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蘇東坡 蘇軾의 일생
蘇軾 1036년 ~ 1101년
중국 북송(北宋)의 문신. 자는 자첨(子瞻)ㆍ화중(和仲), 호는 동파(東坡).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3소(三蘇)라 불리며, 같이 당ㆍ송 8대가의 한 사람이다. 철종에 중용되어 구법파(舊法派)의 중심적 인물로 활약하였고 특히 구양수(歐陽修)와 비교되는 대 문호로서 유명한 《적벽부(赤壁賦)》를 비롯한 시ㆍ사(詞)ㆍ고문(古文) 등에 능하며 재질이 뛰어나 서화(書畫)에도 유명하였다.
“이 분은 텅 빈듯하면서도 한없이 넓은 마음씨로서 사람들과 경계를 다투지 않으셨다.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즐겁게 어울렸으니 유하혜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의 풍모를 갖춘 분이었다. 나는 그분을 본받고 싶지만 역부족이다.” -허균, [성소부부고]
“우리는 소동파를 구제불능의 낙천가로, 위대한 인도주의자로, 백성들의 친구로, 위대한 작가로, 서예의 대가이자 창조적인 화가로, 또는 술을 빚고 품평하는 명인으로, 엄숙주의를 타파하려던 사람으로, 단(丹) 수련자로, 불교인으로, 유가적 관료로, 황제의 측근으로, 술의 신선으로, 온정적인 재판관으로, 정치비평가로, 달빛 아래 산책하기를 즐기는 사람으로, 시인으로, 익살꾼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도 소동파의 전부를 이야기했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중국에서 누군가 소동파의 이야기를 꺼낸다면, 듣는 사람은 으레 미소를 머금는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다.” -린위탕, [소동파 평전]
★ 선비의 본분
선비, 또는 사대부라 불리는 계급은 전통 동아시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존재다. 관료가 되고 정치 엘리트가 되는 것을 기본 목표로 삼지만 공부하는 그 자체를 업으로 여기고, 초야에 묻혀 재능을 발휘하지 않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본다. 금욕적인 도덕률을 강조하지만 한편 풍류를 즐기고, 보통 유교를 따르지만 유교가 수립되기 전에도 있었으며 도가와 불가의 가르침에도 관심이 많다. 전통 동아시아 역사는 군주들과 이들 선비들이 펼치는 드라마였다고 보아도 큰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이 선비계급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역할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선비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운명이 달라졌던 시대는 중국 북송 왕조 시대를 손꼽는다. 범중엄, 구양수, 매요신, 소옹, 왕안석, 사마광, 심괄, 정명도, 정이천, 그리고 남송의 주희, 진덕수 등내로라하는 선비들이 이때 나타나 저마다 일가를 이루고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다 보면 정치가, 관료, 학자, 도덕가, 문인 등 선비의 여러 가지 성격 중에서 어느 성격이 가장 중요한지의 문제도 거론되었다. 그리고 그런 구분을 넘어 모든 면에서 두루 뛰어났으며, 어떤 한 쪽에 집중하려 하지도 않았던 사람도 있었는데 동파(東坡) 소식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시를 읊으며 장강을 여행하다
소식은 오늘날의 쓰촨성, 고대에는 촉(蜀)이라 불리던 땅의 미산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명문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부유했던 지주 가문으로, 아버지 소순(蘇洵)은 뒤에 두 아들과 함께 ‘삼소(三蘇)’라 불리며 당송팔대가의 일원이 될 만큼 문장을 널리 인정받게 되지만, 시험운은 없었던지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했다. 그래서인지, 큰아들의 이름은 수레의 앞턱에 붙이는 손잡이를 뜻하는 ‘식(軾)’으로, 작은아들의 이름은 수레바퀴 자국을 뜻하는 ‘철(轍)’로 지었다.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지만, 수레에 높이 올라앉아 도성을 누비고 다니는 고위관료의 상을 떠올렸던 것은 아닐까.
