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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時調詩 ***/時調 감상

옥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by 산산바다 2008. 7. 5.

산과바다

 

 

 청금상연 (聽琴賞蓮)혜원풍속도

 


 

             시조 감상


181  어와 저 조카야 밥 없이 어찌 할고         정철

182  옥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정철

183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정철

184  새원 원주되어 시비를 고쳐닫고            정철

185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정철

186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정철

187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 보아라          정철

188  나무도 병이드니 정자라도 쉴이 없다       정철

189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 하자스라           정철

190  정철 시조 모음                           정철

191  송림에 눈이 오니 가지마다 꽃이로다       정철

192  거문고 대현 올려 한과 밖을 짚었으니      정철

193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정철

194  소금 수레 메었으니 천리마인 줄 제 뉘 알며 정춘신

195  꿈에 증자께 뵈와 사친도를 묻자온데       조광조

196  저 건너 일편석이 강태공의 조대로다       조광조

197  설악산 가는 길에 개골산 중을 만나        조명리

198  삼동에 뵈옷 입고 암혈에 눈 비 맞아       조식

199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보니         조식

200  빈천을 팔랴 하고 권문에 들어가니         조찬한




181 어와 저 조카야 밥 없이 어찌 할고 / 정철


어와 저 조카야 밥 없이 어찌 할고

어와 저 아자바 옷 없이 어찌 할고

머흔 일 다 일러사라 돌보고저 하노라


이 작품 역시 훈민가 중의 하나다.



182 옥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외 1편 / 진옥과 정철


옥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 하니 진옥(眞玉)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뚜러볼가 하노라


옥이라 하기에 번옥(가짜 옥―돌가루를 구워 만든 옥)으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자세히 보니 참옥(眞玉)임이 분명하구나.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여기서 살송곳이란 남성의 심볼을 의미)


정철이 강계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였다(선조 때). 달은 밝고 오동잎 지는 소리 스산한 밤, 귀뚜라미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그를 더욱 쓸쓸하게 하였다. 적막한 처소에 혼자 취해 누워 있는 그에게 나지막한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철은 누운 채로 누구인가 물었다. 대답 대신 문이 스르르 열리고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한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서는데 여인은 마치 한 마리 하얀 학처럼 고왔다. 그가 바로 기생 진옥이었다.


두 사람이 술상을 마주 하고 앉은 어느 날 밤, 반쯤 취한 송강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진옥을 불렀다.

“진옥아, 내가 시조 한 수를 읊을 테니 그대는 이 노래에 화답을 하거라.”

“예, 부르시옵소서.”

기생 진옥은 가야금을 뜯고 송강 정철은 목청을 한껏 가다듬어 노래했다.


옥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 하니 진옥(眞玉)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뚜러볼가 하노라


송강 정철의 시조창이 끝나자 지체 없이 진옥이 받았다.


철이 철이라커늘 섭철(憾鐵)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 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골풀무 있으니 뇌겨볼가 하노라


쇠라 쇠라 하기에 순수하지 못한 섭철(잡다한 쇳가루가 섞인 쇠)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자세히 보니 정철(正鐵→鄭澈)임에 틀림없구나. 나에게 골풀무 있으니 그 쇠를 녹여볼까 하노라.”(골풀무란 쇠를 달구는 대장간의 풀무로서 여기서는 여자의 심볼을 의미)  그날 밤 송강과 진옥은 이 시조를 촉매제로 하여 적소(謫所)를 밝히는 촛불보다 더 뜨겁고 아름다운 사랑의 밤을 보냈던 것이다.



183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 정철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곳 아니시면 이몸이 살았으랴

하늘같은 은덕을 어디에다 갚을가


지은이는 훈민가의 맨 첫머리에도 시작하여 부모에 대한 자효(子孝)는 인륜(人倫)의 기본이며 대강(大綱)이란 것을 역설하였다.



184 새원 원주되어 시비를 고쳐닫고 / 정철


새원 원주되어 시비를 고쳐닫고

유수청산을 벗삼아 던졌노라

아이야 벽제에 손이라거든 날 나갔다 하여라


새원(新院) : 고양군에 있는 원

시비(柴扉) : 사립문

벽제(碧蹄) : 고양군에 있는 역원(驛院)


신원의 원주가 된 뒤 사립문을 다시 닫고,

흐르는 물과 푸른 산을 벗 삼아 내 몸을 그 속에 맡겨 버렸노라

아이야 만일 벽제를 거쳐서 오는 손님이 와서 나를 찾거든 나갔다고 일러라


이 시조는 신원의 院主(원주)로 있을 때 지은 3연의 연시조 중에서 마지막 연이다.

