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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時調詩 ***/妓女의 時調

풍류(風流)의 꽃, 기녀(妓女)의 정체(正體)

by 산산바다 2007. 11. 10.

산과바다

 

청금상연 (聽琴賞蓮)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 중에서1805년

 

 

 

 

 

     풍류(風流)의 꽃, 기녀(妓女)의 정체(正體)

 

- 그 실상(實相)과 허상(虛相)

 

 풍류한량(風流閑良)들과 기녀(妓女)들의 화답(和答)의 노래나 그녀들의 이야기에 나타난 것을 보면, 기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화류계(花流界)의 여자(女子)' 내지는 '몸을 파는 여인(女人)' 들의 이미지와는 엄청나게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들에게는 시(詩)가 있고, 풍류(風流)가 있고, 사랑이 있으며, 정절(情節)이 있었다. 비록 양반들의 노리개로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세계에서 그 나름대로의 인생관(人生觀)을 가지고 멋과 풍류를 즐겼다.

 

그리고 그 속에서 때로는 부패한 양반. 한량들의 버릇을 따끔하게 고쳐 주었고, 때로는 자학(自虐)으로 자신을 혹사하는 일도 있었으나,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면 사랑의 불꽃으로 자신을 불사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남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작품을 수없이 써 낸 여인들이기도 했다. 물론 현대적인 개념과 별 차이가 없는 기생(妓生)들도 허다했지만, 모두를 통틀어 그렇게 취급하기에는 아까운 여인들도 많았다. 이 글에서 다루는 기녀들은 통상 개념으로 기생(妓生)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의 여인들만 골라 취급하였다.

 

이제 독자들의 궁금증, 곧 우리가 '기생(妓生)'이라고 부르는 여인들이 우리 역사상 언제 생겨났으며, 그녀들의 호칭(呼稱)은 어떠했고, 또 그녀들의 사회적 신분(身分)은 어떠했으며, 이 밖에 그들의 생활단면(生活斷勉)은 어떠했는지를 밝혀봄으로써 작품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곧 그녀들의 실상(實像)과 허상(虛像)을 앎으로써 그녀들을 좀 더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겠기 때문에서이다.

 

1. 기생(妓生)의 기원(起源)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이보다 먼저 군신(君臣)들이 인재(人才)를 알지 못하여 근심한 끝에 많은 사람들을 무리지어 놀게 하여, 그들의 행실(行實)을 보아가지고 이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이에 아름다운 두 여자를 뽑았는데, 하나는 '남모(南毛)'라 하였고, 다른 하나는 '준정(俊貞)'이라 하였다.(三國史記)]

 

이 자료는 우리 고문헌(古文獻)에 보이는 기생(妓生)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즉 신라 진흥왕 37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란 것이 생겼다는 기록이다. 우리나라에서 기생사(妓生史)의 유일한 문헌이라 할 수 있는 이능화님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는 전기 기록을 참조하여 기생(妓牲)의 기원을 '원화(源花)'로 부터라고 잡고 있다.

 

[비로서 원화(源花)를 받들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기녀(妓女)의 시초였다. <이능화, 朝鮮解語花史)]

원화(源花)는 본래 임금과 신하가 더불어 노닐 때(類聚群遊)에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던 여자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기생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주장대로 한다면 우리 나라의 기생의 역사는 무려 1,400년이란 장구한 전통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기생(妓生)'이란 명칭이 생긴 것은 고려 이후일 뿐 아니라 그 출신이 '원화(源花)'와는 아주 달랐었다. 원화(원화)가 양갓집 규슈(閨秀) 중에서 얼굴이 아름답고 행동거지가 뛰어나서 교양이 특출한 여자를 골라서 뽑는 데 반해, '기생(妓生)'은 사회적 신분이 가장 미천한 '무자리(水尺者)'의 딸 중에서 뽑은 것이어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원화(源花)와는 전연 달랐던 것이다.

 

 '무자리'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나라를 창건했을 때 후백제의 유민(遊民) 중에 많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삼국시대의 유민들로서 그들은 관적(貫籍)도 없었고, 천역(賤役)도 아니하고, 다만 산천을 유랑하면서 수렵(狩獵)과 유기(柳器,버드나무로 만든 고리)를 만들어 파는 사람으로, 현대적인 표현을 빌면 유랑민(遊浪閔), 즉 일종의 집시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에 이들을 노예(奴隸)로 하는 제도를 두어 남자를 노복(奴僕), 여자는 노비(奴婢)로 하여 경향(京鄕) 각지의 관가(官家)에 예속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들 노비들의 딸 중에서 얼굴이 예쁜 애들을 골라 노래와 의술(醫術)을 배워주고 연회석에서 춤을 추게 하며, 필요한 때에는 높은 양반들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는데, 말하자면 이것이 기생(妓生)의 시초인 것이다. 흔히 말하는 '여락(女樂)'이란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기생의 기원은 후백제의 유목민 중의 '무자리의 딸' 또는 '무자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기생의 역사는 고려 때부터라 할 수 있는데, 물론 신라 때에 '창기(倡妓)'란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볼 수 있는 기록으로, 김유신 장군이 천관이란 기녀의 집에 출입하다가 어머님의 심한 꾸지람을 듣고 다시는 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 드렸는데, 취중에 자기가 탄 말이 그를 천관의 집으로 데리고 간 것을 발견하고는 애마(愛馬)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있으나, '원화(源花)'는 기생의 원형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나 원화(源花)가 곧 기생의 시초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자리의 딸들은 열세 살 정도만 되면 그 이름이 기적(妓籍)에 오르고, 그때부터 동기(童妓)로서의 수업을 받게 되는데, 교방(敎坊)에서 가무와 음률을 비롯하여 모든 예절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생의 호적이 정식으로 만들어진 것은 약 800여 년 전에서 비롯된다.

