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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時調詩 ***/時調 감상

시절이 태평토다 이몸이 한가하니

by 산산바다 2008. 7. 4.

 산과바다

 

 


       시조 감상

 

61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성삼문

62   언충신 행독경하고 그른 일 아니하면        성석린

63   이리도 태평성대 저리도 태평성대           성수침

64   일심어 느즛피니 군자의 덕이로다           성여완

65   전원에 봄이 오니 이 몸이 일이 하다        성운

66   있으렴 부디 갈다 아니 가든 못할소냐       성종

67   시절이 태평토다 이몸이 한가하니           성혼

68   말 없는 천산이요 태없는 유수로다          성혼

69   말이 놀라거늘 혁 잡고 굽어보니            성혼

70   상공(相公)을 뵈온 후에 사사(事事)를 믿자오매 소백주小栢舟

71   칠십에 책을 써서 몇 해를 보잔 말고        송계연월옹

72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        송순

73   늙었다 물러가자 마음과 의논하니           송순

74   꽃이 진다 하고 새들아 슬퍼마라            송순

75   풍상이 섞어친날에 갓피온 황국화를         송순

76   님이 헤오시매나는 전혀 믿었더니           송시열

77   닻 들자 배 떠나니 이제 가면 언제 오리     송시열

78   솔이 솔이라 하니 무슨 솔마 너겻난다       송이(松伊)

79   들은 말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 듯이      송인

80   심여장강 유수청이요 신사부운 무시비라     신광한




61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외 2편 /성삼문

충의가(忠義歌)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얏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봉래산(蓬萊山) : 가상적인 산인 중국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 그러나 여기서는 금강산으로 보는 것이 좋음.

낙락장송(落落長松) : 키가 크고 가지가 축축 늘어진 소나무.

만건곤(滿乾坤) : 온 천지에 가득함.

독야청청(獨也靑靑) : 홀로 푸르리라.


나의 이 몸이 죽은 뒤에 무엇이 되느냐하면, 봉래산 중에서도 제일 높은 성역(聖域)에 돋아난 소나무, 그 중에서도 가장 키가 크고 곧은 소나무가 되어 온 천지에 흰 눈이 가득찬 그 산 위에서 홀로 푸르리라.


성 삼문이 의(義)를 어기고 살아서 욕되게 사느니보다는 죽음의 길을 택하여 늙지 않는 영원한 소나무로써 푸른 청춘과 푸른 절개를 지켜 세상과 역사를 비치는 그러한 몸이 되겠다는 결의가 표명된 작품이다.


그러니까 법의 심판 앞에 죽음을 선고받을 저자로서 태연자약하게 몸을 내던지는 기개가 이 시조의 밑받침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살아 있을 때 못지않은 푸르름을 항상 세상에 내뿜어 만인의 마음을 푸르게 하겠다는, 일종의 사회, 인간, 교육에 거울이 되겠다는 심상이 전편에 흐르는 작품이라 하겠다.


또 봉래산 중에서도 그 제일봉에 돋아난 소나무, 그 소나무 중에서도 키가 크고 가지가 축축 늘어진 위풍도 당당한 소나무가 되려는 자신의 이상(理想)이 표현 속에 두드러져 있고, 온 천하를 덮은 눈 위에서 홀로 푸르리라는 결의는 괄목할 표현력과 더불어 이미지의 효과도 더 말할 나위 없이 넓고 높다.


더구나 흰 눈 위에 푸른 소나무에서 오는 색조의 대비 효과는 하나의 절경이라 하겠으며, 금상첨화(錦上添花)격으로 다른 사람이 다 퇴색하더라도 나만은 홀로 푸르리라는 대목에 이르러선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절의가(絶義歌)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긔 뉘 따헤 났다니


이 시조는 [고시조17]에서 소개했다


세종 말년에 중국사신 예겸이 왔을 때, 시에 조예가 깊은 그를 대접할 인물이 없어 낭패했을 때, 성삼문, 신숙주가 접대역으로 선발되었는데, 중국어에 능통한 신숙주가 말상대를 하고, 시는 모두 성삼문이 지었다고 한다. 예겸은 깊이 감동하여 두 사람과 의형제를 맺었고 이때 우리 학자들에게서 받은 시를 모아 <遼海片(요해편)>이라는 시집을 냈는데 성삼문이 발문을 썼다고 한다.


아래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수레 안에서 지은 시조


임의 밥 임의 옷을 먹고 입으며

일평생 먹은마음 변할줄이 있으랴

한번 죽음이 충의인줄 알았으니

현능의 숭백이 꿈결처럼 아롱이네



62

언충신 행독경하고 그른 일 아니하면 /성석린


언충신 행독경하고 그른 일 아니하면,

내 몸에 해 없고 남 아니 무이하니,

행하고 여력(餘力)이 있거든 학문(學文)조차 하리라.


지은이 : 성석린(成石璘, 1338~1423) 호는 독곡(獨谷). 1357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 전리총랑(典理摠郞), 성균관 사성(司成), 밀직대언(密直代言), 지신사(知申事)를 지내고, 우왕 10년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전원수(助戰元帥) 양백연(楊白淵)과 함께 이를 물리친 공으로 수성좌리공신(守成佐理功臣)이 되고, 공양왕(恭讓王) 옹립에도 공을 세워 찬화공신(讚化功臣)이 됨. 조선 건국 후에는 영의정을 지냄. 필적에 '조선태조건원릉신도비(朝鮮太祖健元陵神道碑)'가 있음.


언충신 행독경(言忠信 行篤敬) : 말이 충성되고 진실하며, 행실이 돈독하고 조심스러움.

