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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정사(寒泉精舍)와 월류봉의 월류정에 가보다

by 산산바다 2015. 11. 24.

산과바다

 

한천정사(寒泉精舍)와 월류봉의 월류정에 가보다

2015. 11. 22. 담음

산과바다는 선재(한병국)님과 동행 한천정사와 월류봉의 월류정에 가보다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원촌동148(원촌리 50)에 위치

달도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은 월류정이 있고 초강천이 휘돌아 나아감이 운치를 더하는군요.

 

한천정사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한때 은거생활을 하며 학문에 몰두했던 자리를 기념하여 건립한 조선시대 누각이다.

 

 

월류봉의 월류정 가는길

 

 

 

 

 

 

 

 

 

한천정사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한때 은거생활을 하며 학문에 몰두했던 자리를 기념하여 건립한 조선시대 누각이다.

 

1999915일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한때 은거생활을 하며 학문에 몰두했던 자리를 기념하여 건립하였다. 원래는 그를 배향하는 한천서원이 있었는데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된 후 후학들이 유림회(儒林會)를 결성, 한천정사를 건립하였다. 누각이 위치한 원촌리 일대는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이곳에 한천정사가 있어 한천팔경(寒泉八景)이라고 이름붙였다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방을 들이고 전면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가구형식은 3량가(三樑架)에 주위로 막돌담장을 둘렀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이다. 병자호란 때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扈從)하였고, 1649년 당파싸움에 휘말려 벼슬을 잃고 낙향,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이후 다시 중용되어 1671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을 역임하다가 한동안 화양계곡에서 은거하였다.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제주로 쫓겨나고, 다시 서울로 이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한천정사앞에 초강천이 흐르고 월류봉과 월류정이 눈앞에 펼쳐져서 운치를 더하는군요.

선재(한병국)벗님 동행해주어 즐거웠답니다. 다음만날 때까지 매일매일 즐거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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