 

[중국 오월춘추(吳越春秋) 시대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음탕한 자부들을 산중에 모아 두고 맘대로 즐기게 한 일이 있고, 또 후에 한무제(漢武帝)와 제왕(齊王) 환공(桓公)이 진중에 여기(女妓)들을 두어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었는데, 우리 나라의 기생의 제도는 이것을 본뜬 것이다.(이익, 星湖塞說)]

 

[고려 명종 때 부사 이의민(李義旼)의아들 이지영(李至榮)이가 무자리의 후손인 기생(妓生)들을 모아서 기적(妓籍)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우리나라의 기생의 시초다. (정약용, 雅言覺非)]

 

[이 달에 사농경(司農卿) 왕일경(王日卿)을 계단(契丹)에 보내어 애(哀)를 고하고 사위(嗣位)하였음을 알렸다. 교방(敎坊)을 파하고 궁녀 100여 명을 놓아 주었다. (고려사, 顯宗條)]

 

[교방(敎坊)에서 여제자를 뽑아 여악사(女樂士)로 삼았다. (고려사, 文宗條)]

[각 고을에 명하여 창기(倡妓)와 유색예자(有色藝者)를 뽑아 교방( 敎坊)에 충당시켰다. (高麗史, 忠烈王條)]

 

이상의 기록을 보면 정다산(丁茶山)도 기생의 기원이 '무자리'의 후손임을 긍정하고 있다. 제 8대 현종은 이전에 만들었던 교방(敎坊)을 폐했다 했는데, 기적(妓籍)을 정식으로 작성한 것이 제 9대 명종 때여서 이보다 160여 년이나 앞선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생의 역사는 줄잡아도 1,000여 년은 넘는다 하겠다.

 

'교방(敎坊)'은 기녀들의 교육을 받는 기관으로, 미모(美貌)와 재예(才藝)가 있는 자를 선출하여 식용단장(飾容丹裝)시키고 가무와 예절. 습속(習俗) 등을 학습시켜서 궁중에서 종사시키던 곳 이었다 .

 

2. 기생(妓生)의 명칭(名稱)

 

이 '기생(妓生)'의 명칭은 여러 가지로 변해 왔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이조에 이르러 그들을 관장하는 기관이 생기고, 그것이 다시 큰 규모로 발전되기도 했다. 가장 번창했던 시기는 연산군 때이다.

 

이제 그 명칭과 유형은 어떠했으며 그들을 관장했던 기관에는 어떤 것이 있었는가를 살펴보자.

 

'무자리'의 딸들로 얼굴이 예쁘고 행동거지가 바른 사람을 뽑아 의술과 예절을 배워 주고, 연회석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 하던 기생을 '여악사(여악사)'라 했고, 또 '기생(妓生)'이라 하여 재주(技)를 배우는 기생도 있었으며, 이 밖에 연회석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양반들의 잠자리 시중을 들다가 나중에는 몸을 팔기에 이른 '기생(妓生)' 등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호칭도 여러 가지로 바뀌었다.

 

이조 초기 궁중 진연(進宴)에 참여하는 기생을 '진풍정(進豊呈)'이라 불렀고, '기화자(技花者, 손에 꽃을 들고 있는 무자리)'라고도 했는데, 이는 다시 '운평(運平)' 또는 '계평(繼平)'이라고도 불렀다. 이들을 다시 임금과의 관계를 중심하여 보면,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기생을 '지과흥청(地科興淸)', 임금과 관계가 있는 기생을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부르는 등 그 호칭이 다양했다. 연산조(燕山條)에 와서 이 제도는 크게 번창하여 등극한 지 10년째인 갑자년(甲子年)에는 각 도(道) 대소읍에 '기악부(妓樂府)'를 두고 그 칭호도 '흥청(興淸)'이라 했는데, 임금을 모신 기생인 '천과흥청(天科興淸)'은 그 세도가 삼공(三公)이 부럽지 않았다. 지금의 '흥청거리다'는 말의 유래도 이 천과흥청(天科興淸)에서 온 것을 보면 그 세력을 유추할 수 있겠다.

 

기생은 그 유형을 크게 나누면 장악원(掌樂院)에 예속되어 있는 기생을 '일반기생(一般妓生)'이라 하는데, 대부분의 기생이 여기에 속한다. 혜민서(惠民署)에 예속되어 의술과 약방문을 습득한 기생을 '약방기생(藥房妓生)'이라 했는데, 이는 일종의 여의사(女醫士)라 할 수 있다. 또 지방에서 뽑혀 온 기생을 '선상기생(選上妓生)'이라 하였는데, 평양에서 연중행사로 각 군(郡) 대항 가무경연대회가 1년에 두 번씩 열려, 그 호화롭기가 지금의 전국체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한다. 이때에 가무와 용모재색(容貌才色)이 뛰어난 기생을 뽑아 올렸는데, 평양기 매월(梅月), 진주기 월산(月山) 등이 특출했다 한다. 또 그때 부르던 노래로 영변 기생의 [영변가(寧邊歌)], 안주 기생의 [백상루가(百祥樓歌)], 성천 기생의 [금사무(金獅舞)]가 뛰어났다 한다.

 

연산군은 후에 '장악원(掌樂院)'을 '계방원(繼芳院)'이라 개칭하고 각 지방에 분원(分院)을 두기까지 하였는데, 간신 임사홍(任士洪)은 뒤에 채홍사(採洪使)를 보내어 각 지방에서 아름다운 여자들을 뽑아 올리게까지 하여 많은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傭齋叢話)]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송사문(宋斯文)은 얼굴이 못나고 비루하며 행동도 어설프고 졸렬하였다. 긴 수염은 덥수룩하고 눈은 사팔뜨기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로 오랜 동안 지방의 교수(敎授) 노릇을 하다가, 전임된다는 것이 또 혜민서(惠民署) 소속의 교수가 되어 오로지 의녀(醫女)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 의녀(醫女)라는 것은 각 관사(官司)의 나이 젊은 종년들을 가려 뽑아서 시킨다. 그 젊은 계집아이들이 곱게 단장하고 애교를 부리며 다투어 와서 글자를 묻는다. 사문(斯文)이 그 속에 있으니, 마치 늙은 곰이 꽃나무 숲 가운데 웅크리고 앉은 것 같았다. 그의 거처하는 곳도 또 장악원(掌樂院) 곁에 우거하면서 날마다 왕래하였다. 한 친구가 만나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사문(斯文)이 큰 소리로 시를 읊어 대기를

 

 사는 곳은 장악원 이웃이구요

 벼슬은 혜민서에 속해 있다오.