무이하니 : 미워하니.


<감상> 지은이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걸쳐 80여 평생을 나라의 녹을 먹으며 정치에 관여한 높은 벼슬아치였으며, 동서에 서예가요, 덕망 높은 학자이기도 하였다. 물론 그의 인생 편력에도 모함과 시기로 벼슬자리에서 밀려나고, 낙향해야 하는 쓰라린 경험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조(麗朝)와 이조(李朝)를 통해 중히 기용(起用)되었고, 80여세의 장수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사람됨이 출중하고, 남에게 덕을 끼친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니겠는가 짐작된다.


그의 그러한 인간 됨됨의 면모를 이 작품이 웅변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즉, 이 작품은 군자의 행할 바 언행과 교양의 지침서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초장의 '언충신(言忠信) 행독경(行篤敬)'은 곧, 말함에 있어서는 무게와 경건함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여 언행의 본을 제시하였고, 종장에 가서는 그러한 언행의 밑거름은 학문을 닦아 교양을 쌓아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여 자신과 남을 동시에 훈계하고 있는 것이다.



63

이리도 태평성대 저리도 태평성대 / 성수침


이리도 태평성대 저리도 태평성대

요지일월이요 순지건곤이로다

우리도 태평성대에 놀고 가려 하노라


이리도 : 여기도.

요지일월(堯之日月) : 요 임금이 다스리던 세월.

순지건곤(舜之乾坤) : 순 임금이 다스리던 세상. '요천

순일(堯天舜日)' 태평한 요순 시절을 말함.


요순시대 같은 태평성대로 비유된 이조 명종(明宗)대는 기실 이조 5백 년을 통하여 가장 평화스러운 세월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해에 조금도 어려운 점이 없지만, 종장의 '우리도 태평성대에 놀고 가려 하노라'고 한 '놀고 간다' 는 대목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이다. 무릇, 일반적인 개념으로 '논다'는 뜻은 비생산적(非生産的) 인 의미로 풀이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그런 뜻으로가 아니라 향유(享有)한다는, 다시 말하면 '마음껏 누리리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지은이 : 성수침(成守琛, 1493~1564) 호는 청송(聽松) 학식과 덕망이 높았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백악산(白岳山) 기슭에 '청송서실(聽松書室)'을 짓고 '대학, 논어'를 읽으며 일생을 지냈다 사후 좌의정에 추대됨. 시호 문정공(文貞公)



64

일심어 느즛피니 군자의 덕이로다 /성여완


일심어 느즛피니 군자의 덕이로다

풍상에 아니지니 열사의 절이로다

지금에 도연명 없으니 알이 적어 하노라


일찍 심어도 가을 늦게야 피어나니 이는 오랫동안 수양을 거듭하는 군자의 덕행과 같다. 비바람 눈서리에도 꽃은 떨어지지 아니하니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지조 높은 열사의 절개와도 같다. 옛날 진(晋)나라 때 국화를 몹시 사랑했던 도연명 같은 절게 높은 이를 지금 세상에는 볼 수 없으니 이를 슬퍼한다.


지은이 : 성여완 고려 말의 문신으로 호는 이헌, 본관은 창녕으로 공민왕 때 민부상서를 지냈다.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가 등극하자 포천의 왕방산으로 들어갔으며 이때 고려의 멸망을 보고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많았다. 이것은 새 왕조 이씨조선에 벼슬하지 않겠다는 절의의 표현이었으며 결국 이들은 불에 타 죽임을 당하였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태조가 회유책으로 그에게 검교문하시중 창녕부원군에 봉하였으나 거절하였다고 한다.



65

전원에 봄이 오니 이 몸이 일이 하다 / 성운


전원에 봄이 오니 이 몸이 일이 하다

꽃나무 뉘 옮기며 약밭은 언제 갈리

아해야 대 베어 오너라 삿갓 먼저 결으리라


만물이 푸릇푸릇 되살아나는 전원에 봄이 오고 있으니 내 할 일이 많구나. 꽃나무는 누가 옮기며, 약밭은 언제 다 갈겠는가? 아이들이 갈아 주기를 기다리다간 봄은 씨 뿌리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떠나가 버릴지 모르는 일이다. 아이야 어서 대를 베어 오너라. 삿갓부터 먼저 짜서 쓰고 나서야겠다. 아까운 이 봄을 게으름으로 날려 보낼 수는 없지 않겠느냐.


지은이 : 성운 지은이는 연산군 3년부터 선조 12년 사이에 산 선비이다. 호는 대곡(大谷)으로 중종(中宗) 21년 나이 30에 겨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은 모두 마다하고 보은 속리산에 은거하면서 대곡집(大谷集)을 지어 남겼다. 아버지가 종 3품의 부정(副正) 벼슬까지 한 집안에 태어났으나, 형이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억울하게 화를 당하자 이에 벼슬을 멀리 하고 평생을 전원에 묻혀 살게 되었다.


이 시조는 그가 '꽃과 봄' '약밭과 대' 등을 벗하여 자연 속에 살았음을 보여준 작품으로 그 구성에도 빈틈이 없다. 당대의 명사 이 토정(李土亭)·서 화담(徐花潭) 등과 사귀면서 시와 거문고를 즐겼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그의 생활은 이 같은 交遊를 가지면서 오직 학문에만 정력을 쏟았다. 이 시조의 가치는 그러한 내용이 갖는 커다란 스케일과 늠름한 주제의 기세로써,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압도돼 버리고 만다는 점에 있다.



