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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佛 心***/長阿含經

長阿含經 21. 梵動經 범동경

by 산산바다 2015. 2. 19.

산과바다

 

 

 

 

長阿含經

 

21. 梵動經 범동경

 

범동경(梵動經)은 부처님께서 마가다국 죽림(竹林)에 계실 때 선념(善念)이라는 범지는 3보를 비방하였으나 그의 제자 범마달(梵摩達)3보를 칭찬한 것을 두고 여러 비구들 사이에 논의가 빗발쳤다. 이것을 아신 부처님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바라문들의 3()에 대한 비방이나 칭찬을 두고 분노나 기쁨의 태도를 가지지 말아야 함을 설하셨다. 이와 함께 바라문들이 주장하는 62가지 그릇된 견해의 부당함을 설명하셨다.

 

 

 

 

 

如是我聞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一時佛遊摩竭國與大比丘眾千二百五十人俱遊行人間詣竹林止宿在王堂上

어느 때 부처님께서 마갈국(摩竭國마가다국)을 유행하실 적에 큰 비구 대중 1,250명과 함께 계셨다. 인간 세상을 유행하시다가 죽림(竹林)에 이르러 왕의 전당에 머무셨다.

 

 

有梵志名曰善念善念弟子名梵摩達師徒常共隨佛後行而善念梵志以無數方便毁謗佛法及比丘僧其弟子梵摩達以無數方便稱讚佛法及比丘僧師徒二人各懷異心共相違背所以者何斯由異習異見異親近故 

그 때 선념(善念)이라는 범지(梵志)가 있었는데 선념의 제자 이름은 범마달(梵摩達)이었다. 그들 스승과 제자는 항상 부처님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런데 선념 범지는 무수한 방편으로써 부처님과 법과 비구 대중을 헐뜯었고 그 제자 범마달은 무수한 방편으로써 부처님과 법과 비구 대중을 칭찬했다. 그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마음을 품고 서로 엇나갔다. 왜냐 하면 그들은 습관이 다르고 소견이 다르고 가까이 하는 사람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爾時眾多比丘於乞食後集會講堂作如是論甚奇甚特世尊有大神力威德具足盡知眾生志意所趣而此善念梵志及其弟子梵摩達隨逐如來及比丘僧而善念梵志以無數方便毁謗佛法及與眾僧弟子梵摩達以無數方便稱讚如來及法眾僧師徒二人各懷異心異見異習異親近故 

그 때 많은 비구들은 걸식한 뒤에 강당에 모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특별하다. 세존께서는 큰 신력을 지녔고 위덕을 구족하여 중생의 마음과 좋아하는 바를 다 아신다. 저 선념 범지와 그 제자 범마달은 여래와 비구 대중을 따라다니는데 선념 범지는 무수한 방편으로 부처님과 법과 스님들을 비방하고 제자 범마달은 무수한 방편으로 여래와 법과 스님들을 칭찬한다. 그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마음을 품었다. 그것은 소견이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가까이 하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爾時世尊於靜室中以天淨耳過於人耳聞諸比丘有如是論世尊於淨室起詣講堂所大眾前坐知而故問諸比丘汝等以何因緣集此講堂何所論說 

그 때 세존께서는 고요한 방 안에서 사람의 귀보다 뛰어난 청정한 천이(天耳)로써 모든 비구들이 말하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셨다. 세존께서는 고요한 방에서 일어나 강당으로 나아가 대중 앞에 앉아 다 알고 계시면서도 일부러 물으셨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무슨 인연으로 이 강당에 모였고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가?”

 

 

諸比丘白佛言我等於乞食後集此講堂眾共議言甚奇甚特如來有大神力威德具足盡知眾生心志所趣而今善念梵志及弟子梵摩達常隨如來及與眾僧以無數方便毁謗如來及法眾僧弟子梵摩達以無數方便稱讚如來及法眾僧所以者何以其異見異習異親近故向集講堂議如是事

 

그 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은 걸식한 뒤에 이 강당에 모여 여럿이 이야기했습니다.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특별하다. 여래께서는 큰 신통력이 있고 위덕을 구족하여 중생들이 마음으로 지향해 나가는 것을 아신다. 지금 선념 범지와 그 제자 범마달은 항상 여래와 스님들을 따라 다니는데, 선념 범지는 무수한 방편으로 여래와 스님들을 헐뜯고 그 제자 범마달은 무수한 방편으로 여래와 법과 스님들을 찬양한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소견이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가까이 하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강당에 모여 이런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爾時世尊告諸比丘若有方便毁謗如來及法眾僧者汝等不得懷忿結心害意於彼所以者何若誹謗我法及比丘僧汝等懷忿結心起害意者則自陷溺是故汝等不得懷忿結心害意於彼比丘若稱譽佛及法眾僧者汝等於中亦不足以爲歡喜慶幸所以者何若汝等生歡喜心即爲陷溺是故汝等不應生喜所以者何此是小緣威儀戒行凡夫寡聞不達深義直以所見如實讚嘆

 

그 때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방편으로써 여래와 법과 스님들을 헐뜯더라도 너희들은 분노에 찬 마음을 품고 저들을 해칠 뜻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만일 나와 법과 비구들을 비방한다고 해서 너희들이 분노에 찬 마음을 품고 해칠 뜻을 일으킨다면 너희들은 곧 스스로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분노에 찬 마음을 품고 저들을 해칠 뜻을 가져서는 안 된다.

 

비구들아,

만일 부처와 법과 스님들을 칭찬하더라도 너희들은 그 가운데서 또한 기뻐하며 경사스럽게 여길 것 없다.

왜냐 하면 만일 너희들이 환희심을 가지면 곧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기쁜 마음을 내어서도 안 된다.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소소한 인연으로서 위의(威儀)를 지키고, 계행을 따르는 것일 뿐인데 범부들이 들은 것이 적고 깊은 뜻을 몰라 곧 저의 소견으로써 제가 본 그대로 찬탄하기 때문이다.

 

 

云何小緣威儀戒行凡夫寡聞直以所見如實稱讚彼讚嘆言沙門瞿曇滅殺除殺捨於刀杖懷慙愧心慈愍一切此是小緣威儀戒行彼寡聞凡夫以此歎佛又嘆沙門瞿曇捨不與取滅不與取無有盜心又嘆沙門瞿曇捨於淫欲淨修梵行一向護戒不習淫逸所行淸潔又嘆沙門瞿曇捨滅妄語所言至誠所說眞實不誑世人沙門瞿曇捨滅兩舌不以此言壞亂於彼不以彼言壞亂於此有諍訟者能令和合已和合者增其歡喜有所言說不離和合誠實入心所言知時沙門瞿曇捨滅惡口若有麤言傷損於人增彼結恨長怨憎者如此麤言盡皆不爲常以善言悅可人心眾所愛樂聽無厭足但說此言沙門瞿曇捨滅綺語知時之語實語利語法語律語止非之語但說是言

 

어떤 것을 "소소한 인연으로서 위의를 지키고 계행을 따르는 것일 뿐인데 범부들이 들은 것이 적어 곧 저의 소견으로써 제가 본 그대로를 찬탄한다"고 하는가? 그들은 이렇게 찬탄한다.

 

"사문 구담은 살생을 소멸하여 살생을 없앴으며 칼과 몽둥이를 버리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품고 일체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긴다."

이것은 소소한 인연으로서 위의를 지키고, 계행을 따르는 일일 따름인데 들은 것이 적은 저 범부들은 이것을 가지고 부처를 찬탄한다. 또 이렇게 찬탄한다.

 

"사문 구담은 주지 않는 것을 가지려는 마음을 소멸하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려는 마음을 없애 도둑질할 마음이 없다."

