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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時調詩 ***/妓女의 時調

여류시조(매화 명옥 소백주 송이 천금 한우 홍랑 황진이)

by 산산바다 2006. 12. 7.

산과바다

 

여류시조에 대하여

 

매화, 명옥, 소백주, 송이, 천금, 한우, 홍랑, 황진이의 시조

 

 

 

조선 시대의 시조는 대체로 남성 전유물이었고, 특히 조선 전기의 시조들은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거나 유교적 이념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된 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많지는 않으나 여인들, 특히나 기녀들에 의해 창작된 시조들은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기녀들의 시조는 고려 가요의 맥을 이어가는 정조를 보여주며, 인간의 진솔한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있어서 기녀들은 유교의 엄격한 도덕의 제약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상대가 양반들이었기에 어느 정도 교양도 겸비하였던 특이한 존재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찾아주는 남정네가 없을 때에는 그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기녀들의 삶의 지주는 그들을 찾아주는 양반들이 전부였다. 그 결과 기녀들의 시조에는 임에 대한 사랑의 갈구가 들어 있거나, 떠나간 임에 대한 원망 내지 슬픔이 담겨 있다.

 어찌하여 만들어진 것이든 간에 그들의 이별가는 오늘날에 보아도 가슴을 찡하게 하는 것이 있다.

 현대까지 이 곳간에 쟁여둔 여류 시조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여류 시조에 대하여

매화 옛 등걸에(매화)

꿈에 뵈는 님이(명옥)

상공을 뵈온(소백주)

솔이 솔이라 (송이)

산촌에 밤이 (천금)

어이 얼어 자리(한우)

묏버들 갈해 (홍랑)

내 언제 무신(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황진이)

산은 옛 산 (황진이)

어져, 내 일 (황진이)

청산리 벽계수(황진이)

청산은 내 뜻(황진이)

 

 

매화(梅花)의 시조

 

 매화 옛 등걸에 봄졀이 도라오니

 옛 퓌던 가지에 픠엄즉도 하다마는

 춘설(春雪)이 난분분(亂紛紛) 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이 시조는 시대는 알 수 없으나 평양의 명기였다고 하는 매화(梅花)의 작품이다. 뜻풀이 삼아 바꿔 보면 다음과 같다.

 

 

매화 피던 등걸에도 봄날이 돌아오네

그 옛날 꽃 피던 가지 다시 필만도 하건만

봄눈이 흩날리노니 필까말까 하여라

 

 

 고목이 된 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 옛날에는 화사한 꽃을 피워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던 화려했던 추억이 있다.

 그러나 세월의 풍상을 겪은 매화 나무는 그저 등걸이 되어, 정작 봄날이 왔어도 꽃망울을 맺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때 늦은 봄눈까지 어지럽게 흩날리니 도저히 꽃 피울 가망이 없어 보인다.

 결국 무상하게 흐르는 세월에 늙어 가는 모습을 한탄하는 노래라 하겠다.

 그런데, 이 시조를 지은이의 이름도 매화라는 점에서 중의법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시조의 '매화'는 매화나무인 동시에 지은이 자신을 가리킨다 할 수 있다.

 젊었던 시절 잘 나가던 기녀로서 뭇 남정네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늙어 아무도 찾지 않는 처지가 된 것을 슬퍼하고 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젊음을 그리워하며 늙음을 한탄한 것이다.

 초장의 '옛'은 늙음을 뜻하며, 중장의 '옛'은 흘러간 과거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춘설(春雪)'이란 말은 '봄'이나 '매화'와는 대립하는 말로 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은이(매화)의 정 깊은 사랑의 방해물로 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젊고 발랄한 '춘설'이란 이름을 가진 나이 어린 기녀가 있었던 게 아닐까? 또는 눈은 흰 색이니 '춘설'을 통하여 자신의 머리에 나타나기 시작한 백발을 원망하는 것을 아닐까?



 

명옥의 시조


 꿈에 뵈는 님이 신의 없다 하건마는

 탐탐이 그리울 제 꿈 아니면 어이 보리

 저 님아 꿈이라 말고 자로자로 뵈시쇼


 이 시조는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수원의 유명한 기생이었다는 명옥의 작품이다. 뜻풀이 삼아 다음과 같이 개작해 보았다.