66

있으렴 부디 갈다 아니 가든 못할소냐 / 성종


있으렴 부디 갈다 아니 가든 못할소냐

무단히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려도 하 애닯고야 가는 뜻을 일러라


있으려므나 꼭 가야 하겠느냐? 아니 갈수는 없겠느냐?

까닭없이 여기 있기가 싫어졌느냐? 아니면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몹시 애닯구나, 갈려고 나서는 그 까닭을 알려나 주려무나


이 작품은 경사백가(經史百家)에서부터 성리학(性理學), 서화(書畵), 사예(射藝)에 까지 능하여 호학(好學)의 명군(明君)으로 이름이 높았던 성종(成宗)이, 합천 군수로 있던 유호인이 노모의 봉양을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려 함을 만류하며 지은 노래이다.


유호인은 비록 벼슬은 낮았으나, 시문(詩文), 서필(書筆), 그리고 충효(忠孝)에도 뛰어나 당대의 삼절(三絶)이라 불리우던 인물이었으니, 호학(好學)의 성종에게는 남다른 총애를 받았을 것이고 정을 느끼게 했으리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임금에 그 신하라는 말이 있듯이, 이 작품에 풍기는 임금의 은총과 정은 비단 군신(君臣)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보다 차원을 높여 순수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우러나는 정마저 느끼게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같이 학문을 아끼고 즐기는 호학(好學) 동지(同志)의 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지은이 : 성종(成宗 1457~1494) : 이조 제 9제 임금. 세조의 손자이며 덕종의 제 2자로 예동의 뒤를 이어 1469년 13세에 즉위. 7년간 세조비인 정희왕후(貞喜王后)의 섭정 뒤 친정(親政)에 들어갔다. 특히 학문을 즐기고 유학을 장려하였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속록(大典續錄) 악학궤범(樂學軌範) 두시언해(杜詩諺解) 동문선(東文選) 동국통감(東國通鑑)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등을 편찬케 하였다. <고시조선>



67

시절이 태평토다 이몸이 한가하니 /성혼


시절이 태평토다 이몸이 한가하니

죽림 푸른 곳에 오계성 아니런들

깊이든 일장화서몽을 어느 벗이 깨우리


시절이 태평하니 이 몸이 할 일이 없어, 죽림 푸른 곳에서 잠든 나에게, 한낮의 닭울음소리가 아니었던들, 깊이든 이 좋은 꿈을 깨울 벗이 어디 있겠는가?


죽림(竹林) : 죽림칠현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현자들의 은신처를 말함

오계성(午鷄聲) : 한낮에 우는 닭소리


낮잠을 자다가 닭소리에 깨었나 보다 .평화로운 태평성대의 기원이 꿈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성혼(成渾)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이었던 성수침의 아들이다.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닦아 12세 때 그의 학문은 큰 진전이 있었으며 행동에도 절도가 있고 여러모로 어지러움이 없었다고 한다. 17세에 발해, 사마양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신병으로 복시에 응하지 못하자 과거를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는데 그 뒤로 그의 학덕은 높아져 율곡과 나란히 견주는 대학자가 되었다. 우계(牛溪) 성혼은 율곡과 도의로 사귀어 평생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과거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헌관에 임명되기는 기묘사화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으나 그는 7회나 되는 임용의 부름을 거절했다.


이이의 주장과 추천이었지만 그는 매번 거절했고 선조는 의원을 보내 약을 지어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집중했던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우계집> 6권6책과 <朱門旨訣(주간지결)> 1권1책, <爲學之方> 1책이 전해지고 있다.



68

말 없는 천산이요 태없는 유수로다 / 성혼

말 없는 청산이요, 태(態)없는 유수로다

값 없는 청풍이요, 임자 없는 명월이라

이 중에 병 없는 이 몸이 분별없이 늙으리라


지은이 : 성혼 지은이는 임진왜란 때, 세자 광해군(光海君)의 부름으로 우참판과 좌참판을 지낸 일 이외에는 60평생을 거의 벼슬과는 인연을 끊고 학자로서만 지낸 사람이다.

이 작품도 보통 다른 시가와 마찬가지로 작품의 소재는 산수풍월(山水風月)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같은 소재이면서도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독특한 감각은, 다시 말하면 소재를 다루는 솜씨는 지은이 특유의 독창성이 있어서 독자에게 주는 이미지는 남다르게 참신한 바가 있는 것이다. 즉, 초장, 중장, 종장의 매장마다 '없은' '없이' 등의 '없다' 는 어휘를 공통적인 결구(結句)로 묘하게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초장의 '말 없는 청산이요, 태 없는 유수로다'의 '없다'는 개념에서 제시한 청산(靑山)과 유수(流水)가 실제로는 얼마나 화려 웅장하고 분명한 현실적 유(有)의 세계인가. 중장의 '값없는 청풍이요, 임자 없는 명월이라'의 '없다'도 실상은 모든 만인에게 골고루 베풀어지는 자연(自然)의 보다 무한한 가치(價値)를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장의 '이 중에 없는 이 몸이 분별없이 늙으리라'에서 보여주는 '없다'는, 기실 어린 날에 병으로 중시(重試)를 포기해야 했던 병약한 지은이의 항상 건강에 대한 희구(希求)가 승화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지은이는 있는 것을 없다는 기준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폭과 멋을 지니고 있다.



