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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時調詩 ***/時調 감상

검으면 희다 하고 희면 검다 하네

by 산산바다 2008. 7. 4.

산과바다

 

 

21   적설이 다 녹도록 봄소식을 모르더니     김수장

22   검으면 희다 하고 희면 검다 하네        김수장

23   흉중에 먹은 뜻을 속절없이 못 이루고    김수장

24   효제로 배를 무어 충신으로 돛을 달아    김수장

25   환욕에 취한 분네 앞길 생각하소         김수장

26   한식 비갠 후에 국화 움이 반가왜라      김수장

27   일순천리 한다 백송골아 자랑 마라       김영

28   처음에 모르더면 모르고 있을 것을      김우규

29   태산에 올라앉아 사해를 굽어보니       김유기

30   장부로 삼겨나서 입신양명 못할지면     김유기

31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김육

32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김인후

33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김종서

34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김종서

35   초생에 비친 달이 낫같이 가늘다가      김진태

36   벼슬을 저마다 하면 농부할 이 뉘 있으며 김창업

37   겨울날 따스한 볕을 님 계신데 비추고저  김천택

38   강산 좋은 경을 힘센 이 다툴 양이면     김천택

39   흰구름 푸른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김천택

40   가을 밤 채 긴 적에 님 생각 더욱 깊다   김천택

 

 

 

21

적설이 다 녹도록 봄소식을 모르더니 / 김수장

적설이 다 녹도록 봄소식을 모르더니

귀홍은 득의 천공활이요 와류는 생심 수동요리

아이야 새술 걸러라 새봄맞이 하리라


적설(積雪) : 겨우내 쌓인 눈.

귀홍 득의 천공활(歸鴻得意天空闊) : 가을에 왔다가 봄에 북녘으로 돌아가는 철새 기러기는, 하늘이 넓고 넓어서 의기양양하게 날아가고.

와류생심 수동요(臥柳生心水動搖) : 냇가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버드나무(수양버들을 가리키기도 함)는 얼음이 녹아서 물이 움직임에 따라 춘심(春心)이 생기는구나! 잠자던 버드나무도 이제 잠을 깨고, 얼음에 갇혔던 물도 이제 활기를 찾아 흘러가는 구나!


<감상> 겨우내 쌓였던 눈이 다 녹도록 아직 봄이 온 것을 별로 못 느꼈는데, 넓은 하늘을 훨훨 마음껏 날아가는 기러기 떼와 냇가의 버드나무 실가지에 푸릇푸릇 생기가 돌고, 얼음에 덮였던 시냇물이 돌돌돌 흘러가는 것을 보니 봄이 완연하구나! 이제 완전히 봄이 왔구나. 아이야 새술을 걸러라. 새봄맞이를 해야겠다. 새봄을 맞이하는 밝은 마음, 즐거운 심정이 생동한다.

한국의 봄은 버드나무 실가지에 먼저 오고, 한국의 가을은 오동잎이 누구보다도 먼저 알린다고 한다. 아직도 여름인 줄만 알고 있는데 뜰 앞의 커다란 오동잎이 뚝하고 떨어져 펄럭펄럭 땅 위에 내려앉는다. 버드나무의 실가지와 둥그런 오동잎은 계절 감각의 첨병(尖兵)인가?


'금수강산'이라는 말은 우리나라를 꾸며서 하는 말이 아니다. 사실 그대로 그린 말이다. 산수가 좋아서, 자연 풍경이 아름다워서만이 아니다. 계절의 변화가 이렇듯이 규칙적 · 율동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계절의 변화가 율동적 음악적이어서 산수가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봄 · 여름 · 가을 · 겨울이 4계절의 개성 발휘가 우리나라처럼 뚜렷한 나라도 별로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봄은 따뜻하고 여름은 더우며, 가을은 시원하고 겨울은 추운, 이 현상에 예외는 없다.