원주라는 직책보다는 자연을 벗 삼아 생활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기를 꺼려했던 작자의 심경을 노래한 글이다



185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 정철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저멋거니 돌히라 무거울가

늙기도 설웨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머리 위에 이고, 등에 짐을 진 저 늙은이 그 무거운 짐을 나에게 넘겨주시오.

나는 아직 젊었으니 돌인들 무겁겠오. 내 가져다 드리리다.

늙은 것만도 서러울 터인데 짐까지 지고 다니시다니.


사람이란 세상과의 교통을 끊고 홀로 살아가노라면 석가모니와도 같이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정 철이 이 시조에서 느끼는 무상은 종교의 세계로 가 버리지 않고 행동으로 이를 도움으로써 마음의 충족(充足)을 얻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안겨 주려는 충동을 느끼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다르다.

말로만 짐을 날라다 주는 그러한 참새가 아니라, 자기 어깨와 등을 내밀음으로써 그 노인이 지고 가는 무거운 짐을 가져다주면서 나누는 이야기에 자기의 피로도 잊어버리는 인간성의 진면목(眞面目)이 있는 것이다.


그만큼 정 철은 좋은 것을 좋아하고, 나쁜 것을 싫어하는 원초적인 동심을 기초로 한 직선형(直線型)의 인간이었음을 이 시조는 남김없이 보여 주고 있다. 더구나 높은 벼슬자리에 앉아서 나라의 경륜(經綸)을 펴던 그가 이만큼 평민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계급의식이 절대적이었던 당시로선 실로 찾아보기 힘든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아들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늙은 나이에 비지땀을 흘려가며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또 끌고 가는 노인의 모습.

정철은 이러한 광경 앞에서 어진 임금이 백성의 어려운 생활에 가슴을 앓듯이 어딘가 괴로운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것은 곧 자기의 슬픔이라고 즉각 단정하는 인간성, 말하자면 타인과 자기와의 사이에 별다른 거리를 느끼는 일없이 만인을 위한 만인의 감정,

그것이 인간의 감정이자 행동으로 알고 있는 정 철이었다.



186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 정철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엇지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이 작품은 정 철의 훈민가(訓民歌) 중의 하나로,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 효도를 다 하여라. 돌아가신 뒤에 슬프다고 울기만 하면 무엇 할 것인가. 사람 한 세상에 태어나서 돌이키지 못하는 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효도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효(子孝)를 가르친 작품이다.


부모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 아버지나 어머니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받들어 모시지 못하다가 돌아가신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이를 후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돌아가신 뒤에 말로만 후회를 하지 말고, 차라리 살아 계시는 동안에 걱정을 끼치지 않고 마음과 몸을 평안하게 이끌어 드리도록 마음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살아 계시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그때를 놓치지 말고 아들딸들은 노력해야 하겠다고 강조하는 하나의 경구(警句)의 형식으로 이 시조는 효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생무상(無常) 바로 어제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이 느끼는데 어느새 무덤 입구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중생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시간이 유수보다도 더 빨리 흘러가니 정신을 부모에게 돌려 자신이야 어떻든 간에 아픈 데를 살펴 드리고 잡수시고픈 음식을 장만해 드려 몸과 마음을 평안케 해 드리는 것이 다시없는 효도의 길이다.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효도할 줄 모르는 위인이 어떻게 나라를 위한 인물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유교에서 보는 인격 측정의 한 기준이었다. 세월이 가기 전에 효도를 하여,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공백이 없도록 타이르는 정 철의 이 시조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심금 을 울리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187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 보아라 / 정철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 보아라

뉘손대 타나관대 양재조차 같으산다

한 젖 먹고 나이셔서 닷마음 먹지 마라


양재 : 모양

정철 호는 송강(松江). 이조 선조 때의 정치가이자 시인. 가사문학에 첫째가는 시인으로 <관동별곡>,<사미인곡>,<성산별곡>,<장진주사>  장가와 단가 77수가 있다.


<감상>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 보아라. 누구한테서 태어났기에 모양도 같지 않더냐?

어머니의 한 젖을 먹고 자라나서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느냐?

형제간의 우애를 노래함



188 나무도 병이드니 정자라도 쉴이 없다 / 정철


나무도 병이드니 정자라도 쉴이 없다

호화히 섰을때는 올이갈이 다쉬더니

잎지고 가지 꺾은후는 새도 아니 앉는다


나무도 병이 들면 정자나무라도 그 그늘 밑에서 쉴 사람이 없구나.

나무가 무성하여 호화롭게 서 있을 때 오는 이 가는 이 다 쉬더니,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꺾인 후에는 새 마저도 앉지 않는구나.


