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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詩聖 杜甫 詩

관공손대낭제자무검기항병서(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幷序)

by 산산바다 2020. 12. 9.

산과바다

두보 시(杜甫 詩) HOME

 

 

 

         관공손대낭제자무검기항병서(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幷序) - 두보(杜甫)

          공손대랑의 제자가 검기무 추는 것을 보고 병서

 

 

서(序)

大歷二年十月十九日(대력21019)

夔府別駕元持宅(기부별가원지댁)見臨潁(견림영)

李十二娘舞劍器(이십이랑무검기)壯其蔚跂(장기울기)

問其所師(문기소사)()余公孫大娘弟子也(여공손대랑제자야)

 

開元三載(개원삼재)余尚童稚(여상동치)

記于郾城觀公孫氏舞(기우언성관공손씨무)劍器渾脫(검기혼탈)

瀏灕頓挫(유라돈좌)獨出冠時(독출관시)

自高頭宜春梨園二伎坊內人(자고두의춘리원이기방나인)

洎外供奉(계외공봉)曉是舞者(효시무자)

聖文神武皇帝初(성문신무황제초)公孫一人而已(공손일인이이)

 

玉貌錦衣(옥모금의)況余白首(황여백수)

今茲弟子亦匪盛顏(금자제자역비성안)

既辨其由來(기변기유래)知波瀾莫二(지파란막이)

撫事慷慨(무사강개)聊為劍器行(요위검기행)

 

昔者吳人張旭善草書書帖(석자오인장욱선초서서첩)

數嘗於鄴縣見公孫大娘舞西河劍器(수상어업현견공손대랑무서하검기)

自此草書長進(자차초서장진)豪蕩感激(호탕감격)

即公孫可知矣(즉공손가지의)

 

서(序)

대력(大曆) 2(767, 唐 代宗 5) 1019일 기주부(夔州府) 별가(別駕) 원지(元持)댁에서 임영인(臨潁人) 이십이랑(李十二娘)의 검기무를 보고 그 빛나고 호탕한 모습이 훌륭하다고 생각해 그 스승을 물으니, “저는 공손대랑의 제자입니다.”라고 하였다.

 

개원 3(715, 당 현종)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언성(郾城)에서 공손씨가 검기혼탈무를 추는 걸 본 기억이 있는데, 활발한 변화가 끝이 없어 당시에 홀로 으뜸이었다. 황제 앞에서 춤추던 의춘원(宜春園)이원(梨園) 두 교방(敎坊) 나인에서부터 외공봉(外供奉)에 이르기까지 이 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현종 초까지 공손씨 한 사람뿐이었다.

 

옥같은 얼굴에 비단 옷 입은 공손씨도 사라져 버렸는데 하물며 내 흰머리 나는 것이야!

지금 이 제자 또한 한창 때 얼굴은 아니다. 이 제자의 유래를 알고 나니 그 변화 가득한 춤이 스승의 춤과 다르지 않음을 알겠다. 옛일을 더듬으며 슬퍼하면서 애오라지 검기행을 쓴다.

 

예전에 오인(吳人) 장욱이 서첩에 초서(草書)를 잘 썼는데, 자주 업현(鄴縣)에서 공손대랑이 서하검기무(西河劍器舞) 추는 걸 보았다. 이로부터 초서가 크게 진척되어 호방하고 격탕(激蕩)하게 되었으니, 공손씨 춤이 어떠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公孫大娘(공손대랑) : 개원(開元) 연간 검기혼탈무(劍器渾脫舞)를 잘 추기로 유명했던 여자다. 그에 대한 기록이 明皇雜錄(명황잡록), “이때 공손대랑은 칼춤을 잘 추어 향리곡(鄕里曲) 및 배장군만당세(裵將軍滿堂勢), 서하검기혼탈(西河劍器渾脫)을 잘 했는데 춤추는 기예가 아름답고 묘해 모두 이 시대의 으뜸이었다.[時有公孫大娘者 善劍舞 能爲鄰里曲及裵將軍滿堂勢 西河劍器渾脫 舞藝姸妙 皆冠絶於時]”고 전한다.

* 蘷府別駕元持宅(기부별가원지댁) : ‘蘷府(기부)’는 기주부(蘷州府)로 지금의 사천성(四川省)이다. 부청(府廳) 소재지는 봉절(奉節)에 있었다. ‘別駕(별가)’는 관직명으로 자사(刺史)의 보좌직이다. ‘元持(원지)’는 기주부 별가를 맡고 있던 사람인데 생평(生平)은 미상(未詳)이다.