22

검으면 희다 하고 희면 검다 하네 / 김수장


검으면 희다 하고 희면 검다 하네

검거나 희거나 옳다 할 이 전혀 없다

차라리 귀 막고 눈 감아 듣도 보도 말리라


<감상> 검은 것과 흰 것은 서로 반대되는 빛깔이다. 그러니까 흔히들 말하는 흑백논리라는 것은 시비의 논리요, 동신에 양단간에 단정을 지어 버리는 단순 논리인 것이다. 희지 않으면 검다, 검지 않으면 희다고 단정지어 버리고, 그 중간의 빛깔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니, 이른바 변증법에서 말하는 '정(正)'과 반(反)'이 있을 뿐, 그것이 지양되는 '합(合)'의 차원이 없다. 지난날 우리나라의 이른바 당쟁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반대를 위한 반대만이 있었을 뿐 거기에는 타협이니 발전이니 하는 상향성(上向性)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검으면 희다 하고 희면 검다 하는 터이니, 검거나 희거나 절대 옳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참으로 '코막고 답답한'노릇이다. 그러니까 귀막고 눈감고 듣지도 보지도 않을 수밖에 도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어질고 정당한 비판력을 가진 인재는 초야에 숨어 버릴 수밖에....... 그리하여 강호에서 백구나 벗삼고, 낚시질로 세월이나 낚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 시조도 직접적으로는, 경종의 무자병약(無子病弱)이 불러들인 왕위계승권을 에워싼 노론과 소론의 대립에서, 노론의 4대신과 60여 명의 인재를 역모로 몰아 투옥하고 죽이고 귀양을 보낸 것에 대한 지은이의 분노와 강개(慷慨)가 차라리 방관, 무관심 내지 묵살로 변해 버린 것에 대해 읊은 것이리라.



23

흉중에 먹은 뜻을 속절없이 못 이루고 / 김수장


흉중에 먹은 뜻을 속절없이 못 이루고

반세 홍진에 남의 우음 된 져이고

두어라 시호시호니 한할 줄이 이시랴


반세 홍진(半世紅塵) : 홍진은 속세의 번거로운 일들. 반평생의 그것.

우음 된 져이고 : 웃음 ---비웃음 거리가 되었도다!

두어라 : 종장 첫머리에 흔히 쓰이는 감탄사로서 '내버려두어라. 그만 두어라, 아서라'따위의 뜻으로 체념을 나타내는 말.

시호시호(時乎時乎) : 시재시재(時哉時哉)와 같은 한자로, 좋은 때가 온 것을 감탄하는 소리.

변할 줄이 : 한탄할 것이.


<감상> 장부의 가슴속에 품은 큰 뜻을 속절없이 이루지 못하고, 반평생을 세속적인 구질구질한 일에다 썩혀, 남의 비웃음을 사고 말았도다! 그러나 이제서야 비로서 좋은 때를 만났으니 한탄할 것이 없지 않느냐. 우리의 기성세대들이 지난날의 인고(忍苦)를 회상하면서, 이제 좋은 세상이 왔고 앞으로도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므로, 한번 멋지게 살아보자고 의지를 표현한 것과 맥이 통하는 느낌이다.



24

효제로 배를 무어 충신으로 돛을 달아 / 김수장


효제로 배를 무어 충신으로 돛을 달아

안연 자로로 노 주어 세워 두고

우리도 공부자 모시고 학해중에 놀리라


효제(孝悌) : 효도와 우애(友愛).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함.

배를 무어 : 배를 만들어. '무어'의 원형은 '무ㅡ다, 무으다'로서 '쌓아올리다. 꾸며 맞추다'의 뜻

충신(忠信) : 충성과 신의(信義).

안연(顔淵) 자로(子路) : 공자의 두 제자로서 모두 십철(十哲)의 한 사람들이다. 안연의 본성명은 안회(顔回)요, 연(淵)은 그의 자(字)인데,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 자로의 본성명은 중유(仲由)로서 자로는 그의 자(字)이다. 용맹스러운 성격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공부자(孔夫子) : 공자를 높여서 부르는 말.

학해(學海) : 학문의 바다. 학문의 길이 바다와 같이 넓고 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감상> 공자의 가르침이자 곧 유교의 덕목인 효제와 충신을, 배와 그 배를 저어 나가는데 중요한 부분인 돛에다가 비유하였고, 또 공자의 뛰어난 제자인 안연과 자로 역시 노에다가 비유함으로써 학문의 세계의 무한함과 그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잘 표현하였다.



25

환욕에 취한 분네 앞길 생각하소 / 김수장


환욕에 취한 분네 앞길 생각하소

옷 벗은 어린아이 양지꼍만 여겼다가

서산에 해 넘어가거든 어찌하자 하는다


환욕(宦慾) : 벼슬에 대한 욕망.