소식은 여섯 살 때 스승을 모시고 공부를 시작했으며, 열 살에 시의 한 형태인 부(賦)를 능숙하게 짓는 등 일찌감치 글재주를 뽐냈다. 어릴 때 밭에서 놀다가 돌덩어리를 캐 왔는데, 그 돌로 벼루를 만드니 질이 아주 좋았다. 그것은 장차 소식이 글로 대성할 징조라고, 아버지 소순은 여겼다고 한다. 19세에 결혼하고, 21세에 동생 소철과 함께 개봉으로 가서 그곳에서 열린 진사시에 합격했다. 이듬해에 예부에서 주관하던 2차 시험에 합격했는데 당시 시험을 주재하던 구양수는 당대 문단의 최고봉이었다. 그가 소식의 답안을 읽고는 놀라서 “이제 이 늙은이의 시대는 가는구나! ·····30년이 지나면 아무도 구양수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격찬했다고 하며, 최종 관문인 전시(殿試)에서는 인종황제가 “짐의 자손에게 봉사할 재상감을 얻었다”며 기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소식과 소철은 곧바로 관리가 되지는 못했는데, 때마침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삼년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3년 후, 소식은 아버지, 동생과 함께 고향을 떠나 한수와 장강을 따라 수도 변경으로 갔다. 이 걸출한 시인 삼부자는 여행 도중 100수가 넘는 시를 지었고, 그것을 하나로 엮어 [남행집]이라는 책으로 내었다. 상경한 소식에게는 복창현 주부의 관직이 주어졌으나 그는 동생과 함께 다시 황제 주관의 특별시험을 보아 합격함으로써 봉상부첨판에 임용되었다. 이후 역사를 편수하는 직사관 일을 맡았으나 부인과 아버지가 잇달아 사망함으로써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 신법파와의 악연
소식은 33세가 되던 1068년에 재혼을 하고, 이듬해에 변경으로 되돌아왔다. 그가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 사이에 국가 역시 인종에서 영종, 다시 신종이라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소식은 다시 직사관에 취임했으나, 조정은 전에 없는 폭풍에 휘말려 들기 시작했다. 바로 신종의 전적인 신임을 업은 왕안석의 ‘신신법 운동’이었다.
인종 말기에는 이대로 안일에 빠져서는 안 되며 뭔가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선비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소식 역시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에서 “국가재정의 결핍, 허약한 국방력, 관리 선발의 불공평함”이 3대 개혁과제라고 제시하는 등 개혁의 의지가 뚜렷했다. 하지만, 곧바로 맹렬한 반대론을 불러일으켰고, 얼마 후 조정은 왕안석과 일부 신진 관료들을 중심으로 하는 ‘신법당’과 한기, 부필, 문언박, 사마광 등 주로 중진급들을 중심으로 하는 ‘구법당’으로 나뉘었다. 소식은 이 중에서 구법당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으나, 사마광 등과는 달리 제도개혁의 필요성 자체는 인정하는 편이었다. 소식이 못 미더워했던 것은 신법 자체보다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들의 사람됨과 태도였다. 가령 왕안석은 얼굴빛이 검어질 정도로 세수나 목욕을 하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재상의 일을 보았는데, 이는 세상사에 초연한 정도를 넘어서 자신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독선, 나아가 ‘청렴한 사람’임을 과시하려는 위선의 냄새가 풍긴다고 보았다. 이런 시각에서 왕안석이라고 직접 이름을 들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씻지 않고 누더기를 걸치며, 성인군자인 체하지만 속은 간사한 소인배인 관리”를 비난하는 [변간론]이라는 글을 쓴 사람은 바로 소식의 아버지 소순이었다(보다 뒤의 저작이라는 설도 있지만, 소씨 집안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된 글임은 분명해 보인다).
왕안석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도 이정처럼 출세의 맥이 끊길까 봐 모친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상을 치르지 않은 자, 여혜경처럼 아첨에 능한 자 등 유덕한 군자와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소식이 가장 적극적으로 왕안석의 제도개혁에 반대했던 것은 1071년의 “과거에서 시문을 없애고, 경전의 이해 수준만 평가해 선발한다”는 것이었다. 본래 학문과 도덕이야말로 선비가 힘쓸 본분이라 보는 사람들은 시문은 음풍농월이나 하는 잔재주일 뿐이라며 경멸한다. 하지만, 반대 입장에서는 문학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이다. 오랫동안 교양을 쌓고 인격을 도야하게 해 주며, 세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두뇌만이 아니라 가슴으로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길잡이인 것이다. 문학의 가치에 대한 논쟁은 조선 시대에 조광조와 남곤의 대립에서도 반복될 것이지만, 당시의 소식은 과거에서 문학을 없애버리려는 왕안석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는 조정이 온통 이정, 여혜경 같이 겉으로는 인의도덕을 말하고 뒷구멍으로는 권모술수에 힘쓰는 가짜 군자, 추악한 소인배들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구법당의 핵심은 화북 지역 출신자들이 많아서 ‘삭당(朔黨)’으로도, 신법당은 양자강 이남 출신자가 많아 ‘남당(南黨)’으로도 불리는 한편 소식 형제들은 ‘촉당(蜀黨)’이라 불릴 만큼 제3의 입장을 띠고도 있었으나, 결국은 구법당의 일파로 분류되게 되었다.
