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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청룡사지(靑龍寺址)에 가보다.

by 산산바다 2016. 5. 25.

산과바다



충주 청룡사지(靑龍寺址)에 가보다.

2016. 5. 22. 담음

태고 보우(太古普愚)의 법통을 이어받은 보각국사 환암 혼수(幻庵混修)의 흔적이 남아있는 보각국사탑(普覺國師塔)과 보각국사탑비(普覺國師塔碑), 보각국사탑 앞 사자석등(普覺國師塔 獅子石燈) 등이 있는 고려시대의 사찰터인 충주 청룡사지(忠州靑龍寺址)를 둘러보았다.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길 147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 보각국사 환암 혼수(幻庵混修 1320~1392)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의 고승으로서 태고 보우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이 같은 고승이 활동하였던 청룡사는 조선 전기에 그 위상이 상당히 높았던 사찰로 보인다.

* 韓國佛敎法脈 



청룡사의 창건 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려시대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관련 설화가 전래되고 있다. 현 사지에는 국보 제197호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忠州靑龍寺址普覺國師塔)과 보물 제658호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忠州靑龍寺址普覺國師塔碑), 그리고 보물 제656호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忠州靑龍寺址普覺國師塔 獅子石燈)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42호로 지정된 충주 청룡사 위전비(靑龍寺位田碑)3기의 석종형 부도 등이 있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까지 법통이 이어졌던 사찰의 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각국사 환암 혼수(幻庵混修)[1320~1392]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의 고승으로서 태고 보우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이 같은 고승이 활동하였던 청룡사는 조선 전기에 그 위상이 상당히 높았던 사찰로 보인다. 한편 1692(숙종 18)에 세워진 충주 청룡사 위전비는 사찰의 경영을 위하여 신도들이 출원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사정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사찰과 관련된 문헌 기록을 살펴보면, 인조 때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호서승람(湖西勝覽)에 그 이름이 전하고, 여지도서(輿地圖書)』「충원현조에는 현의 북쪽 50리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 간행된 각종 읍지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고, 자세한 연혁과 내용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현재의 청룡사는 1921년에 신축되었다. 본래 있었던 청룡사지의 북쪽 청계산 중턱에 위치하였는데, 이곳은 원래 보조국사가 은거하였던 곳이라 전하고 있다.


청룡사는 조선 전기의 불교계를 고찰하는 데 중요한 사찰이다. 환암 혼수 이후 구곡(龜谷각운(覺雲), 벽계(碧溪정심(淨心), 벽송(碧松지엄(智嚴), 부용(芙蓉영관(靈觀), 청허(淸虛휴정(休靜)으로 전해지는 조계종의 법통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다. 또한 청룡사지 내에 전하는 각종 석조 유물은 불교 미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은 조선시대의 석조 부도 중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 될 만큼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이다.


  

* 청룡사지에 전하는 전설 *

소태면 오량리에 청계산이 있는데 명산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조 말엽 민씨네가 득세를 할 때 청룡사 윗자리에 명당이 있다 하여 민씨네가 이곳으로 이장을 하였다. 그런데 풍수설에 따르면 명당자리 부근에 절이 있으면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을 없애기로 했다. 당시 이곳에는 허씨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의 세력이 컸고 사찰의 운영권도 그들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 절을 없애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민씨 가에서는 비밀리에 사람을 사서 절에다 불을 지르기에 이르렀다. 그 때 이 절 지붕에서 살 던 큰 뱀이 내려와 불을 지른 사람의 앞을 가로 막으니 한 사람은 놀라 자빠져 피를 토하며 죽고, 또 한 사람은 발이 떨어지지 않아 불에 타 죽고 말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절 위에 쓴 민씨 산소에 벌초를 하러 오는 사람까지도 오기만하면 생명을 잃고 갔기에 산소도 묵모이로 옮겼다고 한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보물 제658(19790522일 지정)
청룡사 옛 터에 남아 있는 비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 보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 돌이 서 있다.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 양 귀퉁이를 깎아서 마무리했다. 조선 태조 3(1394) 문인선사 희달이 왕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권근이 비문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현재 다시 새로 창건한 청룡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보각국사탑과 그 앞의 사자석이 함께 있다.


