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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時調詩 ***/時調 감상

뉘라서 가마귀를 검고 흉타 하돗던고

by 산산바다 2008. 7. 4.

산과바다

 

 

         시조 감상


41   잘 가노라 닫지 말며 못 가노라 쉬지 마라   김천택

42   간밤에 지게 여던 바람 살뜰히도 날 속여고  김천택

43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남구만

44   장검을 빼어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남이

45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매창

46   매화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오니            매화

47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맹사성

48   꿈에 뵈는님이 신의(信義) 업다 하것마난    명옥

49   울어서 나는 눈물 우흐로 솟지 말고         박영수

50   동기로 세 몸 되어 한 몸 같이 지내다가     박인로

51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니             박인로

52   금생여수라 한들 물마다 금이나며           박팽년

53   님 그린 상사몽이 실솔이 넉시 되어         박효관

54   뉘라서 가마귀를 검고 흉타 하돗던고        박효관

55   내게 좋다 하고 남 싫은 일 하지 말며       변계량

56   임반 설중고죽 반갑고 반가왜라             서견

57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서경덕

58   말은 가자 울고 님은 잡고 아니 놓네        서경덕

59   마음아 너는 어이 매양에 젊었는다          서경덕

60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성삼문




41

잘 가노라 닫지 말며 못 가노라 쉬지 마라 / 김천택


잘 가노라 닫지 말며 못 가노라 쉬지 마라

부디 긋지 말고 촌음을 아껴스라

가다가 중지고도 하면 아니 감만 못하니라


닫지 말며 : 달리지 말며. 허겁지겁 뛰어가지 말 것이며.

긋지 말고 : 그치지 말고, 중단하지 말고.

촌음(寸陰) : 일촌광음(一寸光陰)의 준말. 짧은 시간.

아껴스라 : 아끼려무나. 아꼈으면 좋겠구나.

        ~스라'는 원하고 바라는 뜻이 들어 있는 종결어미이다.

중지(中止) : 중간에서 그만두기만 한다면.

        ~곧'은 강세조사.


<감상> 잘 간다고 해서 너무 달리지 말며, 반대로 잘 못 간다고 해서 쉬어 버리고 말아서는 더욱 안 된다. 부디 그치지 말고 짧은 시간일지라도 아껴서 부지런히 가야 한다. 가다가 중간에서 그만 멈추어 버리고 말면, 차라리 가지 아니한 것만도 못한 것이다. 무슨 일이든 중단하지 말고 꾸준히 끈기 있게 해 나가야 성공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걷는 자만이 전진할 수 있다."는 격언이 바로 이 진리를 설명해 주고 있다. 초장을 보면 '중용'을 강조한 듯도 하지만, 종장에서의 결론은 '중단 없는 꾸준한 전진'을 역설하였다.



42

간밤에 지게 여던 바람 살뜰히도 날 속여고 / 김천택(金天澤)


간밤에 지게 여던 바람 살뜰히도 날 속여고

풍지 소리에 님이신가 반기온 나도 외거니와

진실로 들라곤 하더면 밤이조차 우을랏다


지게 : 문. 지게문. 戶=지게 호(훈몽자회).

살뜰히도 : 살뜰하게도. 여기에서는 '교묘하게도'의 뜻으로 쓰였다.

풍지(風紙) : 문풍지. 문틈으로 새어드는 찬바람을 막기 위해 덧붙여 바른 종이. 바람이 불면 떨려서 소리가 난다.

외다마는 : 그르다마는. 잘못이지만.

들리곤 : 들어오라고만.

밤이조차 : 밤조차. 밤까지도.

우을랏다 : 웃었을 것이로다!


김천택(金天澤) 자는 백함(伯涵), 호는 남파(南坡). 벼슬은 숙종때 포교(捕校)를 지냈다. 조선조 영조 때의 가인(歌人)으로, 노가재(老歌齎) 김수장과 가까이 사귀면서, 평민 출신으로 이루어진 경정산 가단(敬亭山歌壇)에서 많은 후진을 길러 내었다. 영조 4년(1728)에 우리나라 최초의 시가집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하여 시조의 정리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해동가요'에 그의 시조 57수가 실려 오늘에 남아 있다.

<감상>

지난밤에 내 방문을 열던 바람이 감쪽같이 나를 속였구나! 문풍지 소리를 모르고 님이 오셨나 반가워한 나도 어리석었지마는, 참말로 들어오라고도 했더라면 밤까지도 웃을 뻔한 일이로다. 바람에 떠는 문풍지 소리를 그리운 님의 기척으로 착각해서 하마터면 들어오라고 말할 뻔하였다. 그 말을 안했기에 망정이지 했더라면 밤마저도 나를 비웃었을 것이다. 이런 것이 '자연과의 대화'라는 것일까.