세상인심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권력과 명예를 �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탄식하고 애석해하는 그러면서 권력이나 명예의 무상함을 풍자하고 있다. 신의나 도덕이 점차 묻혀져 가는 오늘의 우리들이 되새겨 보고 음미해 봐야 할 시조가 아닌가 싶다.



189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 하자스라 / 정철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 하자스라

사람이 되어 나서 옳지 곧 못하면

마소를 갓 고깔 씌워 밥 먹이나 다르랴


마소 : 말과 소

정철 : 호는 송강(松江). 이조 선조 때의 정치가이자 시인이며, 가사문학에 첫째가는 시인으로 <관동별곡><사미인곡><성산별곡><장진주사>  장가와 단가 77수가 있다.


<감상> 사람은 항상 인륜과 도덕에  어긋나는 길을  가서는 안 되며 옳은 길로 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음을 노래하였다.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 하면서 살자. 사람으로서 태어나서 옳은 일 못한다면 , 말이나 소에게 갓이나 고깔을 씌워 밥 먹이는 일과 다를 것이 있겠는가?



190 정철 시조 모음.

내 마음 베어내어 저달을 만들고자

구만리 장천에 번드시 걸려있어

고온님 계신곳에 가 비춰어나 보리라


나의 마음을 베어 내어 저 달을 만들고 싶다. 그리하여 높고 먼 하늘에 번듯이 떠 있으면, 임금님이 계신 곳을 훤하게 비추어 드렸으면 한다.


정철의 선조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난 글이다. 워낙 강직한 성품에 타협을 몰랐던 정 철이 많은 적을 만들 고 유배되기를 수차례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선조에 대한 섭섭함이나 하소연이 섞여 있을 수 있는 글이기도 할 것 같다.


송림에 눈이 오니 가지마다 꽃이로다

한가지 꺾어내어 임계신데 보내고자

임이 보신 후에야 녹아지다 어떠리


소나무 숲에 눈이 쌓이니 그 모습이 마치 꽃이 된 듯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혼자 보기가 죄송하니, 한 가지를 꺾어서 임 계시는 곳으로 보내드리고 싶다. 임께서 보신 다음에야 녹아진들 어떻겠는가..


역시 이 글도 임을 그리는 간절한 마음이 가득하다. 흰 눈은 아마도 깨끗한 작자의 마음을 비유하여 자신의 옳음을 임에게 전하고 싶은 연군의 정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무도 병이드니 정자라도 쉴이 없다

호화히 섰을때는 올이갈이 다쉬더니

잎지고 가지 꺾은후는 새도 아니 앉는다


나무도 병이 들면 정자나무라도 그 그늘 밑에서 쉴 사람이 없구나.

나무가 무성하여 호화롭게 서 있을 때 오는 이 가는 이 다 쉬더니,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꺾인 후에는 새 마저도 앉지 않는구나


세상인심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권력과 명예를 쫓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탄식하고 애석해하는 그러면서 권력이나 명예의 무상함을 풍자하고 있다. 신의나 도덕이 점차 묻혀져 가는 오늘의 우리들이 되새겨 보고 음미해 봐야 할 시조가 아닌가 싶다.


새원 원주되어 시비를 고쳐닫고

유수청산을 벗삼아 던졌노라

아이야 벽제에 손이라거든 날 나갔다 하여라


신원의 원주가 된 뒤 사립문을 다시 닫고,

흐르는 물과 푸른 산을 벗 삼아 내 몸을 그 속에 맡겨 버렸노라

아이야 만일 벽제를 거쳐서 오는 손님이 와서 나를 찾거든 나갔다고 일러라


새원(新院) : 고양군에 있는 원

시비(柴扉) : 사립문

벽제(碧蹄) : 고양군에 있는 역원(驛院)


이 시조는 신원의 院主(원주)로 있을 때 지은 3연의 연시조 중에서 마지막 연이다. 원주라는 직책보다는 자연을 벗삼아 생활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기를 꺼려했던 작자의 심경을 노래한 글이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저멋거니 돌히라 무거울가

늙기도 설웨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머리 위에 이고, 등에 짐을 진 저 늙은이 그 무거운 짐을 나에게 넘겨주시오. 나는 아직 젊었으니 돌인들 무겁겠오. 내 가져다 드리리다. 늙은 것만도 서러울 터인데 짐까지 지고 다니시다니.


사람이란 세상과의 교통을 끊고 홀로 살아가노라면 석가모니와도 같이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정 철이 이 시조에서 느끼는 무상은 종교의 세계로 가 버리지 않고 행동으로 이를 도움으로써 마음의 충족(充足)을 얻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안겨 주려는 충동을 느끼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다르다.