69

말이 놀라거늘 혁 잡고 굽어보니 / 성혼(成渾)


말이 놀라거늘 혁 잡고 굽어보니

금수청산이 물 속에 잠겼어라

저 말아 놀라지 마라 이를 보려 하노라


성혼(成渾)1535~1598.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 묵암(默菴). 일찍부터 이율곡과 교분이 두터웠으나, 학설에 있어서는 이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을 지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주장하는 율곡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하여 6년 동안이나 논쟁을 벌인 일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글씨도 잘 썼으며, 임진왜란 때 광해군의 부름으로 잠시 좌참판을 지냈고, 인조 때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혁(革) : 세. 꼬삐. 말고삐. 고삐의 옛말은 세인데, 구개음화 현상에 의하여 '혁'이 될 수 있으니 革 자를 쓴 것이다.

< 감 상> 타고 가던 말이 갑자기 놀라기에 고삐를 치겨 잡고 내려다보니, 금수 같은 청산이 물속에 잠겨 있구나! 파랗게 맑은 물속에 그림자진 산의 경치는 한결 더 아름답고 멋이 있다. 말아! 놀랄 것 없다. 물속에 잠긴 금수청산의 아름다운 이 경치를 나는 보아야겠다. 이 시의 밀도 높은 짜임새를 눈여겨보자. 말도 놀라는 물속에 잠긴 금수청산, 나는 그것을 보아야겠다. 말과 사람과 금수청산이 하나가 되었구나!

우리나라 산골짜기에 흐르는 물은 맑고 곱기가 세계에 유례가 없다고 한다. 푸른 시냇물에 비치는 오색 단풍은 호화 현란의 극치를 이룬다. 이런 풍경을 도처서 볼 수 있는 것이 우리의 금수강산이다. 잘만 가꾸면 세계에서 으뜸가는 강산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되지 않을 성싶다.

그런데'자연보호'를 그렇게 외쳐대면서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강산은 지저분하기만 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명실상부한 금수강산을 만들고 못 만드는 일은 오로지 겨례의 의식(意識)에 달려 있다. 이것은 그것을 깨우쳐 주는듯한 시조이다.



70

상공(相公)을 뵈온 후에 사사(事事)를 믿자오매 / 소백주

상공(相公)을 뵈온 후에 사사(事事)를 믿자오매

졸직(拙直)한 마음에 병들가 염려이러니

이리마 저리차 하시니 백년(百年) 동포(同抱)하리이다


-소백주(小栢舟)- 해동가요(海東歌謠)

<감상> 상공을 뵈온 후는 모든 일을 (상공만) 믿고 지내왔으나, 옹졸한 마음에 (혹시 상공께서 그만 마음이 변하여) 병이 들까 염려하였더니, 이렇게 하마 저렇게 하자고 그러시니, 백년을 함께 살고자 하나이다.


<해동가요>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조는 광해군 때 평양 감사로 있던 박엽(朴燁)이 손님과 함께 장기를 두면서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던 기생 소백주(小栢舟)에게 명하여 짓게 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시조는 장기를 비유하여 대감에 대한 소백주(小栢舟) 자신의 연정(戀情)과 믿음을 노래하였다. 비유와 어휘의 적절한 구사가 매우 뛰어나다.


곧, '상공(相公)'은 장기의 상(象)과 궁(宮)을, '사사(事事)'는 사(士)를, '졸(拙)'은 졸(卒)을, '병(病)'은 병(兵)을, '동포(同抱)'는 포(包)를, '이리마'는 마(馬)를, '저리차'는 차(車)를 뜻한다. 이렇게 음이 같음을 이용하여 중의적(重義的)으로 작품 전체를 이끌어 가는 즉홍적인 착상이 대단하다.



71

칠십에 책을 써서 몇 해를 보잔 말고 / 송계연월옹


칠십에 책을 써서 몇 해를 보잔 말고

어와 망녕이야 남이 일정 우을노다

그래도 팔십이나 살면 오래 볼법 있나니


송계연월옹(松桂烟月翁). 조선 영조 때의 가인으로 '고금가곡(古今歌曲)'을 엮었다.

송계연월옹은 필명이며 본명은 알 수 없다. '고금가곡'의 발문과 거기에 실려 있는 자작 시조 14수를 상고하여 보면, 처음에는 벼슬도 하였으나 본뜻이 아니며, 그것을 버리고 강호로 돌아가 화조(花鳥)를 벗삼고 스스로 즐겼다고 하였다.


망녕이야 : 망령이로구나! 망령은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언행이 보통이 아닌 상태를 말한다.

일정 : 틀림없이. 반드시.

우울노라 : 웃을 것이로다. '~노다'는 '~나다, ~놋다'로도 쓰였는데 감탄형 종결어미이다.


[감상] 70고령에 책을 써서 몇 해나 보자는 것이냐. 늙은이의 망령이라고 웃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80을 산다면 아직 10년은 더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 시대라면, 환갑만 지나도 장수한다는 소리를 듣던 때인데, 고희에 책을 쓰고, 80을 내다보고 있으니 이야말로 노익장의 경지를 과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죽는 그날까지 몰두할 수 있는 필생 사업을 가진 사람은 장수한다는 말이 그 시대에 이미 증명된 느낌이다. 하기야, 인생을 하늘이 정해준 대로 적당히 살면 80은 하수(下壽)요, 100세(또는 90)는 중수이며, 상수는 120세(또는 100)라 하였으니, 기적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다.


그 누가 말했듯이, "내일 지구가 개벽을 할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으리라."고 한 마음 가짐, 그 삶의 자세를 이 노래에서 볼 수가 있어 엄숙한 생각이 든다. 그런 그의 작품을 하나 더 들어보자.


마천령 올라앉아 동해를 굽어보니

물 밖에 구름이요 구름 밖에 하늘이라

아마도 평생 장관은 이것인가 하노라


그의 장수의 비결이 무엇인지 알 듯도 하다.