43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 남구만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 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동창 : 해 돋는 동쪽으로 난 문

노고지리 : 종달새

소치는 : 소먹이는


남구만 : 호는 약천. 이조 숙종 때의 영의정을 지낸 학자.

         <청구영언>에 시조 한 수가 전한다.


<감상> 봄을 맞아 농촌의 생동하는 아름다운 풍경과 농사일을 재촉하는 권농의 뜻을 담고 있다.



44

장검을 빼어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외 2편./남이

장검을 빼어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대명천지에 성진이 잠겼애라

언제나 남북풍진을 헤쳐 볼까 하노라


대명천지(大明天地) : 환하게 밝은 세상.

성진(腥塵) : 싸움으로 인한 먼지.

남북풍진(南北風塵) : 남만(南蠻)과 북적(北狄)의 병란


장검을 빼어들고 해발 2천 5백 미터를 넘는 백두산에 올라보니, 환하게 밝은 세상에 싸움으로 인 먼지가 가득히 잠겼구나. 이 작품은 남만과 북호를 밀어붙여 나라의 안녕을 이루어 놓으리라는 결의를 온 누리에 읊어본 시조로서, 우리들의 마음의 거울을 닦아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 시조에 흐르는 이미지 역시 애국과 애족의 기개가 용솟음치는 일종의 로맨티시즘이 물결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개인주의의 감정에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감정의 고지(高地)를 이루고 있다. 나라를 자기 집처럼 사랑하고 이를 가꾸려는 마음은 정신면에서 거의 사악에 가까운 이 시대 풍토에서는 더구나 그렇다.


투철한 국가 의식이란, 자기 집을 가꾸는 그 이상의 초개인적 의식이 국가를 생각하고 겨레의 오늘을 걱정하는 정신의 선행(先行)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엔 거짓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거인은 칼을 갈아 나라를 지키는 일에 몸을 바쳤는지도 모른다. 진실의 긴 보도를 따라 성장하면 칼은 저절로 나라를 위한 길에 눈을 뜨게 되고, 백성을 위한 백성에의 시책이 어떤 것인가를 그의 행적으로 곧장 이루어 놓는 법이다.


기개가 세차고 패기가 넘쳐도 쏟아짐이 없는 그 높은 절도의 경지는 인품의 완성이 뒤따랐다는 하나의 산 증거이겠으나, 남 이장군의 이 작품이 지니는 광활한 애국지상(愛國至上)의 세계에서, 일어서는 나라의 위력을 다시 한 번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의 시조 가운데,


백두산 바윗돌은 칼날 갈기에 다 닳았고

두만강 물은 말이 마셔 말랐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안히 못할진댄

뒷세상 어느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


는 그의 생리의 진수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 작품이라 하겠다.

추가로.. 그의 또 다른 글 한 편을 살펴보자


오추마 우는 곳에 칠척장검 비겼는데

백이산하는 뉘땅이 되단말고

어즈버 팔천제자를 어느 낯으로 보련고


항우가 오추마를 타고 7자나 되는 큰 칼을 비껴들었는데, 험준하여 백이산이라하고 일컬어지는 진나라가 누구의 땅이 되었는가 한의 차지가 된 것이다. 아아, 전쟁에 지고 8천의 강동 건아들도 모두 죽고 말았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그들의 부형들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시조는 중국의 역사에서 취재한 것으로, 항우의 절망적인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다. 힘과 기를 믿던 항우가 참패하고 돌아가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자결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그린 것이다. 아마도 작자 남이가 자신의 힘만을 믿던 항우와 같은 장군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자기자신에 대한 다짐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지은이 : 남이는 세조 3년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수많은 도적들과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이 되어 반란을 토벌하여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기도 했다. 후에 유자광의 모함으로 평소에 남이를 좋게 생각지 않았던 예종은 그를 제거할 기회로 여겨 남이를 능지처사 시켰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남이의 옥'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때가 그의 나이 28세였다 한다.



45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 매창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 시비에 적힌 시조>


이화우(梨花雨)에서 추풍낙엽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이별이 일순간 천리 공간을 뛰어넘어 그리운 임에게로 향하고 있다. 매창이 유희경과 이별하고 지은 이 시조는 <가곡원류>에 실려 전하는데 이별가로서 이보다 더한 절창(絶唱)이 또 없을 듯하다.


