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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佛 心***/長阿含經

長阿含經 13. 大緣方便經

by 산산바다 2015. 2. 10.

산과바다

화엄사 대웅전

 

 

 

 

長阿含經

 

13. 大緣方便經 대연방편경

 

 

대연방편경(大緣方便經)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불교의 근본 교의를 말씀하신 것이며 또 이 설명이 되는 중요 교리인 인연법을 순역(順逆) 생멸의 관법에 따라 말씀하신 것이다.

* 大緣方便經의 이역본으로는 후한 시대 안세고가 한역한 불설인본욕생경(佛說人本欲生經)과 송 시대 시호(施護)가 한역한 불설대생의경(佛說大生義經)이 있으며, 같은 내용의 경으로는 중아함경제 2497번째 소경인 대인경(大人經)이 있다.

 

 

如是我聞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一時佛在拘流沙國劫摩沙住處與大比丘眾千二百五十人俱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류사국(拘流沙國)의 겁마사(劫摩沙) 마을에서 큰 비구 대중 1,250명과 함께 계셨다.

 

 

爾時阿難在閑靜處作是念言甚奇甚特世尊所說十二因緣法之光明甚深難解如我意觀猶如目前以何爲深於是阿難即從靜室起至世尊所頭面禮足在一面坐白世尊言我向於靜室默自思念甚奇甚特世尊所說十二因緣法之光明甚深難解如我意觀如在目前以何爲深

 

그 때 아난은 고요한 곳에서 이렇게 생각했다.

"너무도 기이하고 특별하구나. 세존께서 말씀하신 열두 가지 인연법의 광명은 매우 깊어 알기 어렵구나. 그러나 내가 마음속으로 관찰해 보니 마치 눈앞에 있는 일과 같은데 무엇 때문에 깊은 이치가 있다고 하는가?"

그렇게 생각한 아난은 곧 고요한 곳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나아갔다.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 세존께 여쭈었다.

저는 아까 조용한 방에서 잠자코 혼자 생각하기를 "참으로 기이하고 특별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열두 가지 인연법의 광명은 매우 깊어 알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마음속으로 관찰해 보니 마치 눈앞에 있는 일과 같은데 무엇 때문에 깊다고 하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爾時世尊告阿難曰勿作此言十二因緣法之光明甚深難解阿難此十二因緣難見難知諸天沙門婆羅門未見緣者若欲思量觀察分別其義者則皆荒迷無能見者阿難我今語汝老死有緣若有問言何等是老死緣應答彼言生是老死緣若復問言誰是生緣應答彼言有是生緣若復問言誰是有緣應答彼言取是有緣若復問言誰是取緣應答彼言愛是取緣若復問言誰是愛緣應答彼言受是愛緣若復問言誰是受緣應答彼言觸是受緣若復問言誰爲觸緣應答彼言六入是觸緣若復問言誰爲六入緣應答彼言名色是六入緣若復問言誰爲名色緣應答彼言識是名色緣若復問言誰爲識緣應答彼言行是識緣若復問言誰爲行緣應答彼言癡是行緣阿難如是緣癡有行緣行有識緣識有名色緣名色有六入緣六入有觸緣觸有受緣受有愛緣愛有取緣取有有緣有有生緣生有老苦惱大患所集是爲此大苦陰緣

 

그 때 세존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만두라, 그만두라.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아난아,

이 열두 가지 인연법의 광명은 너무도 심오하며 이해하기 어렵다.

 

아난아,

이 열두 가지 인연법은 보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렵다.

 

모든 하늘악마범천사문 바라문으로서 아직 인연법에 대하여 관찰하지 못한 자가 만일 생각으로 헤아려보고[思量] 관찰하여 그 이치를 분별하려고 한다면 곧 정신이 아득하여 관찰해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난아, 내가 이제 너에게 말해 주겠다.

 

늙고 죽음에는 연(外緣)이 있다.