72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 / 성순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

나 한간 달 한간에 청풍 한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 일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노라


초려삼간(草廬三間) : 아주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집

송순 : 호는 면앙정. 조선 때의 학자 벼슬을 버리고 담양에 하향하여 면앙정이란 정자를 짓고 그 곳에서 독서와 시작에 전념하였음 <면앙정가> 및 기타 다수 시조가 남아 전해짐.


<감상> 이 작품은 작자 미상으로 보는 이도 있으나, 면앙정잡가에 실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송순(宋純)의 작품으로 간주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어쨌든 이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는 자연과 인간과의 친화(親和)를 그리는 풍류나 호기는 범상치 않음을 본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우리 전래의 격언은 십 년이란 기간이 결코 짧지 않으며, 마음만 먹으면 최소한 이 기간에는 품은 뜻도 펴봄직하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그런데, 이 작품의 지은이는 이러한 기간 동안 자기가 이루려한 뜻이란 세상의 부귀공명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초가삼간을 마련하는 것을 그 보람으로 하였다. 그것도 처자식 거느리고 살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자연과 좀 더 가까이 벗하고 지내기 위해서 말이다.


얼른 생각하기에는 너무 욕심이 없고, 무책임한 감마저 들지만, 곰곰이 되새겨 보면, 이미 가정도 세상도 다 떠나갔거나 멀어져 버린 쓸쓸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어서 도리어 허허함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러한 심경을 결코 서러워하거나 탓하지 않고, 차곡차곡 정성 들여 한 간 한 간 초가삼간을 짓는 마음의 여유를 보여 주었고, 이를 완성함으로 청풍명월(淸風明月)을 몸 가까이 불러 들여 벗할 수 있게 되었으니, 자기 자신은 남 보기보다는 쓸쓸하거나 외로운 게 아니다 라고 폭넓은 마음의 여유를 보여 주었다.


특히 종장의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노라' 한 대목에서 보여 주는 넘치는 여유는 그가 얼마나 자연에 묻혀 자연의 철학을 몸에 익혔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73

늙었다 물러가자 마음과 의논하니 / 송순


늙었다 물러가자 마음과 의논하니

이님을 버리고 어디메로 가잔말고

마음아 너란 있거라 몸만 물러 가리라


나도 이제 다 늙었으니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물러 가자고 내 마음과 의논을 하니, 이 임금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그러니까 마음아, 너는 남아 있거라 이몸만 먼저 물러가겠다.


지은이 : 작자가 77세 때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날 때 임금과 나라를 생각하며 지은 글이다. 송순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호는 면앙정이다. 송순이 살았던 연산조에서 선조조 사이에는 정치적 사회적 변동이 극심했던 격동기였다.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 이른바 4대 사회가 잇달아 일어나고 김인로의 음해, 대소윤의 정쟁, 양재역 혈서 사건 등 수많은 사건들이 송순과 관련되어 귀향도 갔다가 다시 풀려나고 피출 되고 다시 귀향 가는 정치적 역경이 많았다. 그러면서 송순은 그 유명한 <면앙정가>를 썼고 선조 1년 한성부 좌윤이 되어 <명종실록>을 찬수하고 우참찬이 된 뒤에 50년 관직 생활을 은퇴하였다. 그는 성격이 너그러웠으며 특히 음률에도 능하여 가야금을 잘 탓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관리로서 학문으로서 문인으로서의 영역이 넓었던 그는 성수침이 "온 세상의 선비가 모두 송순의 문하로 모여들었다"고 말 할 만큼 친구나 후배가 아주 많았다고 한다. 말년에 그는 고향인 담양에 은거하고 석림정사와 면앙정을 짓고 시를 쓰며 지냈다. 그의 문집 <면앙집>에는 단가 20여 수와 면앙정가 9수, 한시 520수 등 많은 작품이 전하고 있다.


풍상이 섞어친날에 갓피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꽃이 온양 말아 임의 뜻을 알괘라


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리는 날에 막 피어난 노란 국화를 좋은 화분에 가득 담아 홍문관에 보내시니

복숭아꽃이나 오얏꽃 들은 꽃인 체도 하지 말아라 임금님께서 국화꽃을 내려 주신 뜻을 알겠구나


금분(金盆) : 좋은 화분. 도리(桃李) : 복사꽃과 오얏꽃


명종 임금이 어느 날 궁정에 핀 국화를 옥당관에게 하사하며 시를 지으라 했으나, 옥당관은 미처 시를 짓지 못하였다. 마침 참찬(參贊)으로서 숙직을 하고 있던 송순에게 부탁하여 지어바치니 시조를 본 명종은 매우 기뻐하여 송순을 크게 칭찬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 한 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 일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노라


초려삼간(草廬三間) : 아주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집


이 작품은 작자 미상으로 보는 이도 있으나, 면앙정잡가에 실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송 순(宋純)의 작품으로 간주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어쨌든 이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는 자연과 인간과의 친화(親和)를 그리는 풍류나 호기는 범상치 않음을 본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우리 전래의 격언은 십 년이란 기간이 결코 짧지 않으며, 마음만 먹으면 최소한 이 기간에는 품은 뜻도 펴봄직하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그런데, 이 작품의 지은이는 이러한 기간 동안 자기가 이루려한 뜻이란 세상의 부귀공명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초가삼간을 마련하는 것을 그 보람으로 하였다. 그것도 처자식 거느리고 살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자연과 좀 더 가까이 벗하고 지내기 위해서 말이다.