지은이 : 매창  이(李), 본명 향금(香今). 자 천향(天香), 호 매창(梅窓) 계생(桂生) 계랑(桂娘). 부안(扶安)의 명기로서 가사(歌詞) 한시(漢詩) 시조(時調) 가무(歌舞) 현금(玄琴)에 이르기까지 다재 다능한 여류 예술인이었다.

작품으로는 가사와 한시 등 70여 수 외에도 금석문(金石文)까지 전해지고 있으나, 작품집인 《매창집(梅窓集)》은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1668년(현종 9)에 구전(口傳)하여 오던 작자의 시 58수를 이 있다. 부안읍의 진산인 성황산에 있는 서림 공원 입구에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매창(梅窓)의 시비가 있다. 이매창 묘는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전북기념물 제65호.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계생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생이 되어 그는 천향(天香)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號)를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당호(堂號)를 가진 귀족 여성, 이름만 있는 기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던 것이다. 신분이 기생이었던 그에게 술에 취한 손님들이 덤벼들며 집적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으며, 시를 지어 무색하게 하기도 하였다.

다음 '贈醉客(취한 손님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오언절구는 이러한 경우를 당해 쓴 시이다.


醉客執羅衫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不惜一羅衫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但恐恩情絶(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라)

                                                            - 허경진 역 -


지봉 이수광은 매창의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계랑은 부안의 천한 기생인데,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지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의 소문을 듣고는, 시를 지어서 집적대었다. 계랑이 곧 그 운을 받아서 응답하였다.


平生 學食東家 (떠돌며 밥얻어 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獨愛寒梅映月斜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時人不識幽閑意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指點行人枉自多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그 사람은 서운해 하면서 가버렸다. 계랑은 평소에 거문고와 시에 뛰어났으므로 죽을 때에도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매창은 1590년 무렵 부안을 찾아온 시인 촌은 유희경과 만나 사귀었다. 매창도 유희경을 처음 만났을 때 시인으로 이름이 높던 그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촌은집>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그가 젊었을 때 부안에 놀러갔었는데, 그 고을에 계생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계생은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라고 물었다. 그와 백대붕의 이름이 먼 곳까지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이 때 비로소 파계하였다. 그리고 서로 풍류로써 즐겼는데 매창도 시를 잘 지어 <매창집>을 남겼다.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曾聞南國癸娘名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 (글재주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 (오늘에 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贈癸娘 허경진 역>


40대 중반의 대시인 유희경과의 사랑은 18세의 매창으로 하여금 그의 시 세계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그들이 사랑을 주고받은 많은 시들이 전한다.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희경이 서울로 돌아가고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들의 재회는 기약이 없게 되었다. 유희경은 전쟁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바쁜 틈에 매창을 다시 만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정 마음이 통했던 연인을 떠나보낸 매창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이후 쓰인 그의 시들은 님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 서러움과 한(恨)을 드러내고 있다.


春冷補寒衣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自恨, 허경진 역>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懷癸娘, 허경진 역>


1607년 유희경을 다시 만난 기록이 있지만 매창은 그와 헤어진 뒤 10여년을 마음의 정을 주는 사람이 없이 유희경을 그리며 살았다. 그가 마음을 준 두 번째 남자는 이웃 고을 김제에 군수로 내려온 이귀(李貴)였다. 그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글재주까지 뛰어났는데 매창이 그에게 마음이 끌렸음을 보여주는 허균(1569~1618)의 기록이 있다.


허균은 1601년 6월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해운판관이 되어 호남에 내려와 부안에 들렀다. 매창이 허균을 만났을 때 이귀는 이미 파직되어 김제를 떠난지 서너 달 뒤였다. 신축년(1601) 7월 임자(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렀다. 고홍달이 와서 뵈었다. 기생 계생은 이귀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서, 함께 얘기를 나눌만 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보내주었으니, 경원하며 꺼리었기 때문이었다. 매창은 허균을 다시 만나 함께 노닐며 그의 영향을 받아 참선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12월에 정3품 승문원 판교의 교지를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이 무렵 매창과 가깝게 지낸 사또가 있었는데 그가 떠난 후 고을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매창이 그를 그리며 비석 옆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山 )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두고 '매창이 눈물을 흘리며 허균을 원망했다'는 소문이 났다.


다음은 이 소식을 접한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이다.


