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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禪詩/禪師들의 禪詩

西山大師, 休靜大師, 淸虛休靜의 禪詩(선시) (161)~(170)

by 산산바다 2022.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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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山大師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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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山大師, 休靜大師, 淸虛休靜 (1520~1604)禪詩 (161)~(170)

 

 

西山大師, 休靜大師, 淸虛休靜 (1520~1604. 俗名崔汝信. 兒名 雲鶴.

本貫完山<全州>. 字 玄應, 淸虛. 法名 休靜. 平南 安州 出生.

壬辰倭亂 僧軍을 이끌고 平壤奪還作戰參加하여 을 세웠다.

妙香山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妙香山人 또는 西山大師<別號>로 불린다)

 

서산대사(西山大師)[1520~1604]의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속명은 최여신(崔汝信),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별호는 서산대사·백화도인(白華道人)·풍악산인(楓岳山人)·두류산인(頭流山人)·묘향산인(妙香山人)·조계퇴은(曹溪退隱)·병로(病老) 등이다. 임진왜란 때 전국에 승첩을 돌려 승군을 조직하고 왜군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 활동 사항

서산대사는 1520년(중종 20)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9세 때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과거를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친구들과 같이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칠불동(七佛洞) 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찰에 기거하던 중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화엄경(華嚴經)』·『원각경(圓覺經)』·『능엄경(楞嚴經)』·『유마경(維摩經)』·『반야경(般若經)』·『법화경(法華經)』 등을 읽으며 교리를 탐구하던 중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삭발한 다음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1540년 수계사(授戒師) 일선(一禪), 증계사(證戒師) 석희(釋熙)·육공(六空)·각원(覺圓), 전법사(傳法師) 영관을 모시고 계(戒)를 받았다. 그 뒤 영관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각지를 떠돌며 수행에만 전념하다가 1549년(명종 4)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며 물러나 금강산·두륜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을 다니며 수행하였으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감록(鄭鑑錄)』의 미신에 의하여 정여립(鄭汝立)이 역모(逆謀)를 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역모에 가담한 요승 무업(無業)이 휴정과 유정(惟政)이 자신과 함께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주장하여 투옥되었다가 무죄 석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때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서산대사를 불렀다. 이에 서산대사는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權慄)의 휘하에 들었고,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여 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서산대사는 1,500명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이후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서산대사는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유정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산대사(西山大師) 

 

 

(161) 呼犢鳥(호독조) : 송아지 부르는 새(쏙독새)

 

前是牧童今是鳥(전시목동금시조) : 前生엔 목동이요 今生은 새가 되어 

年年猶愛舊春風(년년유애구춘풍) : 해마다 그 옛날 봄바람을 사랑하네

山深樹密無尋處(산심수밀무심처) : 산 깊고 숲 빽빽해 찾을 곳이 없건마는 

呼犢一聲烟雨中(호독일성연우중) : 보슬비 내리는 속에 "쯧쯧쯧쯧" 부르누나.

 

전생에 소에게 꼴을 먹이던 목동이 새로 해 태어났다.

옛날 소를 몰고 꼴 먹이던 그 봄 동산의 따스한 바람을 못 잊어서 해마다 봄이 오면 그 동산을 찾아와서 운다.

3구를 보면 소 먹이던 목동이 잠깐 한 눈을 파는 사이에 소가 달아나 찾을 수가 없었고, 목동은 하루 종일 부슬부슬 내리는 봄 비 속에서 그 비를 쫄쫄이 맞으면서 `쯧쯧쯧쯧 쯧쯧쯧쯧` 송아지를 찾으며 운다는 것이다.

 

 

 

(162) 花開洞(화개동) : 꽃피는 동리

 

花開洞裏花猶落(화개동리화유락) : 이름은 花開인데 꽃은 오히려 지고

靑鶴巢邊鶴不還(청학소변학불환) : 靑鶴 둥우리에 은 아니 돌아오네.

珍重紅流橋下水(진중홀류교하수) : 잘 가거라! 홍류교 아래 물이여

汝歸滄海我歸山(여귀창해아귀산) : 너는 바다로 가고 나는 으로 간다.