얼른 생각하기에는 너무 욕심이 없고, 무책임한 감마저 들지만, 곰곰이 되새겨 보면, 이미 가정도 세상도 다 떠나갔거나 멀어져 버린 쓸쓸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어서 도리어 허허함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러한 심경을 결코 서러워하거나 탓하지 않고, 차곡차곡 정성 들여 한 간 한 간 초가삼간을 짓는 마음의 여유를 보여 주었고, 이를 완성함으로 청풍명월(淸風明月)을 몸 가까이 불러 들여 벗할 수 있게 되었으니, 자기 자신은 남 보기보다는 쓸쓸하거나 외로운 게 아니다 라고 폭넓은 마음의 여유를 보여 주었다.


특히 종장의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노라' 한 대목에서 보여 주는 넘치는 여유는 그가 얼마나 자연에 묻혀 자연의 철학을 몸에 익혔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꽃이 진다 하고 새들아 슬퍼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슴하리요


희짓는 : 휘젓는, 희롱하는. 새와 : 시기하여.


새들아, 꽃이 저 앉을 자리가 없다하여 너무 슬퍼 말라.

모진 바람이 꽃을 떨어뜨리는 것이니 꽃에 무슨 죄가 있으랴. 떠나간다고 휘젓는 봄을 시기하여 무엇 하겠는가.


여기서 꽃이라는 말과 새들이란 명사, 그리고 바람, 봄이라는 어휘들이 지니는 은유(隱諭)의 그림자에 눈을 돌려야 만이 이 작품이 갖는 참 뜻과 그 실마리를 찾아 낼 수가 있다.


아울러 지은이 송순이 처해 있던 시대와 그의 벼슬을 둘러싸고 벌어진 당쟁(黨爭)의 단면을 훑어볼 필요가 있겠다. 잡느냐 놓치느냐에 따라 정의(正義)의 음양이 그 얼굴을 바꾸던 시대, 말하자면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를 두고 다투던 처절한 당쟁은 송 순이 살던 선조 시대에도 걷힐 줄 몰랐다. 당쟁의 파문은 당대 사회의 각계각층에 지대한 상처를 남김을 또한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그토록 허다한 옥사와 사화(士禍)는 너무나 가혹했고, 그 연좌의 범위는 직계존속은 물론, 내·외척에 이르기까지 마련이어서 그만큼 사회 불안의 폭을 크게 하기가 일쑤였다. 환로(宦路)에 나가서 정치의 포부를 펴던 사람치고 당쟁의 화를 입지 않은 사람이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 시조의 소재는 이른바 명종(明宗) 즉위년(卽位年)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지은이는 이때 이에 연좌되어 파직 유배의 몸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조에 동원된 은유들은 그 사회의 참극과 무관할 수가 없다. 꽃이 진다는 속뜻은 을사사화 때 죽은 죄 없는 선비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새들은 세상을 바로 보는 뜻 있는 사람들의 총칭이며, 바람은 을사사화로 일어난 모진 풍화이다. 희짓는 봄은 당시 사화를 꾸며서 성공한 득세파, 이를테면 집권세력을 말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사관불출(辭官不出)로 어지러운 세상과 담을 쌓았지만, 이 불의의 사화가 하나의 역사의 계절임을 달관하고 사필귀정(事必歸正)에 마음을 가라앉힌 그 태연자약한 모습이 새들아 슬퍼마라는 구절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송순의 시조 몇 편을 한데 모아 봤다 그의 많은 작품에 비해 고작(?) 4편에 불과하지만, 책은 <한국고시조선>과 <고시조산책>을 참고했습니다.



74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퍼마라 / 송순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퍼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삼 하리요.


희짓는 : 휘젓는, 희롱하는.

새와 : 시기하여.


<감상> 새들아, 꽃이 저 앉을 자리가 없다하여 너무 슬퍼 말라. 모진 바람이 꽃을 떨어뜨리는 것이니 꽃에 무슨 죄가 있으랴. 떠나간다고 휘젓는 봄을 시기하여 무엇 하겠는가 여기서 꽃이라는 말과 새들이란 명사, 그리고 바람, 봄이라는 어휘들이 지니는 은유(隱諭)의 그림자에 눈을 돌려야 만이 이 작품이 갖는 참 뜻과 그 실마리를 찾아 낼 수가 있다.


아울러 지은이 송순이 처해 있던 시대와 그의 벼슬을 둘러싸고 벌어진 당쟁(黨爭)의 단면을 훑어볼 필요가 있겠다. 잡느냐 놓치느냐에 따라 정의(正義)의 음양이 그 얼굴을 바꾸던 시대, 말하자면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를 두고 다투던 처절한 당쟁은 송순이 살던 선조 시대에도 걷힐 줄 몰랐다. 당쟁의 파문은 당대 사회의 각계각층에 지대한 상처를 남김을 또한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그토록 허다한 옥사와 사화(士禍)는 너무나 가혹했고, 그 연좌의 범위는 직계존속은 물론, 내·외척에 이르기까지 마련이어서 그만큼 사회 불안의 폭을 크게 하기가 일쑤였다. 환로(宦路)에 나가서 정치의 포부를 펴던 사람치고 당쟁의 화를 입지 않은 사람이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 시조의 소재는 이른바 명종(明宗) 즉위년(卽位年)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지은이는 이때 이에 연좌되어 파직 유배의 몸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조에 동원된 은유들은 그 사회의 참극과 무관할 수가 없다. 꽃이 진다는 속뜻은 을사사화 때 죽은 죄 없는 선비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새들은 세상을 바로 보는 뜻 있는 사람들의 총칭이며, 바람은 을사사화로 일어난 모진 풍화이다. 희짓는 봄은 당시 사화를 꾸며서 성공한 득세파 이를테면 집권세력을 말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사관불출(辭官不出)로 어지러운 세상과 담을 쌓았지만, 이 불의의 사화가 하나의 역사의 계절임을 달관하고 사필귀정(事必歸正)에 마음을 가라앉힌 그 태연자약한 모습이 새들아 슬퍼마라는 구절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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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이 섞어친날에 갓피온 황국화를 / 송순


풍상이 섞어친날에 갓피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꽃이 온양 말아 임의 뜻을 알괘라


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리는 날에 막 피어난 노란 국화를 좋은 화분에 가득 담아 홍문관에 보내시니 복숭아 꽃이나 오얏꽃들은 꽃인 체도 하지 말아라 임금님께서 국화꽃을 내려 주신 뜻을 알겠구나.