★ 좌천과 유배
더욱이 지켜볼수록 백성들을 돕기 위해 만들었다는 신법이 오히려 백성들을 괴롭히는 역효과를 내는가 하면, 왕안석은 한때의 동지들도 등을 돌릴 정도로 독선으로 일관하며 반대 의견을 봉쇄하느라 언론까지 폐쇄하는 등 한계를 넘는 듯했다. 그래서 소식은 1070년과 1071년에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총동원하여 황제에게 초강경 상소를 올렸다.
“옛말에 백 사람의 의견이 전부 다 잘못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법을 반대하는 의견은 백 사람이 아니라 천하 만민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폐하는 온 천하를 상대로 고집을 부리시는 것입니까?”
결국, 소식은 중앙관직에서 해임되어, 약 8년 동안 항주, 밀주, 서주, 호주 등의 지방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신법당에서는 그에게 부패 누명을 씌우면서까지 아예 제거해 버리려고 했으나, 신종황제는 왕안석을 신임하는 한편 소식의 재주도 아꼈으므로 그 정도에 그쳤던 것이다. 당파싸움에 얼룩진 수도를 떠난 소식은 오히려 홀가분해했다. 시, 서, 화에서 전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황정견이나 진관 같은 천재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키우기도 했다. 또한, 지방관으로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항주에서는 서호에 제방을 쌓아 아직도 “소씨의 제방(蘇堤)”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으며, 서주에서는 황하가 범람하여 도시가 잠길 위기를 맞자 군민과 함께 잠도 자지 않고 제방을 보수하여 서주성을 구했다. 관과 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천재지변을 이겨낸 귀한 사례로, 서주 백성들은 “태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우리 자식들은 모두 물고기 밥이 되었을 것”이라며 두고두고 소식을 칭송했다.
중앙에서 탁상공론을 할 때와는 또 달리, 지방관으로 백성들의 삶에 직접 접해 보자 소식은 신법의 폐단이 절실히 눈에 들어왔다. “청묘법으로 어려운 백성들에게 국가가 돈을 빌려준다지만, 빌려주는 곳 앞에 화려한 도박장을 지어 놓았다. 그리고 돈을 날린 백성의 담보물인 집과 땅을 빼앗고 있다,” “면역법에 따른 면역전을 과도하게 거둬들이기 때문에, 집 팔고 소 팔아서 세금을 내는 형편이다.” 소식은 일부 신법의 편리한 점도 확인했지만, 법 자체가 현실에 맞지 않거나 올바른 시행이 힘든 경우는 더 많이 목격했다. 그는 이를 틈틈이 상소문으로 중앙에 알리거나, 시를 통해 풍자하거나 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1079년 7월, 호주 태수를 지내고 있던 소식은 변경에서 온 어사대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체포되었다. 당시 왕안석은 이미 실각해 있었지만, 소식이 소인배들이라고 그토록 멸시했던 신법당 인사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소식의 시에 “폐하께 불경스럽거나” “까닭 없이 신법을 비난하는” 내용이 많다며 그의 시 100여 편을 하나하나 따지며 심문했고, 소식의 관련인물도 40명 가까이 잡아들여서 문초했다. 결국 신종이 끝까지 소식을 두둔하고 때마침 태후가 별세하여 중형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기에 그는 목숨을 건졌으나, 황주에 유배되는 신세가 된다.
★ 운명의 변덕에 신선의 꿈은 스러지고
유배이기는 해도 생활이나 거동에 큰 제약이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상경할 수 없음은 물론 정해진 지역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없는 정도였다. 소식은 문학과 예술을 더욱 발전시킴은 물론 불교와 도교를 깊이 공부하고, 황주의 동파(東坡)에 밭을 일구었다. 세상사의 쓴맛 때문인지 장년기에 들어선 그는 도잠(陶潛)처럼 시골에 은둔해 소박한 삶을 가꾸는 꿈을 꾸기도 하고, 단약을 제조하여 신선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의 문학작품 중 가장 유명한 [적벽부]도 이 때 쓰인 것인데, “조조도 주유도 일세의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군. 인생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한탄에 “강물도 흘러가고 우리도 흘러가고 모든 것은 흘러가지만, 흘러가는 동안 우리는 저 달빛도, 이 바람도, 이 술도, 마음껏 즐길 수 있지 않은가. 무엇이 더 필요한가” 하며 달관한 듯한 자세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중국음식으로 오늘날에도 인기가 있는 ‘동파육’을 창안한 때도 이때라고 한다.