계랑에게

계랑이 달을 보면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새'의 노래를 불렀다니, 어찌 그윽하고 한적한 곳에서 부르지 않고 부윤의 비석 앞에서 불러 남들의 놀림거리가 되셨소. 석 자 비석 앞에서 시를 더럽혔다니, 이는 낭의 잘못이오. 그 놀림이 곧 나에게 돌아왔으니 정말 억울 하외다. 요즘도 참선을 하시는지. 그리움이 몹시 사무칩니다.

                                                기유년(1609) 정월 허균


매창을 잊지 못하는 허균은 또 편지를 보냈다.

다음 편지에서 매창에 대해 연인이 아닌 진정한 친구로서의 우정을 간직한 허균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계랑에게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젠 진회해(秦淮海)를 아시는지. 선관(禪觀)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오. 언제라야 이 마음을 다 털어 놓을 수 있으리까. 편지 종이를 대할 때마다 서글퍼진다오.

                                                   기유년(1609) 9월 허균


이듬해(1610) 여름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균은 이를 슬퍼하며 두 편의 시를 지었다. 다음은 그 중 하나이다.


哀桂娘(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土甚擒錦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헤치네)

兪桃來下界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불 (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매창은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 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 이라고 부른다. 그가 죽은 후 45년 후(1655)에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고, 그로부터 다시 13년 후에 그가 지은 수 백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외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개암사에서 간행하였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한 여인의 시집이 이러한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 시집이 나오자 하도 사람들이 이 시집을 찍어달라고 하여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나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후 세월이 지나 그의 비석의 글들이 이지러졌으므로 1917년에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높이 4척의 비석을 다시 세우고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겼다. 부풍시사에서 매창의 무덤을 돌보기 전까지는 마을의 나뭇꾼들이 서로 벌초를 해오며 무덤을 돌보았다고 한다.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 읍내에 들어와 공연을 할 때에도 그들은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고 한바탕 굿을 벌이며 시인을 기렸다. 바로 곁에는 명창 이중선의 묘가 있다. 지금도 음력 4월이면 부안 사람들은 그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그의 묘는 1983년 8월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그가 간지 35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이곳을 찾아온 한 시인은 그를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 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이화우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 하구나

羅衫裳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

                ('매창뜸' 전문 이병기)


1974년 4월 27일 매창기념사업회(회장 김태수)에서 성황산 기슭 서림공원 입구에 매창의 시비(詩碑)를 세웠다.

이곳은 선화당 후원으로 매창이 자주 불려가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했던 곳이다. 글씨는 송지영님이 썼다



46

매화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오니 / 매화


매화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직도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매화 : 황해도 곡산 출신의 기생. 시조 6수가 전해짐. 모두 애틋한 사랑을 노래한 시조임.


<감상> 매화나무의 늙고 낡은 등걸에도 새 봄이 돌아오니, 예전에도 그렇게 소담스럽게 꽃이 피던 가지인지라, 이 봄에도 다시 예쁘게 필 것 같기도 한데 봄눈이 하도 어지럽게 날리니 필지 말지 하여라.ㅡ젊은 시절엔 매화처럼 아름답던 나였지만, 이제 늙어가는 신세가 한탄스럽다는 것을 읊은 노래.



47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 맹사성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교계변에 금린어이 안주로다

이 몸이 한가하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여름이 드니 초당에 일이 없다

유신한 강파는 보내는 이 바람이다

이 몸이 서늘하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아 있다

소정에 그물 실어 흘리 띄워 더져 두고,

이 몸이 소일하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겨울이 드니 눈 깊이 자이 남다

삿갓 빗기 쓰고 누역으로 옷을 삼아,

이 몸이 춥지 아니하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江湖) : 은거하여 사는 곳

교계변 : 막걸리를 마시며 노는 시냇가

금린어이 : 아름다운 물고기

역군은이샷다 : 이 또한 임금의 은혜이시도다

초당(草堂) : 짚으로 지붕을 이은 조그만 별채

유신(有信)한 :신의가 있는

강파(江波) : 강 물결

소정(小艇) : 작은 배

빗기 : 비스듬히

누역 : 도롱이


이 작품은 연시조(連詩調)로 된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로써

한가한 강호생활을 춘, 하, 추, 동 4계절에 나누어 노래하였으며 그 은덕을 임금에게 돌리고 있다.