금분(金盆) : 좋은 화분. 도리(桃李) : 복사꽃과 오얏꽃


명종 임금이 어느 날 궁정에 핀 국화를 옥당관에게 하사하며 시를 지으라 했으나, 옥당관은 미처 시를 짓지 못하였다. 마침 참찬(參贊)으로서 숙직을 하고 있던 송순에게 부탁하여 지어 바치니 시조를 본 명종은 매우 기뻐하여 송순을 크게 칭찬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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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헤오시매 나는 전혀 믿었더니 / 송시열


님이 헤오시매 나는 전혀 믿었더니

날 사랑하던 정을 뉘손대 옮기신고

처음에 �시던 것이면 이대도록 설오랴


지은이 :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효종 임금의 스승으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로 있다가 봉조하(奉朝賀)를 지내었음. 숙종 15년에 원자 책봉을 반대하다 제주도로 귀향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5년 후에 관작이 복구되고 도봉서원(道峰書院) · 문정서원(文正書院)에 모셔졌다. 주자학의 대가로서 많은 저서와 문집을 남기었다.


<감상> 님께서 나를 생각해 주신다기에 나는 그것을 태산같이 믿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는 나를 사랑하던 그 정을 누구에게 옮기시었는고? 처음부터 미워하셨더라면 이렇게까지 서럽지는 않을 것이외다. 이쪽에서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감쪽같이 나를 버리고 다른 님을 사랑한다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느낌입니다. 차라리 애당초부터 정을 주지 않았던들 이렇게 서러울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야속합니다.


이 시조가 만약 남녀 사이의 애정관계를 읊은 것이라면, 그런대로 괜찮은 가작이라고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의 처지로 보아, 이 시조는 그것이 아닌 정치적인 환경에서 받은 충격을 노래한 것으로 짐작이 되는 만큼, 감상의 각도가 바뀌어 지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그러나 옛시조에는 이런 유형의 것이 허다하니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음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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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 들자 배 떠나니 이제 가면 언제 오리 / 송시열(宋時烈)


닻 들자 배 떠나니 이제 가면 언제 오리

만경창파에 가시는 듯 다녀오소

밤중만 지국총 소리에 애끊는 듯하여라


만경창파(萬頃滄波) : 한없이 너르고 너른 바다를 말한다.

가는 듯 : 가자마자 곧, 가는 것처럼 그렇게 빨리.

밤중만 : 시조 종장 첫머리에 흔히 쓰이는 일종의 감탄사인데, '밤중쯤, 한밤중에'의 뜻.

지국총 : 흥을 돋우기 위하여 '어부사'의 후렴에 쓰인 말인데, 아마도 노 젓고 닻 감는 소리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한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효종 임금의 스승으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로 있다가 봉조하(奉朝賀)를 지내었음. 숙종 15년에 원자 책봉을 반대하다 제주도로 귀향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5년 후에 관작이 복구되고, 도봉서원(道峰書院) · 문정서원(文正書院)에 모셔졌다. 주자학의 대가로서, 많은 저서와 문집을 남기었다.

<감상>

시원스럽게 넘어가는 가락이다. 닻을 들자마자 곧 배가 떠나니 이제 가면 언제 돌아오겠소? 넓고 넓은 바다이지만 가자마자 곧('나는 듯이 돌아오소'로 된 데도 있다), 나는 듯이 오시오. 한밤중에 들려 오는 '지국총 지국총' 배 젓는 소리에 애간장이 다 끊어집니다. 아프고 쓰린 이별의 감정이 잘 나타나 있는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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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이 솔이라 하니 무슨 솔마 너겻난다 / 송이(松伊)


솔이 솔이라 하니 무슨 솔마 너겻난다

천심절벽의 낙락장송 니 긔로다

길 아래 초동의 졉낫시야 거러 볼 줄이 이시랴


무삼 솔만 : 무슨 솔인 줄로만

넉이는다 : 여기느냐

천심절벽 : 천길이나 되는 낭떠러지

낙락장송 : 가지고 축 늘어지고 키가 큰 소나무

초동 : 나무하는 아이

졉낫시야 : 작은 낫

- 송이(松伊)- 해동가요(海東歌謠)

<감상> 나를 보고 '솔이, 솔이'라고 부르니, 무슨 솔이로 생각하고 있느냐?

천 길이나 되는 절벽에 우뚝 솟은 큰 소나무, 그것이 바로 나이도다.

길 아래 지나가는 초동의 작은 낫으로 걸어볼 수 나 있는 낮은 소나무인 줄 아느냐?