말로만 짐을 날라다 주는 그러한 참새가 아니라 자기 어깨와 등을 내밀음으로써 그 노인이 지고 가는 무거운 짐을 가져다주면서 나누는 이야기에 자기의 피로도 잊어버리는 인간성의 진면목(眞面目)이 있는 것이다.


그만큼 정 철은 좋은 것을 좋아하고, 나쁜 것을 싫어하는 원초적인 동심을 기초로 한 직선형(直線型)의 인간이었음을 이 시조는 남김없이 보여 주고 있다. 더구나 높은 벼슬자리에 앉아서 나라의 경륜(經綸)을 펴던 그가 이만큼 평민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계급의식이 절대적이었던 당시로선 실로 찾아보기 힘든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아들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늙은 나이에 비지땀을 흘려가며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또 끌고 가는 노인의 모습. 정철은 이러한 광경 앞에서 어진 임금이 백성의 어려운 생활에 가슴을 앓듯이 어딘가 괴로운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것은 곧 자기의 슬픔이라고 즉각 단정하는 인간성, 말하자면 타인과 자기와의 사이에 별다른 거리를 느끼는 일없이 만인을 위한 만인의 감정, 그것이 인간의 감정이자 행동으로 알고 있는 정 철이었다.


어와 저 조카야 밥 없이 어찌 할고

어와 저 아자바 옷 없이 어찌 할고

머흔 일 다 일러사라 돌보고저 하노라


이 작품 역시 훈민가 중의 하나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엇지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이 작품은 정 철의 훈민가(訓民歌) 중의 하나로,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 효도를 다 하여라. 돌아가신 뒤에 슬프다고 울기만 하면 무엇 할 것인가. 사람 한 세상에 태어나서 돌이키지 못하는 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효도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효(子孝)를 가르친 작품이다.


부모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 아버지나 어머니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받들어 모시지 못하다가 돌아가신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이를 후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돌아가신 뒤에 말로만 후회를 하지 말고, 차라리 살아 계시는 동안에 걱정을 끼치지 않고 마음과 몸을 평안하게 이끌어 드리도록 마음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살아 계시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그때를 놓치지 말고 아들딸들은 노력해야 하겠다고 강조하는 하나의 경구(警句)의 형식으로 이 시조는 효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생무상(無常), 바로 어제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이 느끼는데 어느새 무덤 입구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중생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시간이 유수보다도 더 빨리 흘러가니 정신을 부모에게 돌려, 자신이야 어떻든 간에 아픈 데를 살펴 드리고, 잡수시고픈 음식을 장만해 드려 몸과 마음을 평안케 해 드리는 것이 다시없는 효도의 길이다.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효도할 줄 모르는 위인이 어떻게 나라를 위한 인물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유교에서 보는 인격 측정의 한 기준이었다. 세월이 가기 전에 효도를 하여,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공백이 없도록 타이르는 정 철의 이 시조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심금 을 울리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곳 아니시면 이몸이 살았으랴

하늘같은 은덕을 어디에다 갚을가


지은이는 훈민가의 맨 첫머리에도 시작하여 부모에 대한 자효(子孝)는 인륜(人倫)의 기본이며 대강(大綱)이란 것을 역설하였다.


재 넘어 성 권롱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은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 타고

아희야 네 권롱 계시냐 정 좌수 왔다 하여라


성권롱(成權農) :권농은 지방에서 농사를 권장하는 유사(有司) 친구였던 성혼을 가리키는 말

언치  안장 밑에 까는 털 헝겊


제 넘어 성 권농네 집이 있는데, 그 집에서 담근 술이 익었다는 기별을 어제 받고,

누워서 반추(反芻)를 즐기고 있는 소를 발로 차 일으켜 언치만 놓아 눌러 타고,

성 권농 집에 이르러 아이를 불러 이르기를 정 좌수가 왔다고 일러라.


유배지의 생활의 일단이 이 시조 속에 역력히 나타나 있다. 말없이 입을 다물고 보내는 세월 속에서도 인간 정철은 우거(寓居)를 걷어차고 마을의 지방에서는 유일한 지식인인 권농 벼슬 을 하는 성씨 집 문을 두드리기를 유일한 낙으로 삼은 것 같다.


정 좌수가 왔다고 하인에게 외치는 소리부터가 얼마나 유쾌한가 그만큼 성 권농을 만나는 것이 즐거웠던 것 같다. 권농은 또한 정 철의 인간됨을 알아보고, 그를 모실 줄 아는 위인이었기에 정 철의 말벗, 술벗 구실을 다 했을 것이 이 시조를 음미 해 보면 저절로 짐작이 되어 우울한 구름이 끼지 않는다.


