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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東坡居士 蘇軾 詩

宋代 蘇軾의 詩와 禪

by 산산바다 2022. 9. 2.

산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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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代 蘇軾

 

 

1. 소식(蘇軾)과 선종(禪宗)

 

육조혜능(六祖慧能) 스님이 중국화된 선종을 지향한 이후, 선종은 당대(唐代)에 이르러 오가(五家)의 선으로 크게 꽃을 피운다. 이러한 발전은 송대(宋代)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이어져 임제종(臨濟宗) 계열이 황룡파(黃龍派)와 양기파(楊岐派)로 나누어져 소위 말하는 오가칠종(五家七宗)’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불립문자(不立文字)로 대표되던 당대의 선은 송대에 이르러서는 불리문자(不離文字)의 선으로 변천되어 갔다. 송대에 이르러 대량의 선어록(禪語錄)오등회원(五燈會元)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고승전(高僧傳)등의 출현이 바로 그것을 대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차고 따뜻함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如人飮水, 冷溫自知)”는 것에서처럼 어느 사물에도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의 깨우침만을 중시하던 초기의 선종은 깨우침의 경지로 인도할 수 있는 방편적인 도구로써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에 크게 흥성한 임제와 운문(雲門) 양파는 송고(頌古)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문자선(文字禪)’을 크게 흥성시켰기 때문에 선학은 새로운 발전단계로 접어들었다. 다시 말해서 선사들의 깨우침에 이른 오도송(悟道頌)이나, 공안(公案) 등을 후인들이 화두(話頭)로 삼아 깨우침에 이르는 하나의 수단으로 삼았기에 이러한 어록이 흥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종의 발전은 사대부와 문인들의 사유의식에도 영향을 미쳐 그들의 창작품과 문학이론 등에는 선종의 흔적이 매우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예를 들면 당대에는 시불(詩佛)이라 칭해지는 왕유(王維)를 필두로 유종원(柳宗元) 유우석(劉禹錫) 맹호연(孟浩然) 백거이(白居易) 등이 적지 않은 禪詩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숙윤(戴叔倫)송도건유방(送道虔游方)에서 시의 사유는 선의 관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서인(徐寅)아도기요(雅道機要)에서 시라는 것은 유가(儒家) 중의 선이요, 한마디로 도와 통하는 것으로 만고(萬古)에 모두 아는 것이다.”

제기(齊己)기정곡랑중(寄鄭谷郞中)에서 시심은 어떻게 전하는가. 증명함이 스스로 선과 동일하다.”라고 논하고 있음을 볼 때 당시의 문인들이 선과 시의 관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이 있었고, 그러기에 시론의 형성에도 선종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이 송대(宋代)까지 계승되어 선학(禪學)은 송대의 시와 시화(詩話) 이론에 더욱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쳐 많은 이선유시(以禪喩詩)의 내용을 담은 시화(詩話)들이 대량으로 탄생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주장으로는 오가(吳可)시를 배우는 것은 혼연히 참선을 배우는 것과 같다(學詩渾似學參禪)”고 주장한 시인옥설(詩人玉屑)을 필두로 범온(范溫)시안(詩眼), 엽몽득(葉夢得)석림시화(石林詩話), 엄우(嚴羽)창랑시화(滄浪詩話)등이 대표적인 이선유시(以禪喩詩)의 저작들이다.

그러나 송대 시가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실질적으로 이선유시이선입시(以禪入詩)’의 기풍을 개창하고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소식이다.

그는 오랜만에 좋은 시집 빌려 밤을 지새운다.

좋은 구절 만나는 곳이 언제나 참선이네(暫借好詩消永夜, 每至佳處輒參禪)”,

고요하기에 온 세상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공허하기에 온 우주를 용납할 수 있다네.

시법과 불법이 서로 방해되지 않으니, 이 말을 마땅히 다시 물어 보리라

(靜故了群動, 空故納萬境. 詩法不相妨, 此語當更請)”(送參寥師),

나의 마음이 공허하고 사물이 없으니, 삼라만상이 스스로 왕래한다네

(我心空無物, 萬象自往還.)”(書王定國所藏王晉卿畵著色山其一),

도인의 마음은 마치 물과 같아, 아름다운 꽃을 비춤에 걸림이 없네.”

등등의 선의 깨달음에 이르는 사유방식을 시의 창작론에 대비시키는 이선유시(以禪喩詩)의 창작론과 풍격론의 주장은 후대 시의 창작이나 시론에 큰 영향을 미쳐 중국의 문학이론 형성과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칭하고, 20세부터 선승과의 교류를 시작하여 일생 동안 백여 명 가까운 고승 대덕들과 깊은 교류를 하였다. 그러므로 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소식을 동림상총(東林常總) 선사의 법사(法嗣)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수많은 고승과 교유를 통하여 심후한 우정을 쌓으면서 또한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 농후한 선기(禪氣)를 양성하였기에 소식의 시문(詩文) 도처에는 선종의 사상을 담은 작품이나 기록을 많이 남기고 있다.