『첫째 수』는 봄철을 맞아 강가에 나아가 물고기를 안주하여 탁주를 마시는 즐겁고 한가함을 노래했고,

『둘째 수』는 무더운 여름철 시원한 강바람 불어오는 초당에 앉아 더위를 잊고 있는 한가함을 노래하였으며,

『셋째 수』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가을철, 강가에 배 띄워놓고 고기잡이하는 즐거움을 노래하였으며,

『넷째 수』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겨울에도 삿갓과 도롱이로 추위를 막을 수 있으니 이 아니 행복한가 하고 끝을 맺으며,

그 모든 것을 임금의 성은(聖恩)으로 돌려, 신하와 백성 된 충성심을 보여주고 있다.


지은이 : 맹사성 좌의정에까지 오른 재상이면서도 그 생활은 청렴 검소하여 모든 사람의 우러러 보는 바 되었다. 맹사성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호는 고불(古佛)이다. 장원급제하여 우의정,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그의 서민적인 성격과 청렴한 성격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 중. 한 번은, 수행원이 번거로워 혼자 소를 타고 다니던 그가 고향으로 내려가다가 안성(安城)등의 고을에서 봉변을 당했다. 초라한 늙은이가 소를 타고 가는 모양이 하도 우스워서 하인들이 놀려댔던 것이다. 참다못한 그가 '나는 온양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는 늙은이오' 하고 일러주었다. 이를 전해들은 그 고을 사또들은 기겁을 하고 달려 나오다가 가지고 있던 관인을 그만 연못 속에 빠뜨렸다. 그래서 지금도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 일컫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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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뵈는님이 신의(信義) 업다 하것마난 /명옥


꿈에 뵈는 님이 신의(信義) 업다 하것마난

탐탐(貪貪)이 그리올 졔 꿈 아니면 어이 보리

져 님아 꿈이라 말고 자로자로 뵈시쇼.



꿈에 보이는 임은 믿음과 의리가 없다고 하지만
못견디게 그리울 때 꿈에서가 아니면 어떻게 보겠는가?
저 임이시여, 꿈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주자주 보이소서.

성격 : 평시조, 연정가(戀情歌)
주제 : 임을 향한 그리움
지은이 : 명옥(?) - 연대 미상이나, 이름이 알려진 화성의 기생임.
출처 : 청구영언



49

울어서 나는 눈물 우흐로 솟지 말고 / 박영수

울어서 나는 눈물 우흐로 솟지 말고

구곡간장에 속으로 흘러들어

님그려 타는 간장을 녹여볼까 하노라


지은이 : 박영수(朴英秀). 신원미상이나 시조 5수가 전한다.

우흐로 : 위로.

구곡간장(九曲肝腸) : 꼬불꼬불 길고 긴 창자. 구회간장(九回肝腸) 이라고도 한다.


<감상> 님 그리며 울어서 나오는 눈물아, 위로 좃지 말고 차라리 슬퍼서 애가 타고 있는 굽이굽이 긴 창자 속으로 스며들어 가서 불타고 있는 그 창자를 녹여 주려무나. 지은이의 소원대로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뜻대로 잘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타는 애간장을 녹이는 방법도 가지가지로다. 이런 유형의 시조가 하도 많으니 하는 말이다.



50

동기로 세 몸 되어 한 몸 같이 지내다가 / 박인로


동기로 세 몸 되어 한 몸 같이 지내다가

두 아운 어디가서 돌아 올 줄 모르는고

날마다 석양문외에 한숨겨워 하노라


박인로: 호는 노계(盧溪). 이조 선조 때의 문장가, 무인이며 임진왜란 때 해군에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많은 시조와 가사를 남겼음


<감상> 3형제가 한 몸 같이 지내다가 두 동생이 어디 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어서 날마다 해질녘 문에 기대어 동생을 기다리며 한숨을 쉬며 시름에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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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니 / 박인로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니

유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 가 반길 이 없을새 글로 설워 하노라


박인로 : 호는 노계(盧溪). 이조 선조 때의 문장가, 무인이며 임진왜란 때 해군에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많은 시조와 가사를 남겼음


<감상> 한음 이덕형이 접대로 내어놓은 홍시를 보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은 노래. 소반에 담긴 붉은 감이 곱게도 보이는구나. 유자가 아니더라도 품안에 몇 개 넣어 가고 싶다 만은 품어가도 반가워 할 어머니가 안 계시니 그 것 때문에 슬퍼한다.



52

금생여수라 한들 물마다 금이나며 /박팽년


금생여수라 한들 물마다 금이나며

옥출곤강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나랴

아무리 여필종부인들 임마다 쫓으랴


금이 여수에서 난다고 해서 물이면 다 금이 날것이며,

옥이 곤륜산에서 난다고 해서 산마다 옥이 나겠는가

아무리 아내는 임을 쫓는 것이라 하지만 아무 임이나 쫓겠는가?