대문간에 서서 '이리 오너라'를 부르기보다는 '아희야 정좌수가 왔다고 일러라'하는 말씨부터가 정 철의 평민 정신이 스며 나온 흔적이 너무나 뚜렷해서 우선 호감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마음 놓고 아이를 아이라고 부를 만큼 정 철은 인자한데가 있고, 아이와 얼마나 다정하게 지냈는가 하는 내력이 그 말속에 묻어 있어서 좋다.


많은 작품을 남겼던 정철은 이조중기 정치가이면서 시인 이었다 그의 임금에 대한 남다른 충성은 어릴 때부터 궁중 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그래서 궁정에 대한 짙은 향수 때문이라고도 한다. 학식도 뛰어났던 그는 정치에 입문하면서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결백하고 곧은 성격은 많은 사람들과 부딪쳤고 왕과도 부딪쳤다.

의견대립이 있을 때에는 국왕 앞이라도 상대방을 가차 없이 공격하여 주변에 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정치생활은 평탄하지 못했으며 항상 주변이 시끄럽고 그를 모함하는 무리들로 잠잠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명작.. 관동별곡은 그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당시 관내를 돌아보며 지은 것들인데 금강산의 빼어난 경관을 그려놓은 것으로 그 아름다움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고전문학의 최고 걸작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또한 그의 주옥같은 노래들..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들은 그가 의지하던 율곡이 세상을 뜨고 나이 50이 되던 해 임금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반대파에 의해 추방되다시피 고향으로 돌아와서 쏟아놓은 노래들이다. 말하자면 고관대작(高官大爵) 위에 군림했던 정 철이건만, 한 이웃 할아버지로 아이들과 다정히 지내는 풍모가 있어 이 시조는 정 철의 동심마저 엿보이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191 송림에 눈이 오니 가지마다 꽃이로다 / 정철


송림에 눈이 오니 가지마다 꽃이로다

한가지 꺾어내어 임계신데 보내고자

임이 보신후에야 녹아지다 어떠리


소나무 숲에 눈이 쌓이니 그 모습이 마치 꽃이 된 듯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혼자 보기가 죄송하니 한 가지를 꺾어서 임 계시는 곳으로 보내드리고 싶다, 임께서 보신 다음에야 녹아진들 어떻겠는가..


역시 이 글도 임을 그리는 간절한 마음이 가득하다. 흰 눈은 아마도 깨끗한 작자의 마음을 비유하여 자신의 옳음을 임에게 전하고 싶은 연군의 정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192 거문고 대현 올려 한과 밖을 짚었으니 / 정철

거문고 대현 올려 한과 밖을 짚었으니

얼음에 막힌 물 여울에서 우니는 듯

어디서 연잎에 지는 빗소리는 이르 좇아 마초나니


대현(大絃) : 거문고의 넷째 줄의 이름.

과(課) : 대과(大課). 첫째 과. 과는 거문고 줄을 받치는 기러기발.


<감상> 대현 위에 올려놓고 한과 밖을 짚은 거문고 줄 위에서 율동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눈에 선하구나. 그 소리 또한 얼마나 맑고 아름다우냐. 마치 얼음에 막힌 물이 여울에서 우니는 듯, 게다가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의 반주가 더없이 절묘하구나! 구성진 거문고 소리를 "얼음에 막힌 물이 여울에서 우니는 듯" 하다 했고 '널따란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반주라도 하듯이 장단을 맞춘다는 착상이나 시정(施情)이 송강의 붓끝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청각에 호소한 음률의 표현이지만, 그 뒤에 숨은 시각적 영상이 더욱 선명한 명작이다.



193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 정철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는 데 물어 보자

막대로 흰구름 가리키며 돌아 아니 보고 가노매라


물 아래 : 다음의 "다리 위"와 댓구를 이루는 것인데, 다리 아래에 흐르고 있는 물이라는 뜻이다.

막대로 : 막대기로. 지팡이로. 스님이 짚고 다니느 긴 지팡이를 석장(錫杖)이라 부른다. 일종의 무기로도 썼다.

가노메라 : 가는구나! '~노매라'는 감탄형 종결어미.


<감상> 다리 밑의 물에 그림자가 지기에 다리 위를 쳐다보았더니 한 사람의 스님이 지나간다. 스님, 잠깐 걸음을 멈추시오. 어디로 가는 길이오? 하고 물었더니,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석장을 들어 하늘에 뜬 흰 구름만 가리키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리더라. 하늘에 둥실 떠 있는 흰 구름과도 같이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그래서 선사(禪師)를 가리켜 '운수(雲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막대로 흰 구름 가리키고 돌아보지도 않고 가는 다리 위의 중'이 어쩌면 <관농 풍경을 잘 아는 선사>일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더욱 좋겠다. <무애가>를 부르면서 매인 데 없이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다는 원효대사의 모습이 이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부처님의 길을 바로 깨달은 원효대사가 스스로를 비승비속(非僧非俗)이라 일컬으면서 자유인의 극치를 살았던 것과 운수 행각(雲水行脚)에 무슨 관련이 있었을까. 우주의 진리가 자연 속에 있다면, 자연 속을 헤맨 그 생활은 진여(眞如)의 세계를 편답한 것이 아닐까? 자연 중에서도 아름다운 자연에는 진여가 더 많이 차 있을 것만 같다.