* 臨潁李十二娘(임영이십이랑) : 임영(臨潁)사람으로 공손대랑의 제자다. 임영(臨潁)은 하남성(河南省) 임영현(臨潁縣)을 말한다.

* 劍器(검기) : 건무(健舞) 곡명의 일종으로 서역에서 전해진 무무(武舞)이다. ()나라 교방악무(敎坊樂舞)에는 춤추는 자세가 강건(剛健)하고 많은 현악기와 빠른 관악을 사용하는 건무(健舞)와 이와 상대되는 연무(軟舞)가 있었다. 건무에는 검기(劍器)능대(稜大)호선(胡旋) 등이 있고, 연무에는 양주(涼州)녹요(綠腰)감주(甘州) 등이 있다. 검기(劍器)에 대한 기록은 文獻通考(문헌통고)》 〈舞部(무부), “고대 무무(武舞)의 곡명(曲名)으로 이 춤은 여자 기생이 성대하게 화장을 하고 빈손으로 춘다.[古武舞之曲名 其舞用女妓雄妝 空手而舞]”라고 하였다.

* 蔚跂(울기) : 웅건하고 호탕한 모양을 말한다.

* 開元三載(개원삼재) : 全唐詩(전당시)(), “다른 본에는 5년으로 되어 있다.[一作五年]”고 하였는데, 개원 5년이면 두보가 5살 때이다.

* 郾城(언성) : 지금 하남성(河南省) 임영현(臨潁縣) 남쪽의 언성현(郾城縣)을 말한다. 두보가 어렸을 때 여기 산 적이 있다. 임영(臨潁)과 함께 언성(郾城)은 당나라 때 모두 허주(許州)에 속했다.

* 公孫氏(공손씨) : 여기서는 공손대랑(公孫大娘)을 가리킨다.

* 劍器渾脫(검기혼탈) : 무무(武舞)의 일종으로 당대(唐代)에 유행하던 혼탈무(渾脫舞)와 검기무(劍器舞)가 융합되어 새롭게 만들어진 무무(武舞)를 말한다. 혹자는 검기(劍器)와 혼탈(渾脫)을 각각 다른 춤으로 보기도 한다.

* 瀏灕(유라) : 춤추는 자태가 활발한 모양을 형용한 것이다.

* 高頭(고두) : ‘前頭(전두)‘를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항상 황제 앞에서 춤추고 노래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宜春梨園(의춘리원) : 옛 터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에 있다. 의춘원(宜春園)은 당 현종 때 가무(歌舞)에 종사하는 궁녀들이 있던 곳이다. 현종이 직접 재인(才人)들을 가르치던 곳은 이원(梨園)이라 하고 여기에 속한 예인(藝人)들을 이원제자(梨園弟子)라 하였다. 이원제자(梨園弟子) 가운데는 궁녀 수백인(數百人)은 의춘원(宜春園)에 살았다고 한다.

* 伎坊內人(기방나인) : 기방(伎坊)은 교방(敎坊)을 말하며 노래와 춤을 가르치던 곳이다. 기녀(妓女)가 의춘원(宜春園)에 들어오면 內人(나인) 혹은 전두인(前頭人)이라 불렀다.

* 外供奉(외공봉) : 궁전 밖에 살면서 일이 있을 때마다 궁전에 들어와 재주를 보여줬던 남녀 예인(藝人)들을 말한다.

*聖文神武皇帝(성문신무황제) : 성문신무(聖文神武)는 현종의 존호(尊號)를 말한다.

* 波瀾(파란) : 여기서 파란(波瀾)은 춤추는 자태와 변화의 법도(法度)를 가리킨다.

* 張旭(장욱) : 소주인(蘇州人)으로 당나라 때 유명한 초서(草書)의 명인(名人)이다. ()는 백고(伯高)草聖(초성)’으로 불렸다. 머리에 먹을 적셔 글씨를 쓰기도 해서 세상에서는 장전(張顚)이라 불렀다. ()은 미치광이라는 뜻이다.

* 鄴縣(업현) :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임영현(臨潁縣) 서남쪽의 안양현(安陽縣)을 가리킨다.

* 西河劍器(서하검기) : 검기무(劍器舞)의 일종이다.

 

 

 

1.