나의 임은 단종으로 세조을 따를 수 없다.

                      - 국학자료원 '고시조산책' 성낙은 편저 -


당시 사육신들은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며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안 마셨지만 모두 살아 있었다. 도승지 구치관이 세조의 명을 받아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옥중으로 갔다. 성삼문을 회유하다 실패하고 박팽년에게로 갔으나 그의 대답 또한 시조 한 수로 대신하고 입을 다물었다. 시조를 받아쓰던 구치관은 화냥년에 비유하여 자신을 욕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인지 짧은 순간 숨을 멈추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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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그린 상사몽이 실솔이 넉시 되어 / 박효관

님 그린 상사몽이 실솔의 넋이 되어

추야장 깊은 밤에 님의 방에 들었다가

날 잊고 깊이 든 잠을 깨워 볼까 하노라


지은이 : 박효관(朴孝寬) 1781~1880. 자는 경화(景華), 호는 운애(雲崖). 조선 철종, 고종 때의 가객(歌客). 제자 안민영(安珉英)과 더불어 가집 '가곡원류(歌曲源流)'를 엮었다. 시조 15수가 전한다.


상사몽(相思夢) : 서로 사랑하고 그리워하여 꾸는 꿈.

실솔 : 귀뚜라미.

추야장(秋夜長) : 직역하면 '가을 밤이 길다'이니, 긴 가을밤. 다음의 "깊은 밤"을 수식하는 말.


<감상> 애타게 그리운 님을 어떻게 하면 만날볼 수가 있을까. 가을밤, 긴긴 밤을 잠 못 이루고 님 생각에 엎치락뒤치락하는 내 신세 ······. 그러나 님께서는 나를 잊고 단잠을 자고 있을 텐데, 그 님을 깨워서 나를 생각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님 그리워 꾸는 사랑의 꿈이, 저렇게 밤을 지새워 우는 저 귀뚜라미의 넋이 된다면, 님이 자고 있는 방에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가 있지 않을까. 애절한 마음이 기교적으로 표현된, 잘 다듬어진 가작이다. 귀뚜라미 울음 수리에 잠 못 이루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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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라서 가마귀를 검고 흉타 하돗던고 / 박효관


뉘라서 가마귀를 검고 흉타 하돗던고

반포보은이 그 아니 아름다운가

사람이 저 새만 못함을 못내 슬허하노라


반포보은(反哺報恩) : 까마귀의 새끼가 다 자란 후에는 새끼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말한다.

박효관 : 고종 13년에 제자 안민영과 시조집 가곡원류를 편찬.

         시와 노래, 술과 거문고, 바둑으로 일생을 보냄. 시조 155수가 전함


<감상> 세상 사람들은 까마귀를 흉하고 검다고 하여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까마귀는 반포보은의 갸륵한 마음을 가진 새다. 사람으로 효도를 하지 않는 것에 비하면  이 얼마나 대견한 일이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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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좋다 하고 남 싫은 일 하지 말며외 2편 / 변계량

내게 좋다 하고 남 싫은 일 하지 말며

남이 한다 하고 의 아녀든 좇지 말라

우리는 천성을 지키어 삼긴 대로 하리라


변계량(卞季良)1369~1430.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고려말에 진덕부사, 조선 태종 때 예문관제학.우군도총제부사를 지냈으며, 시문에 뛰어났다.


의(議) 아녀든 : 옳은 일이 아니거든. '의 아니면'으로 된 데도 있다.

삼긴 대로 하리라 : 타고 난 착한 성품 그대로 하리라.


<감상> 나에게 좋다고 해서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말라. 옛글의 '기소불욕(己所不欲)을 물시어인(勿施於人)'이라는 말이 곧 그것이다. 자유가 아무리 좋지만 남에게 폐가 되는 일을 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하니, 이 행위는 봉건 시대에 있어서나 민주주의 시대에 있어서나 변함이 없는 인륜도덕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남들이 한다고 해서 옳지 않은 일까지 따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정의감, 결단력, 용기가 필요한 꽤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이 시조는 선한 천성을 그대로 지켜서, 그 선한 천성이 명하는 대로 따르라는 내용의, 특히 유교적인 교훈이 담긴 노래로서, 좌우명이나 가훈으로도 삼음직한 작품이다.