 아침에 화류(花柳)의 땅에서 눈을 떠서

 또 화류를 향해 가는 길이라오.

 

라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모두 조소하였다. 여기 보이는 '장악원(掌樂院)'과 '혜민서(惠民署)'는 기생을 교육시키는 곳이고, '의녀(醫女)'는 약방기생(藥房妓生)을 가리키는 것이다.

 

 3. 기생(妓生)의 사회적(社會的) 직능(職能)

 

[무릇 천지만물(天地萬物)에는 六氣(陰.陽.風.雨.晦.明)가 있는데, 그 중 하나에 더럽고 간악한 기(氣)가 있으니, 그 간악한 기(氣)를 소통시켜 버려야만 청명한 기분을 제대로 보존할 수 있다. 비유하건대 대도시에 개천이 있어서 모든 더러운 것을 그리로 흘려버려야만 집집마다 정원을 깨끗이 유지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한(漢)의 문정공(文定公)이 기생(妓生)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인데, 기생은 사회제도를 발전시킴에 없어서는 안 될 필요악(必要惡)이란 것이다. 요즈음 어떤 나라에서는 공창제도(公娼制度)를 두고 있기도 한 것을 보면 그때에도 벌써 이런 것이 논의 대두되었던 모양이며, 현재 사회에서도 이것은 커다란 문제꺼리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이에 반해서 기생의 제도를 폐지하자는 논의도 많았던 것 같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보면 태조 4년에 박경(朴經)이 기생의 폐지를 발의하였고, 동(同) 11년에는 임금 자신이 기생 제도의 폐지를 발의했으나 개국 공신 하륜(河淪)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영주(英主) 세종(世宗)이 또 발의했으나 영의정 허조(許稠)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없애지 못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런 많은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그 필요성이 강조되기도 하여 어쩔 수 없이 흐지부지되어 버리고 말았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용재총화]의 기록을 보자.

 

[허문경공(許文敬公)은 마음가짐이 맑고 엄하였다. 집을 다스리는 데에는 엄격하여 법이 있고, 자제(子第)들을 가르치는 데는 다 [소학(小學)]의 예(禮)를 사용하였다. 터럭만한 미세한 행동에도 다 스스로 삼가니, 사람들이 '허공(許公)은 평생에 음양(陰陽)의 일은 모를 것이다.'고 말하였다. 공이 웃으며 '만약 내가 음양의 일을 알지 못한다면 허(후)와 눌(訥)은 어디에서 생겼겠는가'라고 웃으며 말하였다.

 

그때에 주읍(州邑)의 창기(娼妓)를 폐지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임금이 이 문제를 정부의 대신들에게 문의하라고 명령하였다. 모두가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의론이 오직 공(公)의 차례에까지 미치지는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속으로 공은 아마 맹렬히 폐지를 주장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공이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누가 이 계책을 내었는지요, 남녀의 관계는 사람의 커다란 욕망으로서 금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읍의 창기(娼妓)는 다 공유물로서 그것은 취하여도 무방하지만, 만약 이 금령(禁令)을 엄중하게 한다면 나이가 젊은 봉명사신(奉命使臣)인 조사(朝士)들은 다 불의의 방법으로 사삿집의 여자를 빼앗게 될 것이니, 영웅준걸(英雄俊傑)들이 죄에 걸리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폐지하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고 하였다. 마침내 공의 논의에 쫓아 그냥 두고 폐지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런 찬·반의 논란 속에서도 이 기생의 제도가 계속해서 번창해 갔던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정다산(丁茶山)은 그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조선조에 와서 기생이 번창하게 된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사회제도의 결함에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정사(人間情事)의 자연한 발로란 것이다.

 

 일부다처주의(一夫多妻主義)가 공인되던 당시의 사회제도 하에서 대갓집 젊은 며느리들이 공규(空閨)를 달래던 방법으로 각신(角腎)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당시 공공연히 축첩을 합리화하던 제도적인 모순이 기생의 번창을 더욱 자극했고, 또 양반들의 총애를 받으며 수청(守聽)을 들거나, 더 나아가서는 몸을 파는 일종의 생활 수단으로 타락하기까지 했다. 이런 제도가 사회 발전의 필요악이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 하겠다.

 

4. 기생(妓生)의 생활단면(生活斷綿)

 

이들 기생들은 아무리 '지과흥청(地科興淸)'이니 '천과흥청(天科興淸)'이니 하여 그 세도가 삼공(三公) 부럽지 않았다 해도, 역시 신분이 낮은 천기(賤妓)로 대우했던 것이 당시의 사회였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수원(水原)의 기녀(妓女)가 손님을 거부했다하여 매를 맞았다.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어우동(於宇同)은 음탕한 짓을 즐겨 하였다고 하여 죄를 받았고, 나는 음탕하지 않았다고 하여 죄를 받았으니, 조정의 법이 어지 이같이 같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말이 정론(正論)이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만 보아도 기생에 대한 사회적인 대우를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음란하다고 해서 죄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한다면, 음란하지 않다고 해서 죄를 받는 일은 무엇인가?

 

[성산월(星山月)은 성주(星州)의 기생인데, 지방에서 뽑혀 장안에 들어온 선상기(選上妓)로 제일 유명하였다. ...그가 늙어서 퇴기(退妓)가 되어서는 늘 자기 평생에는 세 가지 우스운 일이 있었노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 하나는 일찍이 김상서(金尙書) 모공(某公)의 집에 연회(宴會)가 있어서, 가서 술과 음식을 먹으며 시조와 잡가를 불렀다.....

