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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時調詩 ***/妓女의 時調

진옥의 시(진옥과 정철)

by 산산바다 2006. 12. 7.

산과바다

           

 

        기생 진옥의 시조

 

- 우리 時調로 유명한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 정철鄭澈(1536-1593)의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인데 그의 외설시조도 있어 감히 여기 소개한다.

- 松江 정철鄭澈이 강계의 이름 없는 기생 眞玉과 주고받은 격조가 높은 진한 외설시조

- 귀양살이하는 정철 선생이 달 밝은 밤 적막한 처소에서 혼자 취해 누워 있는데 오동잎 지는 소리는 스산하고 귀뚜라미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그를 더욱 쓸쓸하게 하였습니다. 밖에서 나즈막한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송강은 누운 채로 누구인가 물었습니다. 대답 대신 문이 스르르 열리고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한 여인이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들어섰습니다. 달밤에 보는 지붕위의 한 송이 박꽃처럼 여인은 너무나 고왔습니다. 그가 바로 기생 眞玉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술상을 마주 하고 앉은 그날밤, 송강 선생께서 은근한 음성으로 진옥에게 말했습니다.

 

어느 날, 송강 정철과 기생 진옥 두 사람이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거나해진 송강이 입을 열었다. "진옥아, 내가 한 수 읊을 테니, 너는 그 노래에 화답을 해야 한다."

 "예, 부르시옵소서."

 "할 수 있겠느냐? 지체해서는 안 되느니라." "......." 진옥은 말없이 거문고의 줄을 고른다.

 

정철은 목청을 가다듬어 읊는다.

 

"玉이 玉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 하니 眞玉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뚜러볼가 하노라"

 

이 시조를 현대말로 풀이하면 대충 이렇습니다.

"옥이라 옥이라 하기에 번옥(가짜 옥 돌가루를 구워 만든 옥)으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자세히 보니 참옥(眞玉)임이 분명하구나.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여기서 살송곳이란 남성의 심볼을 의미)

 

송강의 시조 창이 끝나자 지체 없이 진옥이 받았습니다.

 

"鐵이 鐵이라커늘 섭철(섭鐵)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正鐵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골풀무 있으니 뇌겨볼가 하노라."

 

 

"쇠라 쇠라 하기에 순수하지 못한 섭철(잡다한 쇳가루가 섞인 쇠)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자세히 보니 정철(正鐵·松江은 鄭澈임)임에 틀림 없구나.

나에게 골풀무있으니 그 쇠를 녹여 볼까 하노라."

 

(골풀무란 쇠를 달구는 대장간의 풀무로서 여기서는 여자의 심볼을 의미)

그날밤

송강과 진옥은

이 시조를 촉매제로 하여 적소(適所)를 밝히는 촛불보다

더 뜨겁고 아름다운 사랑의 밤을 보냈다네여

 

 

선조 25년, 임진란을 계기로 그해 5월 오랜 적소의 생활에서 풀려 다시 관로(官路)에 나가게 되었을 때, 마지막 송강을 보내는 자리에서 진옥은 아쉬움을 이렇게 불렀다고 하네...

 

인간차야이정다(人間此夜離情多) 오늘밤도 이별하는 사람 하 많겠지요.

낙월창망입원파(落月蒼茫入遠波) 슬프다 밝은 달빛만 물 위에 지네.

석간금초하처백(惜間今硝何處佰) 애닯다 이 밤을 그대는 어디서 자오.

여창공청운홍과(旅窓空廳雲鴻過) 나그네 창가엔 외로운 기러기 울음 뿐이네.]

 

 

-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진옥(眞玉)의 절창(絶唱) -

1.정송강 여진옥상수답(鄭松江 與眞玉相酬答)

 

시조집 권화악부(權花樂府)에 정송강 여진옥상수답(鄭松江 與眞玉相酬答)이란 기록이 있다.

 

송강이 56세 때 이산해의 계락에 빠져 혼자서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다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 되었다.

그를 파직시켜 유배 보내면서 이 때 선조는 정철을 향해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져 있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 는 말을 하며 안타까워 했다. 선조가 56세의 늙은 재상에게

 

이렇듯이 노골적으로 꾸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철은 술과 여자에 심하게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한 때 이이도 그에게 '제발 술을 끊도록 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없애라' 고 충고했을 정도였다. 술을 좋아하였던 송강은 술을 마시고 취하면 그 취기를 바탕으로 어쩌면 그와 같은 빼어난 산문과 절편의 시를 뽑아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배된 그는 진주와 강계 등으로 이배되었다가, 57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여 의주까지 호종하기도 하였다. 유배지 강계에 우거해 있을 때 만난 아릿 다운 여인이 바로 노재상의 말년을 쓸쓸하지 않게 위로해준 진옥이라는 미모와 재기 발랄한 기생이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거나해진 송강이 입을 열었다.

 

"진옥아, 내가 한 수 읊을 테니, 너는 그 노래에 화답을 해야 한다."

"예, 부르시옵소서."

"할 수 있겠느냐? 지체해서는 안 되느니라."

"......."

진옥은 말없이 거문고의 줄을 고른다. 정철은 목청을 가다듬어 읊는다.

 

옥(玉)이 옥이라커늘 반옥(반玉)만 너겨떠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젹실(的實)하다

내게 살송곳 잇던니 뚜러 볼가 하노라

정철(鄭澈) 근악槿樂) 391

 

정철의 노래가 끝나자 거문고에 손을 올린 채로 진옥이 지체 없이 받는다.

 

(鐵)이 철(鐵)이라커늘 섭철(섭鐵)만 녀겨떠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잇던니 뇌겨 볼가 하노라.

진옥(眞玉)  근악槿樂) 392

정철은 놀랐다. 정말 놀랐다. 진옥의 즉석에서의 화창은 자타가 조선 제일의 문인이라고 칭송하는 당대의 대문장가 정철을 완전히 탄복시키고도 남았다. 송강의 시조에 자자구구 대구 형식으로 서슴없이 불러대는 진옥, 그녀는 정녕 뛰어난 시인이었다.

 

두 사람의 은유적 표현 역시 뛰어난다. '반옥'은 진짜 옥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모조 옥(玉), '진옥(眞玉)'은 '참玉'을 뜻하면서, 기생 '진옥(眞玉)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며, '살송곳'은 '살(肉)송곳'으로 '남자의 성기(性器)'를 은유하고 있는데, 진옥은 쉽게 그 뜻을 알아낸 것이다.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뜬다. '반옥'에 대해서 '섭철(鐵)', '진옥(眞玉)'에 대해서 '정철(正鐵)', '살송곳'에 대해서 '골풀무'의 대(對)는 놀라운 기지와 재치와 해학이다.