이외에 결코 순탄하다고 할 수 없는 벼슬길에 있어서 좌절과 인생에 있어서 고행이 더욱더 불교 선종에 심취하게 하여 그는 전형적인 외유내불(外儒內佛)을 띠고 있는 중국 문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랬기에 소식은 불교경전과 문헌, 그리고 선종 어록에 대해서도 상당히 익숙하였는데, 특히 그의 많은 선시(禪詩) 속에는 반야경》 《유마힐경》 《능가경》 《원각경등의 禪宗經典을 원용하고 있음을 보아 충분히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송대를 대표하는 시인인 蘇軾禪詩에 나타난 주제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소식 禪詩의 특징과 내용을 파악하는 동시에 선종 사상이 소식의 인생관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고, 그로 인한 소식의 생활방식과 사유방식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서는 禪宗 思想이 기타 중국 문인 士大夫들에게 미친 영향을 유추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소식 禪詩의 특징과 주제

 

1) 생활 속 오성(悟性)의 발로

소식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자주 선종의 사유방식을 운용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시는 매우 풍부하고 심오한 선종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평소에 선종사상에 대해 대단한 지식과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고로 유희재(劉熙載)동파의 시는 공()에서 유()를 잘 만들고, 또한 무()에서 유()를 잘 만들어내는데 그 주된 이유는 실질적으로 선의 깨달음에서 온 것이다.”7)라고 말하고 있다.

그 자신 스스로 해가 감에 따라 점점 은거하는 의미를 알아, 생각한 것을 침대를 사이에 두고 고승(淸順)과 논한다네(年來漸識幽居味, 思與高人對榻論).”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 속에는 이러한 보편적인 생활 속의 깨우침을 나타내는 많은 선시가 있다.

예를 들어금시(琴詩)를 살펴보자. “東坡詩善于空諸所有, 又善于無中生有, 機括實自禪悟中來.”

 

蘇軾詩集8, 是日宿水陸寺, 寄北山淸順僧其一.

 

若言琴上有琴聲, 만약 거문고 소리가 거문고 위에서 난다면,

放在匣中何不鳴. 어찌 그대로 두면 속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가?

若言聲在指頭上, 만약 거문고 소리가 손가락 위에서 난다면,

何不于君指上聽. 어찌하여 그대는 손가락 위에서 듣지 않는가?

 

이 시는 마치 선사의 게송과 비슷하다.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거문고와 손가락의 사이에서다. 
거문고에 손가락이 닿아 소리로 울리는 이 미묘한 이치를 아는가? 
소리는 그렇다면 어디에 숨어 있었더란 말인가? 
깨달음은 어디에 있는가? 

거문고와 튕기는 손가락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소리를 울리지 못한다.

능엄경에 보면 예를 들어 거문고와 비파는 비록 아름다운 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만약 오묘한 손가락이 없다면, 결국에는 소리를 낼 수 없다.

당신과 중생들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譬如琴瑟琵琶, 雖有妙音, 若無妙指, 終不能發. 汝與衆生亦復如是.)”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시인이 능엄경을 인용하여 주관과 객관적인 조건이 서로 교묘하게 잘 결합하여야 비로소 좋은 효과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보편적인 哲理를 매우 생동감 있게 설명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의 생()과 멸()도 이것과 같은 도리임을 알 수 있다.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소식의 제서림벽(題西林壁)도 역시 자연 사물에 대한 깨달음을 통하여 선종의 심오한 이치를 나타내고 있다.

 

橫看成嶺側成峰, 가로로 보면 고개 옆에서 보면 봉우리,

遠近高低各不同. 원근 고저의 보는 각도에 따라 각각 다르게 보이네.

不識廬山眞面目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까닭은

只緣身在此山中. 단지 이 몸이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네.

 

이 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이 애송하는 유명한 작품이다.

이전의 많은 시인은 이 여산을 노래하면서 대부분 웅장하거나 수려한 여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했다.

그러나 소식의 이 시는 여산의 실질적인 풍광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산을 유람하면서 느낀 시인의 정감을 의론으로 표시하고 있다.

무명(無明)을 제거하고, 주관과 객관의 대립성을 없애야 비로소 우주인생의 궁극적인 철리를 명백히 깨달을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여산연우(廬山煙雨)를 살펴보자.

 

廬山煙雨浙江潮, 여산의 안개와 비, 전당강(錢塘江)의 조류,

未到千般恨不消. 이르지 않으면 원망이 사라지지 않는다네.

到得還來無別事, 도에 이르러 되돌아오니 차별이 없어,

廬山煙雨浙江潮. 여산의 안개와 비, 전당강의 조류.

 

이 시는 불교와 선종의 많은 종파에서 인용하는 선리시(禪理詩)로 깨우침에 이른 경지와 이르지 못한 경지를 매우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소식은 여기에서 무궁무진한 변화를 이루는 여산의 경치와 절강의 전당강 조류의 묘사를 통하여 그 속에 인생의 철리를 암묵적으로 비유하고 있다. 만약 사람의 마음이 바깥 사물의 영향을 받으면, 곧 바로 취함과 버림, 사랑과 증오 등의 편견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오로지 올바른 정념(正念)을 간직하면, 마음의 근원이 맑고 투철해져 마음의 경지가 거울과 같이 투명하여 비로서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1구와 4구는 표면적으로는 똑같은 구절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경계가 다른 것으로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경계인 것이다. 즉 정(), (), ()의 논리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여산을 노래한 증동림총장로(贈東林總長老)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溪聲便是廣長舌, 계곡물 소리는 바로 부처님의 상이니

山色豈非淸淨身. 산색은 어찌 청정한 법신이 아니리요?