 

즐거운 연회가 파하고 금객(琴客) 김철석(金哲石),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 계섬(桂蟾), 매월(梅月) 등이 모두 기뻐하였다. 며칠 후에 심부름하는 하인이 와서 모재상(某宰相)이 불러 보기를 청한다 하거늘 금가객(琴歌客)과 여러 기생이 급히 와서 기다려 보니, 일전 김상서(金尙書)의 연회에 왔던 재상이었다. 뜰 아래 여러 사람이 모였는데, 그 재상이 의관을 정제하고 한마디 말도 없이 곧 노래를 부르라 하거늘 흥취(興趣)도 없이 노래를 불렀다. 초장(初章)이 끝나고 2장(章)으로 넘어가 곡이 끝나지 않았는데, 그 재상이 갑자기 크게 노하거늘..... 모든 기생이 서로 눈짓을 하여 곧 우조(羽調)를 대성고창(大聲高唱)하여 잡가를 불러대니 전혀 곡조에 맞지도 않았다. 그제야 그 재상이 크게 기뻐하며 잘 한다 잘 한다 칭찬하여 마지 않더라....... 노래가 끝나니 박주건포(博酒乾脯)를 내어 먹이고는 물러가라 하거늘, 마침내 서로 보고 웃으며 돌아왔다.

 

또 한 번은 하인이 와서 모 재상이 불러 보기를 청한다 하거늘, 가능한 한 빨리 갔다. 만일 늦으면 죄책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두려울 따름이었다. 금가객(琴歌客)과 하인을 따라 동문(東門) 밖에 있는 연미동(燕尾洞)에 가니, 아주 작은 집인데 주인이 머리에 때 묻은 수건을 쓰고 떨어진 옷을 입고 있었다. .... 이야기도 할 맛이 없었는데, 향객(鄕客) 몇 사람과 대좌하여 시조 몇 수를 부르니, 주인이 손을 내저으며 더 이상 못 듣겠으니 그치라고 하더니, 각각 탁주(濁酒) 한 잔으로써 먹이고 돌아가라 하거늘, 쓴 웃음을 지으며 돌아왔다. 이 모두가 가소로운 일들일 뿐이다.]

 이것은 [동야휘집(東野彙集)]에 보이는 기록이다.

 

창(唱)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돈이 있다고, 권력(權力)이 있다고 불러다가(남이 불러다 부르게 하니까) 전혀 이해가 안 가서 중도에서 그만두게 하고는 박주(博酒)와 건포류를 먹여서 돌아가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지체 없이 가야지 늦으면 큰 벌을 받기 때문에 오라는 즉시 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이들 예능인(藝能人)들의 생활상이었다. 누구든 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이 부르면 내키지 않아도 가서 노래를 불러야 했고, 그 대가로 겨우 박주(搏酒) 건포류(乾脯類)를 얻어먹고 쓸쓸히 웃으며 돌아와야 했다. 이것이 당시의 금객(琴客), 가객(歌客), 기생(妓生) 들의 생활이요 신분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금객, 가객, 기생이 한 티임이 되어서 불려 다녔는데, 그들을 데리고 다니던 일종의 스폰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 중에 심용(沈鏞)이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다.

 

[심용(沈鏞)은 재산도 있고 풍류를 알아, 한때는 가희(歌姬), 금객(琴客), 주도(酒徒), 사붕(詞朋)이 몰려와서 같이 다녀 문전성시(門前盛市)를 이루었다. 무릇 장안(長安)의 연유(宴遊)에는 공(公)에게 청하지 않으면 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심공(沈公)이 죽은 후에 파주(坡州)의 시곡(柴谷)에 장례를 지냈는데 금객(琴客)가 가희(歌姬)들이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평생에 심(沈)의 풍류(風流)와 그가 사람을 알아주고 음률을 이해하는 것을 알고 그를 따랐거늘, 이제 그가 죽으니 노래가 끊겼고 거문고가 쇠잔하거늘, 우리가 장차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하고 슬퍼하였다. 시곡(柴谷)의 장지에 모여 일장가(一場歌) 일장금(一場琴)을 부르고 마침내 무덤 앞에서 통곡하고는 각기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으나, 오직 기생 계섬(桂蟾)만은 무덤을 지키고 돌아가지 않았다....] 이것은 [청구야담(靑丘野談)]에 보이는 기록인데, 스폰서와 가희(歌姬)들과의 일면을 알려 주는 기록이다.

 

그러나 한편 이 기생들은 풍류를 알고 시를 아는 일면이 있는가 하면, 바람둥이 양반 자제, 분수 모르는 한량들을 골탕 먹인 일들과 철저하게 남자로부터 돈을 뺏어낸 기생들도 많았다.

 

이능화님의 [朝鮮解語花史]에 전하는 남자를 껍데기째 벗긴 일화 하나를 소개하여 기녀들의 다른 일면을 보자.

[옛날 전라도 전주에서 어떤 사람이 생강 한 배를 싣고 평양으로 장사를 왔다. 관서지방에는 생강이 나지 않았으므로 평양에서는 생강이 더없이 귀한 물건이었다. 장사꾼은 생강 한 배를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팔았다. 그는 갑자기 많은 돈을 벌어 큰 부자가 되었다.

 

일약 거부가 된 생각장수는 이왕 평양까지 온 김에 말로만 듣던 색향(色鄕) 평양의 여색(女色)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수중에 들어오면 여색을 보고 싶은 것이 남자의 속성이던가. 어쨌든 생강 장수는 결국 돈이 많은 것을 기화로 기생 하나를 사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기생은 산전수전 다 겪은 능수능란한 기생이어서 생강장수는 몇 달을 기생집에 묻혀서 헤어날 줄을 몰랐다. 그야말로 왕후장상(王侯將相)도 부럽지 않은 호화판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가진 돈이란 한도가 있는 법, 생강 한 배 값이 완전히 바닥나 버렸다. 돈이 떨어지자 기생의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냉담해졌다. 원래가 돈을 바라고 달려 붙은 기생이 아닌가. 이제는 보기도 싫으니 이 집에서 나가든지 생활비를 대든지 하라는 것이다. 장사꾼은 더 이상 버틸 돈이 있을 리 만무다. 생강 한 배를 싣고 와서 얻은 돈이 바닥이 났으니, 돈이 나올 구멍은 깜깜했다. 재물을 말끔히 빼앗기고 기생집에서 쫓겨난 생강장수는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돈 떨어지자 임 떨어진 생강장수였다. 집에 돌아갈 노자까지 떨어진 장사꾼은 길가 목노집 툇마루에 걸터  앉아 막걸리 잔을 들이키면서 신세 한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아무리 뉘우쳐 보았자 행차 뒤의 나발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서당에서 얻어 들은 지식으로 즉흥시 한 수를 읊었다.