'섭철(鐵)'은 잡것이 섞인 순수하지 못한 쇠요, '정철(正鐵)은 잡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쇠를 뜻하면서, '송강 정철(鄭澈)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며, '골풀무'는 '불을 피우는데 바람을 불어 넣는 풀무'인데 '남자를 녹여내는 여자의 성기(性器)'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만하면 필설이 부끄러울 만치 문자 그대로 뛰어난 명기(名妓)이다.

 

()을 옥()이라커든 형산백옥(荊山白玉)만 여겻더니

다시보니 자옥(紫玉)일시 적실(的實)하다

맛참이 활비비 잇더니 뚜러 볼가 하노라

옥이(玉伊) 병가(甁歌) 545

 

철(鐵)을 철(鐵)이라커든 무쇠석철(錫鐵)만 여겻더니

다시보니 정철(鄭澈)일시 적실(的實)하다

맛참애 골풀모 잇더니 녹여 볼가 하노라

철이(鐵伊) 병가(甁歌) 546

 

병가에는 각각 옥이(玉伊)와 철이(鐵伊)라는 이름으로 올려져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서로 반대의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이다. 즉 옥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자신을 옥이라고 하면서 종장 에서는 남성의 성기를 은유하는 활비비로 뚫겠다는 엉뚱한 모순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철이라는 남자도 종장에서 여성의 성기를 은유하는 골풀모로 녹이겠다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어찌 이런 간단한 이치를 몰랐으랴.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이들이 단순히 재미를 더 하기 위하여 서로 이름만을 남자와 여자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즉 옥이라는 사람은 실제로 남자인 정철이고, 철이라는 사람은 여자로 진옥을 말하는 것이다.

 

먼저 작자가 이름 그대로 철이(鐵伊)라고 보면 여기서 '철(鐵)'은 작자 자신의 이름과 일치 하여 중의적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곧 송강이 작자 자신을 스스로 '섭철'이 아닌 '정철' 이라 하여 은근히 자신의 지조와 절개를 과시하면서, 누군가가 자신을 뜨거운 사랑으로 녹여 주기를 바라는 의도를 알 수 있다.

 

작자가 진옥(眞玉)이라 한다면, 먼저, 진옥이 정철을 만난 후 노재상과의 인연을 기리 살리 고자 자신의 이름을 철이(鐵伊)라고 스스로 고쳤는데 작자가 다른 이름 철이(鐵伊)라고 보면 여기서 철(鐵)은 남성을 비유했다고 볼 수 있다. 곧 '섭철'은 행실이 좋지 못하여 평이 나쁜 남성을, '정철'은 행실이 돈독하고 인덕이 높은 남성을 지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젊고, 아름답고, 뜨거운 가슴으로 인덕과 교양을 겸비한 이런 남성과 함께 사랑을 나누겠다는 심정을 헤아려 볼 수 있다.

 

그 두 번째는 좀 더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이런 은유를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남성의 성기는 비록 남성의 몸에 붙어 있지만 여성의 만족을 위하여 있는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여성의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그것도 남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므로 비록 여성의 몸에 붙어 있지만 사용권 자는 바로 남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로 보았을 때 옥이라는 여자는 남자 몸에 있는 여자의 것 활비비로 바로 여자인 옥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남자의 것인 골풀모를 뚫어보도록 하겠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인 철이의 노래도 같은 이치로 살펴보면 이해가 될 수 있으리라.

 

누가 이들의 시를 들어 추잡한 시정잡배의 오입질 노래라고 폄훼할 수 있을까아니 누가 평소 흠모하던 노 정객이자 대 문장가인 송강을 향한 사랑스런 여자의 육체와 정신의 합일을 이루는 행위를 숭고하지 않다고 말하는가?

칩다 네품에 드자 벼개 업다 네팔 베자

입에 바람든다 네혀 믈고 잠을 드자

밤중만 믈미러 오거든 네배 탈가 하노라

무명씨

 

이날 밤에 송강과 진옥은 뜨겁게 뜨겁게 정염을 불태웠다. 송강의 살송곳이 진옥의 골풀무 속에서 완전히 녹아져 갔는지 아니면 송강의 살 송곳이 견디어 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보다도 당시에 용광로가 없었기에 골풀무라는 표현을 썼을 뿐 실제로는 진옥의 젊고도 즐거운 육체는 용광로보다 더 뜨겁게 활활 타올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나이 쉰여섯이 되어 젊은 시절의 용력을 지니지 못할 수밖에 없는 노 재상 송강의 건강을 무엇보다 염려했던 진옥이 노 재상에게 여직 남아있는 태울 가슴이 마저 고스란히 타도록 부드럽게 골풀무의 불살을 조절했으리라.

 

 

2. 적거(謫居)의 외로운 밤을 찾아 든 여인

 

그의 적소(謫所)의 생활은 송강이 54세 때부터 시작되었다. 을축(선조 22)년 선조가 정철을 우의정에 특배하고, 이듬해인 선조 23년 좌의정에 제수하니 다시 관계에 나서는가 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비가 아들이 없고 측실에 아들이 있었는데, 왕이 생각하는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을 반대하고 공빈 김씨 소생인 광해군을 세우려 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산해의 배후 책동에 몰려, 결국은 파직되고 명천에 유배되었다. 다시 진주. 강계로 옮겨 유배되었으니 이것이 그의 유배생활의 시작이다.

 

진옥은 본래 무명의 강계의 기녀였다. 그녀가 무명의 기생으로서 일약 이름을 떨친 것은 어쩌면 강계에 유배된 송강을 그녀가 가까이에서 뫼신 인연이 계기가 되어 송강의 명성과 더불어 빛이 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진옥은 참으로 기재가 뛰어난 여인이었음은 틀림없다. 적어도 어느 면에서는 송강을 맞대하여 앉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대 정치가의 적거(謫居).

 

정철은 그의 생애에서 살펴보았듯이 지극한 효자였고, 충신 이었으며, 지나칠 정도로 원칙주의자였다. 지나친 원칙의 고수가 그를 협애한 인물로 만들어 이것이 당시 정치적 격동기에서동인과 서인의 심각한 당파싸움의 와중에서 뜻을 굽히지 않고 타협할 줄 모르는 소신 정치인으로 남게 했다.