夜來八萬四千偈, 밤 사이에 팔만 사천 게송이 있으니

他日如何擧似人. 다른 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명할까?

 

광장설이란, 법화경》 〈신력품(神力品)에서 나온 것이다.

세존이 큰 신력으로 광장설을 나오게 하였는데 위로는 범세(梵世)에 까지 이르렀다

(世尊現大神力, 出廣長舌, 上至梵世).”가 그것이다.

불교에서는 부처가 소위 32()을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형상으로 나타나 설법을 한다고 전한다. 광장설이 바로 32상 중의 하나인 것이다.

청정신이란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의 준말로 삼신(三身) 중의 하나이다.

만법(萬法: 森羅萬象宇宙萬物)은 모두 진여(眞如) 법성(法性) 자성(自性)에서 나온 것으로, 고로 만법 자체가 바로 진여이고 법성이며 자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만물 모두가 부처이기에 삼라만상 모두에도 자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광장설상과 청정법신을 인용하여 불법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음을 비유, 설명하고 있다.

즉 불법은 진여법체(眞如法體)의 완전하고 큰 공간 속에 위치하여,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언제 어디서든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종의 푸르고 푸른 대나무 모두가 법신이고, 울창한 황색 꽃은 반야가 아님이 없다.

(靑靑翠竹, 盡是法身. 鬱鬱黃花, 無非般若.)”(景德傳燈錄)의 사상과 일치하고 있다.

이로 보아 소식은 일반적인 생활 속에서 사물을 관조한 결과, 그의 시가 속에는 이러한 선종의 경전과 선승들의 깨달음의 표시인 선종 공안(公案)의 화두(話頭)나 기봉(機鋒) 등이 들어가 매우 생동감이 뛰어나며 풍부하고도 오묘한 哲理性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시 이외에도 등령롱산(登玲瓏山)〉 〈사주승가탑(泗州僧伽塔)

화자유민지회구(和子由池懷舊)등이 모두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2) 인생여몽(人生如夢)을 노래

불가에서는 모든 세계가 상성(常性)을 가지고 있지 않아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인생도 생로병사 등의 여러 변화가 있기 때문에 상성이 없다고 보고 있다.

특히 금강경에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바로 꿈, 환상, 거품과 같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바로 인생은 여몽(如夢)’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금강경: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러한 금강경을 선종에서는 매우 중시하고 있는데, 오조홍인(五祖弘忍)금강경으로 제자들을 거두어들였고, 육조혜능도 금강경을 통하여 깨우침을 얻은 것으로도 이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매우 곡절 있는 인생역정을 겪었고, 또한 선종사상에 심취한 소식은 이러한 인생여몽(人生如夢)’을 주제로 한 선시를 적지 않게 남기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송 선종(神宗) , 조정에서는 변법(變法)의 시행 여부 등을 둘러싸고 통치계급 내부에서 극심한 다툼이 시작되었다.

소식은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선종 희령(熙寧) 6(1073), 항주 통판(通判)으로 부임하여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으니, 백 년의 과객이 되려 한다네. (人生如朝露, 要作百年客).”라는 인생의 감개를 발하였고, 3년 뒤 희령 9, 밀주(密州)에서도 인생의 고단함과 짧음을 노래하였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고, 백발은 나날이 늘어가네(人生如朝露, 白髮日夜催).”

 

다시 2년 후(1078) 서주(徐州)에서 차운왕정로퇴거견기(次韻王廷老退居見寄)시를 지어 직접적으로 인생몽환(人生夢幻)을 노래하고 있다.

 

登常山絶頂廣麗亭.

 

浮花不辨春 : 흔들리는 꽃봉오리에 봄을 분별 못하고,

歸來方識歲寒人 : 돌아와서 비로소 굳은 사람 알았네.

回頭自笑風波地 : 생각하니 스스로 풍파 겪은 곳 우습고,

閉眼聊觀夢幻身 : 눈을 감고 잠시 보니 꿈같은 인생이네.

 

이 시에서 소식 자신이 온갖 풍파를 겪은 후에야 비로소 인생이 꿈이요, 환상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어떠한 흔적을 남기는 실상이 아닌 것과 같이 눈 깜작할 사이에 사라지는 한바탕의 꿈, 환상, 거품이라는 선리(禪理)와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인생관은 오대시안(烏臺詩案, 1079)을 겪은 후에도 계속 지속될 뿐만 아니라, 더욱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원풍 5(1082) 황주 유배지에서 지은 <정월이십일, 여번곽이생출교심춘, 홀기법년시일동지여왕성작시, 내화전운>(正月二十日, 與潘郭二生出郊尋春, 忽記去年是日同至女王城作詩, 乃和前韻)의 시도 역시 인생여몽(人生如夢)을 이야기하고 있다.