 

 멀리서 보면 말의 눈깔도 같고

 가까이서 보면 진무른 헌데 같은데,

 두 볼에는 이빨도 하나 없으면서

 어찌 생강 한 배를 꿀꺽 먹어 버렸나.

 {원간사마목(遠看似馬目) 근시여농창(近視如濃瘡)

 양협무일치(兩頰無一齒) 능식일선강(能食一船강)}

 

생강 한 배, 그 많은 돈을 깡그리 털어 넣고 얻은 소득이 이런 꼴로 나타난 것이다.

돈에 악착스러웠던 것은 비단 평양기생 뿐만은 아니었다. 어느 고을에건 이런 유형의 기생들은 몇 명씩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면서도 유난히 평양 기생들이 악명 높고 두드러진 것은 평양이 워낙 대도시요, 거기서 기생들에게서 녹아난 거부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5. 기생(妓生)들의 작품 유산(作品遺産)

 

우리의 시조문학사에 나타난 여성의 위치는 대단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큰 것이다. 남성 독점의 시조문학사에 비록 양적으로는 미미하나 그것이 미미하면 할수록 더욱 귀중한 유산인 것이다. 우리 문학에 있어서 여류 작품은 신화(神話)나 건국신화(建國神話) 속에 깃들인 여성들의 모습, 상고시대 [공후인]의 작자 여옥(麗玉)을 비롯해서 향가(鄕歌)와 여류(女流), 삼국시대의 부녀(婦女)들의 노래, 여화(麗話)에 나타난 여류(女流) 등 많지는 않으나 꾸준히 그 명맥을 이어 왔다. 그러나 이조(李朝)에 들어와서는 여성들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그렇지 못했다.

 

[부인은 대강 서사(書史)와 논어(論語), 모시(毛詩), 소학(小學), 여사서(女四書)나 읽어서 그 뜻을 통하고, 제가(諸家) 성씨(性氏)와 역대 국호(國號)와 성현(聖賢)들의 명자(名字)을 알면 족하다. 함부로 시사(詩詞)를 지어 외간에 퍼짐은 불가하다.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독서와 강의는 장부(丈夫)의 일이니, 부인이 이를 힘쓰면 폐해가 무궁하리라. {이익, 星湖僿說}]

 

위의 기록들은 한 마디로 여성들의 사회의식이나 여권을 송두리째 무시하고, 남성들의 완농물(玩弄物)로 취급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이런 사회적 여건 속에서 성장된 시조문학에 여류의 작품이 많을 수 없을 것임은 능히 추측할 수 있는 일이나, 그런 속에서나마 시조 문학에는 여류의 작품이 다수가 전해져 온다. 시조문학에 참여한 여류작가는 모두 31명에 불과한데, 그 중 '정몽부 모씨(鄭夢周 母氏)'와 '김홍도(金弘道)', '부지하허인(不知何許人)', '궁녀(宮女)'라고 표기된 일반여류를 제하면 27명이 모두 기녀작가이다.

 

다음은 기녀 작가와 작품 수를 살펴본 것이다.

 

강강월(康江月)-3수, 계랑(桂娘)-4수, 계섬(桂蟾)-1수, 구지(求之)-1수

금춘(今春)-2수,  소백단(小栢丹)-1수, 다복(多福)-1수, 매화(梅花)-8수,

명옥(明玉)-1수, 문향(文香)-1수, 소춘풍(笑春風)-3수, 부동(夫同)-4수,

금홍(錦紅)-1수,송이(松伊)-14수,옥선(玉仙)-1수, 송강첩(松江妾)-1수,

옥이(玉伊)-1수, 진옥(眞玉)-1수, 천금(千錦)-1수, 한우(寒雨)-1수,

송대춘(松臺春)-2수, 입리월(立里月)-2수, 홍랑(紅娘)-1수, 홍장(紅粧)-1수,

황진이(黃眞伊)-6수, 평안기(平安妓)-1수, 평양인무명씨여인(平壤人無名氏女人)-1수.

 

위에서 보이듯이 31명 중 일반여류 4명을 제하면, 기녀작가 27명에 의해 66수의 작품이 전하고, 일반여류의 작품 5수를 합하면 모두 71수, 이것이 현전하는 4,000여 수의 시조 작품 중에서 여류작품의 전부이다. 물론 위에 예시한 기녀의 개인 작품수는 그 작품의 작가로 확실히 단정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어서 그것을 고증해서 밝히면 그 작품량은 더욱 줄어들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기녀들의 사회적인 신분은 미미한 것임은 주지의 일이나 전적(典籍)에 표기된 '작가표시(作家表示)'를 보아도 알 수 있다.

 

1)이름을 표시한 기녀

 계섬(桂蟾), 구지(求之), 다복(多福), 매화(梅花)

 

2)출신 성분을 표시한 기녀

 계랑(桂娘), 매화(梅花), 명옥(明玉), 송대춘(松臺春), 옥선(玉仙), 홍장(紅粧)  진이(眞伊), 강강월(康江越) 평양인무명씨여인(平壤人無名氏女人)

 

3)기타 표기

 송강첩(松江妾)

 

이상에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첫째, 이조의 문학, 특히 시조문학에 있어서의 여류문학은 전부가 기녀들의 손에 의해서 그 명맥이 유지되어 왔으며, 시조 문학이 양반귀족들에게 한정된 듯한 감을 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점차 대중화하여 명실상부한 평민문학(平民文學)으로 그 폭이 넓어졌다 하겠다.