또 이렇게 찬탄한다 

"사문 구담은 음욕을 버리고 범행을 깨끗이 닦으며 한결같이 계를 지키고 음탕함을 익히지 않으며 행하는 바가 청결하다."

또 이렇게 찬탄한다 

 

"사문 구담은 거짓말을 버려 없애고 하는 말마다 진실하고 성실하여 세상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또 이렇게 찬탄한다 

 

"사문 구담은 두 말[兩語]을 버려 없앴다. 그리하여 이쪽 사람의 말로 저쪽 사람을 헐뜯지 않고 저쪽 사람의 말로 이쪽 사람을 헐뜯지 않는다. 다툼이 있으면 잘 화합시키고 이미 화합하면 그 기쁨을 더하게 한다. 또 말을 하면 화합하는 말만 하고 성실하게 남의 마음을 살펴 때에 맞게 말씀하신다

 

사문 구담은 악한 말[惡口]을 버려 없앴다. 만일 추한 말로 사람을 손상하면 그 맺힌 원한은 늘어나고 원한과 미움이 자라게 되는데 그런 추한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여러 사람들이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항상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그런 착한 말만 한다.

사문 구담은 꾸밈말을 버리고 없앴다. 때에 맞는 말진실한 말이로운 말법다운 말()다운 말잘못을 그치게 하는 말 이런 말만 한다.

 

 

沙門瞿曇捨離飮酒不著香華不觀歌舞不坐高床非時不食不執金銀不畜妻息僮僕婢使不畜象犬及諸鳥獸不畜象兵馬兵車兵步兵不畜田宅種殖五穀不以手拳與人相加不以斗秤欺誑於人亦不販賣券要斷當亦不取受觝債橫生無端亦不陰謀面背有異非時不行爲身養壽量腹而食其所至處衣鉢隨身譬如飛鳥羽翮身俱此是持戒小小因緣彼寡聞凡夫以此歎佛

 

사문 구담은 술 마시기를 버리고 향화(香華)로 몸을 치장하지 않으며 노래와 춤을 구경하지 않고 높은 평상에 앉지 않는다. 때 아닌 때에 먹지 않고 금은을 지니지 않는다. 아내와 자식과 남녀의 종을 두지 않고 코끼리돼지염소개 및 모든 새나 짐승을 기르지 않고 상병(象兵)마병(馬兵)차병(車兵)보병(步兵)을 기르지 않는다. 밭과 집을 가지지 않고 5곡을 심지 않으며, 주먹으로 남과 맞서지 않고 말과 저울로써 남을 속이지 않는다.

 

또한 판매하거나 계약하지도 않는다. 또한 저당을 잡고 빚을 주어 함부로 이익을 내지 않으며 또 음모를 꾸미거나 면전(面前)과 배후(背後)를 다르게 하지 않는다. 때가 아니면 행하지 않으며 몸을 위하고 목숨을 기르기 위해 알맞게 먹는다. 그가 가는 곳마다 옷과 발우가 몸을 따르는 것은 마치 나는 새의 몸에 날개가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계를 가지는 소소한 인연일 뿐인데 저 들은 것이 적은 범부는 이것을 가지고 부처를 찬탄한다.

 

 

如餘沙門婆羅門受他信施更求儲積衣服飮食無有厭足沙門瞿曇無有如此事如餘沙門婆羅門食他信施自營生業種殖樹木鬼神所依沙門瞿曇無如此事如餘沙門婆羅門食他信施更作方便求諸利養象牙雜寶高廣大床種種文繡毯登被褥沙門瞿曇無如此事如餘沙門婆羅門食他信施更作方便求自莊嚴酥油摩身香水洗浴香末自塗香澤梳頭著好華鬘染目紺色拭面莊飾鐶紐澡潔以鏡自照著寶革屣上服純白戴蓋執拂幢麾莊飾沙門瞿曇無如此事

* (담요 구-+-+

* 1.면류관 싸개 2..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信施]을 받고도 다시 저축하기를 구하며 의복과 음식에 만족할 줄을 모르지만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자기의 생업을 경영하고 나무를 심어 귀신이 의지할 곳을 만들지만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다시 방편을 지어 온갖 이양(利養)상아(象牙)잡보(雜寶)높고 넓은 큰 평상과 온갖 무늬가 있는 비단털로 짠 담요돗자리이불 등을 구하지만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다시 방편을 써서 자신을 치장한다. 소유(?)를 몸에 문지르고 향수에 목욕하며 향가루를 몸에 바르고 향수로 머리를 빗으며 아름다운 화만(?)을 걸치고 눈을 감색으로 물들이며 얼굴을 문질러 장엄하고 깨끗한 고리를 차고 끈을 묶고 거울에 제 자신을 비추어 본다. 보배 가죽신을 신고 새하얀 옷을 입으며 일산을 쓰고 총채를 잡으며 깃발로 장엄하게 꾸민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如餘沙門婆羅門專爲嬉戱碁局博奕八道十道至百千道種種戱法以自娛樂沙門瞿曇無如是事如餘沙門婆羅門食他信施但說遮道無益之言王者戰鬪軍馬之事群僚大臣騎乘出入遊戱園觀及論臥起行步女人之事衣服飮食親里之事又說入海採寶之事沙門瞿曇無如此事如餘沙門婆羅門食他信施無數方便但作邪命諂諛美辭現相毁呰以利求利沙門瞿曇無如此事如餘沙門婆羅門食他信施但共諍訟或於園觀或在浴池或於堂上互相是非我知經律汝無所知我趣正道汝趣邪徑以前著後以後著前我能忍汝不能忍汝所言說皆不眞正若有所疑當來問我我盡能答沙門瞿曇
無如是事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오로지 잡기를 즐겨 바둑장기8()10백천 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놀이로 스스로 즐긴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도에 방해되는 무익한 이야기만 한다. 왕들의 전쟁과 군마에 관한 일, 뭇 대신과 관리들이 수레나 말을 타고 드나들며 동산에서 유희하는 일을 말할 뿐이다. 또 눕고 일어나고 걸어 다니는 일, 여자에 관한 일, 의복과 음식과 친척의 일을 이야기하며, 또 바다에 들어가 보물 캐는 일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 무수한 방편을 써서 나쁜 직업으로 생활하고 아름다운 말로 아첨하며, 대놓고 서로 헐뜯고 이익으로써 이익을 구한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서로 다툼만 일삼는다. 혹은 동산에서, 혹은 욕지(浴池)에서, 혹은 당()에서 서로 시비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경률(經律)을 알지만 너는 모른다. 나는 바른 길을 가지만 너는 삿된 길을 가며 앞의 것을 뒤에 붙이고 뒤의 것을 앞에 붙인다. 나는 잘 참지만 너는 잘 참지 못한다. 네가 하는 말은 모두 정직하지 않다. 만일 의심되는 것이 있거든 내게 와서 물으라. 내가 모두 답해주리라.)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如餘沙門婆羅門食他信施更作方便求爲使命若爲王王大臣婆羅門居士通信使從此詣彼從彼至此持此信授彼持彼信授此或自爲或敎他爲沙門瞿曇無如是事如餘沙門婆羅門食他信施但習戰陣鬪諍之事或習刀杖弓矢之事或鬪鷄犬猪羊象馬牛駝諸獸或鬪男女或作眾聲吹聲鼓聲歌聲舞聲緣幢倒絶種種伎戱無不翫習沙門瞿曇無如是事如餘沙門婆羅門食他信施行遮道法邪命自活瞻相男女吉凶好醜及相畜生以求利養沙門瞿曇無如是事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다시 방편을 써서 스스로 심부름꾼이 되기를 구한다. 혹은 왕이나 왕의 대신바라문거사(居士)를 위해 심부름꾼이 되어 여기서 저기로 가고 저기서 여기로 오며 이 소식을 가져다 저 사람에게 주고 저 소식을 가져다 이 사람에게 주되 혹은 스스로 하기도 하고 혹은 남을 시켜서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다만 전쟁에서 싸우는 일만 익힌다. 혹은 칼이나 몽둥이 활 쏘는 법을 익히고, 혹은 닭돼지염소코끼리낙타 따위의 짐승들을 싸움 붙이기도 하며, 혹은 남녀간에 싸움 붙이기도 한다. 피리 소리북소리노래 소리춤 추는 소리 등 여러 가지 소리를 내고, 혹은 깃대에 오르고 거꾸로 떨어지는 재주 등 갖가지 재주부리기를 익히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남녀의 길흉과 잘 생기고 못생긴[好醜] 관상을 보고 점치며 또 짐승의 관상까지 보면서 이익을 구한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如餘沙門婆羅門食他信施行遮道法邪命自活召喚鬼神或復驅遣種種無數方道恐熱於人能聚能散能苦能樂又能爲人安胎出衣亦能呪人使作驢馬亦能使人聾盲現諸技術叉手向日月作諸苦行以求利養沙門瞿曇無如是事如餘沙門婆羅門食他信施行遮道法邪命自活或爲人呪病或誦惡呪或誦善呪或爲醫方鍼炙藥石療治眾病沙門瞿曇無如此事如餘沙門婆羅門食他信施行遮道法邪命自活或呪水火或爲鬼呪或誦刹利呪或誦象呪或支節呪或安宅符呪或火燒能爲解呪或誦知死生書或誦夢書或相手面或誦天文書或誦一切音書沙門瞿曇無如此事如餘沙門婆羅門食他信施行遮道法邪命自活瞻相天時言雨不雨穀貴穀賤多病少病恐怖安隱或說地動彗星月蝕日蝕或言星蝕或言不蝕方面所在皆能記之沙門瞿曇無如此事如餘沙門婆羅門食他信施行遮道法邪命自活或言此國當勝彼國不如或言彼國當勝此國不如瞻相吉凶說其盛衰沙門瞿曇無如是事諸比丘此是持戒小小因緣彼寡聞凡夫以此嘆佛