양지(陽地) : 햇볕이 잘 드는 양지 쪽.

           '꼍'은 뒤꼍의 꼍과 같은 것.

하는다 : 하느냐? '~는다'는 의문형 종결어미이다.


<감상> 벼슬에 대한 욕심에 취해 있는, 벼슬을 탐내고 벼슬길에 연연하는 이들이여, 눈을 들어 앞날 일을 좀 생각해 보시오. 발가벗은 어린 아이(어리석은 사람을 비유)가 언제나 햇볕이 잘 쬐는 따뜻한 양지쪽인 줄로만 알았다가, 저녁때가 되어 해가 서산에 넘어가 추워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벼슬에 있는 동안은 양지 쪽 같아서 발가벗고도 따뜻하겠지만, 거기서 떨어져 나가게 되면 까딱하다가는 신세 망칩니다.


벼슬이란 한때 적당히 봉사하다가 깨끗이 물러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훌륭한 선비들은 '더디 나아가고 빨리 물러나는'것이 현명한 벼슬아치의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물러난 뒤에 무엇을 할 것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잘 설계해야 할 것입니다. 탐관오리를 경계하고 청렴결백한 선배의 생활을 찬양하는 뜻이 들어 있다.



26

한식 비갠 후에 국화 움이 반가왜라 / 김수장

한식 비갠 후에 국화 움이 반가왜라

꽃도 보려니와 일일신 더 좋왜라

풍상이 섞어칠 제 군자절을 피운다


한식(寒食) : 명절의 하나. 둥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로, 4월 5~6일쯤이다. 이 날은 나라에서는 종묘와 능원에 제사를 지냈고, 민간에서는 성묘를 하는 풍습이 있다. 옛날 중국 진나라의 현인 개자추(介子推)가 이날 산에서 불에 타 죽었으므로,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이날은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었다는 데서 유래된 명칭이다.

반가왜라 : 반갑구나! 반갑도다! 다음에 오는 '좋왜라'도 마찬가지로, '~왜라, ~웨라'는 감탄형 종결어미이다.

일일신(日日新) : '대학'에서 나온 말인데, 날로 새롭다는 뜻.

군자절(君子節) : 군자의 절개. 국화는 매와 · 난초 · 대와 더불어 4군자의 하나.


<감상> 한식 철에 내리던 비가 개면 봄이 열린다. 국화의 움(새싹)이 트는 것을 보니 반갑구나! 앞으로 꽃도 보려니와 움이 트고, 잎이 돋고, 꽃이 피고 하는, 나날이 새로워지는 그 생성 발전이 더욱 좋다. 그렇게 자라서 가을바람 불고 서리칠 때에 너 홀로 활짝 피어서 군자의 절개를 보여 줄 것이 더더욱 반갑도다! 정층법을 써서 새싹을 발견한 경이의 기쁨, 일일신의 그칠 줄 모르는 향상 발전, 오상고절을 자랑할 군자절, 한포기의 국화에도 이런 철학이 들어 있구나!



27

일순천리 한다 백송골아 자랑 마라 / 김영

일순천리 한다 백송골아 자랑 마라

두텁도 강남 가고 말 가는데 소 가느니

두어라 지어지처이니 네오내오 다르랴


김영(金鍈)자세한 연대 미상). 조선조 정조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형조판서를 지냈다. 시조 7수가 전한다.


일순천리(一瞬千里) : 한번 눈을 깜박하면 천 리 밖까지를 바라본다.

백송골(白松骨) : 백송고리. 털빛이 흰 송골매. 해동청(海東靑) 중에서도 귀한 종류의 좋은 매.

두텁 : 두꺼비. 살가죽에 사마귀 같은 것이 두툴두툴 돋아 있는 볼품사나운 개구리의 한 가지.

강남(江南) : 본디 중국 양자장 남쪽을 가리키는 말인데, 먼 곳을 뜻한다.

지어지처(止於至處) : 직역하면 '이르는 곳에서 머물다'이니, 정처 없이 어디든지 발 닿는 곳에서 머문다는 것이다.

두어라 : 시조 종장 첫머리에 흔히 쓰이는 감탄사로서 '아서라, 관계할 것 없다'등의 방관, 무관심, 체념의 뜻이 들어 있다.

네오내오 : 네나 내다. 너와 나나. 둘이 같다는 뜻이 된다.


