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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詩仙 李白 詩

문왕창령좌천룡표요유차기(聞王昌齡左遷龍標遙有此寄) - 이백(李白)

by 산산바다 2020.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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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白 詩(이백 시) HOME

 

 

 

     문왕창령좌천룡표요유차기(聞王昌齡左遷龍標遙有此寄) - 이백(李白)

     왕창령이 용표로 좌천되었다는 말을 듣고 멀리서 이시를 지어 보내다

 

楊州花落子規啼(양주화낙자규제) : 양주는 꽃이 지고 뻐꾸기 우짖는데

聞道龍標過五溪(문도룡표과오계) : 듣자하니 용표가 오계를 건너간다 하네.

我寄愁心與明月(아기수심여명월) : 근심스런 내 마음 저 밝은 달에게 부치노니

隨君直到夜郎西(수군직도야낭서) : 그대 따라 야랑의 서쪽에 가겠네.

 

 

* 王昌齡 : [698-756] 성당(盛唐)의 저명한 시인으로 자는 소백(少伯), 강녕(江寧) 출신이라 사람들이 왕강녕(王江寧)이라고도 불렀다. 현종(玄宗) 개원(開元) 15(727) 진사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 되었다. 그의 시는 고적(高適), 왕지환(王之渙) 이름을 나란히 하며 변새시(邊塞詩) 썼다. 훗날 용표(龍標)(지금의 호남성湖南省 검양현黔陽縣) 좌천된 까닭에 사람들이 왕용표(王龍標)라고도 불렀다. 천보(天寶) 14(755) 안록산이 군사를 일으키자 고향으로 피신해 있다가 그곳 자사인 여구효(閭丘曉)에게 살해되었다. 그때 나이 58세였다.

* 龍標(용표) : 지명. 무주(巫州)에 속한 현 지금의 후난성(湖南省) 서부 검양현(黔陽縣). 여기서는 왕창령을 가리킨다. 왕창령이 일찍이 강녕승(江寧丞)을 지냈고 또 당시 용표위(龍標尉)로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왕강녕(王江寧) 또는 왕용표(王龍標)라고불렀다.

* 左遷(좌천) : 직위가 강등 되는 것을 가리킨다. 안사고(顔師古)한서漢書주창전周昌傳에 나오는 좌천이란 말에 주를 붙인 것을 보면 是時尊右卑左, 故謂貶秩位爲左遷(당시에는 오른쪽을 높이고 왼쪽을 낮게 여겼기 때문에 직위가 강등되고 봉록이 깎이는 것을 좌천이라고 하였다).”이라고 했다.

* 揚州(양주) : 지명. 양주는 중국 역사상 서한(西漢), 수당(隋唐), 청조(淸朝) 등 모두 세 차례 전성기를 맞았던 곳이다. 당대에는 대외교류의 문호 역할을 한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였으며, 농업과 상업, 수공업이 모두 발달하여 강회지간부갑천하(江淮之間富甲天下)(장강과 회하 일대에서 으뜸가는 부를 이룬 곳)’라 하여 동남부 제일의 도시로 꼽혔으며, ‘양일익이(揚一益二)(양주가 첫 번째고 익주는 두 번째다 익주(益州)는 지금의 청두(成都)를 이른다)’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양주화락(揚州花落)대신 양화낙진(楊花落盡)으로 쓴 자료도 있다. 당시 이백이 양주를 유람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구절이다.

* 子規(자규) : 두견새.  뻐꾸기.

* 聞道(문도) : 듣자니

* 五溪(오계) : 통전通典에서 이르기를 五溪謂酉辰巫武陵等五溪也(오계는 , , , , 등 다섯 계곡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후난성湖南省 서부와 귀주성貴州省 동부 일대를 가리킨다. 용표龍標는 귀주에 가까워 당대에는 퍽이나 구석진 곳으로 여겨지던 곳이었다.

* 夜郞(야랑) : 지명. 당대 진주珍州에 속하던 곳(지금의 귀주성貴州省 동재현桐梓縣 동쪽)이었다. 진주는통전通典에서 古蠻夷之地, 大唐貞觀七年置珍州或爲夜郞郡(고대에는 오랑캐의 땅이던 것을 대당정관 7년 진주를 설치하고 야랑군 이라고도 하였다).”이라하였다.

* 隨君(수군) : 그대 따라 수풍(隨風)’(바람 따라)으로 적고 있는 자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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