* :   1.보이다 2.가르치다 3.알리다 4.보다 5.지신 6.* (깨물 교) * (벙어리 음)  * 의 대치(벙어리 아)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귀신을 부르고 혹은 쫓으며 갖가지 기도와 무수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두렵게 하여 모으기도 하고 능히 흩어지게도 하며 괴롭게도 하고 즐겁게도 한다. 또 능히 사람을 위해 태()를 편안하게도 하고 태의(胎衣)가 밖으로 나오게도 하며, 또 능히 사람을 저주해 나귀로 만들기도 하고 또 사람을 귀머거리나 장님, 벙어리로 만들기도 한다. 또 여러 가지 기술을 보여주고 손을 모으고 일월(日月)을 향하는 등 온갖 고행을 하는 것으로써 이양을 구한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혹은 사람을 위해 병을 치료하는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혹은 나쁜 주문을 외우기도 하며, 혹은 선한 주문을 외우기도 한다. 혹은 의방약석(藥石)으로써 여러 가지 병을 고쳐주기도 한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혹은 홍수나 화재를 방지하는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혹은 귀신의 주문을 외우기도 하며 혹은 찰리의 주문을 외우기도 한다. 혹은 코끼리 주문, 지절(支節)의 주문, 집을 편안케 하는 부적과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혹은 불에 데이고 쥐에게 물린 독을 풀어주는 주문을 외우기도 한다. 혹은 죽고 사는 것을 점치는 글을 외우고 꿈풀이 하는 글을 외우며, 손금이나 관상을 보고 천문서를 외우며, 혹은 모든 소리에 대한 글을 외운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천기를 살펴 비가 올지 오지 않을지, 곡식이 귀할지 천할지, 병이 많을지 적을지, 세상이 혼란스러울지 안온할지를 말해 준다. 혹은 지진혜성월식일식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별이나 일식월식[星蝕]에 대해 말하기도 하며, 혹은 불식(不蝕)을 말하기도 하고 어느 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다 능히 말한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런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혹은 (이 나라가 마땅히 이기고 저 나라는 그렇지 못하리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저 나라가 마땅히 이기고 이 나라는 그렇지 못하리라)고 말하기도 하며, 길흉을 점쳐 그 성쇠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모든 비구들이여, 이것은 계를 가지는 소소한 인연들인데 저 들은 것이 적은 범부들은 이것을 가지고 부처님을 찬탄한다.”

 

 

佛告諸比丘更有餘法甚深微妙大法光明唯有賢聖弟子能以此言讚嘆如來何等是甚深微妙大光明法賢聖弟子能以此法讚嘆如來諸有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末劫末見種種無數隨意所說盡入六十二見中本劫本見末劫末見種種無數隨意所說盡不能出過六十二見中彼沙門婆羅門以何等緣於本劫本見末劫末見種種無數各隨意說盡入此六十二見中齊是不過諸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種種無數各隨意說盡入十八見中本劫本見種種無數各隨意說盡不能過十八見中彼沙門婆羅門以何等緣於本劫本見種種無數各隨意說盡入十八見中齊此不過諸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起常論我及世間常存此盡入四見中於本劫本見言我及世間常存盡入四見齊是不過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과는 다른 법으로서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오직 현성(賢聖)의 제자만이 능히 이 법을 가지고 여래를 찬탄한다. 어떤 것이 "깊고 미묘한 큰 광명의 법으로서 현성의 제자만이 능히 이 법을 가지고 여래를 찬탄한다"는 것인가? 모든 사문 바라문들이 갖가지로 무수하게 나름대로 주장하는 본겁 본견(本劫本見)과 말겁 말견(末劫末見)은 다 62견에 들어가며 갖가지로 무수하게 나름대로 주장하는 본겁 본견과 말겁 말견은 다 62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은 어떤 인연으로 본겁 본견과 말겁 말견에 대해서 갖가지 무수한 나름대로의 주장이 다 이 62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하는가? 모든 사문 바라문이 갖가지로 무수하게 나름대로 주장하는 본겁 본견은 다 18견에 들어가고, 갖가지로 무수하게 나름대로 주장하는 본겁 본견은 다 18견을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어떤 인연으로 본겁 본견에 대해서 갖가지 무수한 나름대로의 주장이 다 18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있어서 상론(常論)을 일으켜 말한다

"나와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 

이런 주장은 다 4견에 들어간다.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 고 말하는 것은 다 4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

 

 

彼沙門婆羅門以何等緣於本劫本見起常論我及世間常存此盡入四
見中齊是不過或有沙門婆羅門種種方便入定意三昧以三昧心憶二十成劫敗
彼作是說我及世間是常此實餘虛所以者何我以種種方便入定意三昧
三昧心憶二十成劫敗劫其中眾生不增不減常聚不散我以此知我及世間是常
此實餘虛此是初見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見計我及世間是常於四見中
齊是不過

 

저 사문 바라문은 어떤 인연으로 본겁 본견에 대해서 상론(常論)을 일으켜 "나와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고 말하고, 모두 4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하는가?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定意三昧)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20번의 성겁(成劫)과 패겁(敗劫)을 기억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와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20번의 성겁과 패겁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 동안 중생은 늘지도 않았고 줄지도 않았으며 항상 모이고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으로써 나와 세간은 영원하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초견(初見)이다.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고 헤아리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或有沙門婆羅門種種方便入定意三昧以三昧心憶四十成劫敗劫彼作是說我及世間是常此實餘虛所以者何我以種種方便入定意三昧以三昧心憶四十成劫敗劫其中眾生不增不減常聚不散我以此知我及世間是常此實餘虛此是二見諸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見計我及世間是常於四見中齊是不過

 