<감상> 단번에 천 리를 내다볼 수 있는, 머리가 잘 돌아가고 행동이 날쌘 흰 송골매이지만, 뽐내고 우쭐댈 것 없다. 못나고 느린 두꺼비도 먼 강남까지 갈 수가 있고, 날랜 말 가는 데 느린 소라고 해서 못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동이 빠르니 빠른 것이 거나 느린 것이거나, 결국 누구나 머무는 데 가서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으며, 못났으면 얼마나 못났겠느냐. 인간차별해서는 안 된다.



28

처음에 모르더면 모르고 있을 것을 / 김우규

처음에 모르더면 모르고 있을 것을

어인 사랑 싹나며 움돋는가

언제나 이 몸에 열음 열어 휘들거든 보려뇨


김우규(金友奎)1691~?. 자는 성백(聖伯). 영조 때의 가인(歌人)으로, 경정산가단의 한 사람. 김수장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시조 12수가 전한다.


<감상>처음부터 몰랐더라면 차라리 모르고나 있었을 것을. 이제는 사랑이 싹트고 움이 돋아 자꾸만 커 가는구나. 이 사랑이 언제나 열매를 맺어 흔들거리는 것을 볼 것인가. 만나고 좋아지고 하는 동안에 사랑이 싹트고, 그것이 자라서 남은 것은 열매가 열어 무르익는 것뿐인데, 그때가 언제나 올 것인가. 애틋한 심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단계가 아닐까.



29

태산에 올라앉아 사해를 굽어보니 / 김유기


태산에 올라앉아 사해를 굽어보니

천지 사방이 훤치도 한저이고

장부의 호연지기를 오늘이야 알쾌라


사해(四海) : 온 천하. 사방.

훤칠도 한저이고 : 훤칠하기도 하구나! '훤칠하다'는 넓게 트여서 시원스러운 것. '한저이고'는 감탄형 종결어미.

호연지기(浩然之氣) : 마음이 매우 넓고 뜻이 아주 큰 호탕한 장부의 기상.

알쾌라 : 알겠구나! 감탄형 종결어미.


등산을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그런 기분을 꾸밈없이 표현한데 동감이 간다. 호연지기를 기르는 데는 등산이 첩경이다. 망망대해에 배를 띄우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안정감이라는 점에서 약간의 문제가 없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남아 대장부는 이런 호연지기를 길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시조는 하나의 금언이 될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도시 인생에게는 이 '호연지기'를 맛보고 기르는 데에 각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30

장부로 삼겨나서 입신양명 못할지면 / 김유기


장부로 삼겨나서 입신양명 못할지면

차라리 다 떨치고 일없이 늙으리라

이 밖에 녹록한 영위에 거리낄 줄 이시랴


입신양명(立身揚名) : 출세하여 온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다.

녹록(碌碌) : 의젓하지 못한. 하잘 것 없는.

영위(營爲) : 일을 경영하다. 무슨 일을 해 나가다.


[감상]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한번 크게 성공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모든 것을 다 깨끗이 떨쳐 버리고 매인데 없이 유유히 한가롭게 늙으리라. 하찮은 일에, 대수롭지 않은 일에 얽매여서 구질구질하게는 살지 않을 것이다. 부귀나 영화에 연연하지도 않겠지만, 명성이나 고락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도 않을 것이다.


입신양명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되나 지은이의 행장으로 보아서는, 부귀나 영화를 다 떨쳐 버리고 자연을 벗 삼아 노래나 부르면서 매인 데 없이 한평생을 살아가겠다는, 옛 풍류인들의 인생관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31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 김육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내 집에 곶 피거든 나도 자네 청해옴세

백 년덧 시름 잊을 일을 의논코자 하노라


곶 : 꽃. 청해옴세 : 청하겠네. 백 년덧 : 백년동안


자네 집에 담근 술이 익으면 부디 나를 불러 함께 술잔 기울이는 것을 잊지 마시오. 내 또한 우리 집 꽃이 활짝 피어나면 꽃구경에 당신을 부를 것이니. 그 자리가 마련되면 우리 백년동안 시름없이 살아갈 길이나 서로 의논 합시다그려..


지은이 : 김육(金堉)은 선조와 효종 때 벼슬을 하면서 효종 2년에 영의정까지 오른 사람이다.