우리 문학사에 가사 4편ㆍ시조 90여수ㆍ한시 760여수를 남겼는데 그가 남긴 작품들은 하나 같이 절창이어서 당대에서 지금까지 계속하여 주목을 받아오고 있다.

 

일세의 대문장가 정철이 강계 유배생활에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명리를 찾아 평생을 살아왔는데, 시비만 가득했고, 백 가지 근심이 귀밑머리만 성글게 하였다고 자탄하고있다.

이 때 그에게는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하고 외지로 유배당해 떠 돌아야 하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과 그 적소의 울분과 실의를 달래기 위한 그 무엇이 필요했을 것이다.

 

 

머귀닙 디거야 알와다 가을힌줄을

세우 청강이 서느럽다 밤긔운이야

천리의 님 니별하고 잠 못 드러 하노라

 

달이 밝고 오동잎 지는 소리가 스산한 밤, 귀뚜라미의 처량한 울음이 적객 (謫客)의 가슴을 더욱 괴롭히는 소슬한 초가을 밤은 쉬이 잠들기 어려웠으리라.

가난에 찌들고 농사 일에 몸이 지친 범상한 농민들이야 달 밝은 밤이라고 무슨 정취를 찾으며, 귀뚜라미 소리에 자연의 신비를 어찌 거기서 들을 수 있으며, 밤하늘의 먼 울음을 남기며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님 소식을 묻는 향수를 느낄 것인가?

 

내마음버혀내여별달을맹글고져

구만리당텬의반드시걸려이셔

고은님계신고대가비최여나보리라

 

 

임금과 위정자들과 백성들에 대한 세상사의 어지러움과 학문과 뜻으로 통하였던 이이, 성혼, 송익필 같은 친교를 나눈 동반자들과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처자의 안부. 시름을 잊고자 한잔 술을 찾아야 했고 그리움을 잊고자 또 한잔을 마셔야 했던 송강. 그는 그렇게 잠들지 못하는 긴 밤을 괴로워하면서 시를 썼다.

 

 

누은들잠이오며기다린들님이오랴

이재누으신들어내잠이하마오리

찰하리안즌고대셔긴밤이나새오리라

북전(北殿)

 

청천의 발근 달은 임의 얼골 보련마는

나는 엇지하여 져 달과 갓치 못 가는고

님도 져 달 보고 날 생각 한는지

원세순(元世洵)

 

 

그때 조용히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송강은 누운 채로 대답했다. 문이 열리며 소리 없이 들어서는 여인, 그녀가 진옥이었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의 방문에 놀란 것은 송강. 더욱 놀란 것은 장옷을 벗고 보인 화용월태의 아름다움. 잘 손질해서 입은 모시 옷의 우아함. 꼭 한 마리의 백학이었다. 침침한 불빛에 비친 얼굴은 담장(淡粧). 그러나 그 소박한 얼굴의 주인은 빙그레 미소를 먹음고 아미를 숙여 깍듯이 예를 드린다.

송강은 말을 잃고 어안이 벙벙하여 앉아만 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 일이 졸지에 일어난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놀라운 미인의 방문이었다.

 

"죄송하옵니다. 버릇없는 당돌함을 용서해 주옵소서."

"아아니,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그리고 어찌된 일이오?"

"예, 소첩은 진옥이라 하옵고, 기적에 몸담고 있사옵니다."

"그래? 그런데 이 밤중에 어인 일인고?"

"예, 벌써부터 대감의 명성을 들었사옵고, 더욱이 대감의 글을 흠모해 오는 천기이옵니다."

"그래 내 글을 읽었다니, 무엇을 읽었노?"

"제가 가야금을 타 올릴까요?" "......"

 

 

거세부지세 (居世不知世)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모르겠고,

대천난견천 (戴天難見天)하늘 밑에 살면서도 하늘 보기 어렵구나.

지심유백발 (知心惟白髮) 내 마음 아는 것은 오직 백발 너뿐인데,

수아우경년 (隨我又經年)나를 따라 또 한 해 세월을 넘는구나

 

 

놀랐다. 송강은 정말 놀랐다. 강계에 와서 고통스런 심정을 읊은 자신의 노래를 타고 있지 않은가! 송강은 진옥의 아름다움에 첫 번째로 놀랐고, 자신을 알고 있는 진옥에게 두 번째 놀랐다. 또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는 진옥에게 세 번째로 놀랐다.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그날부터 외롭고 쓸쓸하고 괴로웠던 송강의 적소생활은 달라졌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진옥의 샘솟는 기지와 해학이 넘치는 이야기를 들으며 시름을 잊게 되었고 그녀의 가야금의 선율을 들으면 헝클어졌던 마음이 진무되고 우울함을 달랠 수 있었다. 송강 앞에 나타난 그녀는 단순한 기녀가 아니고 시와 가무에 능하고 지혜롭고 슬기롭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송강은 이런 진옥을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적소의 생활 중에서 부인 유씨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송강은 진옥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적어 보내기도 하였다. 정철이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고 시와 문장에 뛰어난 정치가 이자 문장가 이면서도 당시의 남성위주의 성 풍속에서 주색을 매우 밝혔다고 비난을 받았지만 기생과의 주연자리에서 닥치는 대로 기생들을 건드리지 않았었고, 정철은 부인 유씨를 사랑하고 존경하여 여자문제에서는 이외로 담백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때때로 과음을 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어 동석하였던 기생이 그를 방안으로 안아다 눕히는 일은 자주 있었던 사실이다.

정철이 유배생활 중에서도 부인 유씨에게 소상히 저간의 사정을 낱낱이 적어 보내는 것을 보면 소위 오늘날의 표현으로 매우 가정적이었던 것 같다.

 

물론 부인 유씨의 인품도 도드라지는 것은 일세를 풍미하는 정치가 남편이자 최고의 문장가로 세상에서 가장 이름을 떨치며 한량의 조건을 충분히 갖춘 남편에게 수 많은 여류 기생들이 그의 시와 노래에 대한 흠모의 정을 갖고 서로 가까이에 모시고자 했겠지만 정실부인에 대한 예의를 변함없이 지키는 남편에 대한 깊은 이해로 남편을 믿고 편하게 해 주었기에 남편이 여자 문제로 속 썩이게 하는 대신 소상히 정철 자신이 스스로 자기 주변의 여자 얘기를 숨김없이 의논하게 만든 것이었으리라.