 

꿈에 나타난 임 믿을 수 없다지만

틈틈이 그리울 때 꿈 아니면 어찌 보랴

임이여 꿈속에라도 자주자주 오시라

 

 너무도 그리워 꿈 속에서라도 만나는 임, 그러나 꿈 속의 임은 믿을 수가 없다.

 꿈에서 깨어나면 옆에 없는 임을 더욱 그리워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꿈 속이 아니라면 멀리 떠나신 임을 어찌 볼 수 있으랴. 꿈 속에서나마 임을 자주 볼 수만 있다면, 깨어나서의 허망함이 문제이겠는가?

 이별한 임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이보다 더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소백주(小栢舟) 시조

 

상공(相公)을 뵈온 후에 사사(事事)를 믿자오매

졸직(拙直)한 마음에 병들가 염려이러니

이리마 저리차 하시니 백년(百年) 동포(同抱)하리이다

 

<해동가요>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조는 광해군 때 평양 감사로 있던 박엽(朴燁)이 손님과 함께 장기를 두면서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던 기생 소백주(小栢舟)에게 명하여 짓게 한 작품이리고 한다.

 그런데 이 시조는 그 표현이 기묘하여 도저히 시조의 운율을 살리며 현대어법으로 고쳐 쓰기가 어렵다. 그 뜻을 대락적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은 마음을 전하는 듯하다.


 

 상공을 뵈온 후는 모든 일을 (상공만) 믿고 지내왔으나

 옹졸한 마음에 (혹시 상공께서 그만 마음이 변하여) 병이 들까 염려하였더니

 이렇게 하마 저렇게 하자고 그러시니, 백년을 함께 살고자 하나이다


 

 이 시조는 장기를 비유하여 대감에 대한 소백주(小栢舟) 자신의 연정(戀情)과 믿음을 노래하였다. 비유와 어휘의 적절한 구사가 매우 뛰어나다.

 곧, '상공(相公)'은 장기의 상(象)과 궁(宮)을, '사사(事事)'는 사(士)를, '졸(拙)'은 졸(卒)을, '병(病)'은 병(兵)을, '동포(同抱)'는 포(包)를, '이리마'는 마(馬)를, '저리차'는 차(車)를 뜻한다.

 이렇게 음이 같음을 이용하여 중의적(重義的)으로 작품 전체를 이끌어가는 즉홍적인 착상이 대단하다.

 

 

송이(松伊)의 시조


 

솔이 솔이라 하니 므슨 솔만 너기는다

천심 절벽(千尋絶壁)의 낙락 장송(落落長松) 내 긔로다

길 아래 초동(樵童)의 졉나시야 거러 볼 줄 이시랴


 이 시조는 신원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기녀 송이(松伊)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대략의 뜻을 밝혀 고쳐보면 다음과 같다.


 

솔이고 다 같은 솔인가, 무슨 솔로 생각하는가?

천길 절벽 위에 낙락장송이 내 모습이로다

길 아래 초동의 낫으로 걸어 볼 수나 있으랴.

 

이 작품에서 '솔이'는 작자의 이름인 송이(松伊)를 우리말로 바꾼 것으로, 중의법이 사용되고 있다. 즉, 솔이는 '소나무'의 뜻도 지니면서 동시에 작자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소나무라고 다 같은 소나무가 아니다. 나는 보통의 나무꾼의 낫 따위로는 벨 엄두도 내지 못하는 낙락장송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이는 몸은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높은 지조와 당당하고 고고한 긍지를 노래하고 있으며, 하찮은 남성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자부심을 노래한 것이다.



 

천금(千錦)의 시조

 

산촌에 밤이 드니 먼딋 개 즈져온다

시비(柴扉)를 열고 보니 하늘이 차고 달이로다

뎌개야 공산(空山) 잠든 달을 즈져 무삼 하리요

 

 이 시조는 생존 연대나 신원을 알 수 없는 천금(千錦)이라는 기녀가 지은 것이다. 현대어법에 맞게 고쳐 보면 다음과 같다.