194 소금 수레 메었으니 천리마인 줄 제 뉘 알며 / 정춘신


소금 수레 메었으니 천리마인 줄 제 뉘 알며

돌 속에 버렸으니 천하보인 줄 제 뉘 알리

두어라 알 이 알지니 한할 줄이 이시랴


정춘신(鄭忠信)1576~1636.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임진왜란 당신 17세의 소년으로 활약하여, 이항복의 눈에 들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괄의 난 때에는 원수 장 만(張晩)을 도와 진무공신이 되고 금남군에 봉해졌다. 정묘호란 때에 부원수가 되었는데 세폐(世幣)문제로 귀양살이를 하고 돌아와 고향에 있다가 다시 포도대장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감상> 천리마가 비록 소금 수레를 메었다 하더라도 알 사람은 알아주고, 천하 사람들이 귀하에 여기는 좋은 보석이 돌 속에 내버려져 있어도 역시 알 사람은 결국 알아주게 되는 것이니 조금도 한탄할 것이 없다. 은인자중하면 인재는 역시 출세하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물건이나 사람의 참값은 때가 되면 알려지게 마련이니, 한때의 불운은 결코 한할 것이 없다는, 매우 느긋하고 낙관적인 인생관의 소유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195 꿈에 증자께 뵈와 사친도를 묻자온데 / 조광조


꿈에 증자께 뵈와 사친도를 묻자온데

증자왈 오호라 소자아 들어사라

사친이 개유타재리오 경지이이라 하시더라


꿈에 증자를 뵈옵고 부모님을 섬기는 도리에 대하여 물었는데 증자께서, "아아! 여보게, 들으려무나. 부모를 섬기는 것이 어찌 다른데 있겠느냐? 오직 공경할 따름이니라" 라고 하시더라


효경에는 천자의 효와 庶人(서인)의 효를 나누어서 말하고 있는데 위의 글에서는 서인의 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효경에서의 서인의 효란 천도 즉 봄에 내고 여름에 기르고 가을에 여물게 하고 겨울에 간수하는 도와 지리 즉 마른데, 진데 각각 알맞게 곡식을 심는 이로움을 말하고 있는데 천도와 지리로 몸을 삼가며 쓰기를 절약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서인의 효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것을 증자는 경지이기(敬之而己)라 말하였는데, 조광조는 이 말을 빌어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지은이 : 정암 조광조는 조금이라도 남의 허물을 보면 그 자리에서 직언하여 시비를 밝혔으므로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의복이 검소하고 행동이 정연하였던 그는 중종 5년 생원시에 장원하여 성균관에 입학한다. 중종 14년에 대사헌이 되고 세자부빈객을 겸하였는데 당시 전례 없던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중종의 신임으로 국정을 도맡아 처리하던 그는 미신타파책을 강력히 시행하고 향약을 만들어 미풍양속을 권장하였다. 조광조는 향약실시로 그가 생각하는 혁신정치를 실현하고자 했고 국가의 대사는 모두 조광조 일파의 세력 뜻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구세력의 책략으로 중종은 조광조를 투옥하게 되고 유배되어 나중에는 처형된다.


후세의 학자요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조광조의 실패를 이렇게 한탄했다.


"옛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후에 이론을 실천 하였으며 이론을 실천하는 요점은 임금의 잘못을 시정하는데 있었다.

아깝다! 조광조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가졌음에도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에 나아가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을 막지 못하였으니 비록 임금에게 간청을 하기는 하였으나 그를 비방하는 입이 한번 열리면 결국 몸을 죽이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으며,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 하늘이 그의 이상을 실행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어찌 그와 같은 사람을 내었을까.." 젊은 혈기와 정의감으로 나라를 위해 새로운 질서를 세워 보려고 했던 그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의 높은 이상은 역사에 오래토록 남을 것이다.