만일 누가 "무엇이 늙고 죽는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이 늙고 죽음[老死]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어떤 것이 생의 연인가" 하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존재)가 생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유의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가 유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취의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가 취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애의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가 애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수의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이 수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촉의 연인가?"하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6()이 촉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6입의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명색(名色)6입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명색의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이 명색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식의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이 식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행의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가 행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아난아,

이와 같이 치()를 연(外緣)으로 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으로 하여 식()이 있으며, 식을 연으로 하여 명색이 있고 명색을 연으로 하여 6입이 있으며, 6입을 연으로 하여 촉이 있고 촉을 연으로 하여 수가 있으며, 수를 연으로 하여 애가 있고 애를 연으로 하여 취가 있으며, 취를 연으로 하여 유가 있고 유를 연으로 하여 생이 있으며, 생을 연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과 걱정과 슬픔과 고뇌 등 큰 근심[]의 덩어리가 있다. 이것이 큰 고음(苦陰)의 연이 된다.”

 

 

佛告阿難緣生有老死此爲何義若使一切眾生無有生者寧有老死不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생을 연으로 하여 늙고 죽음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이 생이 없다면 그래도 늙음과 죽음이 있겠느냐?”

 

 

阿難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是故阿難以此緣知老死由生緣生有老死我所說者義在於此

그러므로 아난아,

이 연법(緣法)을 통해서 늙음과 죽음은 생으로 인하여 생기고 생을 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又告阿難緣有有生此爲何義若使一切眾生無有欲有色無色有者寧有生不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유를 연하여 생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이 욕유(欲有欲界)색유(色有色界)무색유(無色有無色界)가 없다면 그래도 생이 있겠느냐?”

* 욕유 색유 무색유 세 가지를 3()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유()란 나고 죽음의 과보이다. 욕유란 욕계의 생사(生死)이고, 색유란 색계의 생사이며, 무색유란 무색계의 생사를 말한다.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我以此緣知生由有緣有有生我所說者義在於此

아난아,

나는 이러한 연법을 통해서 생은 유로 인하여 생겨나고 유를 연하여 생이 있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又告阿難緣取有有此爲何義若使一切眾生無有欲取見取戒取我取者寧有有不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취를 연하여 유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욕취(欲取)견취(見取)계취(戒取)아취(我取)가 없다면 그래도 유가 있겠느냐?”

* 네 가지를 4()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취()란 집착을 뜻한다. 욕취란 욕계에서 5욕의 대상 경계에 대하여 일으키는 탐욕의 집착이고, 견취란 잘못된 견해를 진실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계취란 정인정도(正因正道)가 아닌 것을 정인정도라고 집착하는 것이고, 아취란 자기의 말에 대하여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我以此緣知有由取緣取有有我所說者義在於此

아난아,

나는 이러한 연법을 통하여 유는 취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고 취를 연하여 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又告阿難緣愛有取此爲何義若使一切眾生無有欲愛有愛無有愛者寧有取不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애를 연하여 취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욕애(欲愛)유애(有愛)무유애(無有愛)가 없다면 그래도 취가 있겠느냐?”

 

 

答曰無有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我以此緣知取由愛緣愛有取我所說者義在於此

아난아,

나는 이러한 연법을 통해서 취는 애로부터 생겨나고 애를 연하여 취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又告阿難緣受有愛此爲何義若使一切眾生無有樂受苦受不苦不樂受者寧有愛不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수를 연하여 애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낙수(樂受)고수(苦受)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가 없다면 그래도 애가 있겠느냐?”

* 세 가지를 3()라 하는데, 여기에서 수()란 감각 즉 느낌이라는 뜻이다. 낙수란 바깥 경계와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즐거움의 느낌이고, 고수란 바깥 경계와의 접촉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에 느끼는 괴로움이며, 불고불낙수란 고수와 낙수에 속하지 않는, 즉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말한다.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我以此緣知愛由受緣受有愛我所說者義在於此阿難當知因愛有求因求有利因利有用因用有欲因欲有著因著有嫉因嫉有守因守有護阿難由有護故有刀杖諍訟作無數惡我所說者義在於此阿難此爲何義若使一切眾生無有護者當有刀杖諍訟起無數惡不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해서 애는 수로부터 생겨나고 수를 연하여 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마땅히 알라.