보각국사 부도 - 보각국사 혼수의 부도이다. 일반적인 팔각원당형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중대석과 몸돌을 부풀려놓은 것이 특이하다.

부도는 팔각원당형이면서 중대석과 몸돌을 부풀려놓는 등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팔각지대석은 높직하며 윗면을 파서 하대석이 꼭 맞아 들어가도록 했다. 하대석 옆면에는 문양이 없으나 윗면에는 열여섯 장의 연꽃잎이 엎어 새겨졌으며 꽃잎마다 삼산형(三山型) 꽃이 장식되어 있다.


하대석 윗면에 중대석을 받는 각진 굄이 있고 그 위에 얹힌 중대석은 배가 불러서 북통 모양이다. 각 면에 사각의 모서리를 안으로 구부려넣은 모양의 안상이 있고 그 안에 운룡(雲龍)과 사자상이 번갈아 조각되었다. 상대석은 위아래만 바뀌었을 뿐 하대석과 꼭 같은 모양이고 지대석과 마찬가지로 윗면을 파서 부도의 몸돌을 끼울 수 있게 되어 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 보물 제656(19790522일 지정)

청룡사지는 충주시 소태면에 있는 옛 절터이다. 옛터에는 석등과 함께 보각국사의 사리탑과 탑비만이 남아있다. 이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어 주기 위해 그의 사리탑 앞에 세워진 것이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이 있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3단의 받침 가운데 아래받침돌 아래에 사자 조각이 있어서 사자석등이라 부른다. 절터에서 석등을 사리탑, 탑비와 나란히 세운 것은 조선시대의 배치방식이다. 탑비의 기록으로 볼 때 이 석등은 조선 전기인 태조 1(1392)부터 그 이듬해인 1393년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바로 옆에 새로운 청룡사가 세워져서 현재 불사가 진행 중이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국보 제197(1979522일 지정)
* 조선시대 전기 조형미술의 표본,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륭탑 *

청계산 중턱의 청룡사에 자리한 부도로, 보각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았다. 보각국사(13201392)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불교의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높은 명성을 떨치었다. 특히 계율을 굳게 지키고 도를 지킴에 조심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73세의 나이로 목숨을 다하자, 왕은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정혜원륭이라 내리어 탑을 세우도록 하였다.


몸돌은 팔각이지만 둥그스름하게 배가 불러 있다. 각 면에 무기를 든 신장상이 조각되었으며 모서리에는 반룡이 휘감긴 배흘림기둥이 높은 부조로 새겨졌고 기둥 위에는 목조건축물처럼 창방이 표현되었다. 지붕돌은 두툼하며 처마는 몸돌의 기둥 위 창방머리와 닿은 부분이 역시 목조건축물의 짜임처럼 처리되었고 열여섯 장의 연꽃잎이 새겨졌다. 지붕돌 윗면은 경사가 급하고 기왓골은 표현되지 않았으나 합각마루 끝마다 봉황과 용머리가 차례로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 일곱 장의 연꽃잎이 엎어 새겨졌고 그 위에 앙화, 복발, 화염보주로 이루어진 상륜부가 놓였다.


* 보각국사정혜원륭탑의 구성과 의의 *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조성되었는데, 바닥돌 위에 아래·가운데·윗받침돌을 얹어 기단(基壇)을 마련하고 그 위로 탑몸돌과 지붕돌을 올려 탑신(塔身)을 완성하였다. 기단은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8각으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가운데돌에는 사자상과 구름에 휩싸인 용의 모습을 교대로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마다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신장상(神將像)을 정교하게 새겨 놓았으며, 그 사이마다 새겨진 기둥에는 위로 날아오르는 이무기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에서 높이 들려있는데 마치 목조건축의 아름다운 지붕 곡선이 살아난 듯 하다.