 

둘째, 그런 속에서도 여전히 성별의 구분에 절대적으로 폐쇄적이었으며, 유교의 지도 이념인 남존여비(男尊女卑)의 뿌리 깊은 윤리 인습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다.

 

세째, 작가명을 분명히 밝힐 수 없었고, 또 작품과 작가의 표시가 혼동되어 전하고 있음을 보아도 기녀들은 사회적으로 크게 천시를 받았음을 입증하게 된다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이런 기녀들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시조문학에서 여류의 작품은 불모지(不毛地)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나마 그들의 출현은 시조문학사에서 귀중한 유산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들 작품들의 내용면을 보면 대개가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것이나, 연모(戀慕)의 정(情), 유혹(誘惑)의 손길, 늙음에 대한 한탄(恨嘆), 떠나버린 임에 대한 원망(怨望), 남녀간의 희학(戱謔), 고고(孤高)한 절개(節介), 인생의 무상함 등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애절한 노래들이다. 참고로 앞에서 언급되지 않은 기녀의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1. 강강월(康江月)-맹산기(孟山妓) 자천심(字天心)

 

 기러기 우는 밤에 내 홀노 잠이 업셔

 잔등(殘燈) 도도 혀고 전전불매(轉輾不寐)하는 차에

 창(窓) 밧긔 굵은 비 소래에 더욱 망연(茫然)하여라.

 

 釋 (기러기 우는 밤에 나 홀로 잠이 없어,

 꺼져가는 등잔불을 돋우고 잠 못 들어 뒤척이던 차에

 창 밖에 내리는 굵은 빗소리에 그대 소식 더욱 아득하여라.)

 시시(時時) 생각(生覺)하니 눈물이 몃 줄기요.

 북천상안(北天霜雁)이 언의때여 도라올고.

 두어라 연분(緣分)이 미진(未盡)하면 다시 볼가 하노라.

 

 釋 (때때로 생각하니 눈물이 몇 줄기인가.

 북쪽 하늘 서릿 기러기는 어느 때나 돌아올까.

 두어라 인연이 다하지 않으면 다시 볼 수 있겠지)

 천리(千里)에 맛나따가 천리(千里)예 이별하니

 천리(千里) 꿈 속에 천리(千里)님 보거고나.

 꿈 깨야 다시금 생각(生覺)하니 눈물계워 하노라.

 

 釋 (천리 밖에서 만났다가 천리 밖에서 이별을 하니,

 천리 밖의 꿈 속에서 천리 밖의 임을 보겠구나.

 꿈 깨어 다시금 생각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2. 계랑(桂娘)-부안명기(扶安名妓)

 

 청조(靑鳥) 오노고야 반갑다 님의 소식(消息)

 약수(弱水) 삼천리(三千里)를 네 어이 건너온다.

 우리 님 만단정회(萬端情懷)를 네 다 알가 하노라.

 

 釋 (靑鳥-반가운 使者, 푸른 새가 온 것을 보고, 동방삭이가 西王母의 使者라고 한 漢武의 고사에서 온 말-가 왔구나

 반갑다 임의 소식이여, 弱水三千里-仙京에 있다는 물 이름. 끝없이 먼 것을 말함-를 너는 어이 건너 왔느냐(우리 임은 못 오시는데),

 우리 임의 수많은 정담과 회포를 너는 다 알까 하노라.)

 

 

3. 계섬(桂蟾)-신원 미상

 

 청춘(靑春)은 언제 가면 백발(白髮)은 언제 온고.

 오고 가는 길을 아던들 막을낫다.

 알고도 못 막을 길히니 그를 슬허하노라.

 

 釋 {청춘은 언제 가며 백발은 언제(어느새) 왔는가.

 오고 가는 길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막을 수 있었겠는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을.)

 알고도 못 막을 길이니, 그것을 슬퍼 하노라.}

 

 

4. 구지(求之)-평양명기(平壤名妓)

 

 장송(長松)으로 배를 무어 대동강(大洞江)에 흘니 띄여

 유일지(柳一枝 ) 휘여다가 구지구지 매야시니

 어듸셔 망령(妄伶)에 거슨 소헤 들나 하나니.

 

 釋 (낙낙 장송으로 배를 지어 대동강에 흘러가게 띄워,

 한가닥 버들가지(求地의 사랑하는 애인 柳一枝)를 휘어다가,

 굳게 굳게(자신의 이름 '求之'의 음차) 매었으니,

 어디서 망녕의 한량은 沼(못)에 들라고 유혹하는구나.)

 

 

5. 궁녀(宮女)-선묘조내인(宣廟祖內人)

 

 압못셰 든 고기들아 네 와 든다 뉘 너를 몰아다가 엿커를 잡히여 든다.

 북해청소(北海淸沼) 어듸 두고 이 못새 와 든다

 들고도 못 나는 정(情)이야 네오 내오 다로랴.

 

 釋 (앞못에 든 고기들아 네가 스스로 와서 들었느냐, 아니면 주가 너를 억지로 몰아다가 넣어 잡혀 들었느냐.

 북쪽의 넓은 바다와 맑은 연못들을 어디에 두고, 이 좁고 더러운 못에 들었느냐.

 네 스스로 들어오기는 하였어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는 정이나,

 내가 일방적 으로 임에게 준 정을 떼지 못해 애쓰는 마음은, 너나 나나 다를 것이 있겠느냐.)

 

 

6. 금홍(錦紅)-평양기(平壤妓)

 

 벽천(碧天) 홍안성(鴻雁聲)에 창(窓) 열고 내다보니

 설월(雪月)이 만정(滿庭)하여 님의 곳 빗츄려니

 아마도 심중안전수(心中眼前愁)는 나뿐인가 하노라.