은퇴하여 조용히 살고 있던 왕안석을 방문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만남에서는 왕안석이 소식의 비판에 쩔쩔맸다고도 하고, 옛 앙금을 털어버리고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고도 하는데, 지금의 정치가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데는 의견이 같았다.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동병상련의 심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운명의 바람은 다시 바뀌어, 신종이 죽고 어린 철종을 선인태후가 섭정하면서 신법당이 일거에 몰락하며 구법당이 집권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왕안석은 실의에 빠져 쓸쓸히 죽었고, 소식은 다시 관리가 되어 수도로 가게 된다.
하지만, 수도에서의 정치활동은 소식에게 다시 한 번 실망을 안겨주었다. 사마광은 한풀이라도 하듯 왕안석의 제도라면 무조건 뒤엎었는데, 소식은 “가령 면역법 같은 것은 잘 운용만 하면 나쁘지 않다”고 만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소식은 점점 세력을 늘려가고 있던 정호(정명도), 정이(정이천) 형제를 비롯한 성리학파와도 사이가 나빠졌다. 사마광이 죽고 그 장례일이 공교롭게 정부의 축하행사와 겹치자, 정이는 “[논어]에 곡을 한 날에 노래를 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다”며 조문을 막았다. 그러자 소식은 “노래를 한 날에 곡을 하지 말라는 말은 없지 않느냐?”며 조문을 강행했다. 이런 농담이 통하지 않았던 정이가 상주를 협박해서 조문을 하지 못하게 만들자 소식은 “이런 답답하고 촌스러운 사람을 보았나!”고 소리쳤다. 이 일로 소식은 정통 주자학자들에게 “글재주밖에 없는 비천한 인물”로 낙인찍히게 된다. 결국 1093년에 선인태후가 죽고 철종이 친정을 하자, 신법당이 재집권하면서 소식은 다시금 귀양살이를 떠난다. 이번에는 당시의 중국에서 가장 오지에 속했던 해남도였다. 그는 한동안 자포자기했으나, 차차 마음을 다잡고 생활에 적응해가던 중 또 바람이 바뀌었다. 철종이 죽고 휘종이 즉위한 것이다. 그는 사면되었고, 제거성도옥국관이라는 명예직을 받고는 상경했다. 하지만 1101년 5월, 바뀐 기후에 쇠약해진 몸이 견디기 어렵던 중 상주 땅에서 이질로 추정되는 병을 얻어, 그해 7월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그가 태수로 있었던 지방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통곡을 했고, 태학 학생들은 수업을 폐하고 추모제를 지냈다. 그리고 기생 여러 명이 자살을 했다.
★ 문호의 진면목
소식이 정치에서 기필코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면, 왕안석이나 사마광처럼 자신만의 패거리를 이루고는 반드시 집권하려고 했을 것이다. 학문에서 불멸의 업적을 남기려 했다면, 인생 전반기에 [삼경신의]를 짓고 후반에 [자설]을 지으며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왕안석이나 정치적으로 실의에 빠진 동안 [자치통감]을 짓는 데 매진했던 사마광처럼 학술 분야에서 필생의 대작을 지으려 했을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다 뜬구름이라 여기고 자연을 벗 삼아 신선처럼 사는 것에 충실하려 했다면, 조정의 부름이 있을 때마다 한 차례도 거절함이 없이 출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식의 재능은 정치이든 학문이든 최고가 되기에 부족하지 않았으나, 그는 어느 한 쪽에 집중하지 않았으며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 다른 가능성을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유, 불, 도 어느 쪽도 이단이 아니었고, 고관대작이든 시정잡배든 가려서 사귈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모든 만남에서, 그리고 수백 편의 시와 그림, 글씨에서 그는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결국 그는 인류사에 빛나는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 보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당대의 누구보다 멋진 삶을 살았다. 아마도 그래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식
★ 蘇軾의 영향
詩
소동파의 시는 송(宋)나라 때부터 중국은 물론 고려나 요(遼)나라 같은 이웃 나라에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었던 만큼 독자의 수요에 부응하여 그의 시집 역시 송나라 때부터 시작하여 줄곧 간행되어 왔으며, 이 가운데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도 아주 많다.