내라 내라 하니 내 뉘런고

내 내면 낸 줄은 내 모르랴

내라서 낸 줄을 내 모르니 낸동만동 하여라


<감 상> 내(나) 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나'에 대한 철학적인 의문과 '내'라는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그 뜻이 더욱 강조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에 그친 듯한 느낌도 있지만 단순한 시어들 속에 내재한 자아 발견 사상에 큰 공감이 간다.



넓으나 넓은 들에 흐르느니 물이로다

인생이 저렇도다 어드러로 가는게오

아마도 돌아올 길이 없으니 그를 슬허 하노라


<감 상> 넓으나 넓은 들에 흐르는 것이 물이로다. 인생이 저러하도다. 저렇게 흘러서 어디메로 가는 것이냐? 저렇게 흐르고 또 흘러가서 결국은 되돌아올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냐. 사바세계를 저렇게 흘러흘러 살다가 어느덧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가버리는 것이,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리라. 넓으나 넓은 들, 그것은 무한한 공간이다. 물이 그 공간을 정처 없이 흘러간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모두들 흘러만 가는 것일까.


인생이란 무엇인가?

앞으로의 운명, 특히 죽고 나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한치 앞도 못 내다보는 인생,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물처럼 정처 없이 흘러가야 하는 이 인생.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런 것이 아닌가.

모두가 불확실하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렇게 흘러흘러간 인생은 다시는 되돌아  오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은 현재 나에게 주어진 생활에 충실하는 길이 곧 삶의 보람이요, 대자연의 철리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



56

임반 설중고죽 반갑고 반가왜라 /서견


임반 설중고죽 반갑고 반가왜라

묻나니 고죽아 고죽군의 네 어떤닌

수양산 만고청풍에 이제 본 듯 하여라


바위 두둑에 쌓인 눈에 고고하게 서 있는 대나무, 반갑기도 반가워라. 대나무야, 너에게 묻노니, 그 옛날 은(殷)나라가 망할 무렵 백이와 숙제의 아버지였던 고죽군이 네가 보기에는 어떻더냐? 너 대나무를 보니 그 고죽군의 아들인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절개를 지킨 만고에 빛나는 모습을 다시 보는 듯하구나.


지은이 : 서견 고려 말의 문신,

정몽주가 피살되고 이성계와 정도전이 실권을 장악하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으나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숨어 살면서 절개를 지켰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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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서경덕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에 어느 님 오리요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가 하노라


어린 후이니 : (마음이)어리석어진 뒤이니. '어리다'는 어리석다의 옛말.

만중 운산(萬重雲山) : 겹겹이 쌓여 항상 구름이 끼어 있는 깊은 산.

�가 : 그이인가. 긔는'그이'의 준말.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자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花潭). 가세가 빈곤하여 독학으로 13세에 '서경(書經)'을 읽고 복잡한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을 스스로 터득했으며, 18세에는 '대학(大學)'을 읽고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원리를 깨달았다. 여러 지방을 유람한 후 산림에 묻혀 후진 교육에 힘을 기울이던 중, 조광조의 천거가 있었으나 사양하고 역시 학문 연구에 전력하였다. 또한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여러 편의 기행시를 남겼다. 개성(開城) 동문 밖 화담(花潭)에 초막을 짓고 도학을 비롯하여 수학 · 역학 등의 연구로 여생을 보내었다. 명기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친 일화가 전하며, 선조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감 상

마음이 어리석다 보니 하는 일이 모두 어리석기만 하다. 이 깊은 산속까지 어느 님이 찾아오랴마는, 흩날리는 나뭇잎과 박람 소리에 행여 님이 아닌가 하고 가슴이 설레이는구나!


화담에게 글을 배우러 오던 황진이를 생각하며 지은 노래라고 하는데, 학문밖에 모르는 서화담도 황진이의 여성적인 매력에는 역시 마음이 흔들렸던가 보다. 화담도 목석이 아닌 바에야 그럴 법한 일이지만, 그래도 역시 그는 황진이에게 빠져 학문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깨끗한 애정으로 승화시킨 점이 화담의 인격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또한 근엄하기만 한 도학자로만 알았던 화담에게 이런 낭만이 있었다는 것은 그를 인간적으로 한결 친근감을 느끼게 해주지 않을까. 사랑하는 마음, 특히 연애 감정에는 지칠 줄 모르는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 이에 화답하였다는 황진이의 시조가 있다.