196 저건너 일편석이 강태공의 조대로다 / 조광조


저 건너 일편석이 강태공의 조대로다

문왕은 어디가고 빈대만 남았는고

석양에 물차는 제비만 오락가락 하더라


저 건너에 있는 한조각의 돌은 강태공의 낚시질 하던 곳이다. 강태공을 스승으로 삼아 周(주)나라의 기반을 닦은 문왕은 어디가고 빈자리만 남았는고 저녁놀 속에 제비만 물을 차며 왔다갔다 하는구나


강태공과 문왕의 옛 고사를 인용해서 인재를 알아보는 군주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자 자신이 정치에 대한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뜻을 펼칠 수 있게 해주는 임금을 그리워하는 속뜻이 담겨져 있다. 강태공은 태공망의 속칭으로 주나라 초기의 정치가이며 병략가였다. 문왕이 위수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는 그를 처음 만나 스승으로 삼았으며 뒤에 문왕의 아들인 무왕을 도와 무도한 은(殷)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우게 했다.



197 설악산 가는 길에 개골산 중을 만나 / 조명리

설악산 가는 길에 개골산 중을 만나

중더러 물은 말이 풍악이 어떻더니

이사이 연하여 서리 치니 때맞았다 하더라


조명리(趙明履) 1697~1756. 자는 중례(仲禮), 호는 도천(道川). 영조 때에 형조판서를 지냈다. 문명이 높았고, 글과 글씨도 잘해서 '광묘어제훈사(光廟御製訓辭)'를 짓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저서로 '도천집'이 있고, '청구영언'에 시조 4수가 전한다.


설악산(雪嶽山) : 강원도 양양군과 인제군 사이에 있는 명산으로 높이는 1,708m. 눈경치가 특히 좋아서 이렇게 부른다.

개골산(皆骨山) : 금강산의 겨울 이름. 나뭇잎이 다 떨어지면 바위만 앙상하게 남는다는 뜻. 금강산은 경치가 하도 좋아서 계절에 따라 여름은

봉래(蓬萊), 가을은 풍악(楓嶽) 봄은 금강(金剛), 또는 금수(錦繡)라고 일컫는다.

이사이 : 요즈음.

때맞았다 :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때를 만났다.


<감상> 설악산으로 단풍 구경을 가는 길에 금강산 중을 만나 풍악의 단풍 경치가 어떠하냐고 물어 보았더니, 요즈음 며칠 동안에 잇달아 서리가 내려서 한창 단풍이 아름다운 좋은 때를 만났다고 하더라. 단풍놀이도 꽃구경과 같아서 때를 잘 맞추어서 해야 한다.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어서는 단풍의 진정한 제 맛을 볼 수가 없다. 한창 절정을 이루는 때가 언젠가를 미리 조사해서 구경해야 단풍의 참다운 아름다움을 즐길 수가 있는 것이다.


단풍은 또 가을 날씨에 따라서 아름다움이 좌우된다. 가을 날씨가 맑고 좋아서 햇빛을 담뿍 머금은 해의 단풍은 아름답고, 그렇지 못한 때의 단풍은 곱지가 못하다. 이 해는 아마도 단풍이 몹시도 아름다웠던 해인 것 같다. 단풍의 경치를 포함해서 금강산의 경관은 설악산의 한수, 아니 몇수 위다. 어떤 면으로 보아서는 비교가 안 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글자 그대로 금강산은 세계적 명산이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중국 사람도 "원 컨데 고려 나라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라고 하지 아니하였던가? 풍악의 단풍을 제쳐 놓고는 단풍을 논하지 말라.



198 삼동에 뵈옷 입고 암혈에 눈 비 맞아 / 조식


삼동에 뵈옷 입고 암혈에 눈 비 맞아

구름 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 지다 하니 눈물 겨워하노라


삼동(三冬) : 겨울의 석달, 추운 겨울.

뵈옷 : 베옷.

암혈(岩穴) : 바위틈의 조그만 거처.

볕뉘 : 조그만 햇볕, 볕의 혜택.

해 지다 하니 : 해가 진다 하니, 여기서는 중종(中宗)의 서거를 뜻함.


춥고도 추운 삼동(三冬)에 베옷을 입고, 바위틈의 작은 거처에서 눈비를 맞아가며 구름에 덮인 조금의 햇볕의 혜택도 받은 일이 없건만, 서산에 해가 진다하니 눈물이 앞을 가로막는구나.


지은이 : 이 시조는 연산군으로부터 중종, 명종, 선조에 이르기까지 명망 있는 성리학자로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으나, 수차의 벼슬 임명에도 이를 거절한 조식(曺植)의 작품이다.