 

부인의 서신 속에도 진옥에 대한 투기나 남편에 대한 불평보다는 남편의 적소 생활을 위로해 주는 진옥에 대한 고마움이 적혀 있음을 볼 수 있다.

불우한 남편의 생활 속에서 남편에게 위로를 주고, 남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여자라면 조금도 나무랄 것이 없다는 부인의 글을 받고 송강은 고마웠고 이런 내용을 진옥에게 사실대로 얘기했다. 진옥 역시 정철의 유씨 부인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와 또한 유씨 부인이 일개 기녀인 자신을 비하하는 대신, 자신에게 투기하지 않고 오히려 송강을 잘 보살펴주기를 부탁하는 너그러움에 감복하여 더욱 알뜰히 송강을 보살피려 노력하였다.

 

한 사람의 남자로서 부인과 자기에 대한 진실되고 솔직한 송강의 처신에 진옥은 더욱 깊은 애정과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 사이에는 누구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뜨거운 애정의 강물이 마음 밑바닥으로 끊임없이 교류되어 갔던 것이다.

 

 

3. 정철의 관로 생활

 

정철(鄭澈)은 호(號)를 송강(松江), 자(字)는 계함(季涵) 또는 칩암거사(蟄菴居士)라 하며 연일이 관향인데, 철(澈)은 그의 이름(名)이다. 중종 31년(1536)에 나서 선조 26년(1593)에 죽은 근조(近朝) 가사문학의 대가다. 송강(松江)은 죽록천이라고도 불렸는데 정철이 유년 시절을 보냈고, 그가 정치적으로 불우한 일을 당할 때마다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에 위치한 강의 이름을 따서 호를 지었다.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과 정유항전(鄭惟沆傳)에 나타난 그의 가계(家系)을 보면, 송강의 고조 연(淵)은 병조판서, 증조 백숙(白淑)은 김제군수, 조부 위(僞)는 사원참봉이었다.

부(父) 유항은 돈녕부판관을 지냈는데, 대사헌 안팽수의 딸과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중의 네째로 태어났다. 누님은 인종의 귀인이 되고, 둘째 누님은 계림군의 부인이 되는 등 훌륭한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평탄하지 못했다. 매부인 계림군 유(溜)가 정명순, 허자 등의 모함으로 을사사화에 관련하여 죽고, 백형 자(滋)는 잡혀 장류되어 도중에서 죽었으며, 부친은 관북, 정평.연일 등에 유배되었으니 이때가 송강의 나이 10살이었다.

 

불행이 집안에 닥친 어린 시절 큰 누님을 보러 동궁에 자주 드나들면서 당시 대군으로 있던 명종과 함께 놀기도 하며 자랐다. 명종 6년에 그의 부친이 유배지에서 풀려 전라도 창평의 당지산(唐旨山)에 우거하였는데, 이 시기에 그는 송강반의 기암누정, 성산녹반의 대나무 숲, 명봉산 위의 학떼 등을 벗삼아 소년 시절의 동경과 꿈을 키웠다. 이때 삼당(三唐)의 한 사람인 임석천(林石川)에게 시를 배웠고, 하서 김인후, 면앙정 숭순에게 수학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문학에 큰 길잡이가 되었다.

 

명종 16년, 16살이 된 정철은 진사시에 1등을 하고, 다음해 3월에 문과별과에 장원하였는데 이때 명종이 방목(傍目)을 보고 어릴 때 놀던 죽마고우의 정을 생각하여 특별히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의 청렴 결백성과 강직성이 법을 고집하고 명종의 뜻을 거스리기도 하여 외청 한직으로만 돌았다. 32세 때는 동갑내기로 서로 친하고 존경했던 율곡 이이와 같이 호당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되자 저 유명한 관동별곡과 민훈가(民訓歌) 16수를 지었다.

전라.함경 관찰사, 예조판서, 판돈령부판관 등을 역임하면서 계속 동인과의 불화 속에서 이이의 조정 노력도 헛되이 을유 선조 18년 4월 지천명의 나이 50세 때 큰 뜻을 펼치지 못하고 스스로 퇴직하였다. 그가 벼슬을 내놓은 것은 자신의 주장을 결코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 때문이었는데 그의 강직한 성격은 가는 곳마다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그것은 곧 당쟁의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서인이었던 그는 동인의 영수 김효원을 맹렬히 비판하기도 하여, 친하게 지내던 이이로부터 조정을 혼란 시키는 정쟁을 일삼지 말라는 충고를 받고 실망하여 낙향했던 것이다.

 

선조 22년 나이 54세가 된 정철은 우의정이 되었다가 이듬해 좌의정을 제수 받았지만 이산해 등의 모함으로 다시 명천, 진주와 강계를 전전하는 긴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몽진하여 개성에 이르니, 백성들이 모두 몰려 나와서 정철을 기용하기를 선조께 간청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왜구가 쳐들어오매 상(上)이 서쪽으로 몽진하여 개성에 이르니, 백성들이 길을 막고 정철을 부르기를 빌었다. - 당의통략(黨議通略)

 

이 기록을 보아도 백성들의 송강에 대한 애정과 기대는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드디어 그 해 5월에 석방되어 다시 관계에 나와 선조 26년(1593)에 봉사하여 명에 갔다가 오는 등 분골쇄신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다가, 그 해 12월 8일 강화 우거(寓居)에서 파란의 생애를 마치니 향년 58세였다.

 

그는 어찌 보면 중앙 관직에 어울리지 않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중앙 관료들처럼 그는 성격도 치밀하지 못했고, 기질이 음흉한 것 과는 거리가 멀어 직선적이고 게다가 성질이 불 같고 술을 즐겼다. 더군다나 말을 함부로 하여 정적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일도 잦았다. 그래서 그는 중앙 관직에 머물 때는 언제나 주변 사람들과 부딪치며 격렬한 논쟁을 일삼는 파당적인 인물로 낙인이 찍히곤 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방 수령으로 나가게 되면 지방에서는 타인과 격론을 벌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뛰어난 관리적 기질을 발휘하여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였다. 또한 그는 각 지방의 수려한 자연 경관을 벗삼아 그 속에서 술을 마시고 한량들과 함께 시를 읊는 등 뛰어난 시인적 자질을 마음대로 발휘하기도 했다.