 

다른 解譯

꽃 피는 동리라는 화개동 속에는 오히려 꽃이 지고 있고

청학 머무는 둥지라는 청학동에도 청학은 돌아오지 않았네.

진중한 홍류교 아래 물이여

너는 큰 바다로 돌아가는데 나는 산으로 돌아왔구나.

 

* 珍重(진중) : 1. 진귀(珍貴)하고 중함 귀중(貴重) 2. 아주 소중(所重)히 여김

* 진아 진면목인 본질을 회복하므로 진중하다고 평하심

*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 진아를 회복하는 이치와 같이 청허는 속세를 떠나 산에 들어와 지내야한다

 

 

 

(163) 花雨(화우) : 꽃비

 

白雲前後嶺 ~ 前後 山마루엔 흰 구름 떠가고

明月東西溪 ~ 東西로 흐르는 시내엔 밝은 달빛 떠간다.

僧坐落花雨 ~ 중은 앉은 채 떨어지는 꽃비를 맞고

客眠山鳥啼 ~ 새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164) 還鄕(환향) : 고향에 돌아와서

 

三十年來返故鄕 ~ 三十 年 만에 故鄕에 돌아오니

人亡宅廢又村荒 ~ 아는 사람은 다 죽고 마을은 황폐하여라.

靑山不語春天暮 ~ 靑山은 말이 없고 봄날은 저물어

杜宇一聲來杳茫 ~ 杜鵑새 울음소리만이 아득하게 들려오네.

一行兒女窺窓紙 ~ 한 무리 兒女子들 창호지를 뚫어서 지켜보고

鶴髮隣翁問姓名 ~ 白髮의 이웃 老人은 나의 이름을 물어보네.

乳號方通相泣下 ~ 어릴 때 이름으로 서로 알아보고 나서 눈물짓는데

碧天如海月三庚 ~ 하늘은 바다같이 푸르고 三更의 하늘엔 달도 밝았다.

 

 

 

(165) 還鄕曲(환향곡) : 고향으로 돌아가는 노래

 

曝然訪杖天魔走 ~ 지팡이 내던지는 소리에 天魔(천마)가 도망가고

古路分明脚不差 ~ 옛길이 分明하니 걸음걸이 어긋남이 없다.

生死去來爲一貫 ~ 生死의 가고 옴이 하나로 꿰뚫렸으니

羅羅羅羅 ~ 라라라라(할일 마치고 노래 부른다)

 

* 환향곡(還鄕曲) : 불교가요(佛敎歌謠)의 한 곡명.

청허(淸虛) 휴정(休靜 1520~1604)이 지은 이 곡은 한찬(漢讚)의 일종이고, 생사거래(生死去來)에 대해 읊은 노래이다. 이 노래 가사는 청허집(淸虛集)에 전한다.

 

 

 

(166) 會友(회우) : 벗을 만나며

 

雲樹幾千里 ~ 나무 끝 아슬한 구름 몇 千 里

山川政渺然 ~ 참으로 아득했던 山川이로고.

相逢各白首 ~ 서로 만나면 어느새 흰 머리

屈指計流年 ~ 열 손가락 굽혀가며 지나간 해를 헤아리네.

 

 

 

(167) 輝遠扶天道人(휘원부천도인) : 휘원부천 道人에게

 

祖師西來意 ~ 祖師西쪽에서 오신 뜻을 물으니

庭前栢樹子 ~ 뜰 앞의 잣나무라 하였네.

問答甚分明 ~ 물음도 도 매우 分明한데

龍藏未有底 ~ 經典에는 없는 말이로다.

盡力起疑處 ~ 힘을 다해 疑心을 일으킨 곳

氷消瓦解去 ~ 얼음 녹듯 기왓장 깨지듯 하리라.

 

다른 解譯

祖師西來意(조사서래의) :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인가요?