송 선종 때인 원풍 2(1079) 소식의 나이 44세에 오대시안이라는 문자옥(文字獄)이 발생하였다. 당시 소식은 시를 지어 조정의 신법(新法)을 풍자 비판하였는데, 신법당들이 이를 빌미 삼아 조정을 비판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하여 어사대옥에 감금하였다.

역사에서는 이를 오대시안이라고 칭한다. 당시 이 문자옥은 유가의 경세사상에 의거하여 자기의 포부를 실천하려던 소식에게 정신적·사상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준 사건이 되었다.

출옥한 이후 황주로 유배되어서는 모든 것을 초월한 심정으로 불교 선종과 가까이 하게 된다.

東風未肯入東門 : 동풍이 동문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으니,

走馬還尋去歲村 : 말 타고 또 다시 작년에 간 곳 찾아가네.

人似秋鴻來有信 : 사람은 마치 가을 기러기 오듯이 확실하니,

事如春夢了無痕 : 그 일은 마치 봄날의 꿈같이 흔적이 없네.

 

세상사 모든 것이 지나간 이후에는 마치 봄날의 꿈과 같이 아무런 흔적이나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겪었던, 즉 오대시안(烏臺詩案) 같은 모든 고난 등을 포함한 일체의 미련과 번뇌가 모두 봄날의 꿈과 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원우(元祐) 원년(1086) 구법당(舊法黨)의 집권으로 잠시 조정으로 돌아 온 소식은 왕진경과 조정에서 만나 시를 받고 화옥진경(和王晉卿)이란 답시를 지었다.

 

吾生如寄耳 : 나의 인생은 잠시 기탁한 것일 뿐,

何者爲禍福 : 무엇이 화가 되고 복이 되는가!

不如兩相忘 : 둘 모두를 잊어버림이 좋지 않은가,

昨夢那可逐 : 어젯밤 꿈을 어찌 쫓아가겠는가?

 

일반적으로 객관적인 현실을 잊어버리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그것을 여몽(如夢)’이나 여환(如幻)’으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와 선종을 자기의 사상기반으로 자기의 정신적인 탈출구를 찾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고로 위의 시에서도 불가에서 말하는 무상성(無常性)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인생 자체가 잠시 기탁한 허상인데 화와 복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소식이 12세에 아버지 소순을 따라 건주(虔州)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 부근의 천축사(天竺寺)에 들러 백거이가 쓴 시를 보았다. 47년이 지난 59세 때(1094) 다시 건주를 지나면서 천축사에 들렀는데, 이때는 이미 백거이의 시가 보이지 않아 이에 천축사(天竺寺)란 시를 지어 자기의 감회를 서술하고 있다.

 

香山居士留遺跡天竺禪師有故家

空詠連珠吟疊壁已亡飛鳥失驚蛇

林深野桂寒無子雨浥山姜病有花

四十七年真一夢天涯流落涕橫斜

 

香山居士留遺跡 : 향산 거사의 유적이 남아 있고,

天竺禪師有故家 : 천축 선사의 옛집도 있다네.

空詠連珠吟疊壁 : 연주체 아름다운 시를 읊어보는데

已亡飛鳥失驚蛇 : 이미 새 날고 뱀 놀랄만한 필적은 사라져 없네.

林深野桂寒無子 : 숲이 깊어 야생 계수나무는 그늘로 열매 맺지 않고

雨浥山姜病有花 : 비에 젖은 생강은 죽어가며 겨우 꽃이 피었네.

四十七年眞一夢 : 47년 세월이 진실로 하나의 꿈과 같고,

天涯流落淚橫斜 : 세상 끝 유랑하니 눈물이 옆으로 흐르네.

 

이 시도 위의 시와 마찬가지로 인생여몽(人生如夢)’의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젊었을 때 보았던 시가 지금은 보이지 않고 47년의 세월 동안 경험한 정치적인 좌절과 유배 생활 등 모든 것이 하나의 꿈이라는 것이다.

이로 보아 소식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심리적으로 깊은 변화가 일어나 세상사의 모든 것이 허황하고 무상함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해인 1095년 소식은 혜주(惠州)에서

사월십일 일초식려지(四月十一日初食)의 시에서도 역시 같은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我生涉世本爲口, 나의 인생 벼슬길로 든 것은 원래 입 때문이고,

一官久已輕蓴. 관직은 전부터 순채, 농어보다 가볍게 여겼네.

人間何者非夢幻, 인간사 어떤 것이 꿈과 환상이 아닌가?

南來萬里眞良圖. 남쪽으로 만 리 오니 정말 아름답다네.

 

여기에서 소식은 인연을 따르는 생활태도와 인생은 꿈이고 환상이라는 개인적인 감정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만물을 초월한 정신적인 배경 아래에서 자신이 비록 남쪽으로 만 리나 좌천되어왔지만, 그러나 이곳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만족한다는 시인의 낙관적이고 광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소식이 벼슬길에서 겪은 여러 차례의 좌절이 그로 하여금 불교 선종에 더욱 심취하게 하였으며, 또한 그로 하여금 불교 선종에서 말하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상성(常性)’이 없고 무상(無常)’한 세계임을 깨닫게 하였다.

