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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여행이 좋아**/사찰 여행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에 가보다

by 산산바다 2016. 6. 30.

산과바다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에 가보다

2016. 6. 20.

산과바다는 박종규벗님과 상원사(上院寺)에 가보다

강원 평창군 진부면(珍富面) 동산리(東山里)의 오대산(五臺山)에 있는 사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36)이 있고

국내에서 유일하게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있는 문수신앙의 중심지이다.



상원사에서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은 관대걸이이다. 상원사 입구 매점 옆 버섯 모양의 비석이 그것이다. 상원사에 참배차 행차하던 세조가 목욕할 때 의관을 걸었던 곳으로 갓거리’(갓걸이)라고도 부른다.



상원사 올라가는 계단이 아름답군요.


계단옆에 오대서약의 간판이 눈길을 끌어 읽어보는군요.


오대서약

하나 - 다른 생명을 아끼면서 함께 살아 갑시다.

둘 - 남의것 욕심내지 말고 자기 살림을 아낍시다.

셋 - 맑은몸과 정신을 지니고 바른행동을 합시다.

넷 - 남을 존중하고 말씀을 아낍시다.

다섯 - 밝은 생활을 하면서 좋지 못한 것을 하지 맙시다.

상원사(上院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 월정사와는 이웃하고 있다. 원래의 절은 724(신라 성덕왕 23)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었고 통도사(通度寺) 등을 창건한 자장(慈藏)이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종각(鐘閣)만 남고 건물은 8·15광복 후에 재건한 것이다. 현존 유물 중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36)이 있다. 월정사에서 산속으로 더 깊숙히 올라 비로봉 동남 기슭에 자리 잡은 상원사는 현재 월정사의 말사로 있으나, 국내에서 유일하게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있는 문수신앙의 중심지이다.



이후 몇 차례 중창되다가 1907년 수월화상이 방장으로 있을 때 크게 선풍을 떨쳤으며, 1951년 입적한 방한암 스님3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지냈다. 방한암스님이 한국전쟁 때 병화로부터 상원사를 지켜낸 일화 또한 매우 유명하다. 방한암의 제자인 탄허스님도 강원도 일대에 이름난 분이다.


* 방한암스님

경허, 만공, 수월과 함께 근세에 선풍을 크게 이룬 방한암스님(1876~1951)이 상원사를 지킨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이 치열할 즈음 산속의 절이 군사 거점이 된다 하여 월정사와 상원사의 소각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에 이르니 노스님이 혼자서 절을 지키고 있었다. 불을 놓을 터이니 비키시라 하자 방한암스님이 그렇다면 이 법당과 함께 불에 타서 소신(燒身) 공양을 하겠노라며 움직이지 않았다. 스님의 굳은 의지에 군인들도 감화를 받고 한걸음 물러났지만, 상부의 명령이었기에 불복종할 수는 없어 절의 문짝만 떼어내 불살라 절이 불에 타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을 때에는 스님을 존경하던 조선 총독이 찾아와 전쟁의 승패를 물었는데 정의로운 자가 이길 것이라 의연히 답하기도 하였다.

방한암스님은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중원(重遠). 스물둘 되던 해 금강산 유람중에 출가 결심을 하였다. 기암절벽의 경승과 운치 속에서 강렬한 종교적 감흥을 받고 입산한 뒤, 보조국사의 수심결(修心訣)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자성(自性) 밖에 법이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티끌처럼 많은 겁을 몸을 태워 기도하는 고행을 하고 팔만대장경을 모조리 독송한다 하더라도, 이는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 오히려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스물넷 되던 해에는 경북 성주 청암사 수도암에서 우리나라 불교계의 중흥조(中興祖)라고 불리는 경허스님을 만났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일 형상이 있는 것이 형상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볼지라하는 경허스님의 말씀을 듣고 방한암스님은 다시 깨우침을 얻어, 듣는 것이나 보는 것이 모두 자기 자신이 아님이 없었다.

쉰 살이 되던 해 봉은사의 주지를 지낼 때에는 차라리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상춘(常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을 찾았다. 그 뒤 76세의 나이로 입적할 때까지 27년 동안 오대산 동구 밖을 떠나지 않았다.

이렇듯 이 땅의 뛰어난 선사였던 방한암스님이 야마가와 주켄(山川重遠)이라는 이름으로 창씨 개명을 하였던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41년 총독부가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설립을 공식 인가한 뒤 방한암스님이 초대 종정으로 취임하였는데, 신불교31집에 사진과 함께 그 이름이 대외적으로 공포된 것이다. 27년 동안이나 동구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던 그가 직접 창씨 개명을 했다던가 또는 친일성의 글을 직접 발표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비록 그것이 휘하의 인물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 할지라도 그 오명을 지울 수는 없게 되었다.

오대산 중대 사자암에는 방한암스님이 꽂아놓은 지팡이가 있다. “이 지팡이가 사는 날 내가 다시 살아오리라하였는데, 지금은 그 지팡이에 가지가 돋고 잎이 피어 훌륭한 단풍나무로 자라고 있다.

상원사 아래 양지 바른 곳에 방한암스님의 부도 및 그의 제자 탄허와 의찬 스님의 부도가 있다.