혹 어떤 사문 바라문들은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40번의 성겁과 패겁을 기억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40번의 성겁과 패겁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 동안 중생들은 늘지도 않았고 줄지도 않았으며 항상 모여 있고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으로써 나와 세간은 영원하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제 2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고 헤아리는데, 그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或有沙門婆羅門以種種方便入定意三昧以三昧心憶八十成劫敗劫彼作是言我及世間是常此實餘虛所以者何我以種種方便入定意三昧以三昧心憶八十成劫敗劫其中眾生不增不減常聚不散我以此知我及世間是常此實餘虛此是三見諸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見計我及世間是常於四見中齊是不過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80번의 성겁과 패겁을 기억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80번의 성겁과 패겁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 동안 중생들은 늘지도 않았고 줄지도 않았으며 항상 모여 있고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으로써 나와 세간은 영원하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제3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고 헤아리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或有沙門婆羅門有捷疾相智善能觀察以捷疾相智方便觀察謂爲審諦以己所見以己辯才作是說我及世間是常此是四見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見計我及世間是常於四見中齊是不過此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計我及世間是常如此一切盡入四見中我及世間是常於此四見中齊是不過唯有如來知此見處如是持如是執亦知報應如來所知又復過是雖知不著已不著則得寂滅知受集出要以平等觀無餘解脫故名如來是爲餘甚深微妙大法光明使賢聖弟子眞實平等讚嘆如來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민첩한 지혜가 있어 잘 관찰한다. 민첩한 지혜 방편으로 관찰하여 "자세히 밝혔다"고 여기고는 자기 소견과 자기의 말재주로써 이렇게 말한다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

 

 

이것이 제4견이다.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고 헤아리는데, 그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고 헤아리는데 이와 같은 일체 견해는 모두 4견에 들어가는 것이고,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는 견해는 이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여래만이 이 견처(見處)와 이러한 가짐[]과 이러한 고집[]을 알고 또한 그 보응(報應)을 안다. 여래가 아는 것은 또 이것을 넘어서지만 비록 알아도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곧 적멸(寂滅)을 얻는다. ()의 집()()()()출요(出要)를 알고 평등관으로써 남김 없이 해탈하였기 때문에 여래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혀 다른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요,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하는 것이다.

 

 

復有餘甚深微妙大法光明使賢聖弟子眞實平等讚嘆如來何等是諸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起論我及世間半常半無常彼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見計我及世間半常半無常於此四見中齊是不過或過或有是時此劫始成有餘眾生福盡命盡行盡從光音天命終生空梵天中便於彼處生愛著心復願餘眾生共生此處此眾生旣生愛著願已復有餘眾生命福盡於光音天命終來生空梵天中其先生眾生便作是念我於此處是梵大梵我自然有無能造我者我盡知諸義典千世界於中自在最爲尊貴能爲變化微妙第一爲眾生父我獨先有餘眾生後來後來眾生我所化成其後眾生復作是念彼是大梵彼能自造無造彼者盡知諸義典千世界於中自在最爲尊貴能爲變化微妙第一爲眾生父彼獨先有後有我等我等眾生彼所化成彼梵眾生命行盡已來生世間年漸長大剃除鬚髮服三法衣出家修道入定意三昧隨三昧心自識本生便作是言彼大梵者能自造作無造彼者盡知諸義典千世界於中自在最爲尊貴能爲變化微妙第一爲眾生父常住不變而彼梵化造我等我等無常變易不得久住是故當知我及世間半常半無常此實餘虛是謂初見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見起論半常半無常於四見中齊是不過

 

또 다시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어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한다. 어떤 것이 그것인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나와 세간은 반은 항상하고 반은 무상하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다"고 헤아리는데, 이러한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은 이런 때도 있었다. 이 겁()이 처음으로 시작되던 때에 어떤 중생이 복()이 다하고 목숨[]이 다하고 행()이 다해 광음천(光音天)에서 목숨이 끝나 허공의 범천에 태어났다. 그는 곧 그곳에서 애착심을 내어 다른 중생도 함께 그곳에 태어났으면 하고 원했다. 이 중생이 애착의 원을 일으킨 뒤에 다시 다른 중생이 목숨과 행과 복이 다해 광음천(光音天)에서 목숨을 마치고 범천에 태어났다. 그러자 먼저 범천에 태어난 중생은 곧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곳의 범()이요, 대범(大梵)이다. 나는 저절로 있게 되었으며 아무도 나를 만든 자는 없다. 나는 모든 뜻을 알고 1천 세계를 맡아 그 가운데서 자재(自在)하며 가장 존귀하고 잘 변화하며 미묘하기 제일이다. 나는 중생의 아버지로서 나 혼자 먼저 있었고 다른 중생은 뒤에 왔으니, 뒤에 온 중생은 다 내가 조화로 만든 것이다."

 

 

그 뒤에 온 중생들도 또 이렇게 생각했다

"저 분은 대범이다. 저 분은 스스로 생겨난 자이며 저 분을 만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모든 뜻을 알고 1천 세계를 맡아 그 가운데서 자재하며 가장 존귀하고 잘 변화하며 미묘하기 제일이다. 중생의 아버지로서 저 분 혼자 먼저 있었고 그 뒤에 우리가 있게 되었다. 우리들 중생은 저 분이 조화로 만든 것이다."

 

 

저 범천의 중생들은 목숨과 행이 다해 이 세상에 와서 태어났다. 그들은 점차 자라나서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의를 입고 집을 떠나 도를 닦았다. 그들은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을 따라 자기 자신의 본생을 기억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 대범천은 스스로 생겨난 자이며 저 분을 만든 자는 없다. 모든 뜻을 다 알고 1천 세계를 맡아 그 가운데서 자재하며 가장 존귀하고 잘 변화하며 미묘하기 제일이다. 저 분은 중생의 아버지로서 항상 존재하며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저 범천이 조화로 만들었으므로 무상하여 변하고 바뀌며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초견(初見)이다.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或有眾生喜戲笑懈怠數數戲笑以自娛樂彼戲笑娛樂時身體疲極便失意以失意便命終來生世間年漸長大剃除鬚髮服三法衣出家修道彼入定意三昧以三昧心自識本生便作是言彼餘眾生不數生不數戲笑娛樂常在彼處永住不變由我數戲笑故致此無常爲變易法是故我知我及世間半常半無常此實餘虛是爲第二見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見起論我及世間半常半無常於四見中齊此不過

 

혹 어떤 중생은 쓸데없는 우스갯소리와 게으름을 좋아하고 자주 우스갯소리를 하며 스스로 즐겼다. 그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즐기다가 몸이 매우 피로해 곧 의식을 잃었고 의식을 잃음으로써 곧 목숨을 마치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는 점점 자라서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의를 입고 집을 나가 도를 닦았다. 그는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본생을 기억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 곳에 있는 다른 중생들은 자주 태어나지 않고 자주 우스갯소리를 하며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그곳에 있고 영원히 머물며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자주 우스갯소리를 한 까닭에 이 무상한 곳에 태어나 변하고 바뀌는 몸[變易法]이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제 2견이다.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或有眾生展轉相看已便失意由此命終來生世間漸漸長大剃除鬚髮服三法衣出家修道入定意三昧以三昧心識本所生便作是言如彼眾生以不展轉相看不失意故常住不變我等於彼數相看數相看已便失意致此無常爲變易法我以此知我及世間半常半無常此實餘虛是第三見諸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見起論我及世間半常半無常於四見中齊此不過

 

혹 어떤 중생은 이리저리 서로 쳐다보다가 곧 뜻을 잃고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마치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는 점점 자라나서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의를 입고 집을 나와 도를 닦아 정의삼매에 들어갔다. 그는 삼매의 마음으로써 본래 태어났던 곳[本所生]을 기억하고는 곧 이렇게 말했다.