 

 釋 (푸른 하늘 기러기 소리에 창문 열고 내다 보니,

 눈 속에 달빛이 뜰에 가득하여, 임이 있는 곳을 비칠 것이니,

 아마도 마음 속 깊이 든 단장의 근심은 -임께서는 나를 생각지도 않은데,

 나 혼자서만 그리워 못 견디는 창자를 끊는 슬픔은-

 나 혼자뿐인가 하노라.)

 

 

7. 다복(多福)-신원 미상

 

 북두성(北斗星) 기우러지고 오경경점(五更更點) 자자간다.

 십주가기(十洲佳期)는 허랑(虛浪)타 하리로다.

 두어라 번우한 님이니 새와 무삼 하리오.

 

 釋 (북두칠성은 기울어지고, 새벽녘이 다 된 때에,

 십주-신선들이 산다는 성-에서 만나리라는 기약은, 아마도 거짓이라 하겠구나.  두어라 바쁘신 임이니 시기하여 무엇하겠는가.)

 

 

8. 매화(梅花)-평양기(平壤妓)

 

 죽어 니저야 하랴 살아 글여야 하랴.

 죽어 닛기도 얼엽꼬 살아 글의이도 얼여왜라.

 져 님아 말 한 말씀만 한소라 생사결단(生死決斷) 하리라.

 

 釋 (죽어서 잊어야 하랴, 살아서 그리워하면서 살아야 하랴.

 죽어서 그 임을 잊기도 어렵고, 살아서 그리워하는 일도 어렵구나.

 저 임이여 한 말씀만-나를 사랑하는 지 않는지를- 하시구려.

 죽든 살든 그 말을 들은 후에 결단을 내리라.)

 평생에 밋을 님을 글려 무삼 병(病)들 손가.

 시시(時時)로 상사심(相思心)은 자기 하는 타시로다.

 두어라 알들헌 이 심정을 님이 어이.

 

 釋 (한평생 동안을 믿고 살아갈 임인데, 그런 임을 그리워 하여 무슨 병이 든단 말인가.

 때때로 임을 생각하는 마음은, 자기 스스로 생각할 탓이로구나.

 두어라 임을 그리는 알뜰한 이 마음을, 임이 어이 짐작이나 하겠는가.)

 

 

9. 문향(文香)-성천기(成川妓)

 

 오냐 말 아니 따나 실커니 아니 말랴.

 하늘 아래 너 뿐이면 아마 내야 하려니와

 하늘이 다 삼겻스니 날괼 인들 업스랴.

 

 釋 (오지 말라고 하거나 따나, 싫은 것이니 아니 그만 두랴.

 하늘 아래 너뿐이라면 아마 '나다'하고 뽐내려니와,

 하늘이 모든 사람을 만들어 내었으니 '나를 사랑할 사람' 인들 없으랴.)

 

 

10. 부동(夫同)-기(妓)

 

 성은(聖恩)을 아조 닛고 고당학발(高堂鶴髮) 모르고져

 옥중(獄中)에 �어진 줄 뉘 타슬 하단 말고.

 뎌 님아 널노 된 일이니 네 곳칠가 하노라.

 

 釋 (임금님의 은혜를 아주 잊고, 집에 계신 두 분 늙으신 부모님을 모르는 체하고 싶구나.

 옥중에서 죽어진다 해도 누구를 탓하겠다는 말인가.

 저 임이시여 당신으로 하여 이렇게 된 일이니, 당신이 고쳐 주실 수 있을까 하노라.)

 청조(靑鳥)가 유신(有信)타 말이 아마도 허랑(虛浪)하다.

 백리수성(百里水城)이 익수(溺水)도곤 머돗던가.

 지금에 무소식하니 잠 못 닐워 하노라.

 

 釋 (청조-소식을 전하는 使者-가 신의가 있다는 말이, 아마도 거짓이구나.

 십리 떨어진 물길이 약수 삼천리보다 멀단 말인가.

 지금까지 임께서 소식이 없으니 잠을 못이루겠구나.

 춘향(春香)이 네롯더냐 이도령(李道令) 긔 뉘러니

 양인일심(兩人一心)이 만각(萬却)인들 불을소야

 아마도 이 마음 비최기는 명천(明天)이신가 하노라.

 

 釋 (춘향이 너였느냐, 이도령은 그 누구였더냐.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 같다 하더라도 조금인들 부럽겠냐.

 아마도 이 마음 비취기는 밝은 하늘인가 하노라.)

 효이(孝已) 죽어 갈 제 미생(尾生)인들 혼자 살냐

 숙세(宿世)에 연분(緣分)이오 정중(鄭重)한 언약(言約)이라.

 금대(今代)에 우로빈(雨露頻)하니 다시 볼가 하노라.

 

 釋 (孝가 이미 죽어 갈 제, 이 몸인들 혼자서 살겠느냐.

 전생의 연분이오 임과 굳게 맺은 언약이라.

 지금에 임금님 은혜가 자주 내리니,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노라.)

 

 

11. 부지하허인(不知何許人)-신원 미상

 

 춘하추동(春夏秋冬) 지수당(地水堂)은 벽이화(碧李花) 자악화(紫악花)요

 군자연(君子蓮) 대부송(大夫松)을 지금에 남한풍류(南漢風流)는 김상국(金相國) 민상국(閔相國)이라 할낫다.

 

 釋 {춘하추동 지수당(地水堂)에는 푸른 오얏 붉은 악화요

 군자는 연꽃이요 대장부는 푸른 소나무인 것을

 지금의 남한의 풍류랑은 김상국과 민상국인가 하노라.}

 

 

12. 소주(小奏)-창평양(娼平壤)

 

 상공(相公)을 뵈온 후(後)에 사사(事事)를 밋자오니

 굴직(掘直)한 마음에 병(病)들가 염려(念慮)ㅣ 러니

 이러마 져러챠 하시니 백년동포(百年同飽) 하리이다.

 

 釋 (상공을 뵈온 후에 모든 일을 믿사오니

 옹졸하고 고지식한 마음에 병이 들까 염려더니,

 이렇게 하마 저렇게 하자 하니 백년 해로 하리이다.)