 

산마을에 밤이 오니 먼 데서 개 짖는 소리

사립문 열고 보니 찬 하늘에 달뿐이네

저 개여, 빈 산 달에게 짖어 본들 무엇하리요

 

이 시조는 빈 하늘의 무심한 달을 보고 짖는 개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킨 작품이다.

 개 짖는 소리를 듣고 혹시 임이 오는 소리가 아닌가 하고 허둥지둥 사립문을 열어 보는 안타까운 여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개 짖는 소리와 달의 대비는 청각과 시각의 미묘한 대비로서 여인의 외로움을 나타내는 탁월한 효과를 내고 있다 하겠다.


 

 

우(寒雨)의 시조

 

어이 얼어 자리 무스 일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여 잘까 하노라

 

 이 시조는 선조 때의 평양 명기 한우(寒雨)가 지은 것으로 임제(林悌)의 한우가(寒雨歌)에 대한 화답가(和答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임제가 한우의 미모를 보고 함께 하기를 바라는 내용의 시조를 짓자, 곧바로 시조로 답하였다는 것이다.

 그 대강의 뜻을 장별로 풀어본다.


 

어찌하여서 추운 곳에서 얼어서 자려 하시나이까? 무슨 일이 있어 얼어서 자려 하시나이까?

원앙새 수놓은 베개와 비취새 이불을 어디다 버려두고 이 밤을 얼어서 자려 하시나이까?

오늘은 임께서 찬비를 맞고 오셨으니, 따뜻하게 몸을 녹여가며 자 보려고 하나이다.


 

 한우를 유혹하기 위해서 불렀다는 임제의 '한우가'는 다음과 같다.

 

북창(北窓)이 맑다커늘 우장(牛漿)업씨 길을 난이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맛잣시니 얼어잘까 하노라

 

임제는 성격이 강직하고 고집이 세어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하였다. 그는 선비들은 법도(法度) 밖의 사람이라 하여 사귀려 하지 않고, 시와 문장(文章)만을 취한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한우가(寒雨歌)라는 노래를 불러, 평양 명기(名妓) 한우의 심정을 떠 본 것이다. 이에 한우는 시조를 지어 함께 하기를 허락하였다.

 여기서 당시 선비들의 풍류와 여유, 그리고 기녀들의 재치를 알 수 있다. 위의 두 시조에서 '찬비'는 차가운 비를 뜻하는 동시에 한우(寒雨)를 의미하여 중의법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홍랑의 시조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데

자시는 창 밧긔 심거 두고 보쇼서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소셔.

 

 이 시조는 선조 때의 기녀인 홍랑의 작품이다. 뜻풀이하여 써보면 다음과 같다.

 

산 버들 가려 꺾어 보냅니다 님의 손에

사랑방 창밖에 심어두고 봐주세요

밤비에 새싹이 돋거든 나인 듯이 여기소서

 

산에 있는 버들가지를 아름다운 것을 골라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방의 창문가에 심어두고 살펴 주십시오.

행여 밤비에 새 잎이라도 나거들랑 마치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

 

 이 시조에는 다음과 같이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선조 때 북도 평사(北道評事)로 함경도 경성에 가 있던 최경창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최경창은 그 곳에서 홍랑이라는 기녀를 사귀었는데, 벼슬이 바뀌어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에 홍랑이 쌍성(雙城, 지금의 영흥)까지 따라왔다가 작별하고 돌아가는데, 함관령(咸關嶺)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날은 저물고 비가 내리므로 이 시조를 지어 최경창에게 부쳤다고 한다.

 그리고, 3년 뒤 최경창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홍랑은 밤낮 이레를 걸어 그를 찾아가서 간호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는 국상(國喪, 명종 비의 죽음)이 있던 때라 이것이 말썽이 되어 최경창은 관직에서 떨어지고, 홍랑은 다시 경성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시조는 임에게 바치는 지순한 사랑을 묏버들(산에 있는 버들)로 구체화시키고 있다. 비록 임과 이별하게 되어 몸은 천리만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임의 곁에 있고 싶은 심정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은이는 묏버들 가지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보내면서도 자학의 말이나 슬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청순함을 느끼게 하며 이별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하겠다.

