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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詩/悟道頌

효봉(曉峰)선사 오도송(悟道頌)

by 산산바다 2022.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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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봉(曉峰)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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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봉(曉峰)선사 (1888~1966) 오도송(悟道頌)

 

 

海底燕巢鹿抱卵(해저연소록포란) :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火中蛛室魚煎茶(화중주실어전다) : 불 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달이네.

此家消息誰能識(차가소식수능식) :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꼬?

白雲西飛月東走(백운서비월동주) : 흰 구름 서로 날고 달은 동으로 달리네.

 

 

효봉스님께 문무관에서 16개월 간화선 <>자 화두를 들고 치열한 정진 끝에 깨닫고 지은 오도송이 이것이다.

* 효봉(曉峰)스님은 1888년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출생. 속명 이찬형(李燦亨). 법명은 원명(元明). 법호는 효봉(曉峰).

 

효봉선사(曉峰禪師) 1888 5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석리 금성동(錦城洞)에서 아버지 수안(遂安이씨 병억(炳億)과 어머니 김씨의 사이에서 5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스님은 스물여섯에 졸업한 후 서른 여석이 될 때까지 10년간(19131923) 서울과 함흥 등지의 지방법원으로평양의 고등법원에서 법관으로 종사하셨습니다.

1923년 스님의 나이 서른여섯 살 때 최초로 내린 사형선고 앞에서 몇 날 몇 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회의하고 인간사회의 구조에 대해서 고뇌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라는 결심을 하고 집을 나와 유랑 생활을 하다가 1925년 금강산 유점사에 들러 가르침을 받을 만한 스승을 찾으니 신계사 보운암(普雲庵)에 석두(石頭)스님이 계시다는 소리를 듣고 스님을 찾아가게 됩니다이날로 삭발석두스님으로부터 사미계(五戒)를 받고 원명(元明)이라는 법명으로 사셨습니다.

서른여섯에 오계를 받고 스님이 된다는 것은 불가에서는 '늦깍이'라고 합니다스님은 남보다 늦게 출가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잠잘 시간에도 잠자지 않으면서 분발깨달음을 위한 좌선(坐禪)에만 전념했습니다.

 

보운암에서 그해 여름과 겨울을 지내고 나서 이듬해 여름에는 선지식을 친견하기 위해 행각의 길에 나서게 됩니다그러나 불가의 수행의 일은 남의 말에 팔릴 것이 아니라내자신이 스스로 참구(參究)하면서 실답게 깨달아야 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금강산으로 돌아와 정진하게 됩니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의 나이 마흔 세 살 때 깨닫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하고 토굴에 들어간 지 1년 반만에 드디어 토굴의 벽이 무너지고 필사적인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었던 것입니다.

 

스님의 마흔 다섯되던 1932 4월 초파일에 유점사에서 동선(東宣)화상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으셨습니다스님이 설악산의 봉정암오대산의 상원사 등의 청정한 선원에서 한 철씩 정진하다가 1937년 스님의 나이 쉰살 되던 해운수의 발길이 마침내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스님은 선원(禪院)인 삼일암(三日庵)에서 조실로 10년을 머무시면서 수많은 후학들의 눈을 밝혀주고 길을 열어 보이셨습니다그리고 정혜쌍수(定慧雙修)에 관한 확고한 신구도관을 가지게 되셨습니다.

 

8.15 광복으로 일제의 탄압에서 풀려나게 되자 불교계도 인재양성을 절감 해인사에 출가 수행승의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伽倻叢林)을 개원하게 되는데 스님은 방장화상으로 추대되어 조계산을 떠나 가야산으로 가시게 됩니다.

그 후 여러해가 지나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시어 팔공산 동화사에 주석후학들을 지도하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거처를 밀양 표충사로 옮기시게 됩니다.

열반송을 남기시고 19661015일 세수 78, 법랍 42세로 입적.

 

* 효봉(曉峰)선사 열반송(涅槃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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