 

 

13. 송대춘(松臺春)-맹산기(孟山妓)

 

 님이 가신 후에 소식이 돈절(頓絶)하니

 창(窓) 밧긔 앵도(櫻桃)가 몇 번이나 피엿난고.

 밤마다 등하(燈下)에 홀노 안저 눈물계워 하노라.

 

 釋 (임께서 떠나가신 후에 소식이 끊어지니

 창 밖의 앵두꽃 복사꽃이 몇 번이나 피었는가.

 밤마다 등잔불 밑에 홀로 앉아 눈물겨워 하노라.)

 한양(漢陽)셔 떠온 나뷔 백화총(百花叢)에 들거고나

 은하월(銀河月)에 잠간 쉬여 송대(松臺)에 올나 안져

 잇다감 매화춘색(梅花春色)에 흥(興)을 계워 하노라.

 

 釋 (서울서 떠온 나비가 온갖 꽃떨기 속에 드는구나.

 은하월에 잠깐 쉬어 송대에 올라 앉아,

 이따금 매화 핀 빛에 흥을 겨워 하노라.)

 

 

14. 송이(松伊)-평양기(平壤妓)

 

 오동(梧桐)에 우적(雨滴)하니 오현(五絃)을 잉애는 듯

 죽엽(竹葉)에 풍동(風動)하니 초한(楚漢)이 셧도는 듯

 금준(金樽)에 월광명(月光明)하니 이백(李白 ) 본 듯하여라.

 

 釋 {오동나무에 빗방울이 떨어지니 오현금(五絃琴)을 타고 있는 듯.

 댓잎이 바람에 흔들리니 초(楚)와 한(漢)이 섞이에 다투는 듯,

 금술동이에 달빛이 밝으니 이백(이백)을 본 듯하구나.}

 

 

15. 옥선(玉仙)-진양기(晋陽妓)

 

 뉘라샤 졍됴타 하던고 이별의도 인졍인가.

 평생의 쳐음이요 다시 못 볼 님이로다.

 아매도 졍 쥬고 병 엇난 나뿐인가.

 

 釋 (누구서 정이 좋다고 하였던가. 이별에도 인정이 있는가.

 평생에 처음이요 다시 못 볼 임이로다.

 아무래도 임에게 정을 주고 병 얻기는 나뿐인가 하노라.)

 

 

16. 옥이(玉伊)-신원 미상

 

 옥(鈺)을 옥(玉)이라커든 형산백옥(荊山白玉)만 여겻더니

 다시 보니 자옥(紫玉)일시 적실(的實)하다.

 맛참애 활비비 잇더니 뚜려 볼가 하노라.

 

 釋 {옥(玉)이 옥(玉)이라 하거늘 형산(荊山)에서 나는 백옥(白玉)으로만 생각했더니,

 다시금 자세히 보니 자옥(紫玉)임이 틀림 없구나.

 마침내 활비비(옥을 뚫는 송곳) 있으니 뚤어 볼까 하노라.}

 

 

17. 입성월(立星月)-명기(名妓)

 

 시문(柴門)에 말을 매고 님과 분수(分手)할 제

 옥빈주루(玉頻珠淚)가 눌노 하야 흘넛는고.

 아마도 못 니즐슨 님이신가 하노라.

 

 釋 (사립문 밖에 말을 매어놓고, 사랑하는 임과 손 잡고 이별할 때에,

 옥 같은 고운 얼굴에 구슬 같은 눈물은 누구로 인하여 흘렀는가.

 아마도 못 잊을 것은 사랑하는 임인가 하노라.)

 청조(靑鳥)도 다 나라가고 홍안(鴻雁)이 끗치엿다.

 수성적소(水城滴所)에 다만 한 꿈 뿐이로다.

 꿈길이 자최 업스니 그를 슬허 하노라.

 

 釋 (청조도 다 날아가고 기러기마저 날기를 그쳤구나.

 수성의 적소에는 다만 꿈뿐이로구나.

 꿈길은 자취가 없으니(임을 보려고 다녀간 줄을, 임께서 알지 못하니) 그를  설워 하노라.)

 

 

18. 천금(千錦)-신원 미상

 

 산촌(山村)에 밤이 드니 먼듸 개 즈져 온다.

 시비(柴扉)를 열고 보니 하늘이 차고 달이로다.

 져 개야 공산(空山) 잠든 달을 즈져 무슴 하리오.

 

 釋 (산마을에 밤이 드니 먼 곳의 개만 짖는구나.

 사립문을 열고 밖을 보니, 추운 하늘엔 달만 떠 있구나.

 저 개야 빈 산에 잠든 달을 짖어 무엇하겠느냐.)

 

 

19. 평안기(平安妓)-신원 미상

 

 위수(渭水)에 고기 업서 여상(呂尙)이 듕 되단 말가.

 낫대를 어대 두고 육환장(杖)을 디퍼난다.

 오늘랄 서백(西伯)이 와 계시니 함� 놀고 가려 하노라.

 

釋 {渭水(太公望 呂尙이 고기 잡던 渭川)에 고기가 없어 태공망이 중이 되었단 말인가.

 낚싯대를 어디에 두고 육환장(고리가 여섯 개 달린 지팡이)을 짚었느냐.

 오늘날 西伯(周文王이 은의 雍州의 州長이 되었기 때문에 일컫는 말)이 와 계시니

 함께 놀고 가려 하노라.}

 

 

20. 평양인무명씨여인(平壤人無名氏女人)-신원 미상

 

 그리고 못 볼 졔는 일단(一但) 상사(想思) 뿐일러니

 잠간(暫間) 보고 여흰 정(情)은 맷치거다 구곡간장(九曲肝腸)

 져 님아 내 헌 말 잇지 말고 변개(變改) 업시.

 

 釋 (그리워하면서 못 만나 볼 때에는, 보고 싶은 맘뿐이더니,

 잠깐 보고 이별한 정이 맺혔구나 구곡간장에,

 저 임이시여, 내가 한 말을 잊지 말고 변함없이 사랑해 주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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