이 시조를 통해 보면, 이웃끼리 있는 것은 서로 나누어 먹고, 없는 것은 서로 보태어 보충하며 화목하게 지내려는 동양의식의 발로가 뚜렷하다. 말하자면, 서민생활의 평화가 이 시조의 밑바닥에 깔려있다는 말이다. 술이 익으면 서로 나누어 마시고, 꽃이 피면 꽃놀이를 더불어 즐기자는 이웃 의식, 그것은 이웃사촌이라는 속담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동향애의 봉건적 우정의 소중한 표현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대목 속에 이 시조의 생명이 있다고 본다면, 이 시조는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한낱 속담의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재상까지 지낸 사람이, 그것도 양반의 최고 지위를 오르내리던 사람이 서민생활의 구수한 정리(情理)를 새삼 느끼기 시작했다는데 이 시조의 의미가 번득이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초야(草野)에 묻힌 흙의 생활 속에 풍기는 인간의 인간미(人間味), 오고가는 인정(人情)의 통로가 그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양반의 평민화라기 보다는 양반의 인간 발견(人間發見)이라 는데, 이 시조가 갖는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한 평생 근심을 떠나 살 일을 의논하자는 말도 인간다운 인간 본연의 길에 들어서려는 인간 발견의 숨결이라 하겠다.



32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 김인후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김안국의 문인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 황과 학문을 닦았다. 박사(博士) · 설서(設書) ·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현종 때에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양관 대제학이 추증되었다. 을사사화 후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으로 내려가 자연을 벗삼고 지내며,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저서로 '하서집'등이 있다.


<감 상> 푸른 산도 자연이요, 푸른 물도 자연 그것이로다. 산도 자연이요 물도 자연인데, 그 산수 사이에 살고 있는 인간인 나도 자연 그것이로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인 나도 자연 그것이로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자연대로 자란 몸이니, 늙기도 자연대로 하리라.


자연 속에서 자연대로 살고 늙는, 모든 것을 대자연에 내맡긴 옛 풍류객의 생활 태도는 엄숙하면서도 집착이라는 것이 없어서 더욱 좋구나. 마음에 집착이 없으니 절로 매인 데가 없고, 매인 데가 없으니 따라서 모든 것이 허허(虛虛)요 자재(自在)로다. 이쯤이면 사람도 부처가 될 수 있고, 신의 경지에도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시조는 모두 44자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20자가 '절로절로'라는 단어가 되풀이됨으로써 그 어감도 좋거니와 리듬도 잘 살리고 있다. 우리 말 'ㄹ'소리의 음악성이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말장난을 부린 듯하지만 운율을 음미하면서 잘 보면 오히려 엄숙미가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동가요'에는 송시열의 작품이라고 적혀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하서 집'에 '자연가'라고 해서 다음과 같은 한시가 실려있다.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33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김종서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야

어떻다 인각화상을 누가 먼저 하리오


백두산에 깃발을 꽂고 두만강 물에 말을 씻기니

쓸모없는 선비들아 우리가 바로 대장부가 아니냐

공이 큰 신하의 그림이 걸리는 누각에 누구의 얼굴 그림이 먼저 걸리겠는가


* 주제 ; 나라 위한 장군의 참된 충성과 당당한 자부심

지은이 : 김종서



34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김종서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지은이 : 김종서(金宗瑞, 1390~1453) : 호는 절재(節齋). 1405(태종 5)에 문과 급제. 세종, 문종, 단종의 세 임금을 섬기며 단종 때에는 좌의정에 올랐으나, 수양대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영조 22년에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삭풍(朔風) : 북풍. 만리변성(萬里邊城) : 서울에서 먼 변두리의 성. 일장검(一長劍) : 한 자루의 긴 칼.


감상 - 삭풍이 하필이면 왜 나무 끝에서 불까 하는 데서부터 이 시조가 갖는 착상의 비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영하 20여 도를 넘나드는 함경도의 겨울은 상록수가 드문 지대이고 보면 앙상하기 짝이 없다. 잎사귀는 무성했던 여름의 화사한 풍경을 잃어버린 채 찬바람에 쫓기어 자취도 없이 종적을 감춘다. 앙상한 가지만 남겨둔 채...