()를 인하여 구함[]이 있고

구함을 인하여 이익[]이 있고

이익을 인하여 씀[]

있고 씀을 인하여 욕심[]이 있고

욕심을 인하여 집착[]이 있고

집착을 인하여 질투[]가 있고

질투를 인하여 지킴[]이 있고

지킴을 인하여 보호[]가 있다.

 

아난아,

보호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칼과 막대기와 다툼[諍訟]이 있어 무수한 악을 짓는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보호함[]이 없게 한다면 그래도 칼과 막대기와 다툼[靜訟]이 있어 무수한 악을 일으키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是故阿難以此因緣知刀杖諍訟由護而起緣護有刀杖諍訟阿難我所說者義在於此

그러므로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하여 칼과 막대기와 다툼은 보호로부터 일어나고 보호를 연하여 칼과 막대기와 다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난아,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又告阿難因守有護此爲何義若使一切眾生無有守者寧有護不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지킴[]을 인하여 보호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지킴이 없게 한다면 그래도 보호가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我以此緣知護由守因守有護我所說者義在於此阿難因嫉有守此爲何義若使一切眾生無有嫉者寧有守不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해서 보호는 지킴으로부터 생겨나고 지킴을 인하여 보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질투[]로 말미암아 지킴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질투를 없게 한다면 그래도 지킴이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我以此緣知守由嫉因嫉有守我所說者義在於此阿難因著有嫉此爲何義若使一切眾生無有著者寧有嫉不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해서 지킴은 질투로부터 생겨나고 질투를 연하여 지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집착[]으로 인하여 질투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집착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질투가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我以此緣知嫉由著因著有嫉我所說者義在於此阿難因欲有著此爲何義若使一切眾生無有欲者寧有著不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해서 질투는 집착으로부터 생겨나고 집착을 연하여 질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욕심[]으로 인하여 집착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욕심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집착이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我以此緣知著由欲因欲有著我所說者義在於此阿難因用有欲此爲何義若使一切眾生無有用者寧有欲不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해서 집착은 욕심으로부터 생겨나고 욕심을 연하여 집착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하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씀[]을 인하여 욕심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씀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욕심이 생기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我以此義知欲由用因用有欲我所說者義在於此阿難因利有用此爲何義若使一切眾生無有利者寧有用不

 

아난아,

나는 이런 이치를 통해서 욕심은 씀으로부터 생겨나고 씀을 연하여 욕심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이익[]을 인하여 씀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이익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씀이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我以此義知用由利因利有用我所說者義在於此阿難因求有利此爲何義若使一切眾生無有求者寧有利不

아난아,

나는 이런 이치를 통해서 씀은 이익으로부터 생겨나고 이익을 연하여 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구함[]을 인하여 이익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구함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이익이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我以此緣知利由求因求有利我所說者義在於此阿難因愛有求此爲何義若使一切眾生無有愛者寧有求不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해서 이익은 구함으로부터 생겨나고 구함을 연하여 이익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를 인하여 구함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애를 없게 한다면 그래도 구함이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我以此緣知求由愛因愛有求我所說者義在於此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해서 구함은 애()로부터 생겨나고 애를 인하여 구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又告阿難因愛有求至於守護受亦如是因受有求至於守護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애를 인하여 구함이 있다. 이리하여 지키고[] 보호함[]에 이르기까지의 이치도 마찬가지이며, ()도 또한 그와 같아서 수를 인하여 구함이 있으며, 나아가 지키고[] 보호함[]에 이르기까지의 이치도 마찬가지이다.”

 

 

佛告阿難緣觸有受此爲何義阿難若使無眼無色無眼識者寧有觸不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을 연하여 수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아난아, 만일 눈이 없고 빛이 없고 눈의 인식작용[眼識]이 없다면 그래도 촉이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若無耳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者寧有觸不

만일 귀소리귀의 인식작용과 코냄새코의 인식작용과 혀혀의 인식작용과 몸닿임몸의 인식작용과 뜻뜻의 인식작용이 없다면 그래도 촉이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은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若使一切眾生無有觸者寧有受不

아난아,

만일 일체 중생들에게 촉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수가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我以是義知受由觸緣觸有受我所說者義在於此阿難緣名色有觸此爲何義若使一切眾生無有名色者寧有心觸不