특히 오대시안(烏臺詩案) 이후 하마터면 목숨조차도 잃어버릴 뻔한 인생 최대의 고비를 넘긴 소식이 향을 사르고 묵좌(默坐)를 행하면서 깊이 깨달은 것이 바로 인생여몽(人生如夢)’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공명과 부귀에 대한 관념이 점점 옅어졌으며, 또한 세속을 초월하여 자유자재하고 담박한 정신으로 인생여몽을 노래하고 있는것이다.

 

3) 일체개공(一切皆空)의 깨침

소식은 인생여몽(人生如夢)’ 이외에 역시 선종의 핵심사상인 일체개공을 통하여 그의 정신적인 해탈을 추구하고 있다.

반야경에서는 인간 세상의 모든 물질과 사람의 신체는 본래 공()한 것이며, 실체가 없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다.

임제종의 창시자 임제의현(臨濟義玄) 선사는 임제어록에서 다음과 같이 인간의 공허한 분별심과 객관적인 세계를 부정하고 있다.

 

제자가 묻는다:

어떤 것이 진정한 부처이고, 진정한 법이며, 진정한 도입니까?”

스승이 대답하기를:

부처라는 것은 마음이 깨끗한 것이고, 법이라는 것은 마음이 밝게 빛나는 것이며,

도라는 것은 도처에 걸림이 없는 맑은 빛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개가 바로 하나이며, 모두 헛된 이름으로 실질적으로 있지 않은 것이다.

臨濟語錄: “: ‘如何是眞佛, 眞法, 眞道?’

師云: ‘佛者心淸淨是, 法者心光明是, 道者處處無碍淨光是,’ 三卽一, 皆是空名, 而無實有.”

이 세상 모든 일과 모든 사물이 모두 허상이고 환상이며 실질적으로 있지 않은, 즉 실체가 없다는 것이 바로 ()’의 사상인 것이다. 사람이 느끼고 있는 모든 사물과 감정은 허망한 망상이며, 단지 청정한 비어 있는 심령만이 바로 진실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覺悟)에 이르려면 우선적으로 망념(妄念)을 제거하여 현상세계의 오염을 받지 않고 현실 세계의 객관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경계에 도달하는 길만이 성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蘇軾문조양오자야출가(聞潮陽吳子野出家)에서 조양군의 오자야가 세속을 떠나 출가한다는 것을 듣고 자기의 일생 동안 겪은 과정과 오자야의 출가를 대비하며 인생의 객관적인 실체를 모두 부정하면서 선종의 공사상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子昔少年日氣蓋里閭俠自言似劇孟叩門知緩急

千金已散盡白首空四壁烈士嘆暮年老驥悲伏櫪

 

妻孥真敝履脫棄何足惜四大猶幻座衣冠矧外物

一朝發無上顧老靈山宅世事子如何禪心久空寂

 

世間出世間此道無兩得故應入枯槁習氣要除拂

丈夫生豈易趣舍誌匪石當為師子吼佛法無南北

 

妻孥真敝履 : 처와 자식을 진정으로 낡은 신발처럼,

脫棄何足惜 : 벗어 던지면 애석해 할 필요가 없는지?

四大猶空幻 : 사대가 모두 공하며 헛된 것인데,

衣冠外物 : 의관은 하물며 외물에 불과하다네.

一朝發無上 : 한때 불법의 길로 들어섰다면,

願老靈山宅 : 오랫동안 영취산에 있기를 바라네.

世事子如何 : 당신은 세상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禪心久空寂 : 선심은 오래도록 공적에 이르렀네.

 

그는 유가의 사상 속에서 인생의 답안을 찾지 못하고 불교 선종에 심취하였고 결국에는 사대(四大), 즉 사람의 몸과 인생이 모두 환상이고 공허한 것임을 알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벼슬도 신외지물(身外之物)로 여기며 조금도 애석해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무상(無上)’이란 바로 불법의 길을 가리키고, 영산이란 영취산(靈鷲山)을 이른다. 또한 오자야에게는 선심(禪心)이 이미 오랫동안 공적(空寂)의 경계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다.

소성(紹聖) 4(1097) 소식이 62세에 혜주의 유배지에서 더욱 황량한 해남도로 옮기라는 명을 다시 받고도 황량한 남방에서 아홉 번 죽어도 후회 않으며, 이러한 기이한 절경을 유람하니 내 인생의 최고라네.”15)라는 낙관적이고 광달한 면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해남도로 떠나며 동생 소철에게 보낸 차전운기자유(次前韻寄子由)의 시속에도 이러한 불교 선종의 공사상을 통하여 정신적인 안정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蘇軾詩 次前韻寄子由(차전운기자유)의 첫 부분에서

 

我少即多難邅回一生中百年不易滿寸寸彎強弓

老矣復何言榮辱今兩空泥丸尚一路所向余皆窮

似聞崆峒西仇池迎此翁胡為適南海復駕垂天雄

下視九萬里浩浩皆積風回望古合州屬此琉璃鐘

離別何足道我生豈有終渡海十年歸方鏡照兩童

還鄉亦何有暫假壺公龍峨眉向我笑錦水為君容

天人巧相勝不獨數子工指點昔遊處蒿萊生故宮

 

我少卽多難, 나 젊었을 때 많은 고난의 길,

回一生中. 일생을 머뭇거리며 살아왔다네.