 

 

 

황진이(黃眞伊)의 시조(1)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소겻관대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업네

추풍에 지는 닙소릐야 낸들 어이 하리오

 

 이 시조는 황진이의 작이다. 뜻 풀이 삼아 다음과 같이 고쳐보았다. 원전에 누가 될 것을 저어하면서....


 

 내 언제 믿음 없어 임을 언제 속였기에

 달 기우는 삼경에도 오시는 소리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소리니 낸들 어찌하랴

 

 이 시조는 가을밤에 초조하게 님을 기다리며 외롭게 밤을 지새우는 여인의 정한(情恨)을 그리고 있다.

 나는 임을 배신하는 어떤한 행위도 한 적이 없고, 그럴 마음도 먹은 적도 없어 떳떳하다. 그러나 이제나 저제나 찾아올까 마음 조리며 방밖에 들려올 임의 발소리를 아무리 기다려도 들리지 않는다.

 가을 바람에 떨어져 멀리 사라지는 나뭇잎처럼 임의 마음도 내게서 멀리 사라져 버렸나 보다. 하지만, 어쩌랴. 나는 그저 임이 찾아주기를 기다릴 뿐, 찾아가 하소연할 수도 없는 처지이니.......

 이 시조를 가만 살펴보면 시조의 자수율에는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있다. 초장을 제외하고는 2음절 또는 6음절이 한 음보를 형성하기도 한다. 느낌을 충분히 드러내기 위해서 형식을 무시했다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멀어져 가는 임의 마음을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에 비유함으로써 쓸쓸함이라는 정서를 더욱 크게 하고 있다. 이렇듯 쓸쓸하게 기다리다, 그 기다림에 지쳐 임의 마음을 돌릴 수 없는 자신을 탓하며 체념을 한다.

 이러한 모습이 옛날 우리 여인네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기다림, 체념은 한(恨)이라는 독특한 정서를 불러내었으니, 고려가요의 '가시리'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확인된다.

<작자 소개>

 황진이(黃眞伊)는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1530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송도(개성)의 유명한 기생이었다. 본명은 진(眞)이었으며, 기명(기생으로서의 이름)은 명월(明月)이었다.

 원래는 양반(진사)의 딸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녀는 아름다운 용모와 재능을 겸비하여 시(詩), 서예, 노래를 잘하였고, 그림를 그리는 솜씨도 뛰어났다고 하니 다재다능한 여인으로 시대를 잘못 타고 나서 한낱 기생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하겠다.

 이토록 뛰어난 미모와 재능으로 송도만이 아닌 전국적으로 알려진 기생이 되었으니, 송순과 같은 당시의 문인, 학자들이 그녀와 시를 나누며 술을 즐기는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특히, 당시에 불교의 정신적 지주로 생불로 칭송되던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킨 사건은 유명하다.

 그러나 화담 서경덕은 온갖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는 서경덕을 마음 속으로 깊이 흠모하며 존경하였고,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황진이 스스로 박연폭포, 서경덕, 그리고 자신을 송도삼절(松都三節)이라고 칭하였다 하니 그녀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여인이었는지 알 수 있다.



 

황진이(黃眞伊)의 시조(2)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버혀 내어

춘풍(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조선 선조 때의 개성 기생 황진이의 작품이다. 현대어법에 따라 개작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동짓달 긴긴 밤을 한 허리 베어 내어

 춘풍 부는 날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정든 임 오신 밤이면 굽이굽이 펴리라

 

 이 시조는 임을 기다리며 홀로 밤을 지새우는 여인의 심정이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잘 표현되었다.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다니, 형체가 있을 수 없는 추상적인 시간을 두부모 자르듯 한다는 표현은 탄성을 자아낸다.