태조 3(1394)에 완성을 보게 된 이 부도는 양식상 종모양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8각의 평면을 이루는 형식으로 건립된 몇 되지 않는 부도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 전기 조형미술의 표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탑 가득히 새겨진 조각과 둥글게 부풀린 외형이 어우러져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탑신의 기둥과 지붕의 곡선, 그리고 지붕 귀퉁이의 용머리조각 등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충주 청룡사지 석종형승탑]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54(20060303일 지정)

충주시 소태면의 청룡사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석종형 부도이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전형적인 종 모양으로 지붕돌, 팔각원당형 부도재 등의 유물과 함께 보호각 안에 놓여 있다. 전체 높이가 1.98m로 비교적 대형 크기에 속한다. 탑의 몸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정사각형의 지댓돌 위에 각진 모양의 굄대가 새겨진 밑받침돌을 2단 놓고 탑의 몸을 올렸다. 탑의 몸 앞면 가운데 부분에는 문자를 새긴 흔적이 있다. 마모가 심해 육안으로는 쓰인 글씨를 쉽게 알 수 없으나 적운당사리탑(跡雲堂舍利塔)’이라 쓰인 것으로 보인다. 근처에 근래에 지은 청룡사가 있으며 많은 불교문화재가 곳곳에 남아 있다.



보각국사 부도비는 네모난 비좌 위에 머릿돌 없이 비신으로만 이루어진 부도비이다. 보각국사는 조선 태조 1(1392), 청룡사에서 입적했는데 나라에서 보각이라는 시호와 정혜원융이라는 부도명을 내렸다.

비의 앞면에는 단정한 글씨체로 보각국사의 행장이, 뒷면에는 200여 명에 이르는 그의 문도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앞면 아래쪽과 뒷면 위쪽이 파손되어 글자가 많이 마멸되었는데 비문의 내용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보각국사는 고려 충숙왕 7(1320)에 경기도 광주군 풍양현의 조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혼수이고 자는 무작(無作)이며 법호는 환암(幻庵)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대선사 계송에게 법을 받고 내외의 전적을 익혔으며 22세 때인 충혜왕 2(1341)에 선선(禪選)의 상상과(上上科)에 올랐다. 충목왕 4(1348)에 금강산에 들어가 잠을 아끼며 정진하여 공부가 나날이 진보했다. 공민왕 19(1370)에 왕이 양주 회암사에서 나옹 스님을 초청하여 시험관으로 삼고 스님들의 공부를 점검하는 공부선(功夫選)을 베풀었다. 혼수 선사는 최고의 성적으로 이 시험을 통과했다. 그 후 왕이 요직에 임명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왕의 청으로 내불당에서 왕에게 법을 가르쳤다. 우왕 9(1383)에 국사가 되었으며 조선 태조 1(1392) 73세의 나이에 청룡사에서 입적했다. 그의 덕과 지혜는 나라의 추앙을 받을 만하므로 보각이라는 시호와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부도명을 내리고 왕명으로 비를 세우게 하였다.


비문을 지은 이는 권근이며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고 문인인 희진이 왕명을 받아 세웠다. 비문의 글씨는 필력이 뛰어나고 빈틈이 없으며 달리 견줄 만한 예를 찾기 어려울 만큼 높은 서격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보각국사 부도비는 보물 제658호이다.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길 147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인 청룡사지를 둘러보며 불교의 법맥을 상기해보았답니다.

* 보각국사 환암 혼수(幻庵混修 1320~1392)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의 고승으로서 태고 보우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이 같은 고승이 활동하였던 청룡사는 조선 전기에 그 위상이 상당히 높았던 사찰로 보인다.

* 韓國佛敎法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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