제재 : 소나무

성격 : 의지적

주제 : 소나무의 절개를 닮으려는 고고한 자존심(自尊心)

작자는 연대 미상의 기생으로, 비록 천한 하류층의 몸으로 선비들에게 술이나 따라 주지만,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대한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작자가 가진 정신적인 지조는 높은 절벽 위에 우뚝 서 있는 고고한 소나무와 같다는 의미로, 선비들이 하찮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하여 냉정하게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작자의 이름이 소나무의 한자음인 '송(松)'으로, 이 시조에서 초장의 '솔이 솔이'와 중장의 '낙락장송'의 표현을 통해서 이중적인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이 '소나무'이기에 더더욱 지조를 지켜나가고자 하는 다짐이 당당하게 나타나 있으며, 표현 또한 문학성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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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말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 듯이 / 송인


들은 말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 듯이

내 人事 이러호매 남의 시비 모를로라

다만지 손이 성하니 잔 잡기만 하노라


들은 말도 말이 끝나는 대로 잊어버리고, 본 일도 보지 않았던 것처럼 말끔히 씻어 버려야겠다. 세상에 몸을 두면서 살아가는 내 생각이 이러하니 남이야 시비를 하든 말든 내 알 바가 아니 로다. 단지 내 손이 아직 성하니 잔을 들 수 있어 술이나 마시노라.


당파 싸움에 해가 떠도 밤처럼 어둡던 이조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몸에 지녀야 할 처세법이 있었다. 그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들어도 못 들은 척하거나, 곧 잊어버림으로써 말을 옮기는 전언 자(傳言者)의 죄를 뒤집어쓰지 않도록 해야 하고, 눈으로 보고도 못 본 척하거나, 아예 잊어버리는 방법이 최상의 처세였다. 살아가는 기풍을 그렇게 아주 본떠 버린 지은이는, 그러므로 남의 왈가왈부에 개입할 것도 없이 그냥 내 생각 하나만으로 살아갔다. 그러한 무관심 속에서도 성한 손이 아직도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으니 잔이나 잡고 술이나 마시는 데만 열중한 것이다. 만약에 남의 말이 들려 와도 귀에 들어가지 않고, 눈으로 본 일도 인식할 수가 없다면 그 사람은 인간의 생리나 기능을 아주 잃어버린 사람이겠으나, 여기서 표현된 내용은 그러한 것과도 거리가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말하자면, 지은이의 신분이 왕의 외척인데다가 벼슬로는 도총관까지 지낸 귀족이자, 그 식견이나 문장으로도 당대의 명문가였으니, 하고 싶은 말이나 해야 할 말을 할 자유를 어느 누구 못지않게 향유할 수 있을 법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들은 말도 옮기지 않게 미리 잊어버리고, 본 일조차 안 본 거나 다름없는 상태, 말하자면 망각의 상태에 살면서 술잔이나 기울이자 했으니, 그가 살던 시대가 얼마나 어지럽고, 적이냐 편이냐를 가려 죽이고 살리는 재량권 행사도 얼마나 자의로 자행되었는가를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진리나 지식의 세계에서 볼 때 하잘것없는 당쟁의 단면과 그 공포 분위기를 우리는 이 한 수의 시조 속에서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지은이 : 이암 송인은 조선전기의 학자로 10세 때 중종의 셋째 서녀인 정순옹주와 결혼하여 여성위(礪城尉)가 되고 명종 때 여선군에 봉해졌다. 두루 요직을 역임하면서 도총관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였고 이황, 조식, 성혼, 이이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였으며 만년에는 선조의 자문역할을 하였다. 글과 글씨에 능하여 양주의 덕흥대원군신도비, 남원의 황산대첩비, 남양의 영상 홍언필비등에 전하며, 그의 저서로는 <이암유고> 12권 4책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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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여장강 유수청이요 신사부운 무시비라 / 신광한


심여장강 유수청이요 신사부운 무시비라

이 몸이 한가하니 따르는 이 백구이로다

어즈버 세상명리설이 귀에 올까 하노라


심여장강 유수청(心如長江流水淸)  마음은 긴 강 흐르는 물처럼 맑음.

신사부운 무시비(身似浮雲無是非): 몸은 뜬 구름처럼 시비가 없어 자유스러움.

세상명리설(世上名利說)  세상의 명예와 이익에 관한 이야기.


마음은 강물처럼 맑고, 몸은 두둥실 떠 있는 구름처럼 자유롭다. 이렇게 시작된 초장에 이어, 그러한 나에게 근심 걱정과 잡념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나를 따르는 것은 오직 세상 탐욕에 눈이 어두운 마음 검은 무리가 있을 수 없고, 오직 백구와 같이 깨끗한 마음의 벗이 있을 뿐이다. 물론 여기에 백구는 그대로의 백구 자체나 자연으로 풀이할 수도 있으나, 초장의 은유법으로 보아 깨끗하고 착한 벗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성싶다.


어쨌든 그러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의 자신이면서도, 종장에서 보여주는 그래도 행여 세상의 명리(名利)에 관한 이야기가 나의 귀를 솔깃하게 유혹할까 두려워하노라고 다시 한 번 자신을 경계하고 다짐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고고하고 청빈한 선비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다만, 초장에 연이어 쓴 한시문이 작품의 리듬을 딱딱하게 한 점이 흠이라면 흠이겠다. 그러나, 중세 시조작가들이 거의 한문학자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 불가피성은 이해될 수도 있겠다.


지은이 : 신광한(申光漢) : 1484(성종15) - 1555(명종10) 중종조의 문신이다. 신숙주의 손자로 조부에게 수학하였다. 조광조 때에 신진사류로 등용되었다가 기묘사화 때 삭직, 이후 다시 등용되어 좌찬성에 올랐다. 문장에 능하고 筆力이 뛰어 났으며, 문집으로 <기재집(企齋集)>과 소설 <기재기이(企 齋記異)>를 남겼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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