 

그래서 흔히 그의 문학을 비꼬아 귀양문학 또는 좌천문학이라고 하지만, 사실 조선조의 관리나 식자들은 유배지나 은거지에서 학문적 업적을 쌓은 일이 다반사였다. 이황과 이이는 물론이고 정약용과 박세당 등의 실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따져보면 조선 시대의 유배지는 학문과 문학의 산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숙종 때 문청(文淸)이라 익(謚)하였으며, 송강집 11권 7책과 송강가사 2권 1책이 있고, 작품으로는 가사가 4편, 시조가 84수 전한다.

 

 

4. 은거의 생활

 

신라(新羅) 팔백년(八百年)의 놉도록 무은 탑(塔)을

천근(千斤)든 쇠붑소릐 티도록 울힐시고

들 건너 적막산정(寂寞山亭)의 모경(暮景) 도올뿐이라

 

 

노을 지는 저녁 어스럼 무렵 멀리 절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 소리.

그의 은거의 생활은 이때부터 을축년에 이르는 약 4년간의 기간이었는데, 그가 고양(高陽) 신원(新院)과 전라 창평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비관하면서 지낸 기간이다.

 

 

새원 원주 되어 시비를 고텨 닷고

유수 청산을 벗삼아 더뎟노라.

아해야 벽제의 손이라커든 날 나가다 하고려

원주(院主) :경기도 고양에 있는 역원에서 자고 지키는 관원

벽제(碧蹄)의 손님 : 시류를 따라 찾아오는 손님

 

쓴 나물 데온 믈이 고기도곤 마시 이셰

초옥 조븐 줄이 긔 더욱 내 분이라

다만당 님 그린 타사로 시름 계워하노라

 

 

세상의 공명을 버리고 청산 유수를 벗삼아 지내고자 하는 심정이 그대로 잘 드러나 있고, 시류를 배척하는 심정이 말 밖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가난한 생활, 그 자체는 불평이 없으나 연군의 정은 참을 수 없다는 것이 송강의 심정이다.

 

 

석양(夕陽) 빗긴 날에 강천(江天)이 한빗친제

풍엽(楓葉) 노화(蘆花)에 우러녜는 뎌 기럭아

가을히 다 디나 가되 쇼식 몰라 하노라

 

비록 정치적으로는 이 기간이 실의의 시기라 할 수 있겠으나, 작가 송강으로서는 가장 작품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로 자연 속에 유유자적하면서 시작(詩作)에 탐익하던 시기다.

창평에서는 외숙 김성원의 산정을 얻어 수석과 갈매기와 학을 벗하여 독서를 하면서 항상 국가를 걱정하는 정이 이때 지은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배꽃은 벌써 지고 두견새 슬피 울 때에, 낙산의 동쪽 둔덕에 있는 의상대에 올라 앉아, 해뜨는 모습을 보려고 밤중에 일어나니, 상서로운 구름이 피어오르는 듯,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버티는 듯, 바다에서떠오를 때는 온 천지가 흔들흔들하는 듯하더니, 하늘 한복판에 솟구쳐 뜨니 머리카락을 헤아릴 만큼 밝구나. 아마도 내가 임금님 곁에 없는 동안에 간신배들이 임금님의 총명을 어둡게 할까 걱정이 되는구나

 

니화는 발셔 디고 졉동새 슬피 울 제, 낙산 동반으로 의상대에 올나 안자 일출을 보리라 밤듕만 니러하니, 샹운이 지픠는 둥 뉵용이 바틔는 둥, 바다히 떠날 제는 만국이 일위더니, 텬즁에 티뜨니 호발을 혜리로다. 아마도 녈구름이 근쳐의 머믈셰라. (관동별곡 중에서)

 

동풍이 건듯 부러 싸인 눈을 헤쳐 내니, 창 밧긔 심근 매화 두세 가지 퓌예셰라. 갓득 냉담 한대 암향은 므사 일고. 황혼의 달이조차 벼마태 비최니, 늣기는 듯 반기는 듯 님이신가 아니신가. 져 매화 것거내여 님 겨신대 보내오져.님이 너를 보고 어떠타 너기 실고 (사미인곡 중에서)

 

글란 생각 마오. 매친 일이 이셔이다. 임을 뫼셔 이셔 임의 일을 내 알거니, 춘한 고열은 어찌하여 지내시며, 죽조반 조석뫼 예와 같이 셰시는가. 기나긴 밤의 잠은 어찌 자시는고 (속미인곡 중에서)

우리 역사를 통하여 임금님에 대한 연군의 정을 끊임 없이 노래한 사람으로 송강만한 사람이 없으리라. 의상대에서 해 뜨는 모습을 보면서, 봄이 되어 추위를 이기고 핀 매화를 보면서도, 조석으로 밥상을 받으면서도 임금님을 생각하는 정이 솟구치고 있다.

 

가사 전후미인곡(前後美人曲)은 시골(창평)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정확한 연월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그의 작품 생활의 절정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는 정해(丁亥) 무자년간(戊子年間)인 듯하다는 기록이 신빙성이 있다. 이들 작품들에 대해서 서포 김만중은 동방의 離騷(이소)라 하여 극찬하기도 하였고, 이수광, 홍만종, 김춘택 등은 다음과 같이 격찬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참다운 문장은 단지 이 세 편 뿐이다 (서포만필)

우리나라 노래로는 정철의 작품이 가장 우수하여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이 후세에 성행하였다 (지봉유설)

 

 

송림의 눈이 오니 가지마다 곳치로다

한가지 것거내여 님 겨신대 보내고져

님이 보신후 제야 노가디다 엇디리

 

 

그 마음은 충성되고 그 뜻은 맑고 그 절개는 곧으며, 그 문장은 우아하며 완곡하고, 그 가락은 비애로우나 바르기 때문에 거의 굴원의 이소에 짝할 만하다 (북헌집)

 

 

5. 친구보다 적과 동지를 가졌던 모난 성격

 

송강이 35세 되던 해 4월 부친상을 입고 형들과 함께 고양 신원에서 노막을 지키고 있을 때, 삼종지도가 철저했던 이조 사회에서 그의 어머니 안씨가 보낸 편지 하나를 소개한다.

 

나는 걱정 없이 여전합니다.

형제분이 여전하기를 바랍니다. 날씨가 하두 험하니 더욱 걱정이 됩니다. 이 심한 더위에 조심하소서. 우리 큰 집도 대도가 무사하나이다. 제수에 쓸 돼지 머리도 두 곳에서 부조로 준다고 사지 말라고 합니다. 제대로 일이 되었습니다. -신미, 유월 모안(母安)-

 

어머니가 아들을 어떻게 받들고 바른 교육으로 본을 보여 왔는가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의 인물됨에 대해서는 완전히 상반되는 기록들이 보인다.