 

 

"저 중생들은 이리저리 서로 쳐다보지 않았으므로 뜻을 잃지 않았다. 그러므로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곳에서 자주 서로 보았고 자주 서로 보고는 곧 뜻을 잃었기에 이 무상한 곳에 태어나 변하고 바뀌는 몸이 되었다. 나는 이것으로써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며, 이것은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제3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或有沙門婆羅門有捷疾相智善能觀察彼以捷疾觀察相智以己智辯言我及世間半常半無常此實餘虛是爲第四見諸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見起論我及世間半常半無常於四見中齊是不過諸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起論我及世間半常半無常盡入四見中齊是不過唯佛能知此見處如是持如是執亦知報應如來所知又復過是雖知不著以不著則得寂滅知受集出要以平等觀無餘解脫故名如來是爲餘甚深微妙大法光明使賢聖弟子眞實平等讚歎如來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민첩한 지혜(智慧)가 있어 능히 잘 관찰한다. 그는 민첩하게 관찰하는 지혜로써 관찰하고 자기의 지혜와 말재주로써 말한다.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다. 이것은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이 제 4견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들은 다 4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오직 부처님만이 이 견처(見處)와 이러한 가짐과 이러한 고집을 알고 또한 그 보응을 안다. 여래가 아는 바는 또 이것을 넘어서지만 비록 알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곧 적멸을 얻는다. 그래서 수()의 집()()()()출요(出要)를 알고 평등관으로써 남김 없이 해탈하였기 때문에 여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혀 다른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요,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하는 것이다.

 

 

復有餘甚深微妙大法光明使賢聖弟子眞實平等讚歎如來何等法是諸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起論我及世間有邊無邊彼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見起論我及世間有邊無邊於此四見中齊是不過或有沙門婆羅門種種方便入定意三昧以三昧心觀世間起邊想彼作是說此世間有邊是實餘虛所以者何我以種種方便入定意三昧以三昧心觀世間有邊是故知世間有邊此實餘虛是謂初見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見起論我及世間有邊於四見中齊是不過

 

또 다시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어서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한다. 어떤 법이 그것인가? 여러 사문 바라문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나와 세간은 끝[]이 있다, 끝이 없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끝이 있다, 끝이 없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가 삼매의 마음으로써 세간을 관찰하고는 "끝이 있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간은 끝이 있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세간에 끝이 있음을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간은 끝이 있으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초견이다.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끝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或有沙門婆羅門以種種方便入定意三昧以三昧心觀世間起無邊想彼作是言世間無邊此實餘虛所以者何我以種種方便入定意三昧以三昧心觀世間無邊是故知世間無邊此實餘虛是第二見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見起論我及世間無邊於四見中齊此不過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세간을 관찰하고는 "끝이 없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간은 끝이 없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세간이 끝이 없음을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간은 끝이 없으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제2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끝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或有沙門婆羅門以種種方便入定意三昧以三昧心觀世間謂上方有邊四方無邊彼作是言世間有邊無邊此實餘虛所以者何我以種種方便入定意三昧以三昧心觀上方有邊四方無邊是故我知世間有邊無邊此實餘虛是爲第三見諸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見起論我及世間有邊無邊於此四見中齊是不過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세간을 관찰하고는 "상방(上方)은 끝이 있고, 4방은 끝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간은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상방은 끝이 있고 4방은 끝이 없음을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세간이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제3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 "나와 세간은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或有沙門婆羅門有捷疾相智善於觀察彼以捷疾觀察智以己智辯言我及世間非有邊非無邊此實餘虛是爲第四見諸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見起論我及世間有邊無邊此實餘虛於四見中齊是不過此是諸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起論我及世間有邊無邊盡入四見中齊是不過唯佛能知此見處如是持如是執亦知報應如來所知又復過是雖知不著已不著則得寂滅知受集出要以平等觀無餘解脫故名如來是爲餘甚深微妙大法光明使賢聖弟子眞實平等讚歎如來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민첩한 지혜가 있어 잘 관찰한다. 그는 민첩하게 관찰하는 지혜로 관찰하고는 자기의 지혜로와 말재주로써 말한다.

"나와 세간은 끝이 있는 것도 아니요 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이 제4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끝이 있다, 끝이 없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데, 그것들은 다 4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이 견처(見處)와 이러한 가짐과 이러한 고집을 알고 그 응보도 안다. 여래가 아는 바는 또 이것을 넘어서지만 비록 알아도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곧 적멸을 얻는다. ()의 집()()()()출요(出要)를 알고 평등관으로써 남김 없이 해탈하였기 때문에 여래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이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요,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하는 것이다.

 

 

復有餘甚深微妙大法光明使賢聖弟子眞實平等讚歎如來何者是諸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異問異答彼彼問時異問異答於四見中齊是不過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見異問異答於四見中齊是不過或有沙門婆羅門作如是論作如是見我不見不知善惡有報無報耶我以不見不知故作如是說善惡有報耶無報耶世間有沙門婆羅門廣博多聞聰明智慧常樂閑靜機辯精微世所尊重能以智慧善別諸見設當問我諸深義者我不能答有愧於彼於彼有畏當以此答以爲歸依爲洲爲舍爲究竟道彼設問者當如是答此事如是此事實此事異此事不異此事非異非不異是爲初見沙門婆羅門因此問異答異於四見中齊是不過

 

또 다시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어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한다. 어떤 것이 그것인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이문이답(異問異答)을 한다.

* 異問異答 : 궤변론법이다. 팔리본에서는 이러한 부류를 불사교란논자(不死矯亂論者, amar-vikkhepika)라 하였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물을 때 다른 질문, 다른 대답을 하는데, 그것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다른 질문, 다른 대답을 하는데 그것은 다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러한 주장을 하고 이러한 견해를 가진다.

"나는 선악에 과보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다. 나는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선악에는 과보가 있는가, 과보가 없는가?)

 

 

세간에는 널리 알고 많이 듣고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항상 한적한 것을 즐기고 그때그때 하는 말이 미묘하고 자세하여 세상 사람들이 존중하며 능히 지혜로써 모든 소견을 잘 분별하는 사문 바라문이 있다. 만일 그런 자들이 나에게 깊은 뜻을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수 없어 저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저들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마땅히 이런 대답으로써 귀의할 데를 삼고 섬[]을 삼고 집을 삼고 구경도(究竟道)를 삼자. 그가 만일 내게 물으면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리라

(이 일은 이러하다. 이 일은 사실이다. 이 일은 다르다. 이 일은 다르지 않다. 이 일은 다른 것도 아니요 다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초견이다.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다른 질문, 다른 대답을 하는데, 그것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或有沙門婆羅門作如是論作如是見我不見不知爲有他世耶無他世耶諸世間沙門婆羅門以天眼知他心智能見遠事已雖近他他人不見如此人等能知有他世無他世我不知不見有他世無他世若我說者則爲妄語我惡畏妄語故以爲歸依爲洲爲舍爲究竟道彼設問者當如是答此事如是此事實此事異此事不異此事非異非不異是爲第二見諸沙門婆羅門因此問異答異於四見中齊是不過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러한 주장을 하고 이러한 견해를 가진다

"나는 다른 세상이 있는지 다른 세상이 없는지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다. 세간의 여러 사문 바라문은 천안지(天眼智)와 타심지(他心智)로써 능히 먼 일을 본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가더라도 다른 사람은 그를 보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능히 다른 세상이 있는지 다른 세상이 없는지를 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세상이 있는지 다른 세상이 없는지를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다. 만일 내가 말한다면 그것은 곧 거짓말이 된다. 나는 거짓말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그러니 이것으로써 귀의할 데를 삼고 섬을 삼고 집을 삼고 구경도를 삼자. 그가 만일 물으면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리라

(이 일은 이러하다. 이 일은 사실이다. 이 일은 다르다. 이 일은 다르지 않다. 이 일은 다른 것도 아니요 이 일은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이 제2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다른 질문, 다른 대답을 하는데 그것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或有沙門婆羅門作如是見作如是論我不知不見何者爲善何者不善我不知不見如是說是善是不善我則於此生愛從愛生恚有愛有恚則有受生我欲滅受故出家修行彼惡畏受故以此爲歸依爲洲爲舍爲究竟道彼設問者當如是答此事如是此事實此事異此事不異此事非異非不異是爲第三見諸沙門婆羅門因此問異答異於四見中齊是不過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러한 소견을 가지고 이러한 주장을 한다

"나는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불선(不善)인가를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선인지 불선인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다. 나는 곧 여기서 애착을 일으키고 애착으로부터 화를 낸다. 애착이 있고 성냄이 있으면 곧 ()가 생기게 된다. 나는 수를 없애고자 한다. 그러므로 집을 나와 행을 닦는다."

