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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첨성대(慶州瞻星臺)에 가보다

by 산산바다 2015. 6. 8.

산과바다

 

경주첨성대(慶州瞻星臺)에 가보다

2015. 6. 3.

산과바다는 서산꽃돼지님과 걸어서 2~3시간정도 첨성대 주위를 돌아봄

경주 첨성대-경주 계림-경주 내물왕릉-경주 향교-경주 교촌마을-월정교-반월성(월성) 왕궁터-반월성 석빙고-해자와 동문지 발굴터-신라왕궁영상관-첨성대 순으로 돌아봄

첨성대(瞻星臺)는 경주시 반월성 동북쪽에 위치한 신라 중기의 석조 건축물로, 선덕여왕 때에 세워진,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196212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첨성대는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월성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362개의 화강암 벽돌을 사용하여 원통형으로 축조하였다. 높이는 9.17m로 바탕의 지름은 5.17m, 상층부의 지름은 2.5m이다. 2m에서 4m의 고려와 조선시대의 현존 천문대보다 큰 규모이다.

2층의 기단이 있고, 대략 30cm 두께의 돌로 27층을 쌓았으며, 꼭대기에는 다시 우물 정() 모양의 2층의 천장돌이 있다. 13층에서 15층에 이르기까지 정남향의 네모난 문이 있고, 이 문의 아래로 12층이 있고 위로 13층이 있으므로 첨성대 위아래의 중간에 문이 위치한다. 내부에는 12단까지 흙이 채워져 있고 여기에 사용된 돌의 수는 362개이다. 내부에 19단과 20, 25단과 26단이 장대석을 이루고 있다.

  

 

첨성대는 천문 관측을 위해 지어졌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나, 수미산 또는 우주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라는 주장이 있다.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 구조물이 세워져 혼천의(渾天儀)가 설치되었으리라는 생각과, 개방식 으로서의 관측대라는 견해도 있다. 첨성대는 창문을 제외하면 어느 방향에서나 같은 모양이며, 계절과 태양의 위치에 관계없이 일구(日晷)를 측정하여 시간을 헤아릴 수 있으므로 4계절과 24절기를 확실히 정할 수 있다. 정남(正南)으로 열린 창문은 사람이 사다리를 걸쳐 놓고 오르내리는 데도 쓰였지만, ·추분(·秋分)에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 이 창문을 통하여 태양광선이 바로 대() 안의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출 수 있는 위치에 열려 있다. 그러므로 동·하지(·夏至)에는 창문 아래 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므로 분점(分點)과 지점(至點) 측정의 보조역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절기의 정확한 측정에 의하여 역법(曆法)을 바로 잡기 위한 측경(測景)을 목적으로 설립된 규표(圭表), 즉 측경대로서 일구를 측정하는 천문대일 뿐 아니라, 신라 천문관측의 중심지로서, 신라 천문관측에서 자오선과 동서남북 4방위의 표준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첨성대는 그 구조가 상징하는바 하늘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 가설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의거하여 축조되었으리라고 해석되고 있으며, 27단으로 이루어진 것은 선덕여왕이 27대 왕임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천상(天象)의 이변(異變)이 있을 때 외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한 상설 천문대로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옛날에는 자연재해가 사람의 잘못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했다. 흉년이나 전염병도 사람들이 잘못해서 하늘에서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달이 태양을 가리는 것이나 달이 태양의 일부를 가리는 것을 말함)때 자연현상을 관찰했다. 달무리, 이상한별이 나타나면 나라에 전쟁이나 흉년, 돌림병 등의 재앙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문대를 만들어 자연현상을 관찰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과학자들은 첨성대도 별을 관찰하는 천문대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첨성대가 정확히 왜 만들어졌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건립 시점

첨성대에 관한 최초 기록인 <삼국유사>는 첨성대의 건립시점을 선덕여왕대(632~647)로 밝히고 있고, <삼국유사> 이후의 사서에서도 이에 반하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선덕여왕대(632~647)에 첨성대가 건립된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정확한 건립시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 및 견해가 존재한다.

 

선덕여왕 2(633):<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기록은 "唐太宗貞觀七年癸巳 新羅 善德女王 所築累石爲之"라고 했다. 당의 연호인 정관(貞觀) 7년은 계사(癸巳)년이며 633년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준에 따르면 계사년은 선덕여왕 재위 2(633)에 해당하지만,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선덕여왕 원년(633)에 해당한다. <세종실록지리지>가 첨성대 건립연도를 이와 같이 설정한 근거는 알 수가 없다. 만일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첨성대는 선덕여왕의 왕권강화를 위한 조형물일 가능성이 높다.

