자(季康子)가 이에 공자를 불렀고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왔다. 실로 애공(哀公) 12년 정사년 이었고 공자의 나이 68세였다.

 

 

然魯終不能用孔子 孔子亦不求仕 乃敍書傳禮記 刪詩正樂 序易彖繫象說卦文言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해 쓰지 못하였고 공자도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아니했다. 이에 서전(書傳)과 예기(禮記)를 편차하고 시()를 산정하고 악()을 바로잡고 주역(周易)의 단사(彖辭), 계사전(繫辭傳), 상사(象辭), 설괘전(說卦傳), 문언(文言)을 차례로 지었다.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七十二人  

제자가 3천 명쯤 되었는데, 몸소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가 72명이었다.

 

 

十四年庚申 魯西狩獲麟 孔子作春秋 明年辛酉 子路死於衛  

14년 경신년에 노나라가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기린(麒麟)을 잡으니,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었다. 이듬해 신유년에 자로(子路)가 위나라에서 죽었다.

 

 

十六年壬戌 四月己丑 孔子卒 年七十三 葬魯城北泗上 弟子皆服心喪三年而去 惟子貢廬於冢上 凡六年  

16년 임술년 4월 기축일에 공자가 세상을 뜨니 나이가 73세였다.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 가에 장례지냈다. 제자들이 모두 심상(心喪) 3년을 마치고 떠났는데 오직 자공(子貢)만은 무덤 곁에서 여묘살이를 하여 모두 6년을 지냈다.

 

 

孔子生鯉 字伯魚 先卒 伯魚生伋 字子思 作中庸  

공자가 리()를 낳았는데 자()는 백어(伯魚)이고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백어가 급()을 낳았는데 자가 자사(子思)이며 중용(中庸)을 지었다.

 

 

何氏曰 魯論語二十篇 齊論語別有問王 知道 凡二十二篇 其二十篇中章句 頗多於魯論 古論出孔氏壁中 分堯曰下章子張問以爲一篇 有兩子張 凡二十一篇 篇次不與齊魯論同  

하씨가 말하였다. "노논어(魯論語)20편이다. 제논어(齊論語)는 별도로 문왕편(文王篇)과 지도편(知道篇)이 있어서 모두 22편이며, 20편 가운데의 장구(章句)도 노논어보다 자못 많다. 고논어(古論語)는 공씨(孔氏) 집 벽() 속에서 나왔는데, 요왈편(堯曰篇) 아랫장의 자장문(子張問)을 나누어 한 편()을 만들어 자장편(子張篇)이 둘이라 모두 21편이며, 편차가 제논어, 노논어와 같지 않다."

 

 

程子曰 論語之書 成於有子曾子之門人 故其書獨二子以子稱  

정자가 말하였다. "논어(論語)의 글은 유자(有子)와 증자(曾子)의 문인(門人)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 글에 유독 두 사람에 대해서만 자()로 일컬었다.

 

 

程子曰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知好之者 有讀了後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정자가 말하였다. "논어를 읽음에, 다 읽고도 전혀 아무 일이 없는 자도 있고, 다 읽은 뒤에 그 가운데 한두 구절을 얻어서 기뻐하는 자도 있고, 다 읽은 뒤에 논어를 알고 좋아하는 자도 있고, 다 읽은 뒤에 곧 자신도 모르게 손발이 덩실덩실 춤추는 자도 있다."

 

 

程子曰 今人不會讀書 如讀論語 未讀時是此等人 讀了後又只是此等人 便是不曾讀  

정자가 말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은 독서를 제대로 할 줄 모른다. 이를테면 논어를 읽음에, 읽기 전에도 이러한 사람이고 다 읽은 뒤에도 또 다만 이러한 사람일 뿐이라면 바로 이것은 전혀 읽지 아니한 것과 같다."

 

 

程子曰 自十七八 讀論語 當時已曉文義 讀之愈久 但覺意味深長  

정자가 말하였다. "내가 나이 열 일곱여덟 살 때부터 논어를 읽었는데, 당시에 이미 글 뜻을 알았다. 읽기를 오래할수록 다만 의미의 심장함을 깨달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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