 

1). 간신 정철은 이리 같은 바탕으로서 독한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유우머러스한 체하면서  속으로는 남을 시기하는 지라, 청백한 의논이 그를 용납해 주지 않았다.  (丙申十二月, 羅明德硫中)

 

2). 정철은 성질이 괴팍하고 말이 망녕되며, 가볍고 경박하여 조롱을 즐기고 희학(戱謔)을 좋아하여 허물을 자초했다.(선조실록)

 

3). 정철을 보면 겉으로는 청백하다는 명성에 기댔으나, 송강의 성행은 실제 마음이 음란한 것을 탐하며기롱과 방탕으로 한 평생을 그르쳤다. (癸卯. 安重默 琉)

 

4). 그의 마음은 바르고 그 행실은 방정하며 그 언동은 곧다. (선조)

 

5). 사계(沙溪)선생이 일찍이 정송강을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느냐고 묻기에, 소자의 부형이  일찍이 말하기를 청강하고 狹隘(협애)한 사람이라고 합디다 하니, 선생께서는 옳다 하시며, 이것은 공이 스스로 청백하고 티가 없음을 믿고, 안하무인격(眼下無人格)으로 놀았기 때문에 마침내 일세에 구질(仇嫉)을 받게 되었다고 하셨다. (우암집 尤庵集)

 

6). 충효 청백함이 행동에 나타나고, 의를 좋아하며 이를 멀리하고 절조가 굳다. (신흠, 송강 집서)7. 최명길이 이항복에게 정송강이 어떤 사람인가고 물으니, 항복이 대답하기를 반취했을 때는 손뼉을 치며 담론하는 것을 보면 마치 하늘 위의 사람을 보는 것 같으니, 시속배들 이 어찌 흉내를 내겠느냐 했다. 명길이 후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아직 송강을 보 지는 못했으나, 백사의 고안(高眼)으로 이같이 흠복하니 가히 그의 언론풍채를 짐작할 수 있겠다.  (지천유사 遲川遺事)

 

위의 기록에서 1-3번은 송강의 반대파인 적정들의 혹평이므로 논란할 것들이 못 되는 것 같다,

우선 3번에서 안중묵은 정철을 음란한 것을 좋아하고 기롱과 방탕으로 한 평생을 그르쳤다고 했는데 송강의 삶에서 그런 모습은 어디에서고 찾아 볼 수 없다. 4-7번은 송강을 잘 아는 사람들의 인물평이니 송강의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7의 이항복의 평은 그의 문학인으로서의 풍모를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본래 성격이 강직청렴하고 협애한 점이 있어서 융화를 잘 못하였던 것 같다.

 

 

6. 한잔 술에 인생을 마시는 장진주사(將進酒辭)

 

선조실록에 보면 송강은 강화에 우거하다가 술병으로 죽었다고 하였고, 송강 자신도 주중사객(舟中謝客)에서 반백 인간이 술에 취하고, 이름을 얻었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재 너머 성권롱 집의 술 닉닷 말 어제 듯고

누은 쇼 발로 박차 언치 노하 지즐 타고

아해야 네 권롱 겨시냐 정좌수 왓다 하여라

그의 풍류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는 이런 호일방분(豪逸放奔)한 성격이 그의 많은 작품 중에 잘 나타나 있다.

 

 

곳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음연 술 생각하고

곳 픠자 달 밝쟈 술 엇으면 벗 생각하네

언제면 곳 알래 벗 들이고 완월장취 (翫月長醉) 하련요

이정보(李鼎輔)

 

단지 시가를 잘 짓고 술만 즐겨 마실 뿐만 아니라 정철의 다음 시조는 그가 거문고를 즐겨 탔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음악에 대한 그의 깊은 조예를 보여주고 있다.

 

 

거믄고 대현을 티니 마음이 다 눅디니

자현의 우조 올라 낙막됴 쇠온말이

섧기는 젼혀 아니 호되 이별 엇디 하리

 

 

특히 애주가였던 정철이기에 술이 주제가 되어 지어진 시조가 많은데 그 대부분이 오늘날까지 뛰어난 문학성을 인정 받고 있다.

 

 

쉰 술 걸러 내여 밉도록 먹어보새

쓴나물 데워 내여 다도록 십어 보새

굽격지 보요박은 잣딩이 무되도록 단녀 보새

정철은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는 전혀 이질적인 두 행위를 동일한 표현 방법 '먹어보새 십어보새'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조화롭게 묘사함으로써 작품의 흥취를 고조시키고 있다.

그리고 '굽 달린 나막신에 촘촘히 박힌 쇠 징이 다 닳아지도록 놀아보자' 라는 표현에서 사용한 우리 말은 그가 아니고서는 어쩌면 사장되었을지도 모른다.

 

동인의 무리가 정철의 음주를 가지고 탄핵을 하였을 때 한동안 선조는 다음과 같은 말로 정철의 음주는 과인도 일찍부터 알고 있고, 그도 또한 자인하는 바이다. 대개 그가 술을 마시는 이유는 유회(遺懷)를 풀 곳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감싸기까지 했다.

나중에는 정철더러 대신이 주색에 빠져 나랏일을 그르친다 고 나무라기까지 했지만.

 

 

주색을 삼간 후에 일정백년 살쟉시면

서시들 관계하며 천일주들 마실소냐

아마도 참고 참다가 양실할가 하노라

송이(松伊)

 

친구 송강의 자질과 능력을 몹시 아끼고 사랑했던 율곡 이이는 제발 술을 끊도록 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없애라 고 수 차례 권면을 하곤 했다. 그렇지만 송강의 눈에 비취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허탈감은 그를 술의 세계로 이끌었고 차라리 술을 마시고 취하여 세상과의 괴리를 잊고자 하였지만 아무리 술을 마셔도 현실에 대하여 근심하고 걱정는 마음속의 어지러움은 어째 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잔을 먹사이다 또 한잔을 먹사니다

꼿프로 술을 빗저 무궁무진 먹사이다

동자야 잔 가득 부어라 취코 놀고 하자고나

무명씨

 

정철이 얼마나 술을 즐겨 하고, 그 술이 문학적 역량을 발휘하게 하였는가는

『송강집(松江集)』에 수록된 그의 한시(漢詩) 전편에서 '취(醉)'자가 가장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한 잔 먹사이다. 또 한 잔 먹사이다. 꽃 꺾어 수를 세며 무진무진 먹사이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꽁꽁 묶어 매어 가나, 아름답게 꾸민 상여에 실려 수많은 사람이 울면서 뒤따르거나, 억새풀 속새풀 떡갈나무 백양나무 숲 우거진 곳에 가기곳 가기만 하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발 내리는 속에, 슬픔을 자아내는 쓸쓸한 바람 불 제 누가 한 잔 먹자 하겠는가.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의 휘파람 소리가 쓸쓸할 때에 뉘우친들 어찌하겠는가.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가 허무한 인생을 더욱 쓸쓸하게 노래한다.