* (): 맥락을 살펴보고 또 팔리본과 대조해 보았을 때 "(, updna)"의 의미가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신역에서 "5취온(取蘊)"이라 한역된 것이 구역에서는 "5수음(受陰)"으로 한역된 것과 같은 경우이다.

 

그는 수를 미워하고 두려워하여 이것으로써 귀의할 데를 삼고 섬을 삼고 집을 삼고 구경도를 삼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 물으면 그는 마땅히 이렇게 답하리라.

"이 일은 이러하다. 이 일은 사실이다. 이 일은 다르다. 이 일은 다르지 않다. 이 일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이 제3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다른 질문, 다른 대답을 하는데 그것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或有沙門婆羅門愚冥闇鈍他有問者彼隨他言答此事如是此事實此事異此事不異此事非異非不異是爲四見諸沙門婆羅門因此異問異答於四見中齊是不過或有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異問異答盡入四見中齊是不過唯佛能知此見處如是持如是執亦知報應如來所知又復過是雖知不著已不著則得寂滅知受集出要以平等觀無餘解脫故名如來是爲甚深微妙大法光明使賢聖弟子眞實平等讚歎如來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어리석고 어둡고 미련하여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말을 따라 이렇게 대답한다.

"이 일은 이러하다. 이 일은 사실이다. 이 일은 다르다. 이 일은 다르지 않다. 이 일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이 제4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다른 질문, 다른 대답을 하는데, 그것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그로 인해 다른 질문, 다른 대답들을 하는데 그것은 다 4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는 것들이다.

오직 부처만이 능히 이 견처와 이러한 가짐과 이러한 고집을 알고 또 그 응보도 안다. 여래가 아는 것은 또 이것을 넘어서지만 비록 알아도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곧 적멸을 얻는다. ()의 집()()출요를 알고 평등관으로써 남김 없이 해탈하였기 때문에 여래라 이름한다. 이것이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요, 현성의 제자들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하는 것이다.

 

 

復有餘甚深微妙大法光明使賢聖弟子眞實平等讚歎如來何等是或有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謂無因而出有此世間彼盡入二見中於本劫本見無因而出有此世間於此二見中齊是不過彼沙門婆羅門因何事於本劫本見謂無因而有於此二見中齊是不過或有眾生無想無知若彼眾生起想則便命終來生世間漸漸長大剃除鬚髮服三法衣出家修道入定意三昧以三昧心識本所生彼作是語我本無今有忽然有此世間本無今有此實餘虛是爲初見諸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際謂無因有於二見中齊是不過

 

또 다시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어 현성의 제자들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한다. 어떤 것이 그것인가? 어떤 사문 바라문은 본겁 본견에 있어서 "이 세간은 원인 없이 생겼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다 2견에 들어간다. 본겁 본견에 대해서 "이 세간은 원인 없이 생겼다"고 하는 것은 2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은 무슨 일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원인 없이 생겨났다고 하며, 2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는가?

 

 

어떤 중생은 생각도 없고 앎도 없다. 만일 그 중생이 생각을 일으키면 곧 목숨을 마치고 이 세간에 태어난다.

* 어떤 중생: 세간의 중생이 아니라 무상천(無想天)의 신()을 말한다.

 

 

그가 점점 자라나면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의를 입고 집을 나와 도를 닦는다. 그는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본래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기억하고는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본래 없었는데 이제 갑자기 생겨났다. 이 세간은 본래 없었는데 이제 있게 되었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이 초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원인 없이 생겨났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2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或有沙門婆羅門有捷疾相智善能觀察彼已捷疾觀察智觀以己智辯能如是說此世間無因而有此實餘虛此第二見諸有沙門婆羅門因此於本劫本見無因而有有此世間於二見中齊是不過諸有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無因而有盡入二見中齊是不過唯佛能知亦復如是諸有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無數種種隨意所說彼盡入是十八見中本劫本見無數種種隨意所說於十八見齊是不過唯佛能知亦復如是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민첩한 지혜로 능히 잘 관찰한다. 그는 민첩하게 관찰하는 지혜로써 관찰하고는 자기의 지혜와 말재주로써 이렇게 말한다

"이 세간은 원인 없이 생겼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이 제2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이 세간은 원인 없이 생겼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2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원인 없이 생겼다"고 주장을 하는데 그것은 다 2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는 것들이다.

 

 

오직 부처만이 능히 안다는 것은 또한 위의 내용과 같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무수한 온갖 주장을 나름대로 펴는데 그것은 다 18견에 들어간다. 본겁 본견에 대해서 무수한 나름대로의 주장은 이 18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는데 그 내용은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復有餘甚深微妙大法光明何等是諸有沙門婆羅門於末劫末見無數種種隨意所說彼盡入四十四見中於末劫末見種種無數隨意所說於四十四見齊是不過彼有沙門婆羅門因何事於末劫末見無數種種隨意所說於四十四見齊此不過諸有沙門婆羅門於末劫末見生有想論說世間有想彼盡入十六見中於末劫末見生想論說世間有想於十六見中齊是不過彼沙門婆羅門因何事於末劫末見生想論說世間有想彼盡入十六見中齊是不過

 

또 다른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어떤 것이 그것인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말겁말견(末劫末見)에 대해서 무수한 온갖 주장을 나름대로 펴는데 그것은 모두 44견에 들어간다. 또 말겁말견(末劫末見)에 대해서 무수한 나름대로의 주장은 4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말겁 말견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주장을 나름대로 펴는 것이며, 44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말겁 말견에 대해서 유상론(有想論)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다 16견에 들어간다.