昔有佳人公孫氏(석유가인공손씨) : 옛날에 가인(佳人) 공손씨 있어

一舞劍器動四方(일무검기동사방) : 한번 검기무를 추면 사방을 진동시켰지

觀者如山色沮喪(관자여산색저상) : 보는 이들 산처럼 모여 얼굴색이 변하고

天地為之久低昂(천지위지구저앙) : 천지도 이로 인해 출렁이는 듯

霍如羿射九日落(곽여예사구일락) : 빛나기는 예(羿)가 해 아홉을 쏘아 떨어뜨리듯

矯如群帝驂龍翔(교여군제참룡상) : 힘차기는 여러 천제가 용을 타고 날 듯

來如雷霆收震怒(내여뇌정수진노) : 나올 때는 천둥소리가 진노를 거둬들이듯

罷如江海凝青光(파여강해응청광) : 물러날 때는 강과 바다에 맑은 빛 엉기듯 하였지.

 

* 沮喪(저상) : 낯빛이 변하는 것으로 솜씨가 기특하고 비범해 놀랐다는 뜻이다.

* 低昻(저앙) : 낮아졌다 높아졌다 함, 또는 낮추었다 높였다 함

* 㸌如羿射九日落(곽여예사구일락) : ()은 번쩍 빛나는 모양으로 검광(劍光)을 가리킨다. (羿)는 후예(后羿)를 말한다. 고대 전설에, 요임금 때 해 열 개가 함께 떠 곡식을 태우고 초목이 죽자 요임금이 활을 잘 쏘는 예에게 해를 쏘아 없애게 하니, 예가 아홉 개를 쏘아 떨어뜨렸다고 한다. 淮南子(회남자)》 〈本經訓(본경훈)에 보인다.

* 來如雷霆收震怒(내여뇌정수진노) : 검무(劍舞)를 시작하는 모습을 형용한 것으로 크게 음악이 시작되고 나서 조금씩 음악소리가 잦아들 때 격렬하게 춤을 시작하므로 이렇게 표현하였다.

* 雷霆(뇌정) : 雷霆霹靂(뇌정벽력). 천둥과 벼락이 격렬(激烈)하게 침. 또는 그런 천둥과 벼락

* 罷如江海凝淸光(파여강해응청광) : 춤을 마칠 때의 모습으로, 음악이 끝나고 동작을 멈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2.

絳脣珠袖兩寂寞(강순주수량적막) : 붉은 입술 주옥같은 소매 모두 적막해졌는데

晚有弟子傳芬芳(만유제자전분방) : 늦게 둔 제자가 그 아름다움 전하여

臨潁美人在白帝(임영미인재백제) : 임영(臨潁)의 미인이 백제성에서

妙舞此曲神揚揚(묘무차곡신양양) : 이 곡을 절묘하게 춤추니 뛰어난 풍채 너울거린다.

與余問答既有已(여여문답기유이) : 나와 묻고 답해 보니 이미 연유 있었던 것

感時撫事增惋傷(감시무사증완상) : 시절을 느끼며 옛 일 더듬어보니 서글픔만 더해진다.

 

* 絳脣珠袖兩寂寞(강순주수량적막): ‘絳脣(강순)’은 공손대랑의 미모(美貌), ‘珠袖(주수)’는 공손대랑의 춤추는 모습을 나타낸다. ‘兩寂寞(양적막)’의 양()은 강진(絳唇)과 주수(珠袖)를 가리키고 寂寞(적막)’은 공손대랑이 죽고 없어 그 모습도 춤도 볼 수 없어 적막하다 한 것이다.

* 芬芳(분방): 원뜻은 짙은 향기, 고운 향기를 말하나 여기서는 공손대랑의 뛰어난 예술을 가리킨다.

* 臨潁美人在白帝(임영미인재백제): 임영미인(臨潁美人)은 공손대랑의 제자인 이십이랑(李十二娘)을 가리킨다. 백제(白帝)는 지명으로 지금 사천성(四川省) 봉절현(奉節縣) 동쪽의 백제산(白帝山)이다. 기주(蘷州)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 神揚揚(신양양): 神采(신채:뛰어난 풍채) 너울거린다.

* 惋傷(완상): 매우 슬퍼함.  슬퍼서 마음이 상함

 

 

3.

先帝侍女八千人(선제시녀팔천인) : 선제(先帝)의 시녀 팔천 명에

公孫舞劍初第一(공손무검초제일) : 공손씨 검기무가 처음부터 으뜸이었지

五十年間似反掌(오십년간사반장) : 오십년 사이에 손바닥 뒤집듯 세월이 빨라

風塵澒洞昏王室(풍진홍동혼왕실) : 끝없는 바람 먼지 왕실 어둡게 하였기에

梨園子弟散如煙(이원자제산여연) : 이원(梨園)의 제자들 연기처럼 흩어지고

女樂餘姿映寒日(여악여자영한일) : 여악(女樂)의 남은 자태만 차가운 해에 비친다.