목조문수동자좌상




상원사 문수전앞의 오대보탑 



영산전 석탑



봉황보당




* 상원사 동종

신라 성덕왕 24(725)에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동종이다. 성덕대왕신종보다 45년이나 앞선다. 높이 1.67m, 종 입구가 91이다. 몸체에 있는 당초문이나 비천상 조각이 빼어난 것은 물론이거니와 종소리가 어디 비할 데 없이 낭랑하다. 그러나 현장에서 종소리를 듣기는 어렵다. 종을 보호하기 위해 타종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원사 동종은 우리나라 동종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으며, 조각 장식이 빼어날 뿐더러 소리가 매우 아름답다.

종신의 상대와 하대에는 화려한 당초문이 새겨져 있고, 종신에 조각된 비천상은 악기(공후와 생)를 연주하며 곧 하늘로 솟아오를 듯 경쾌하다. 아니 이미 천계를 날고 있는 듯 천의 자락 휘날리는 모습이 당당하고 건강하다.

비천상 사이에 당좌가 두 곳 있는데, 당좌는 8엽의 연판으로 장식하고 다시 연주문대와 당초문을 돌렸다.


이 종은 조각 장식이 매우 아름다운 것은 물론, 종소리도 매우 좋아 통일신라시대의 우수 작품으로 꼽힌다. 국보 제36호로 지정돼 있다.

한국전쟁 때 불에 타 녹아 없어질 뻔한 위기를 겪었으나 30년 동안 상원사 문밖 출입을 않고 수행 정진하던 방한암스님의 굳은 의지에 힘입어 월정사에 있던 선림원터 동종과 같은 불행은 면하게 되었다.



* 상원사 동종의 비천상-천상에서부터 악기를 연주하며 내려왔다가 다시 솟구치는 모습이 박진감 있고 경쾌해 보인다.

종신 위에는 원통형의 음관과 용뉴가 있다. 음관은 위아래를 셋으로 나누어 갖가지 연화와 당초문을 장식하였다. 용은 음관에 몸을 붙인 형상인데, 머리를 크게 만들었으며 발톱이나 비늘 등의 조각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매우 힘차다.


위쪽에 4개의 유곽이 있으며, 하나의 유곽 안에는 9개의 종유가 있다. 종유 좌우에는 종의 이름과 조성 연대를 적어놓았다.

원래 어느 절에 있던 종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조가 상원사에 바치려고 전국을 수소문하여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골라내었는데, 그것이 바로 안동 누문에 있던 종이었다. 이것을 1469년 현재의 상원사로 옮겼다고 한다. 신기한 일은 안동 누문에 걸려 있던 종이 꼼짝도 하지 않아 종유 하나를 떼어내니 비로소 움직였다는 것이다. 전설을 입증하듯 지금도 유곽 안에 종유 하나가 없다.


* 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 불치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세조는 친히 권선문을 작성하고 진여원을 확장하였으며, 이름을 상원사’(上院寺)라 바꾸고 원찰(願刹)로 정하여 문수동자상을 봉안했다.


(적멸보궁에서 내려오면 상원사 중대 사자암에 이른다. 이곳 상원사에 단종애사의 악역 세조에 얽힌 일화가 있다.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세조는 얼마 못 가 괴질에 걸리게 된다. 병을 고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세조가 월정사에 들러 참배하고 상원사로 올라가던 길이었다. 물이 맑은 계곡에 이른 세조는 몸에 난 종기를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혼자 멀찌감치 떨어져 몸을 씻고 있었는데, 동자승 하나가 가까운 숲에서 놀고 있었다. 세조는 그 아이를 불러 등을 씻어달라고 부탁하며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주었다는 말은 하지 마라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임금께서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라고 대답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깜짝 놀란 세조가 두리번거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몸을 괴롭히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이다. 감격에 겨운 세조는 화공을 불러 기억을 더듬어 동자로 나타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고, 그 그림을 표본으로 하여 나무를 조각하였다. 이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을 상원사의 법당인 청량선원에 모셨다.)







서산 박종규벗님과 두런두런 방한암 선사의 이야기와 세조의 이야기를 하며 상원사를 둘러보고 내려온다.


한암중원(漢岩重遠1876~1951)

* 漢巖重遠 悟道頌



* 만공스님과 한암스님의 법거량(法擧量)

1943년 여름 만공(滿空)스님이 적멸보궁을 참배하기 위해 오대산에 왔다. 만공스님이 일주일간 기도를 마치고 돌아갈 때 한암스님은 동피골 외나무다리까지 배웅을 나왔다.


만공스님이 한암스님!”이라고 부른 뒤 작은 돌 하나를 집어 던졌다.

그 돌을 주워든 한암스님은 아무 말 없이 개울로 던졌다. 깨달음의 경지에 있는 두 어른의 법거량 이었다.


그 뒤로 만공스님과 한암스님은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경허스님 법맥을 이어 덕숭산과 오대산에서 회상을 이룬 두 어른의 만남은 그 자체로 의미가 깊다.






내일은 상원사 적멸보궁을 거처 오대산 비로봉 등산 계획이 있어 밝아서 진부면 소재지에 내려가 여장을 푼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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