그러나 북방의 겨울은 눈발이 휘날리는 어둠의 표본이기도 하다. 추위 속에 쌓인 눈은 마치 빙하의 나라 풍경처럼 얼어 붙어 눈부신 태양의 반사로 대낮을 밝히고, 밤은 북구의 백마와도 같이 어둠을 지워 버린다. 더구나 달 밝은 밤의 쏘는 듯한 향기 속에 설경은 우리들의 시선을 찌른다.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라는 대목은 무인(武人)의 감각을 초월한 감도의 넓이 없이는 도입해 볼 수 없는 비상한 착상이며, 이 구성의 품이 김종서의 사람 됨됨의 크기와 맞먹는 웅 장과 밀도 있는 재치의 결합을 이루고 있다.

신시(新詩) 초기의 차디찬 고월(古月)의 감각을 무색케 하리만한 감각의 밀도를 그 체질에서 발산하면서도 그 안팎으로 뻗은 상념의 스케일은 거대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리변성에 긴 칼을 짚고 서있는 그의 거칠 것이 없는 호기는, 변방 방어에 힘을 쏟아 이를 이룩하고, 육진(六鎭)을 일으켜 여진족을 부수고, 이를 다스리는데 부족이 없었던 그의 역량으로 미루어 보아, 신흥 이조의 패기를 만방에 과시하는 하나의 심볼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김종서의 호기는 지용(知勇)을 겸비한 한 장군의 개인적인 기상이라기보다는 신흥 이조의 생기 찬 호흡이며 새로운 시대의 세찬 입김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인을 통해 시대의 생기를 말하는 역사의 주체로서 승화된 한 장군의 늠름한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혁신적인 로맨티시즘을 부채질하고도 남음이 있다. 개인을 초극한 한 시대의 입이 되기란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조그마한 사사(私事)에 공사(公事)의 명분을 도용하는 오늘날엔...



35

초생에 비친 달이 낫같이 가늘다가 / 김진태

초생에 비친 달이 낫같이 가늘다가

보름이 돌아오면 거울같이 두렷하다

아마도 인지성쇠가 저러한가 하노라


초생(初生) : 초승. 음력으로 그 달 첫머리의 며칠 동안 달을 보통 초승달, 보름달, 그믐달로 구분하여 말한다.

두렷하다 : 둥글다. 만월(滿月).

인지성쇠(人之盛衰) : 사람의 번성하고 쇠퇴하는 일.


<감상> 초승달을 낫에다가, 보름달을 둥그런 거울에다가 비유하는 것은 너무도 흔해서 이제 와서는 신선미가 없다는 평을 받을지 모르나, 옛시조로서는 귀에 익어 그렇게 거부 반응까지는 일지 않는다. 또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사물의 성쇠에 비기는 것도 상식적이기는 하나 흔히 쓰는 방법으로서, 만인 공감의 일이니 탓할 것이 없다. 우리는 이 시조에서 초승달이 보름달이 되어 다 차게 되면, 다시 기울어 그믐달이 되는 것처럼 우주의 만유(萬有)는 변하여 마지않는다는 만고의 진리를 다시 한번음미해 볼 수 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 · 겨울이 오고, 그 겨울이 가면 또다시 새봄이 돌아온다. 피었던 꽃이 지고, 그렇게 무성했던 녹음도 가을이 되면 낙엽이 되어 땅 위에 떨어진다. 그리고 썩어서 거름이 된다. 나고 자라고 늙고 죽고, 그 다음에는 자손이 뒤를 이어 또 나고 자라고.. 이것이 인생이요, 대자연의 순환이요, 시계바늘처럼 정확한 우주의 법칙이다.


내려다보고 살 때보다 쳐다보고 살 때에 더 희망이 있다. 즐거움도 극에 달하면, 그 다음에는 괴로움이 온다. 행복이라는 말은 불행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있다. 행복도 극에 달하면 불행으로 바뀐다. 그것은 마치 정상을 정복한 다음에는 내려오는 길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없어지고, 만난 자는 어김없이 헤어진다[生者必滅 會者定離]'는 불교 경전의 이 말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설파한 것인데, 위에서 말한 바로 그 이야기이다. 이 시조에서 말한 범위는 '낫같이 가늘던 초승달이 거울같이 두렷한 보름달이 된, 성장만을 나타낸 것 같으나, '인지상쇠가 그러하다'는 종장의 구절을 미루어 보았을 때 '성쇠'를 모두 다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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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을 저마다 하면 농부할 이 뉘 있으며 / 이창업