 

 

7. 송강 정철의 문학과 교훈

 

일세의 문장가요, 삼공을 지낸 대 정치가 송강 정철은 그의 파란 많은 정치와 유배 생활을 통하여 정치가로서의 강직한 성격의 다른 쪽에 숨은 그 풍류스런 성격을 살려 그의 뛰어난 시재와 자유분방한 필치를 유감없이 구사하여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므로써 우리 국문학의 유산을 살찌게 하였다. 그는 국문학사상 '유배문학'이란 독특한 유형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그는 가사문학의 제1인자이면서도 그의 시조 역시 뛰어난 작품이 수없이 많다.

 

훈민가란 연시조를 써서 국민교화의 방법으로 쓰기도 하였다.

 

 

님금과 백셩 사이 하날과 따해로대

내의 셜운 이랄 아로려 하시거든.

우린달 살진 미나리랄 혼자 엇디 머그리. <君臣 有義>

 

어버이 사라신 제 섬길 일란 다 하여라

디나간 휘면 애다라 엇디 하리

평생애 고텨 못할 이리 이뿐인가 하노라 <父子有親>

 

자효(子孝) 한역: 송달수

태아친재당(苔我親在堂) 위당선사지(謂堂善事之)

어언과료후(於焉過了後) 수회역하추(雖悔亦何追)

평생불가복(平生不可復) 지차이사재(只此而巳哉)

 

 

한몸 둘에 난화 부부랄 삼기실샤

이신 제 함끠 늘고 주그면 한대 간다.

어대셔 망녕의 꺼시 눈흘긔려 하나뇨. <夫婦有恩>

 

팔목 쥐시거든 두 손으로 바티리라.

나갈 대 겨시거든 막대 들고 조차리라.

향음쥬 다 파한 후에 뫼셔 가려 하노라. <長幼有序>

 

남으로 삼긴 듕의 벗갓티 유신하랴.

내의 왼 이랄 다 닐오려 하노매라.

이 몸이 벗님곳 사람되미 쉬울가. <朋友有信>

 

마을 사람들하 올한 일 하쟈스랴

사람이 되어 나셔 올티곳 못하면

마쇼를 갓곳갈 싀워 밥 머기나 다라랴

 

향여유례(鄕閭有禮) 한역 : 송달수

차차인리인(嗟嗟隣里人) 면언위선사(勉焉爲善事)

기수인형생(旣受人形生) 소행반불의(所行反不義)

하이마여우(何異馬與牛) 관건이음식(冠巾而飮食)

 

어와 동냥재를 뎌리 하야 어이 할고

헐뜨기 기운 집의 의논도 하도 할샤

뭇 지위 고자자 들고 헤뜨다가 말려나다

 

 

당쟁의 와중에서 훌륭한 인재들을 마구 몰아 죽이고 귀양 보내는 정국을 한탄한 노래다.

이 작품은 원통하게 죽은 임사수(林士遂)를 애도한 노래이나 자신의 처지를 풍유한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송강의 스승 김하서의 작품이라고 전하는 데도 있다.

우정워정 하며 세월이 거의로다

흐롱허롱 허며 일운 일이 무스 일고

두어라 사이사이어니 아니 놀고 엇디리

 

정철은 특히 시가 창작에 있어서 언어미의 구현에 역점을 두어 위에서와 같이 국문 사용에 있어서 절정의 기량을 발휘 함으로써 다양한 말하기 방식을 사용하여 가사 장르의 단조로움을 면하게 하고 있다.

 

내게 살송곳 잇던니 뚜러 볼가 하노라 하고 진옥을 향하여 살송곳이라는 순수 우리말을 사용하였더니 그녀 또한 골풀무라는 우리말을 꺼집어 내어 대구를 만들고 있다.

점잖은 양반사회에서 이런 격조 낮은 한글로 된 우리말을 쓴다고 당시의 양반들 중 혹자들은 비웃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언어들은 풀잎에 맺힌 새벽이슬처럼 영롱하고 보석처럼 빛날지언정 결코 시의 격조를 떨어뜨리게 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정철의 시조는 고유어가 사용될수록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고, 그의 문학적 자질이 빛난다.

그는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성산별곡 등 가사 4편과 장진주사, 훈민가 등 시조 84수를 남겼다.

 

 

8. 송강의 짧은 로맨스

 

대 시인 정송강과 기녀 진옥(眞玉)과의 절창(絶唱)이 만들어진 것은 송강의 강계 유배지 에서였다.

 

진옥은 시조문학에 있어 송강첩(松江妾)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시조 문헌 중에 작자를 누구의 첩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진옥 뿐이다. 대개는 강릉명기, 평안기 홍장 등 기명을 적었는데, 여기 소개하는 진옥도 기녀임에 틀림없는데 송강첩이라고 기록된 것은 송강의 지위와 명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조 사회제도 속에서 양반이 축첩하는 것은 조금도 허물 될게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이런 기록이 더 많이 있을 수 있으련만 유독 송강첩이라는 기록 하나만 보일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송강이 진옥이라는 기생과의 로맨스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떳떳이 여길 뿐만 아니라 그녀의 시적 재능을 자랑하고 싶어한 점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송강의 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또 한편 으로는 송강의 문학적 대명에 송강 첩의 작품이라고 밝혀도 조금도 손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작품성을 자신하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 나라의 시조 작품 중에서도 첩과 정실부인과의 시새움을 노래한 작품이 남아 있다.

 

첩이 죳타 하되 첩의 설폐 들어 보소.

눈에 본 죵 계집은 기강이 문란하고

노리개 녀기첩은 범백이 여의하되

중문안 외방관기 긔 아니 어려우며

양가녀 첩하면 그중에 낫건마는

안마루 발막짝과 방안에 쟝옷귀가

사부가모양이 저절노 글너가네

아무리 늙고 병드러도 규모 딕히기는 정실인가 하노라

육청(六靑)

첩이 좋다 하되 첩의 나쁜 점을 들어 보시오.