 

* 先帝(선제) : 당 현종을 가리킨다.

* 五十年間(오십년간) : 당 현종 개원(開元) 5(717) 두보가 처음 춤을 보았을 때부터 지금 두보가 이 시를 쓰는 대종(代宗) 대력(大曆) 2(767) 사이를 말한다.

* 澒洞(홍동) : 풍경(風景)이 서로 이어져 끝없는 모양.

* 女樂餘姿映寒日(여악여자영한일) : ‘女樂(여악)’은 이십이랑(李十二娘)을 가리킨다. ‘餘姿(여자)’는 이십이랑(李十二娘)의 춤에 개원 연간 성세(盛世)의 모습이 남아 있음을 말하고 있다. ‘寒日(한일)’은 이 시가 씌어진 10, 초겨울을 나타내지만 해 저물어 갈 곳 없는 고단함을 암시하고 있다.

* 女樂(여악): 궁중(宮中)에서 잔치를 베풀 때에 기생(妓生)들이 하던 노래와 춤

 

 

4.

金粟堆前木已拱(금속퇴전목이공) : 금속퇴(金粟堆)앞에 나무는 이미 한 아름이나 되고

瞿塘石城草蕭瑟(구당석성초소슬) : 구당협 석성에 풀은 쓸쓸하기만

玳筵急管曲復終(대연급관곡부종) : 성대한 술자리 빠른 피리소리 노래조차 끝나니

樂極哀來月東出(낙극애래월동출) : 즐거움 다하고 슬픔이 와 달 동쪽에 떠오르네.

老夫不知其所往(노부부지기소왕) : 이 늙은이 갈 곳 모르고

足繭荒山轉愁疾(족견황산전수질) : 굳은살 박힌 발로 가야 할 황량한 산야 수심만 도리어 빠르구나.

 

 

* 金粟堆前木已拱(금속퇴전목이공) : ‘金粟堆(금속퇴)’는 현종의 태릉(泰陵)이 있는 금속산(金粟山)으로 지금 섬서성(陝西省) 포성(蒲城)의 동북쪽이다. ‘木已拱(목이공)’이라 한 것은 당 현종이 세상을 떠난 때가 대종 보응 원년(762)이니, 이미 5년이 지났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였다. ‘()’은 양손으로 합쳐 잡을 수 있는 굵기를 말한다.

* 瞿塘石城(구당석성) : 지명으로 기주(蘷州)를 가리킨다. 기주(蘷州)가 구당협(瞿塘峽)에 가깝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石城(석성)’은 백제산(白帝山)에 있는 백제성(白帝城)을 가리킨다.

* 玳筵(대연) : 경연(瓊筵:호화로운 宴席(연석))과 같다.

* 樂極哀來(낙극애래) : 일반적인 서술이 아니라 ()’은 연회의 가무(歌舞)가 사람을 즐겁게 해줌을, ‘()’는 자신의 영락한 신세와 국가의 성쇠(盛衰)가 슬픔을 낳는 것을 말한다.

* 老夫(노부) : 작자 두보의 겸칭이다.

* 足繭荒山轉愁疾(족견황산전수질) : ‘足繭(족견)’은 발바닥에 생긴 굳은살이다. 청나라 구조오(仇兆鰲)杜詩詳註(두시상주)에서 이 구절을 두고, “발에 굳은살이 박혀 갈 길 더딘데 도리어 근심은 가장 빠르다. 길 떠나려는데 차마 떠날 수가 없다.[足繭行遲 反愁太疾 臨去而不忍其去也]”라고 하였다.

 

 

* [通釋] 옛날에 아름다운 사람 공손씨는 한 번 검기무를 추면 온 사방을 놀라게 할 정도여서 그의 춤을 보려는 사람들이 산처럼 많이 모여 춤을 보고는 깜짝 놀라 실색(失色)할 정도였고 그의 춤 동작은 하늘로 오르고 땅으로 내리며 움직여 마치 하늘과 땅이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칼을 번쩍 빛내며 춤추는 모습은 예가 해 아홉 개를 쏘아 떨어뜨리는 듯 했고 힘차게 솟구치며 날래게 춤추는 동작은 여러 천제가 용을 타고 나는 듯 했으며 춤이 시작되어 나올 때는 요란한 북소리가 잦아들어 마치 천둥우레가 진노한 소리를 거둬들이는 듯했고 음악이 멈춰 춤을 마치며 정지한 모습은 강과 바다에 맑은 빛이 서리는 듯했다.