 동짓달 밤이라면 1년 중에 가장 긴 밤인데 기다리는 임은 오지 않고, 얼마나 지루할 것이며 쓸데 없이 흘러가는 시간인가. 그러한 밤을 임이 오실 짧은 봄밤을 연장하는데 쓰고 싶다는 생각. 황진이에게서 만 나올 수 있는 상상이며 표현이라 하겠다.

 그리고 중장과 종장의 '서리서리 너헛다가'와 '구뷔구뷔 펴리라'와 같은 대조적 표현은 우리말의 특성을 최대한 살린 것이라 하겠다.



 

황진이(黃眞伊)의 시조(3)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니 옛 물이 이실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노매라

 

 황진이는 기생이었지만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였던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을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삼절(松都三絶)의 하나라고 말했다.

 황진이는 학문이 경지에 올랐다는 서경덕일지라도 송도 제일의 기생인 자신의 유혹의 치맛자락에는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황진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서경덕을 유혹하였으나 그의 마음을 흔들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황진이는 서경덕을 유일한 존경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사제(師弟)의 의(誼)를 맺기를 청하였다. 이에 서경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서경덕의 인품이 어떠했는지 알 만하고, 일개 기생을 덕망 높은 유학자가 제자로 받아들였으니 서경덕이 도량 넓은 학자였음도 알 수 있다. 또한 서경덕이 인정하여 제자로 받아들인 황진이도 그저 미모만으로 개성 제일의 기생이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시조는 그의 스승이었던 서경덕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인생은 흐르는 물과 같이 순간을 머므르다 가는 것이니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노래하고 있다. 그것이 서경덕과 같은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물이 인생 또는 인간을 비유한 것이라면,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자연을 비유한 것이리라. 유구한 자연과 유한한 인생을 대조 시켜 인생무상을 말하고 있다.

 

 뜻을 알기 쉽게 풀어 개작하면 다음과 같다.

 산은 옛날 산이나 물은 옛날 물이 아니구나

 밤낮으로 흐르니 옛날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서 가면 아니 오는 것을

* 인걸(人傑) - 뛰어난 사람

 

 


 

황진이(黃眞伊)의 시조(4)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더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타야

보내고 그리는 정(情)은 나도 몰라 하노라.

 

 뜻이 통하도록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아하! 내가 한 일이여, 그리워질 줄 몰랐더냐

 있어 달라 했던들 갔으랴만 내 구태여

 보내고 그리워하는 정(情)은 나도 몰라 하노라.

 

 이 시조는 고려가요 '가시리', '서경별곡'과 현대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이어주는 이별시의 대표격으로 평가된다. 자존심과 연정(戀情) 사이에서 한 여인이 겪는 오묘한 심리적 갈등이 절묘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시조는 우선 자탄의 소리로 시작하고 있다. 임이 떠나고나면 그리워할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놈의 자존심 때문에 임을 잡지 못하였던 자신을 원망한다. 가지 말라고 하소연하면 임은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떠나가는 임을 구태여 보내놓고 왜 마음 속 깊이 그를 그리워하고 있는지,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사랑하면서도 이별하는 연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마음을 이 시조만큼 적절하게 그려내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 작품의 표현상 묘미는 중장의 '제 구타야'의 행간(行間) 걸침이다. 시조는 대개 운율만이 아니라 의미의 단위가 장별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문맥상 '제 구타야'는 종장으로 이어지는 말이다. 물론 이것을 '이시라 하더면 제 구타야 가랴마는'의 도치로 보면 '제'는 임이 된다. 하지만, 종장과 이어지는 말로 보아 '제 구타야 보내고'로 생각하면 '제'는 서정적 자아 자신이 될 수 있다. '제(저)'는 1인칭으로도, 3인칭으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어느 것으로도 가능하지만 시조의 기본적인 의미 단위를 생각하여 도치된 표현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나, 글의 흐름으로 보면 도치할 이유가 전혀 없다.

 도치는 대개 의미의 강조 효과가 있다고 할 것인데, 이 시조는 화자의 정서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바, 떠나는 임에 대해 강조할 것이 없는 것이다. '구태여'의 뜻을 생각할 때, 보내고 싶지 않으나 보내는 자아의 갈등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묘미 있어 보인다.