벼슬을 저마다 하면 농부할 이 뉘 있으며

의원이 병고치면 북망산이 저러하랴

아이야 잔가득 부어라 내뜻대로 하리라


김창업(金昌業)1658~1721. 자는 대유(大有), 호는 노가재(老稼齋) · 석교(石郊) 아버지 수항가 맏형 창집이 모두 영의정을 지낸 명문에 태어났으나, 그는 벼슬에 뜻이 없어 동교(東郊)에 노가재를 짓고 전원 생활을 즐겼으며, 맏형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와서 '연행일기(燕行日記)'를 지었다. 그림에도 뛰어나 특히 산수 · 인물을 잘 그렸다.


<감상> 모든 사람이 다 벼슬을 하면 누가 농부를 할 것이며, 의원이 병을 다 고친다면 북망산이 저렇게 올망졸망할 것인가, 벼슬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좋아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관심 밖의 일이다. 죽고 삶도 하늘에 달린 것이니 아이야, 어서 잔 가득 술이나 부어라, 실컷 마시면서 전원생활에서 인생을 즐겨 보리라. 명문 가정의 법도에 얽매인 생활을 박차고, " 내 뜻대로" 자유로이 살아 보려는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엄격하기 그지없던 옛 봉건 사회에도 개성이 자유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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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 따스한 볕을 님 계신데 비추고저 / 김천택(金天澤)


겨울날 따스한 볕을 님 계신데 비추고저

봄미나리 살찐 맛을 님에게 드리고저

님이야 무엇이 없으랴마는 내 못다어 하노라


김천택(金天澤) 자는 백함(伯涵), 호는 남파(南坡). 벼슬은 숙종때 포교(捕校)를 지냈다. 조선조 영조 때의 가인(歌人)으로, 노가재(老歌齎) 김수장과 가까이 사귀면서, 평민 출신으로 이루어진 경정산 가단(敬亭山歌壇)에서 많은 후진을 길러 내었다. 영조 4년(1728)에 우리나라 최초의 시가집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하여 시조의 정리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해동가요'에 그의 시조 57수가 실려 오늘에 남아 있다.

<감상>

추운 겨울날 양지쪽에 비치는 따스한 햇볕을 사랑하는 님이 계시는 곳에 비추어 주고 싶다. 또 살찐 봄 미나리의 싱싱하고 산뜻한 맛을 사랑하는 님에게 맛보여 주고 싶다. 모든 것이 넉넉한 님에게야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마는 잊을 수 없는 님이라 그저 이런 것들이나마 정성을 담아 보내 드리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이 희귀하고 좋은 것일수록 더욱 주고 싶은 생각이 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어찌할 수 없는 심정인가 보다.

바로 그것이 사랑의 생리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사랑은 주는 것이냐 받는 것이냐'고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물음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딴은, 신은 만유(萬有)를 위하여 베풀기만 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신에 가까워지려거든, 즉 신성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려거든 널리 베풀 줄을 알아야 한다. 받을 것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니 오로지 주기를 좋아하는 사랑은 인간이 신의 경지를 실천하는 그런 행위임이 분명하다.

이 시기의 시조에 나오는 '님'은 애인 또는 임금을 가리킬 때도 있고, 그 둘을 모두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이 시조에서는 '님'과 '임금',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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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 좋은 경을 힘센 이 다툴 양이면 / 김천택

강산 좋은 경을 힘센 이 다툴 양이면

내 힘과 내 분으로 어이하여 얻을소냐

진실로 금할 이 없을새 나도 두고 노니노라


강산(江山) : 강과 산. 산천(山川)이니, 산하(山河)니, 산수(山水)니 하는 말과 같은 뜻이다.

다툴 양이면 : 다툴 것 같으면. 다툰다면.

두고 노니로라 : 내 앞에 그대로 놓아두고 자유로이 즐길 수 있다.


<감상> 이 강산, 이 좋은 경치를 만일 힘으로써 사람들이 서로 다툰다면, 힘없고 지체 낮은 나의 차례는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것만은 금하는 사람이 없기에 나도 마음대로 노닐며 즐길 수가 있다. 세속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권력이나 금력 따위에 초연하면서 오로지 자연 속에서 인생을 즐기는 옛 선비의 생활 태도가 재치 있는 표현으로 잘 그려져 있다. 읊노라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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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구름 푸른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 김천택

흰구름 푸른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추풍에 물든 단풍 봄꽃도곤 더 좋왜라

천공이 나를 위하여 뫼빛을 꾸며내도다


푸른 내 : 내는 연기이니, 저녁나절에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산 기운 --이내[靑嵐]--을 말한 것.