百年不易滿, 백년의 세월 쉽게 차지 않고,

寸寸彎强弓. 갈수록 강한 활을 당긴다네.

老矣復何言, 늙었으나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榮辱今兩空. 지금 보니 영욕이 모두 공허하네.

泥洹尙一路, 열반의 한길만을 바라보니,

所向餘皆窮. 가는 곳마다 여유가 끝까지 미치네.

 

에서 시인은 자기 인생의 모든 영화와 욕됨은 바로 하나의 실체도 없는 공허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니원(泥洹)이란, 바로 불교 선종의 열반(涅槃)을 일컫는 것이다. 열반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있다.

하나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세상을 떠난다는 의미, 즉 죽음을 이야기하고, 다른 하나는 생사윤회를 초월한 깨달음의 경계로 불교 수행의 최고의 이상 경지를 말한다. 불교 선종의 공관(空觀) 운용을 통하여 자기의 정신적인 의탁처로 삼아서 광달함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식은 선종의 공사상을 시 속에 주입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선종의 깨달음에 이르는 사유방식을 시의 창작론에도 운용하고 있다.

 

송참료사(送參寥師)의 시는 첫 구절부터 선사가 인생의 험난함 속에 일체가 공함을 배워 백 가지의 상념이 이미 차가운 재로 변하였네 (上人學苦空, 百念已灰冷).”라고 참료 선사의 뛰어난 인품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칭찬하고 있다.

 

上人學苦空百念已灰冷劍頭惟一吷焦谷無新穎

胡為逐吾輩文字爭蔚炳新詩如玉雪出語便清警

退之論草書萬事未嘗屏憂愁不平氣一寓筆所騁

頗怪浮屠人視身如丘井頹然寄淡泊誰與發豪猛

細思乃不然真巧非幻影欲令詩語妙無厭空且靜

靜故了群動空故納萬境閱世走人間觀身臥雲嶺

鹹酸雜眾好中有至味永詩法不相妨此語當更請

 

 

細思乃不然,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아니하고,

眞巧非幻影. 진정으로 교묘하면 환영(幻影)이 아니라네.

欲令詩語妙, 좋은 시어를 오묘하게 하려면,

不厭空且靜. ()과 정()을 싫어하지 않아야 하네.

靜故了群動, 고요하기에 온 세상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空故納萬境. 공허하기에 온 우주를 용납할 수 있다네.

 

공허함과 고요함속의 그윽한 사유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처방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법(詩法)과 불법(佛法)이 상통하는 곳은 바로 공허함과 고요함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소식이 참료 선사를 칭찬한 도인의 흉중에는 고요한 물이 맑고, 만상이 생기고 사라져도 본체가 달아나지 않는다

(道人胸中水鏡淸, 萬象起滅無逃形).”(次韻僧潛見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구절에 시법과 불법이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 (詩法不相妨).”고 결론을 짓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 선종의 사유방식을 그의 시론에도 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관점을 나타내고 있는 서왕정국소장왕진경화착색산(書王定國所藏王晉卿畵著色山)기일(其一)을 보자.

 

煩君紙上影, 그대 종이 위 그림자가 산란하게,

照我胸中山. 내 마음속의 산을 비춘다네.

山中亦何有, 산중에는 또한 무엇이 있는가?

木老土石頑. 나무는 늙고 흙과 돌이 무디다네.

正賴天日光, 마침 하늘에 의지한 태양 빛 비추니,

澗谷紛. 계곡 사이에 여러 빛깔이 흩날리네.

我心空無物, 나의 마음이 공허하고 사물이 없으니,

斯文何足關. 이 무늬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君看古井水, 그대는 옛 우물을 보았는가.

萬象自往還. 삼라만상이 스스로 왕래한다네.

 

왕진경(王晉卿)이 그린 착색산(著色山)이란 그림을 왕정국(王定國)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시인이 이 그림을 보고 느낀 바를 이 시로써 남기고 있다.

그림 속의 산의 형상이 작가의 마음을 비추고 마음속에는 흙과 돌, 늙은 나무, 태양 등 삼라만상이 들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4구는 바로 시에서 말하고 있는 고요하기에 온 세상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공허하기에 온 우주를 용납할 수 있다.”와 같은 경계를 말하고 있는것이다.

고정수(古井水)”는 바로 선가의 청정지심(淸淨之心)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본심(本心)’을 깨달으면 온 세계가 공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또한 물아(物我)가 합일 되어 나의 마음이 바로 우주만물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마음속에는 산하대지가 있고, 해와 달과 별 등 온갖 만물이 있으며, 나의 본심이 바로 부처이고 부처가 바로 나의 마음이라는 진리를 시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체득