황진이의 화답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르니 옛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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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가자 울고 님은 잡고 아니 놓네 / 서경덕(徐敬德)


말은 가자 울고 님은 잡고 아니 놓네

석양은 재를 넘고 갈길은 천리로다

저넘아 가는 날 잡지 말고 지는 해를 잡아라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자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花潭). 가세가 빈곤하여 독학으로 13세에 '서경(書經)'을 읽고 복잡한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을 스스로 터득했으며, 18세에는 '대학(大學)'을 읽고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원리를 깨달았다. 여러 지방을 유람한 후 산림에 묻혀 후진 교육에 힘을 기울이던 중, 조광조의 천거가 있었으나 사양하고 역시 학문 연구에 전력하였다. 또한 명승지를 유람하여서 여러 편의 기행시를 남겼다. 개성(開城) 동문 밖 화담(花潭)에 초막을 짓고 도학을 비롯하여 수학 · 역학 등의 연구로 여생을 보내었다. 명기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친 일화가 전하며, 선조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감상> 노랫가락으로 곧잘 불리는 노래다. 어서 가자고 울어대는 말과 옷소매 부여잡고 아니 놓는 님, 갈 길은 천리인데 저녁 해는 벌써 서산을 넘고 있다. 길은 떠나야겠는데 이별하기는 싫은 님, 이 마음의 갈등, 초조감 ······.

내용은 무거우나 리듬은 가볍기만 한 데에 이 시조의 묘미가 있다 하겠다. 그러기에 속요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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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아 너는 어이 매양에 젊었는다 / 서경덕


마음아 너는 어이 매양에 젊었는다

내 늙을 적이면 넌들 아니 늙을소냐

아마도 너 좇아다니다가 남우일까 하노라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자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花潭). 가세가 빈곤하여 독학으로 13세에 '서경(書經)'을 읽고 복잡한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을 스스로 터득했으며, 18세에는 '대학(大學)'을 읽고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원리를 깨달았다. 여러 지방을 유람한 후 산림에 묻혀 후진 교육에 힘을 기울이던 중, 조광조의 천거가 있었으나 사양하고 역시 학문 연구에 전력하였다. 또한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여러 편의 기행시를 남겼다. 개성(開城) 동문 밖 화담(花潭)에 초막을 짓고 도학을 비롯하여 수학 · 역학 등의 연구로 여생을 보내었다. 명기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친 일화가 전하며, 선조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매양에 : 마냥. 늘.

젊었는다(져멋는다) : 젊었느냐?

남 우일까 : 남을 웃길까. 남의 비웃음을 살까.


<감상> 마음을 객관화 · 의인화하여 대화하는 형식이 호소력과 설득력이 크다. 일종의 탄로가(歎老歌)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속에는 젊음의 권화(權化)라고도 할 수 있는 황진이에게 끌리고 있는 한 가닥의 애틋한 '정'이 여운을 끈다.


일생을 살아가는 데에서나 학문으로서나 원숙한 경지에 도달하고 있는 노학자 서화담의 경건하면서도 인간적인 멋을 느낄 수가 있어서, 읊을수록 마음이 흐뭇해지는 작품이다. 마음이 진실 되면 문인, 시인이 아니더라도 훌륭한 문학작품이,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시가 나오기 마련인가 보다. 자칫 목석같은 인간으로 생각하기 쉬운 도학자이지만, 화담의 경지에 이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는 것을 여기에서 느낄 수가 있지 않은가.


마음이 항상 젊으면 몸도 늙지 않는다. 마음이 젊다는 것은 생각이 낡지 않고 항상 새롭다는 이야기가 된다. 늙으면 대부분의 노인들은 고집이 세지고 새로운 것을 좀처럼 따르려 하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이미 발전이 정지되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미 인간 생활권에서는, 아니 인간 문화권에서는 소용없는 존재일 뿐, 죽은 것이나 다를 것이 없는 존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학자 서경덕, 그의 학문은 끊임없이 발전할 것이며, 영원히 남는 진리의 고전이 될 것이다. 이 시조는 대학자 서화담의 그런 면모가 약동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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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 성삼문

절의가(絶義歌)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긔 뉘 따헤 났다니


세종 말년에 중국사신 예겸이 왔을 때, 시에 조예가 깊은 그를 대접할 인물이 없어 낭패했을 때, 성삼문, 신숙주가 접대역으로 선발되었는데, 중국어에 능통한 신숙주가 말상대를 하고, 시는 모두 성삼문이 지었다고 한다. 예겸은 깊이 감동하여 두 사람과 의형제를 맺었고 이때 우리 학자들에게서 받은 시를 모아<遼海片(요해편)>이라는 시집을 냈는데 성삼문이 발문을 썼다고 한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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