* 有想論: 지각하는 의식은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말겁말견(末劫末見)에서 상론(想論)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다 16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인해 말겁말견(末劫末見)에 있어서 상론을 내어 세간에는 생각이 있다고 주장하며, 또 다 16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와 같은 주장을 하고 이와 같은 견해를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 몸도 있고 생각도 있는 존재[有色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이 초견이다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말겁 말견에 대해서 상론(想論)을 내어 세간에는 생각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16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諸有沙門婆羅門作如是論如是見我此終後生有色有想此實餘虛是爲初見諸沙門婆羅門因此於末劫末見生想論說世間有想於十六見中齊是不過有言我此終後生無色有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有色無色有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非有色非無色有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有邊有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無邊有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有邊無邊有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非有邊非無邊有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而一向有樂有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而一向有苦有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有樂有苦有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不苦不樂有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有一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有若干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少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有無量想此實餘虛是爲十六見諸有沙門婆羅門於末劫末見生想論說世間有想於此十六見中齊是不過唯佛能知亦復如是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은 없고 생각만 있는 존재[無色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이 있을 수도 있고 몸이 없을 수도 있지만 생각은 있는 존재[有色無色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생각은 있는 존재[非有色非無色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도 있고 생각도 있는 존재[有邊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이 없고 생각만 있는 존재[無邊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면서 생각은 있는 존재[有邊無邊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생각이 있는 존재[非有邊非無邊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또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한결같이 즐거움이 있고 생각이 있는 존재[一向有樂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한결같이 고통이 있고 생각이 있는 존재[一向有苦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즐거움도 있고 고통도 있으면서 생각이 있는 존재[有樂有苦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고통스럽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면서 생각이 있는 존재[不苦不樂有想]으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한 가지 생각만 있는 존재[有一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여러 가지 생각이 있는 존재[有若干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생각이 적은 존재[少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한량없는 생각이 있는 존재[有無量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이 16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말겁말견에 대해서 상론(想論)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16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는데, 그 내용은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復有餘甚深微妙大法光明何等法是諸有沙門婆羅門於末劫末見生無想論說世間無想彼盡入八見中於末劫末見生無想論於此八見中齊此不過彼沙門婆羅門因何事於末劫末見生無想論說世間無想於八見中齊此不過諸有沙門婆羅門作如是見作如是論我此終後生有色無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無色無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有色無色無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非有色非無色無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有邊無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無邊無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有邊無邊無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非有邊非無邊無想此實餘虛是爲八見若沙門婆羅門因此於末劫末見生無想論說世間無想彼盡入八見中齊是不過唯佛能知亦復如是

 

또 다시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그것은 어떤 법인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말겁말견(末劫末見)에 있어서 무상론(無想論)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없다[無想]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다 8견에 들어간다.

* 無想論: 지각하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말겁말견(末劫末見)에 대해서 무상론을 일으키는 것은 이 8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인하여 말겁말견(末劫末見)에 대해 무상론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없다고 주장하고, 8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이러한 주장을 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은 있고 생각은 없는 존재[有色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도 없고 생각도 없는 존재[無色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이 있기도 하고 몸이 없기도 하지만 생각은 없는 존재[有色無色無想]로 태어난다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생각 없는 존재[非有色非無色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이 있고 생각이 없는 존재[有邊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도 없고 생각도 없는 존재[無邊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지만 생각이 없는 존재[有邊無邊無想]로 태어난다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생각이 없는 존재[非有邊非無邊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이 8견이다. 만일 사문 바라문들이 이로 인해 말겁 말견에 있어서 무상론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다 8견에 들어가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부처만이 아는데, 그 내용은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復有餘甚深微妙大法光明何等法是或有沙門婆羅門於末劫末見生非想非非想論說此世間非想非非想彼盡入八見中於末劫末見作非想非非想論說世間非想非非想於八見中齊是不過彼沙門婆羅門因何事於末劫末見生非想非非想論說世間非想非非想於八見中齊是不過諸沙門婆羅門作如是論作如是見我此終後生有色非有想非無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無色非有想非無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有色無色非有想非無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非有色非無色非有想非無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有邊非有想非無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無邊非有想非無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有邊無邊非有想非無想此實餘虛有言我此終後生非有邊非無邊非有想非無想此實餘虛是爲八見若沙門婆羅門因此於末劫末見生非有想非無想論說世間非有想非無想盡入八見中齊是不過唯佛能知亦復如是

 

또 다시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그것은 어떤 법인가?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말겁 말견에 있어서 비상비비상론(非想非非想論)을 일으켜 이 세간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다 8견에 들어간다. 말겁 말견에 있어서 비상비비상론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8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인하여 말겁 말견에 있어서 비상비비상론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고 또 8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러한 주장을 하고 이러한 견해를 가진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은 있으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존재[有色非有想非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또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이 없으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존재[無色非有想非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이 있기도 하고 몸이 없기도 하며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존재[有色無色非有想非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이 없는 것도 아니며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존재[非有色非無色非有想非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은 있으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존재[有邊非有想非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은 없으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존재[無邊非有想非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며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존재[有邊無邊非有想非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며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존재[非有邊非無邊非有想非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이 8견이다만일 사문 바라문이 이로 인해 말겁 말견에 대해서 비유상비무상론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다 8견에 들어가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는데, 그 내용은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復有餘甚深微妙大法光明何等法是諸有沙門婆羅門於末劫末見起斷滅論說眾生斷滅無餘彼盡入七見中於末劫末見起斷滅論說眾生斷滅無餘於七見中齊是不過彼沙門婆羅門因何事於末劫末見起斷滅論說眾生斷滅無餘於七見中齊是不過諸有沙門婆羅門作如是論作如是見我身四大六入從父母生乳餔養育衣食成長摩捫擁護然是無常必歸磨滅齊是名爲斷滅第一見也或有沙門婆羅門作是說此我不得名斷滅我欲界天斷滅無餘齊是爲斷滅是爲二見或有沙門婆羅門作是說此非斷滅色界化身諸根具足斷滅無餘是爲斷滅有言此非斷滅我無色空處斷滅有言此非斷滅我無色識處斷滅有言此非斷滅我無色不用處斷滅有言此非斷滅我無色有想無想處斷滅是第七斷滅是爲七見諸有沙門婆羅門因此於末劫末見言此眾生類斷滅無餘於七見中齊此不過唯佛能知亦復如是

 

또 다시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그것은 어떤 법인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말겁 말견에 있어서 단멸론(斷滅論)을 일으켜 중생은 남김 없이 단멸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다 7견에 들어간다. 말겁 말견에 있어서 단멸론을 일으켜 중생은 남김 없이 단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7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인하여 말겁 말견에 있어서 단멸론을 일으켜 중생은 남김 없이 단멸한다고 주장하고, 7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러한 주장을 하고 이러한 견해를 가진다.

 

 

"내 몸의 4()6()은 부모로부터 나서 젖을 먹고 길러지고 옷과 음식으로 자라나며 보살핌과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무상하여 반드시 없어져[磨滅]버린다. 그러므로 단멸이라 이름한다." 

이것이 제1견이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나를 단멸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욕계천(欲界天)에서 남김 없이 단멸한다. 이러하므로 단멸이라 한다." 

이것이 제2견이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단멸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근()이 갖추어져 있는 화신(化身)은 색계(色界)에서 남김 없이 단멸한다. 이것을 단멸이라 한다." 

 

어떤 자는 말한다

"이것은 단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무색공처(無色空處)에서 단멸한다." 

 

어떤 자는 말한다

"이것은 단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무색식처(無色識處)에서 단멸한다." 

 

어떤 자는 말한다

"이것은 단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무색불용처(無色不用處)에서 단멸한다." 

 

어떤 자는 말한다

"이것은 단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무색유상무상처(無色有想無想處)에서 단멸한다." 

 

이것이 제7단멸이다. 이것을 7()이라 한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말겁 말견에 대해서 "이 중생의 무리들은 남김없이 단멸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7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는데, 그 내용은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復有餘甚深微妙大法光明何等法是諸有沙門婆羅門於末劫末見現在生泥洹論說眾生現在有泥洹彼盡入五見中於末劫末見說現在有泥洹於五見中齊是不過彼沙門婆羅門因何事於末劫末見說眾生現有泥洹於五見中齊是不過諸有沙門婆羅門作是見作是論我於現在五欲自恣此是我得現在泥洹是第一見復有沙門婆羅門作是說此是現在泥洹非不是復有現在泥洹微妙第一汝所不知獨我知耳如我去欲惡不善法有覺有觀離生喜入初禪此名現在泥洹是第二見

 

또 다른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그것은 어떤 법인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말겁 말견에 대해서 현세의 니원론(尼洹論涅槃論)을 일으켜 중생은 현세에 니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모두 5견에 들어간다. 말겁 말견에 대해서 현세에 니원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5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인해 말겁 말견에 대해서 중생은 현세에 니원을 얻는다 하며, 그 또한 5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현세에서 5()을 마음대로 누린다. 이것이 내가 현세에 니원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제1견이다.