소동파(蘇東坡, 1036~1101)가 우리 문단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그러기에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세상의 학자들이 처음에는 과거시험에 필요한 문체를 익히느라 풍월을 일삼을 겨를이 없다가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시 짓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소동파 시 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에 매년 과거의 방이 나붙은 뒤에 사람마다 금년에 또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고 여긴다”라고 했고,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는 오로지 만당(晩唐) 시만 익혔고 고려 중엽에는 오로지 소동파 시만 배웠다”라고 했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과 동생 김부철(金富轍)의 이름이 소동파(본명 軾)와 소철(蘇轍) 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소동파에 대한 우리 문인들의 추앙심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렇듯 우리의 선조들은 소동파 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음식
동파육(東坡肉)
여가가 날 때마다 소동파는 틈틈이 돼지고기를 쪄서 먹곤 했다고 전해진다. 요리를 하던 중에 오랜 친구가 그를 방문해서 바둑을 두곤 했다. 소동파는 바둑에 열중해서 타는 냄새가 나도록 고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내 놓은 것이 바로 동파육(東坡肉)이라고 하여 거지닭(규화계叫花鷄)과 함께 항저우의 유명한 음식이 되었다.
동파육과 관련하여 소식이 지은 食猪肉시가 있다.
족보
오늘날까지 동양에서 이어지는 족보의 원형은 소순(蘇洵; 부)·소식(蘇軾)·소철(蘇轍; 제)이 정리한 보첩에서 비롯하였다.
★ 蘇軾의 이력(履歷)
8세 때 소학(小學)에 입학. 22세 때 성시(省試)에 응시해 진사에 급제했는데, 이때 과거 시험답지에 ‘인자함은 지나쳐도 군자로서 문제가 없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치면 그것이 발전하여 잔인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인자함은 지나쳐도 되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의 글을 제시해, 당시 한림학사(翰林學士)였던 구양수(歐陽脩)로부터 칭찬을 받음. 26세 때 봉상부판관(鳳翔府判官)에 임명되면서 공직 생활을 시작.
29세 때 황실이 수장하고 있는 진귀한 자료들을 볼 수 있는 직사관(直史館)의 직책을 담당하며 불서(佛書)를 즐겨 읽기 시작. 36세 때 항주(杭州) 통판(通判) 부임.
39세 때 밀주(密州) 태수(太守)로 부임하면서 항주와 다르게 빈곤과 기근을 도처에서 목격한 그는, 이때 비애를 느낌과 동시에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야겠다고 다짐함.
42세 때 서주(徐州)의 지주로 임명되고 황하가 범람하여 서주 이북 100리까지 수해를 당하자, 군대와 백성을 이끌고 운하를 정비하여 백성들을 안전하게 함.
44세 때 호주(湖州) 태수로 부임한지 3개월 만에 반대파의 무고로 유배의 길을 떠남.
46세 때 황주(黃州)에 도착해 지인의 도움으로 성 동쪽에 있는 작은 산비탈에 수십 무(畝)의 황무지를 개간해 생계를 겨우 꾸려감.
47세 때 황주(黃州)에 개간해 농사짓는 땅 옆에 동파설당(東坡雪堂)을 짓고 스스로 동파거사(東坡居士)라 칭했으며, 이때 적벽부(赤壁賦)를 짓고, 또한 이 무렵 참선 수행에도 몰입함.
50세 때 다시 관리로 복직됨. 54세 때 항주(杭州)의 태수로 부임하며 백성을 위한 일에 헌신함. 57세 때 양주(揚州) 태수로 부임. 같은 해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됨.
59세 때 반대파의 무고로 혜주(惠州)로 안치되나 유배 중에도 실권을 가진 지역 관리들과 교우하며 백성을 위한 일에 신명을 다 바치며 지역 하급 관리들의 부정 바로잡기, 혜주에 두 대교 건축하기, 광주(光州)에 병원 설립하기, 도시를 개조해 홍수 막기 등을 건의하여 실행에 옮김.
65세 때 복직되었으며 다음해인 1101년 7월 28일 상주에서 입적入寂함.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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