불교 선종에서 ()’자의 운용을 통하여서도 공관(空觀)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소식은 자기의 작품 속에 위에서 언급한 ()’()’자의 운용 이외에 ()’자의 묘사를 통하여 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를 통하여 蘇軾은 인생에 있어서 객관적인 실체를 부정하는 동시에 자기의 정신적인 깨달음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원풍(元豊) 2(1079) 7월 발생한 오대시안(烏臺詩案) 이후 소식은 이전의 정치상에 있어서 포부를 거의 포기하고 황주(黃州)에 두문불출하면서 불경으로써 세월을 보냈으며향을 사르고 묵좌를 행하면서 깊이 자아성찰을 하여 물과 아를 서로 잊고, 몸과 마음이 모두 해졌다. (焚香默坐, 深自省察, 則物我相忘, 身心皆空)”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보아 황주로 유배된 이후로 그는 완전히 불교 선종에 심취하여 이것을 사상적인 무기로 삼아 인생의 고뇌를 해결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시인의 나이 47세에 황주에서 지은 촉승명조사귀서룡구자벽(蜀僧明操思歸龍丘子書壁)시는 황주에서의 유배 생활 속에 나타나는 작가의 고통을 선종의 공관을 통하여 해결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厭勞生能幾日莫將歸思擾衰年

片雲會得無心否南北東西只一天

 

厭勞生能幾日, 오랜 시간의 괴롭고 힘든 인생 며칠이나 남았는가

莫將歸思擾衰年. 고향 생각으로 노쇠해가는 해를 어지럽히지 말아라.

片雲會得無心否? 한 조각구름은 무심을 얻을 수 있는지?

南北東西只一天. 남북과 동서가 모두 한 하늘에 있다네.

 

선종의 무심(無心)’의 사상을 인용하여 심적인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을 추구한다.

선종의 화두에는 종종 구름으로 마음을 비유하고 있다.

즉 어느 곳에도 묶여 있지 않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구름과 같이 사람의 마음도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함을 설명하고 있는것이다.

傳燈錄: “惠忠國師, 自受心印. 肅宗上元二年赴京, 帝問師在曹溪寺得何法?

師曰: ‘陛下見空中一片雲?’

(혜충국사가 마음의 인가를 받고, 숙종 상원 2년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숙종이 스님은 조계사에서 어떤 법을 얻었습니까?’라고 물었고,

이에 스님은 폐하께서는 공중에 한 조각의 구름이 보입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다음의 전도안유사운 직수인취주인옹작양절희지(錢道人有詩云 直須認取主人翁作兩絶戱之)기이(其二) 시는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오도송(悟道頌)을 인용하여 선종의 공관을 나타내고 있다.

 

有主還須更有賓, 주인이 있으면 반드시 손님이 있어야 하니,

不如無鏡自無塵 거울이 없으면 먼지가 없는 것보다 못하네.

只從半夜安心后, 오로지 한밤중에 안심의 경지에 이른 후부터

失却當前覺痛人. 바로 앞의 통증을 느끼는 이를 잊어버렸네.

 

이 시의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첫 구절은 전() 승려의 바로 주인공을 취하여 알아야 한다. (直須認取主人翁)”의 구절을 겨누어서 지은 것이다.

여기에서의 주인공은 불교 선종에서 말하는 불성(佛性)을 이야기하고 있다.

육조혜능의 오도송을 인용하여 마음속에는 본래 주인과 객, 거울과 먼지 등 모든 분별의 관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3, 4구에서 능엄경을 인용하며, 스스로 참선하여 깨달음에 이르렀음을 나타내고 있다.

능엄경: “독침이 발을 상하게 하니, 몸을 움직이면 통증이 오는데, 청정심을 깨달으니, 조금의 아픔의 느낌도 없도다. (毒刺傷足, 擧身疼痛, 覺淸淨心, 無痛痛覺.)”

蘇軾이 만년에 지은 자제금산화상(自題金山畵像)의 시속에도 이러한 공관을 통한 안심(安心)의 경지를 묘사하면서 정신적인 해탈을 추구하고 있다.

 

心似已灰之木身如不系之舟問汝平生功業黃州惠州儋州

 

心似已灰之木 : 마음은 이미 재가 된 나무와 같고,

身如不繫之舟 : 몸은 마치 묶이지 않은 배와 같네.

問汝平生功業 : 평생 동안 쌓은 공덕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黃州惠州: 황주와 혜주, 담주에 있다고 말하겠네.

 

이 시는 마치 불가의 게송과 비슷한데 정국(靖國) 원년(1101) 728, 소식의 나이 66세 때 지은 것으로 이 시를 지은 지 2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소식은 이 시를 통하여 자신의 험난한 일생을 되돌아보고 이에 대한 감회를 적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옛날 이용면(李龍眠)이 그린 소식의 초상화를 금산사에서 보관하였는데, 지금 다시 금산사를 지나면서 자기의 초상화를 보고 이 시를 읊은 것이다.

불교 선종에는 고목(枯木)’이란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무심의 상태를 비유, 즉 일체 망념과 망상을 끊고 모든 것이 멸한 상태를 말한다.

 

송휘종 정국 원년(1101) 7, 소식이 임종하기 이틀 전에 그의 옛 친우이며, 옛날 항주에 있을 때 경산사(徑山寺)의 주지였던 유림(維琳) 스님이 상주(常州)로 병 문안차 소식을 방문하였다.

유림 스님은 소식에게 여동파문질(與東坡問疾)이란 시를 지어 소식의 마지막을 위로해주었고, 이에 소식은 아래의 답경산유림장로(答徑山琳長老)란 시로 유림 스님에게 답하였다.

 

與君皆丙子, 그대와 나는 같은 병자생,

各已三萬日. 각각 이미 삼만 일을 살았네.