골골이 : 골짜기마다.

봄꽃도곤 : 봄꽃보다. 도곤은 '두곤'이라고도 하여 '~보다'의 옛말.

좋왜라 : 좋도다! 좋구나~ '~왜라'는 '~우에라(웨라)'의 모음조화에 의한 변화로, 감탄형 종결어미.

천공(天公) : 하늘을 의인화하여 존칭을 붙인 것. 하느님. 조물주.

뫼빛 : 산빛. 산의 경치.


<감상> 아름다움의 대명사격으로 불리는 봄꽃보다도 가을 단풍이 더 아름답고 좋다는 것이다.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두둥실 떠있고, 산골짜기에는 골짝마다 푸르스름한 이내가 산의 정기처럼 끼어 있는데, 가을바람에 노랗게, 빨갛게, 혹은 주황으로, 혹은 자줏빛으로....... 갖가지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어 있는 단풍이 봄꽃보다도 더욱 아름답고 눈부시구나! 이것은 조물주가 모처럼 이곳을 찾아온 나를 위하여 이렇게도 아름답게 꾸며 놓은 것이 분명하구나! 조물주의 은공을 새삼스럽게 의식할 정도로 단풍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있는 그 사람은 과연 자연을 알고 조물주와 대화할 수 있는 철인(哲人)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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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밤 채 긴 적에 님 생각 더욱 깊다 / 김천택


가을 밤 채 긴 적에 님 생각 더욱 깊다

머귀 성긴 비에 남은 간장 다 썩노매

아마도 박명한 인생은 나 혼잔가 하노라


지은이 : 김천택(金天澤) 자는 백함(伯涵), 호는 남파(南坡). 벼슬은 숙종 때 포교(捕校)를 지냈다. 조선조 영조 때의 가인(歌人)으로, 노가재(老歌齎) 김수장과 가까이 사귀면서, 평민 출신으로 이루어진 경정산 가단(敬亭山歌壇)에서 많은 후진을 길러 내었다. 영조 4년(1728)에 우리나라 최초의 시가집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하여 시조의 정리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해동가요'에 그의 시조 57수가 실려 오늘에 남아 있다.


채 : 아주. 매우.

마귀 성긴 비 : 커다란 오동잎에 드문드문하게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을 말한다. 이른바 오동(梧桐) 소우(疏雨)라는 것이다.

썩노매 : 썩는구나! '~노매'는 '~노매라'의 준말로 감탄형 종결 어미.


<감상> 기나긴 가을밤은 사람을 감상의 세계로 곧잘 끌고 간다. 님을 여의었거나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애간장을 태우는 것이 가을밤이다. 더욱이 큼직큼직한 오동나무 잎사귀에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의 반주는 사람의 마음을 한껏 슬프게 한다. 그러나 '박명한 인생은 나 혼잔가......."의 끝맺음은 지나친 과장 같아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앞선다.

특히 현대적 감각으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가을 긴긴 밤이 님 생각, 오동잎에 떨어지는 애간장을 녹이는 성긴 비와 같은 것은 너무나 상투적인 소재들이어서 별로 짜릿한 감동을 주지 못한다. 게다가 종장의 지나친 과장과 개념적 호소력을 잃었으니, 남파(南坡)의 작품으로서는 가작이라 하기 어렵다.


간밤에 꿈 좋더니 님에게서 편지 왔네

그 편지 받아 백 번이나 보고 가슴 위에 얹고 잠을 드니

구태여 무겁지 아니해도 가슴 답답


<감상> 내 뱉듯이 토해 놓은 말마다기 작품이 되었구나! 사랑이 진정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더니.......

맨 끝 구절이 생략된 형태이다. 예사대로라면 '하여라'나 '하도다'가 붙어야 할 것이 이지만, 창으로 부를 때에는 이렇게 생략하는 수가 많다. 가슴에 얹은 편지가 무거워서 가슴이 답답하겠는가. 님을 만나보지 못해서 답답한 것인데, 그 구성이 그럴듯하지 않은가.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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