추운 겨울에도 바위틈의 거처에서 내내 고생만 하는 동안 햇볕(여기서는 임금이 내리는 벼슬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겠다. 왜냐하면, 햇볕을 안 쪼인 사람은 동서고금에 없었을 테니까) 한 번 쬐어본 일이 없지만, 서산(西山)에 해가 기우니(중종의 죽음을 말한다) 은총을 받은 일이 없는 나지만 저절로 눈시울이 뜨겁다는게 이 시조의 대의라 하겠다. 이러한 감정은 평범한 속에 비범을 지닌 감정이라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높은 벼슬을 하고도 이익을 위해서 돌아눕기가 일쑤인 당시의 당쟁 속에서 벼슬도 받지 않고 눈물을 흘리는 일종의 무상의 행위가 그 속에 도사리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 시조의 대의 밑에 깔린 진정한 모티브는 그러한 외관의 내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러운 당쟁의 혼탁 속에서 그 제물이 된 중종의 비극, 또는 그러한 비극의 산파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대한 일종의 반감이(무저항 속의 의식이긴 하나) 전편에 넘쳐흐르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눈을 돌려야겠다.



199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보니 / 조식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보니

도화뜬 맑은물에 산영조차 잠겼세라

아이야 무릉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지리산에 있는 양단수 물줄기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옛말을 듣고 이제 와서 보게 되니 복숭아 꽃잎이 떠 있는 맑은 물에 산 그림자까지 잠겨있구나, 옛날 도연명이 도화원기 에서 말하는 별천지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바로 이 지리산이 그 선경이라고 생각 하노라


작자는 벼슬을 멀리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학문수업에 정진하였는데 자연 속에 묻혀 사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 땅을 도원경에 비유하였다 무릉도원은 도연명의 글에서 나오는 얘기인데 동양 사람들이 마음으로 동경하는 그런 이상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런 무릉에 대한 동경은 조선시대 선인들의 의식에 깊이 박혀 고전시가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지은이 : 조식은 호가 남명(南溟)이다.

은둔적인 학풍을 지녔으며 여러번 임금의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황은 글을 보내 '조정에서 초야에 묻힌 어진 이들을 천거하여 임금이 특별히 벼슬을 내렸는데도 거절함은 의가 아니오 군신간의 대륜도 아니라'고 간곡히 권했으나 남명은 그도 거절하였다.

이황과 더불어 영남의 쌍벽을 이루는 학풍을 대표하면서 지리산을 중심으로 유학을 진흥시켜 지역문화에 크게 기여 한 점은 한국유학사에 큰 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한 영남의 학자들은 두 사람을 모두 존경하여 두 문하를 번갈아 출입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수많은 제자들, 정구, 곽재우, 최영경, 김우옹, 김효원 오건 등은 나라의 위기 앞에서 문인으로 몸소 앞장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의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국난극복에 기여한 선비들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조선말기 까지 이어졌다.


사후 그는 영의정에 추종되고 문정의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남명집>, <파한잡기>등이 있다.



200 빈천을 팔랴 하고 권문에 들어가니 / 조찬한


빈천을 팔랴 하고 권문에 들어가니

치름없는 흥정을 뉘 먼저 하자 하리

강산과 풍월을 달라 하니 그는 그리 못하리


조찬한(趙纘韓) 1572~1631. 자는 선술(善述), 호는 현주(玄洲). 인조반정 때에 형조참의가 되고, 이어 선산부사를 지냈다. 문장에 뛰어나고, 시부에 능하였으며, 석주(石洲) 권 필 ·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과 절친하였다. 그의 형 조위한도 지중추 부사를 지냈으며, 문장이 웅대하고 힘이 있었다. 일설에는 유자신(柳自新)이 지었다고도 한다.


빈천(貧賤) : 집안이 가난하고 신분이 천한 것.

권문(權門) : 권세가 있는 집안.

치름없는 흥정 : 대가를 치르지 않는, 주는 것이 없는 흥정.

강산 풍월(江山風月) : 강 · 산 · 바람 · 달이니, 자연의 아름다움을 뜻하는 말.


<감 상> 가난하고 천하게 사는 것이 하도 지긋지긋해서, 그것을 팔아보려고 돈 있고 권세 있는 집안을 찾아갔더니, 주는 것 없는 흥정, 불리한 흥정을 그 누가 먼저 하려고 하겠는가. 아무도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하필이면 강산풍월과 바꾸자고 하는데, 그것만은 안되겠다. 빈천을 못 팔망정 강산풍월을 넘겨 줄 수는 없다. 강산풍월만은 돈이나 권세와도 바꿀 수가 없다. 옛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풍월주인'이라고 불렀다.


빈천과 부귀영화 · 권문세가에서 빈천을 사려고 할 리가 없다. 그러나 강산풍월만은 그도 가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빈천을 안고 살아도 강산풍월이면 된다는 사람, 요즘에는 별로 없겠지만 지난날의 우리 선인들은 그것을 낙으로 삼았다.

금수강산의 아름다운, 복 받은 풍토가 그렇게 시킨 모양이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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