 

붉은 입술의 아름다운 얼굴과 주옥같은 화려한 복장의 그 모습 이제는 모두 세상을 떠나 적막해졌는데 늦게나마 제자를 두어 그 제자가 아름다운 춤을 전할 수 있었다. 임영(臨潁) 출신의 이 아리따운 제자가 백제성에서 이 곡에 맞춰 절묘하게 춤추니 신령스러운 운치가 너울거려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내가 그 사람에게 물어 대답을 듣고 나니 그 사승관계(師承關係)를 알게 되었다. 하여 지금의 시국을 생각하고 옛 일 더듬어보니 서글픈 느낌만 더해질 뿐이다.

 

돌아가신 현종의 시녀 팔천 명 가운데 공손씨의 검기무가 처음부터 본래 으뜸이었다. 내가 처음 춤을 본 시기에서 선제께서 돌아가고 난 후 지금까지 오십년 사이에 손바닥 뒤집듯 세월은 빨리 가서 난리가 끝없는 먼지바람처럼 일어나 왕실은 쇠락(衰落)하고 말았다. 전란 속에 이원자제들은 연기처럼 다 흩어졌는데 이 춤추는 여자에게 번영했던 시대의 자취가 남아 초겨울 차가운 해에 어른거린다.

 

선제의 능, 금속퇴 앞의 나무는 돌아가신지 5년이 지나 이미 두 줌이나 되고 백제성 이곳 구당협 가까이 있는 석성에는 황량하게 풀들만 자란다. 성대한 술자리며 빠른 피리소리 곡조가 다 끝나자 잔치의 즐거움 다 사라지고 자신에 대한 서글픔과 국가의 성쇠(盛衰)에 대한 슬픔이 생겨나는데 그때 마침 달이 동쪽에 떠오른다. 이 늙은 몸은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고 있는데 굳은 살 박힌 발로는 황량한 산야를 더디 갈 수 밖에 없건만 도리어 수심만 빠르게 생겨난다.

 

[解題] 시는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단락 여덟 구는 공손대랑의 춤추는 자태를 묘사하였다. 특히 제5구부터 제8구까지 춤을 묘사한 부분은 혹 四如句(사여구)’라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주석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검기(劍器)가 칼을 가지고 추느냐 아니냐에서 생긴다. 앞서 말한 대로 여기서는 칼을 가지고 추는 것으로 보았다.

 

둘째 단락 여섯 구는 적막감과 아울러 그 여자의 제자가 기예를 계승한 것을 묘사했는데 妙舞(묘무)’구절은 춤추는 모습을 형용했고, ‘感時(감시)’구절은 마지막 단락의 감상을 끌어오고 있다.

 

셋째 단락은 오십 년 간의 변화, 현종이 이미 세상을 뜨고 이원자제도 벌써 흩어져 버렸음을 묘사하였으며,

 

마지막 단락의 여섯 구는 침울한 감개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 시는 서문에서 말한 대로 활발하고 변화무쌍한[瀏灕頓挫] 기세(氣勢)와 호방하고 격렬한[豪蕩感激] 감정을 갖도록 하는 역량(力量)이 충전된 작품이다.

 

두보의 산문(散文)이 남아 있지 않아 볼 기회가 없는데 이 시에는 문()이 있어 두보의 산문(散文)을 볼 수 있다. 보통 두보는, “을 쓰고[以詩爲文]” 한유는, “으로 를 쓴다.[以文爲詩]”고 말한다. 이 서문은 그러한 말의 예증이 된다. 주어와 허사는 태반이 생략되어 있고 감정이 굴절하는 곳에서는 문장이 비약할 뿐 아니라 자유로운 필법을 구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용이 분명해 시의(詩意)가 집약되어 있는 곳이다.

 

* 이 시는 대력(大曆) 2(767) 두보 나이 56세 때 기주(蘷州: 지금의 四川省)에서 지은 작품이다. 이때는 안사(安史)의 난이 평정되기는 하였으나 정세는 아직도 불안해서 하북(河北) 지방은 안사(安史)의 잔당들이 점거하고 있었고 하서(河西)와 농우(隴右) 지방은 토번(吐藩)에 함락되어 장안이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 이 시기에 시인은 서남(西南) 지방을 오래 떠돌면서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고 있을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이십이랑(李十二娘)의 검기무를 보게 된다. 회상을 금할 수 없어 공손대랑의 춤추는 자태를 기억하게 되고, 현종황제 때의 성세를 연상하며 또한 지금 자신의 노년까지 생각하게 된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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