 

황진이(黃眞伊)의 시조(5)

 

청산리(靑山裡) 벽계수(碧溪水)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수여간들 엇더리

 

 이 시조에 얽힌 것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송도의 황진이에 대한 명성은 전국에 자자했었다. 이 때, 왕가 종실(宗室)에 벽계수(碧溪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황진이를 만나 그녀가 아무리 유혹해도 그것에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늘 큰 소리를 쳤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황진이는 그를 유혹해보기로 하였다. 마침 벽계수가 송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를 달 밝은 가을밤에 개성 만월대(滿月臺)로 오게 하였다.

그리고 황진이는 곱게 단장한 후, 낭랑한 목소리로 이 시조를 지어 읊으며 그를 유혹하였다. 이 노래를 듣던 벽계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에 도취되어 그만 타고 온 나귀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다나 어쩠다나.....

 하여튼 이 일로 벽계수는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시조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은 표현법은, 위의 이야기로 볼 때 중의법을 적절하게 사용했다는 것이다.

 '벽계수'를 글자 그대로 청산 속의 '푸른 시냇물'이라는 뜻으로, '명월'을 '밝은 달'로 해석해도 자연스러운 문맥이다. 하지만, '벽계수'를 왕실 친족인 이은원의 호로 보고, '명월(明月)'은 황진이의 기명이었으니 황진이 자신으로 보아도 글의 흐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벽계수에게 자신과 이 달 밝은 밤의 빈 산에서 어우러져 놀아보자는 유혹의 뜻이 충분히 전달되는 것이다. 한 단어를 이용하여 두 가지 흐름을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청산(靑山)'은 영원히 변함이 없이 그 자리에 있는 자연을 나타낸 것이라면, '벽계수'는 순식간에 스쳐 가는 인생을 비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내는 그대로이나 시냇물은 늘 새로운 물에 밀려 사라지는 것이니 말이다.

 결국, 무한한 자연에 비하여 인생은 얼마나 덧없는가, 그럴 진대 풍류로 허망함을 달래보자고 노래한 것이다.

 한편 '청산(靑山)', '벽계수(碧溪水)', '명월(明月)', '공산(空山)'이 어울려 이루는 풍류의 분위기를 유혹의 세계로 발전시켜 놓았다. 애원이나 노골적이거나 음탕한 성적 도발로서가 아니라 멋으로 남성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니, 황진이가 왜 그리도 유명한 기생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한다.

 

황진이(黃眞伊)의 시조(6)

 

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는 님의 정(情)이

녹수(綠水) 흘러간들 청산(靑山)이야 변할손가

녹수(綠水)도 청산(靑山)을 못니져 우러예어 가는고

 

 이 시조는 자연 현상에 기대어 사람의 마음을 적절하게 표현한 황진이의 작품이다. 비록 흐르는 물이 잠시 계곡에 머물다 사라지는 것처럼 자신을 하룻밤의 사랑으로 생각하며 임은 스쳐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임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청산처럼 변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떠난 임도 아마 자신을 잊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원작에 누가 될 것을 염려하면서도 현대어로 개작을 해본다.

 청산은 나의 뜻이요 녹수는 임의 사랑

 녹수가 흘러가도 청산은 변치 않네

 녹수도 청산을 못잊어 저리 울며 가는가

 

 결국 나에 대한 임의 사랑이 설령 바뀌었다 하더라도 임에 대한 나의 마음은 영원함을 노래하고 있다. '청산'이 넘치는 애정과 정열에 불타는 내 마음이라면, 그 밑으로 푸르름을 머금고 흐르는 '녹수'는 임이 나에게 속삭여주던 정이라 할 수 있다.

 청산은 녹수가 영원히 자신의 품안에 있기를 원하지만, 녹수는 더 좋은 경치를 향해 떠나간다. 그러나 흘러간 녹수야 지금 있건 없건, 임을 향한 청산의 마음이야 변할 까닭이 있겠는가? 그리고 저리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아 녹수도 청산을 잊지 못해 눈물을 뿌리고 있는 것이리라.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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