눈요기 하기에 좋은 종을 올려 앉힌 첩은 기강이 문란하고, 노리개로 좋은 기생첩은 여러 가지 일들이 뜻과 같으나, 중문안 지방 관아에 매인 기생을 들여 앉힘이 그 아니 어려우며, 양갓집의 딸을 첩으로 맞아 오면 그 중에 가장 낫지마는, 마루 아래 놓이는 신발짝과 장롱의 귀퉁이가 사대부 집 가풍이 저절로 잘못되어 간다.

아마도 늙고 병들어도 가정의 가풍과 제반 규모를 지키기는 정실부인인가 하노라

 

 

찬란한 봉황 무늬 아껴오던 비단 한 끝

떠나는 임에게 정표로 드리오니

바지는 지을지언정 치마되게 마소서 (不惜作君袴 幕作他人裳)

 

신혼 때 물려주신 서기(瑞氣)어린 순금 패물

차마 끈에 풀러내어 가는 임께 드리오니

차라리 내버릴망정 시앗 주진 마소서 (不惜棄道上 幕結新人帶 )

 

아무리 현숙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가슴을 담은 사랑의 정표를 시앗 주라고 할 여인이 어디 흔하랴. 위 두 시는 허란설헌이 바람 피우는 남편 김성립에게 준 시이다.

 

그러나 송강의 부인 유씨와 진옥의 사이는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던 사이었다. 선조 25년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그 해 5월 강계에서의 적소생활에서 풀려 송강이 57세 때 다시 관로(官路)에 나가게 되자 송강의 풀림을 기뻐하면서도 보내기 아쉬운 정이 진옥을 눈물짓게 했다. 송강 역시적소의 생활을 청산하는 기쁨 속에서도 진옥의 일이 마음 아팠다. 마지막 송강을 보내는 자리에서 진옥은 아쉬움을 이렇게 불렀다.

 

 

인간차야이정다 (人間此夜離情多) 오늘밤도 이별하는 사람 하 많겠지요

낙월창망입원파 (落月蒼茫入遠波) 슬프다 밝은 달빛만 물 위에 지네

석간금초하처백 (惜間今硝何處佰) 애닯다 이 밤을 그대는 어디서 자오

여창공청운홍과 (旅窓空廳雲鴻過) 나그네 창가엔 외로운 기러기 울음 뿐이네

 

부인 유씨는 서울로 올라온 정철 더러 진옥을 데려오도록 권했다. 송강 역시 진옥에게 그 뜻을 물었으나, 진옥은 끝내 거절했고 강계에서 혼자 살며 짧은 동안의 송강과의 인연을 되새기며 나날을 보냈다.

 

 

9.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遺感)

 

송강이 선조 26년(1593) 12월 18일 강화의 우거에서 생을 마치는 운명의 자리에 소리 없이 흐느끼는 여인이 있었다. 진옥 그녀였다. 그 후 진옥은 강계를 떠났다. 그리고 그녀의 그 후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 아무도 모르게 대감이 묻힌 곳 가까운 데를 찾아 간 것이었을까?

 

 

사람이 죽어지면 어드러로 보내는고 뎌셩도 이성 갓치 님한데 보내는가 진실노 그러곳 할쟉시면 이제 죽어 가리라

 

 

죽음을 앞두고 황진이는 지나온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 보면서 '내가 죽거든 울지도 말고 고악(鼓樂)으로서 상여를 전송해 달라'고 부탁을 할 때에는 일세의 명기다운 생각을 한다고 수긍을 하였지만 '생전에 업보로 관도 쓰지 말고 동문밖에 자기의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으라' 고 하는 데는 아예 실색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병가(甁歌)집에 보면 이런 시가 한 수 전해져 온다.

 

이몸이 죽어지거든 뭇지 말고 주푸리여 매혀다가

주천(酒泉) 깊흔 소에 풍덩 드리쳐 둥둥 띄여두면

일생에 질기던 거시미 장취불성(長醉不醒)하리라

 

송강처럼 평소 술을 몹시 좋아하던 사람이라면 이런 유언을 남김직도 할 것 같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는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뭇쳣는다

잔(盞) 잡아 권(勸)하리 업스니 글을 슬허 하노라

 

 

나중 백호 임제의 한탄을 담은 술 한잔이 그 무덤 앞에 올려진 걸 보면 사람들은 황진이를 동구밖에 내쳐 둘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일세의 명기의 죽음을 애달파한 사람들이 초라 하지만 청초 우거진 무덤을 쌓아 올린 걸 보면 썩어 없어질 육신이나마 잠깐이라도 황진이의 모습 그대로 눕도록 해주고 싶다는 갸륵한 마음이 울어났는가 보다.

 

 

공산목락우소소(空山木落雨簫蕭)  빈 산엔 잎이 지고 궂은 비만 내리는데,

상국풍류차적막(相國風流此寂寞) 상국(相國)의 풍유로움이 이제는 적막하구나.

추창일배난경진(추창一盃難更進) 슬프다 한 잔 술을 다시 권키 어려우니

석무가곡즉금조(昔無歌曲卽今朝) 옛날의 그대 노래가 바로 그대로구려.

 

광해군 시절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 풍자하여 이름을 떨쳤던 석주 권필이 송강의 묘를 지나며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한 것이 과송강묘유감 (過松江墓遺感)이다.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불렀던 주인공 정철도 또한 남의 노래의 객이 되었다. 그것이 인생유전(人生流轉)의 법칙(法則)이며 자연(自然)의 섭리(攝理)이던가!

 

그리고 얼마 후 권석주는 광해군 비(妃) 류씨(柳氏)의 아우 유희분(柳希奮 )등 척족(戚族)들의 방종(放縱)을 궁류시(宮柳詩)로써 비방하여 광해군의 진노를 사서 심한 국문을 당한 후 귀양을 가는 로중(路中) 성치 않은 몸으로 동대문 밖에서 사람들이 동정하여 주는 술을 주는 대로 받아 마시고 이튿날 죽었다.

 

훗날 어느 누가 있어 그의 무덤에 술 한잔을 따르며 그의 분한(憤恨)을 위로하는 시 과석주묘유감(過石洲墓遺感) 한 수를 남기기라도 했던가.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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