 

또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현세에 니원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다시 제일 미묘한 현세의 니원이 있다. 이것은 네가 모르는 것으로 오직 나만이 안다. 나는 욕심[]과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버리고, ()도 있고 관()이 있으며,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간다. 이것을 현세의 니원이라 한다." 

이것이 제2견이다.

 

 

復有沙門婆羅門作如是說此是現在泥洹非不是復有現在泥洹微妙第一汝所不知獨我知耳如我滅有覺內喜一心無覺無觀定生喜入第二禪齊是名現在泥洹是爲第三見復有沙門婆羅門作是說此現在泥洹非不是復有現在泥洹微妙第一汝所不知獨我知耳如我除念住樂護念一心自知身樂賢聖所說入第三禪齊是名現在泥洹是爲第四見復有沙門婆羅門作是說此是現在泥洹非不是現在泥洹復有微妙第一汝所不知獨我知耳如我樂滅苦滅先除憂不苦不樂護念淸淨入第四禪此名第一泥洹是爲第五見若沙門婆羅門於末劫末見生現在泥洹論於五見中
齊是不過唯佛能知亦復如是

 

또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현세에 니원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다시 제일 미묘한 현세의 니원이 있다. 이것은 네가 모르는 것으로 오직 나만이 안다. 나는 각()과 관()을 멸하고 안으로 기쁜 한마음[一心]이 되어 각도 없고 관도 없으며,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定生喜樂]이 있는 제2선에 들어간다. 이것을 현세의 니원이라 한다."

이것이 제3견이다.

 

또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현세의 니원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다시 제일 미묘한 현세의 니원이 있다. 이것은 네가 모르는 것으로 오직 나만이 안다. 나는 염()을 없애고 기쁨을 버리고 즐거움에 머무르며 한마음으로 바른 생각을 가진다. 그리하여 현성께서 말씀하신 몸의 즐거움을 스스로 알아 제3선에 들어간다. 이것을 현세의 니원이라 한다."

이것이 제4견이다.

 

또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현세의 니원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다시 제일 미묘한 현세의 니원이 있다. 이것은 네가 모르는 것으로 오직 나만이 안다. 나는 즐거움도 멸하고 괴로움도 멸하는데, 걱정과 기쁨은 이미 멸하였으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바른 생각으로 청정한 제4선에 들어간다. 이것을 첫째가는 니원이라 한다." 

이것이 제 5견이다.

 

만일 사문 바라문들이 말겁말견(末劫末見)에 대해서 현세의 니원론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5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는데, 그 내용은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諸有沙門婆羅門於末劫末見無數種種隨意所說於四十四見中齊是不過唯佛能知此諸見處亦復如是諸有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末劫末見無數種種隨意所說盡入此六十二見中於本劫本見末劫末見無數種種隨意所說於六十二見中齊此不過唯如來知此見處亦復如是諸有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生常論世間是常彼沙門婆羅門於此生智謂異信異欲異聞異緣異覺異見異定異忍因此生智彼以希現則名爲受乃至現在泥洹亦復如是諸有沙門婆羅門生常論世間是常彼因受緣起愛生愛而不自覺知染著於愛爲愛所伏乃至現在泥洹亦復如是諸有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生常論世間是常彼因觸緣故若離觸緣而立論者無有是處乃至現在泥洹亦復如是諸有沙門婆羅門於本劫本見末劫末見各隨所見說彼盡入六十二見中各隨所見說盡依中在中齊是不過猶如巧捕魚師以細目網覆小池上當知池中水性之類皆入網內無逃避處齊是不過諸沙門婆羅門亦復如是於本劫本見末劫末見種種所說盡入六十二見中齊是不過

 

여러 사문 바라문들이 말겁말견(末劫末見)에 있어서 여러 가지를 마음대로 주장하지만 다 4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이 모든 견처(見處)를 아는데, 그 내용은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이 여러 가지로 무수하게 마음대로 주장하는 본겁본견(本劫本見)과 말겁말견(末劫末見)은 다 이 62견에 들어가고, 여러 가지로 무수하게 마음대로 주장하는 본겁본견(本劫本見)과 말겁말견(末劫末見)62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여래만이 이러한 견해들을 아는데, 그 내용은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본견(本劫本見)에 대해서 상론(常論)을 세워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여기서 지혜를 내는데, 그것은 이른바 다른 믿음다른 욕심다른 들음다른 인연다른 깨달음다른 소견다른 선정[]다른 인식[]이다. 그들은 이것으로 인하여 지혜를 내고는 널리 펴 나타내는데 이것을 곧 이름하여 수()라고 한다. 나아가서는 현세의 니원론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상론을 세워 "세간은 항상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수()의 연을 인하여 애착을 일으키고 애착을 내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해 그만 애착에 물들고 애착에 굴복한다. 나아가서는 현세의 니원론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본견(本劫本見)에 대해서 상론을 세워 "세간은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들이 접촉[]의 인연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접촉의 인연을 떠나서 그런 주장을 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아가서는 현세의 니원론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본견(本劫本見)과 말겁말견(末劫末見)에 있어서 각각 본대로 말하는데, 그것은 다 62견에 들어간다. 각각 그 소견을 따라 말하는 것은 모두 그 가운데 의지하고 그 가운데 들어있어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마치 노련한 어부가 섬세한 그물로 작은 못을 덮은 것과 같다. 마땅히 알라. 못 가운데 있는 모든 고기들은 다 그물 속에 들어가고 피할 곳이 없으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도 또한 그와 같다. 본겁본견(本劫本見)과 말겁말견(末劫末見)에 대한 갖가지 주장은 다 62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

 

 

若比丘於六觸集出要如實而知則爲最勝出彼諸見如來自知生死已盡所以有身爲欲福度諸天人故若其無身則諸天世人無所恃怙猶如多羅樹斷其頭者則不復生佛亦如是已斷生死永不復生

 

만일 비구가 6()의 발생[]소멸[][]허물[]벗어남[出要]에 대해서 여실히 안다면 그것은 곧 가장 뛰어난 것으로서 저들의 모든 소견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여래가 스스로 생사가 이미 다한 것을 알면서도 그 몸을 가지고 있는 까닭은 모든 하늘과 사람을 복되게 하고 제도하기 위함이다. 만일 몸이 없다면 곧 모든 하늘과 세상 사람들은 믿을 곳이 없을 것이다. 마치 다라수(多羅樹)는 한 번 끊어내면 다시는 나지 않는 것처럼 부처도 또한 그와 같이 이미 생사를 끊어 영원히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當佛說此法時大千世界三返六種震動爾時阿難在佛後執扇扇佛偏露右臂長跪叉手白佛言此法甚深當以何名云何奉持

 

부처님께서 이 법을 연설하실 때 대천(大千) 세계는 세 차례나 반복해 여섯 가지로 진동했다.

그 때 아난은 부처님 뒤에서 부채를 들고 부처님을 부쳐드리고 있다가 오른 팔을 드러내고 길게 꿇어앉아 손을 모으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법은 참으로 심오합니다. 마땅히 무엇이라 이름하고 어떻게 받들어 가져야 하겠습니까?”

 

 

佛告阿難當名此經爲義動法動見動魔動梵動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이 경을 이름하여 의동(義動)법동(法動)견동(見動)마동(魔動)범동(梵動)이라 하라.”

 

* 梵動: 해당하는 팔리어는 cra이다. 그런데 한역본 "의동(義動)범동(梵動)"에 해당하는 부분이 팔리본에는 "Attha-jlaBrahma-jla"로 되어 있는데 이를 한역하면 "의망(義網)범망(梵網)"이 되는 셈이다.

 

 

 

 

爾時阿難聞佛所說歡喜奉行

 

그 때 아난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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