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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禪詩/悟道頌

경봉정석(鏡峰靖錫) 오도송(悟道頌)

by 산산바다 2022.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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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봉정석(鏡峰靖錫)선사 (1892~1982) 오도송(悟道頌)

 

 

我是訪吾物物頭(아시방오물물두) :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目前卽現主人樓(목전즉현주인루) :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呵呵逢着無疑惑(가가봉착무의혹) : 허허 이제 만나 의혹이 없으니

優鉢化光法界流(우발화광법계유) : 우담발화 꽃 빛이 온 누리에 흐르네!

 

 

* 법호는 경봉(鏡峰)법명은 정석(靖錫), 시호는 원광(圓光)이다.

1882 49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아버지 광주김씨 영규(榮奎거사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 독자로 태어났다.

7세 때 밀양의 한학자 강달수(姜達壽)에게서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5세 때 어머니를 여읜 뒤1907 6월에 출가하여 양산 통도사 성해(聖海)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1908 3월 통도사가 설립한 명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그 해 9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청호(淸湖)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았다.

 

1912 4월 해담(海曇)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연구에 몰두하였다.

종무소에서 소임을 보는 틈틈이 불경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 어치의 이익도 없다” 라는 화엄경구절에서 큰 충격을 받고참선 공부를 하기 위하여 내원사의 혜월(慧月)선사를 찾아 법을 물었으나 마음 속의 의문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이에 해인사 퇴설당으로 가 정진한 뒤 금강산 마하연석왕사 등 이름난 선원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이때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스님과의 선담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통도사 안양암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하면서 정진을 계속했다.

이와 함께 화엄산림법회에서 법주(法主)겸 설주(說主)를 맏아 철야로 설법하고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일물(一物)에 얽힌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 1120일에 방안의 촛불이 춤추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닫고 게송을 읊었다.

 

我是訪吾物物頭(아시방오물물두) :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目前卽現主人樓(목전즉현주인루) :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呵呵逢着無疑惑(가가봉착무의혹) : 허허 이제 만나 의혹이 없으니

優鉢化光法界流(우발화광법계유) : 우담발화 꽃 빛이 온 누리에 흐르네!

 

그 뒤 깨달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오대산 한암(漢岩, 1876~1951), 가야산 효봉(曉峰, 1888~1966), 직지사 제산(霽山, 1862~1930)스님 등 제방의 선지식에게 서간문을 보내고, 만공(滿空, 1871~1946)선사와 용화사 전강(田岡, 1898~1975) 스님과 법문답을 했다.

1930 2월 통도사 불교 전문강원장으로 취임한 뒤부터 5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중생교화의 선구적 소임을 다하였다.

1935 9월에는 통도사 주지, 1941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현재의 선학원이사장,

1949년에는 다시 통도사 주지를 역임하며 전국의 선승들을 지도하여 선풍을 선양했다.

1953 11월에는 통도사 극락호국선원의 조실로 추대되어 입적하시던 날까지 이 곳에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였고 동화사내원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도 겸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셨다.

 

경봉스님은 언제나 온화하고 자상했으며청렴하고 검소한 생활로 일관해 꾸밈없는 활달한 경지에서 소요자재 하였다.

열려진 방문에는 언제나 구도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스님은 특히 알아듣기 어려운 선법문이 아닌 일상생활 주변에서 선도리를 말했으며, 옛 스님들이 해놓은 법문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선사 자신의 안목으로 활구법문(活句法門)을 갈파했고시와 시조선묵(禪墨)에도 뛰어났다.

 

82세부터는 매월 첫째 일요일에 극락암에서 정기법회를 열었는데 90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시자의 부축을 받고 법좌에 올라 설법했는데매회 1,000명 이상의 불자들이 운집했다.

또한 가람의 수호에도 힘을 기울여 통도사의 삼성반월교 건립, 극락암 조사당의 탱화조성 및 추모재 봉행특별 정진처인 아란야(阿蘭若)의 창건, 극락암의 정수보각(正受寶閣신축 및 무량수각(無量壽閣)의 중창 등을 주관하였다.

이밖에도 경봉장학회를 설립하였으며파고다 공원 안에 만해선사 기념비의 건립도 추진했다.

 

또한 18세 때부터 장장 67년 동안 매일의 중요한 일을 기록한 일지를 남기셨는데, 이 일지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한국불교의 근세사가 그대로 담겨있어 아주 중요한 자료로 전해져온다.

경봉선사는 1982717일 오후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라는 임종계를 남기고 세수 91, 법랍 75세로 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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