 

 

선덕여왕 초년설: 민영규(1981)는 첨성대가 분황사(634), 영묘사(635), 황룡사구층목탑(645)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지지할 명확한 근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었으며, 다만 많은 학자들이 첨성대 건립시점을 선덕여왕 몰년(647)으로 보는데, 그렇게 볼 근거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알천공, 김춘추, 김유신 등이 화려하게 선덕여왕을 보좌하고 있던 시절에 첨성대가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첨성대 선덕여왕 초기 건립설""첨성대 선덕여왕 말기건립 부정설"로 볼 수 있다.

황룡사 구층목탑(645) 동시 건립설: 경주 첨성대는 직접적으로는 백제 천문대의 영향을 받아서 그와 비슷하게 축조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그 축조 연대에는 많은 백제의 건축기술자들이 초빙되어 황룡사(皇龍寺) 9층탑 등이 건립된 시기이며, 그로부터 얼마 후인 675년에는 백제 천문학자들의 영향과 직접 지도 아래 일본에도 점성대(占星臺)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백제에는 이미 같은 음()으로 불리는 천문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 천문대도 주비의 법()에 의하여 세워진 측경대였을 것이며, 그것이 신라에 영향을 주어 첨성대가 되었고 일본에 건너가서 점성대가 되었으며, 백제와 신라의 천문대는 당()에 자극을 주어 723년에는 주공측경대(周公測景臺)의 재건(再建)을 보게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종석(2007)"황룡사가 건립된 해에 축조된 첨성대도 이러한 문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또한 "첨성대 축조는 선덕여왕 646년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황룡사 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4(645)에 착공되어 그해 48일에 찰주를 세우고 이듬해인 선덕여왕 15(646)에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황룡사 구층목탑의 건립목적이 "대외적으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노력"에 있었다고 보았으며, 첨성대의 건립목적이 "대내적으로 당시 종교적인 갈등과 혼란을 무마시키고 화합하려는 의지"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선덕여왕 말기(645~647): 김기흥"분황사와 영묘사 그리고 황룡사9층목탑을 세운 바 있는" 선덕여왕이 "자신의 평생의 신앙과 소망을 엮어서 이 첨성대를 건축했던 것"으로 보았다. , 첨성대 건립시점을 황룡사9층목탑 건립 이후로 본 것이다.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건립한 이유는 "첨성대를 통해 제석신이 이 땅에 강림하여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기를 고대"했기 때문에 혹은 선덕여왕이 죽은 후에 "도리천으로 환생하기 위한 통로"로 세웠을 것이라고 했다. 김기흥에 의하면 첨성대는 현실세계와 천상세계를 연결하는 상징적인 "우주 우물"이다.

선덕여왕 몰년(647): 다수의 학자들은 첨성대 건립시기를 선덕여왕 몰년으로 보는데, 주로 <증보문헌비고> 기록을 따랐다. 그런데 이보다 이전 기록인 <삼국사절요>에 비담의 반란 발생(64717), 첨성대의 건립,선덕여왕의 죽음(64718)이 차례대로 적혀 있다. 만일 첨성대가 선덕여왕 몰년에 건립되었다면 첨성대는 선덕여왕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일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면, 이는 곧 첨성대가 천문관측소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가 당으로부터 천문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통일이 이룩된 이후인 7세기 후반이다. 이는 <삼국사기> 新羅本紀, 文武王 14, 孝昭王 元年, 聖德王 17, 景德王 8의 기록에 나타나는데, 문무왕 14(674) 새로운 역법을 도입했고, 효소왕 원년(692)에는 당에서 천문도를 수입했고, 성덕왕 17(718)에 처음으로 누각(漏刻: 물시계)과 누각전을 설치했으며, 경덕왕 8(749)에 완공됨.

 

 첨성대를 돌아보고 이정표를 따라 계림-교촌마을- 월정교-반월성쪽으로 따라간다.

 

 경주 계림

 

계림비각

 

 

내물왕릉

 

경주향교

 

 

 

경주 교촌마을

 

월정교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이루어진 다리라는군요.

 

 

교촌마을을 지나며 석류꽃이 활짝피어 반겨주는군요.

 

첨성대가 멀리보이며 계림을 지나 반월성으로 올라본다.

 

왕궁터의 월성의 동쪽부분에 석빙고가 위치해 있군요.

 

석빙고 넘어로 경주시내가 보이고

 

반월성의 남쪽엔 왕궁터 발굴작업 흔적과 발굴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군요.

 

반월성 뒷쪽의 해자터가 일부 복원되었군요.

 

반월성에서 내려와 신라왕궁영상관에 들려 10여분 영상을 보고 나왔답니다.

 

 

2~3시간 걸려 한바퀴 돌아보고 다시 첨성대가 보이는쪽으로 들어가서 주차장으로 나오는군요.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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