一日一千偈, 하루에 천개의 게송 외우니,

電往那容詰. 시간의 흐름 속에 어찌 멈추리.

大患緣有身, 큰 병은 몸이 있는 인연이고,

無身則無疾. 몸 없으니 바로 괴로움도 없노라.

平生笑羅什, 평생을 구마라집을 비웃은건,

神呪眞浪出. 신통한 주문이 진정 소용없기에.

 

근심과 병이라는 것은 본래 몸의 인연에 의하여 생기는 것인데, 자기에게는 원래 몸이라는 것이 없으니 당연히 병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본래 하나의 사물도 없다.’는 혜능의 오도송을 인용하여 객관적인 자기 몸의 실체를 부정하면서 유림 스님에게 병문안 올 필요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 두 구에서는 구마라집이 임종 전에 자기의 병을 낫게 하려고 제자에게 신통한 주문을 외우라고 한 행위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식이 생사에 초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은 바로 만물이 실체가 없는 공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소식은 육조의 게송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을 인용하여 사람의 자성이 청정함을 주장하거나 혹은 모든 번뇌를 벗어난 안심(安心)의 경지와 선종의 공사상을 선양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복잡다난한 일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게송을 원용하여 인생의 해결점을 모색하는 동시에 정신적인 고뇌로부터 탈피하려 하였고, 이러한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은 세속적인 것을 초월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시인은 개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언제나 수연자적(隨緣自適)하거나 낙관광달(樂觀曠達)하며 해학적인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3. 결론

소식(蘇軾)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직접적으로 선종의 사유의식을 원용하여 많은 선시를 창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바로 그가 오랫동안 불교 선종에 대해 지속적인 흥미를 가진 결과이며, 또한 선종사상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특히 벼슬길에 있어서 좌천과 유배로 점철된 그의 불우한 일생과 이로 인한 이상과 현실 속에서 느끼는 내심의 갈등은 더욱더 선종에 귀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 속에는 자주 ()’ ‘()’ ‘()’ 등의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의 사상은 단순히 인생이 짧고 덧없음을 한탄하는 형이하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인생 자체가 공하다는 통찰의식의 토대 위에서 나타내고 있는것이다. 여기에서 세 가지 방면으로 소식 선시의 의미를 귀결할 수 있다.

 

첫 번째, 소식은 세속을 초월한 담박한 정신으로 인생여몽(人生如夢) 일체개공(一切皆空)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을 노래할 수 있었기에,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낙관적이고 광달한 삶을 살 수 있었던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역정을 선리를 통하여 더욱더 높은 경지의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였고, 이것이 자기 인생의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데 가장 유익한 처방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연이은 좌천과 유배의 곤궁한 현실 속에서도 시인은 언제나 대범함을 유지하여 수연자적(隨緣自適)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정신적인 고민과 번뇌 속에서도 자아해탈을 추구하여 낙관적이고 광달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선시(禪詩) 속에 마치 세속을 벗어난 선사의 풍모가 보이거나, 혹은 선사의 기봉(機鋒)과 같은 시가(詩歌)가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소식은 선학(禪學)에 대한 학습과 동시에 직접적인 실천이 있었기에 세속의 일에 초연하며, 맑고 청명한 마음을 유지하며 지속적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평정(平靜)한 마음과 선종에 의지한 처세 태도는 바로 자기 인생에 대한 이지적인 반성을 불러왔고, 이를 토대로 정신적인 안위와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 속에는 언제나 선리(禪理)와 선취(禪趣)가 담겨져 있는 동시에 인생을 달관한 듯한 해학적인 면도 나타나고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소식 시가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해학성과 유머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의 성격의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선가(禪家)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선사들이 제자들을 깨우침으로 인도하기 위해 행하는 이성을 초월하는 행위와 언어 속에는 언제나 해학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함이 묻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소식의 선시(禪詩)는 후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 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자주 소식의 공안(公案)과 기봉(機鋒)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학생이자 친구인 황정견도 소식의 뒤를 이어 많은 선시(禪詩)를 창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개창한 강서시파(江西詩派) 역시 선종(禪詩)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송대의 선시는 새로운 발전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러므로 소식과 황정견 등의 이선입시(以禪入詩)’의 광범위한 유행은 바로 당시(唐詩)와는 구별되는 송시(宋詩)의 새로운 특징인 철리(哲理)’를 형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동시에 소식의 이선유시(以禪喩詩)의 창작론과 풍격론의 주장은 후대 시의 창작이나 시론에 큰 영향을 미쳐 중국의 문학이론 형성과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다.

이렇게 송대의 소식은 선종사상 속에서 자기의 인생관과 삶의 철학을 찾아내어 험난한 역경 속에서도 달관적이고 광달한 면을 보이는 동시에 평정한 마음으로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인생태도는 후대 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후일 사대부 하나의 전형이 되고 있다.

사실 오늘과 같이 물질 만능과 배금주의가 팽배하며 사람 사이의 인정이 사라지는 각박한 세상에 선의 사유와 사상이 더욱더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선의 사유만이 우리들의 가슴을 넓혀주고 마음을 안정시키며, 삶의 여유를 높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송대(宋代) 소식(蘇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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