庭前栢樹子(정전백수자) : 뜰 앞의 잣나무 이니라

問荅甚分明(문답심분명) : 문답이 참으로 분명하나

龍藏未有底(용장미유저) : 용궁 속에 감춰져 있는 경전에도 그 내용은 있지 않다네.

() :

盡力起疑處(진력기의처) : 있는 힘을 다하여 疑端을 일으켰던 곳이

氷消瓦解去(빙소와해거) : 자취도 없이 소멸(消滅)해 버릴 것이라네.

 

禪家龜鑑(선가귀감)에 어느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뜰 앞의 잣나무니라" 하였는데, 그 화두는 용궁의 장경에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용궁의 장경이란 용궁에 모셔 둔 대장경이다.

 

조주 화상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즉 불법의 대의(大意)를 묻는 질문에 마침내 눈앞에 서 있는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고 분명히 답하였다.

논리와 상식을 초월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이는 기존의 관념과 의식의 세계를 부수고 초월하는 화두인 것이다. 화두(話頭)는 보통 상식으로 사량(思量)하고 촌탁(忖度)하여 무슨 뜻이라고 풀어 사족(蛇足)을 붙이면 사구(死句)가 되고 만다. 그러나 맹자도는 가까운 곳에 있다.”고 했고, 무문관(無門關)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고 한 말이 있듯이 祖師西來意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잣나무, 즉 가장 가까운 곳에 진리가 숨어 있다는 말이다.

 

 

 

(168) 悟道頌(오도송) : 오도송

 

白髮非心白 ~ 머리는 세어도 마음은 안 센다고

古人曾漏洩 ~ 옛사람 일찍이 말했던가.

今聞一聲鷄 ~ 이제 닭 우는소리 듣고

丈夫能事畢 ~ 丈夫의 큰일 능히 마쳤네.

忽得白家處 ~ 홀연히 본 故鄕을 깨달아 얻으니

頭頭盡此爾 ~ 모든 것이 다만 이렇고 이렇도다.

萬千金寶藏 ~ 수많은 보배와 같은 大藏經

元是一空紙 ~ 원래 하나의 빈종이로다.

 

 

 

(169) 涅槃頌(열반송) : 열밤송

 

千計萬思量 ~ 천가지 계획 만가지 생각

紅燈一點雪 ~ 붉은 화로속 한 점 눈송이로다.

泥牛水上行 ~ 진흙소가 물위를 걸어가고

大地虛空裂 ~ 대지와 虛空이 갈라지더라.

 

 

 

(170) 臨終偈(임종게) : 입적하며 깨달음을 후세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글

千計萬思量(천계만사량) : 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일랑

紅爐一點雪(홍로일점설) : 붉은 화로 위에 한 점 눈송이로다

泥牛水上行(니우수상행) : 진흙 소가 물 위로 걸어가는데

大地虛空裂(대지허공렬) : 대지와 허공이 찢어지더라.

 

* 청허당(淸虛堂)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조선조 중종 15(1520)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완산 최씨, 속명은 여신(汝信)이었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열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2세 때 안주 목사 이사증(李思曾)이 서울로 데려가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3년 뒤 지리산을 유람하던 중 쌍계사의 숭인장로(崇仁長老)를 만나 출가하게 된다. 당시 최고 선지식 부용영관(芙蓉靈觀) 대사에게 선을 배우고, 18세에 정식으로 스님이 되어 법명을 휴정(休靜)이라 하였으며, 30세에 승과(僧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교종판사도대사(敎宗判事都大師)와 선종판사도대사(禪宗判事都大師)를 겸하게 된다. 이후 금강산과 지리산을 거쳐 묘향산에서 오래 주석하였는데, 妙香山의 옛 이름이 西山이기에 西山大師라 불리게 되었다. 선조 37(1604) 정월 23일에 원적암(圓寂菴)에서 임종게를 남기고 좌탈입망하였다. 세수 85세 법랍 67세였다.

저서에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유가귀감(儒家龜鑑), 도가귀감(道家龜鑑), 심법요초(心法要抄), 운수단(雲水壇), 청허당집(淸虛堂集)이 남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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