아난아,

나는 이 이치를 통하여 수는 촉으로부터 생겨나고 촉을 연하여 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하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명색(名色)을 연하여 촉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중생에게 명색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마음의 감촉이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若使一切眾生無形色相貌者寧有身觸不

만일 일체 중생에게 형색(形色)과 모형[相貌]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몸의 감촉이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若無名色寧有觸不

아난아,

만일 명색이 없다면 그래도 감촉이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我以是緣知觸由名色緣名色有觸我所說者義在於此阿難緣識有名色此爲何義若識不入母胎者有名色不

아난아,

나는 이 연법(緣法)을 통해서 촉은 명색으로부터 생겨나고 명색을 연하여 촉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하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식()이 모태(母胎)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래도 명색이 생길 수 있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若識入胎不出者有名色不

만일 식이 모태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는다면 그래도 명색이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若識出胎嬰孩壞敗名色得增長不

만일 식이 태에서 나와 어린아이 때 없어지고 만다면 그래도 명색이 자라날 수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若無識者有名色不

아난아,

만일 식이 없다면 그래도 명색이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我以是緣知名色由識緣識有名色我所說者義在於此阿難緣名色有識此爲何義若識不住名色則識無住處若無住處寧有生苦惱不

아난아,

이 연법을 통해서 나는 명색은 식으로부터 생겨나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명색을 연하여 식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식이 명색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곧 식이 머무를 곳이 없을 것이다. 만일 식이 머무를 곳이 없다면 그래도 생사와 우뇌가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若無名色寧有識不

아난아,

만일 명색이 없다면 그래도 식이 있겠느냐?”

 

 

答曰無也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阿難我以此緣知識由名色緣名色有識我所說者義在於此阿難是故名色緣識識緣名色名色緣六入六入緣觸觸緣受受緣愛愛緣取取緣有有緣生生緣老苦惱大苦陰集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해서 식은 명색으로부터 생겨나고 명색을 연하여 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명색은 6()을 연()하고 6입은 촉을 연하고 촉은 수를 연하고 수는 애를 연하고 애는 취를 연하고 취는 유를 연하고 유는 생을 연하고 생은 노뇌의 큰 고음의 쌓임[大苦陰集]을 연한다.

 

 

阿難齊是爲語齊是爲應齊是爲限齊此爲演說齊是爲智觀齊是爲眾生阿難諸比丘於此法中如實正觀無漏心解脫阿難此比丘當名爲慧解脫如是解脫比丘如來終亦知如來不終亦知如來終不終亦知如來非終非不終亦知何以故阿難齊是爲語齊是爲應齊是爲限齊是爲演說齊是爲智觀齊是爲眾生如是盡知已無漏心解脫比丘不知不見如是知見阿難夫計我者齊幾名我見名色與受俱計以爲我有人言受非我我是受或有言受非我我非受受法是我或有言受非我我非受受法非我但愛是我

 

아난아,

이렇게 가지런하게 말하고 가지런하게 대답하고 가지런하게 한계를 짓고 가지런하게 연설하고 가지런하게 지혜로 관찰[智觀]하고 가지런하게 중생을 위하느니라.

 

아난아,

모든 비구는 이 법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를 바르게 관찰하여 번뇌가 없어진 마음의 해탈[心解脫]을 얻으면 아난아, 이 비구는 마땅히 지혜의 해탈[慧解脫]을 얻었다고 한다. 이렇게 마음의 해탈을 증득한 비구는 여래의 마지막도 알고 여래의 마지막이 아닌 것도 알며, 여래의 마지막과 마지막 아닌 것도 알고, 여래의 마지막 아닌 것과 마지막 아님이 아닌 것도 안다.

 

무슨 까닭인가?

아난아,

이렇게 가지런하게 말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대답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한계를 짓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지혜로 관찰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 알아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을 얻은 비구는 알지도 않고 보지도 않으며 다만 이렇게 알고 볼 뿐이다.

 

아난아,

[]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모두를 거의 아견(我見)이라고 하고 명색(名色)과 수()를 다 나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는 나가 아니고 나라는 것이 수이다"라고 말하고, 혹 어떤 사람은 "수는 나가 아니요, 나라는 것이 수도 아니며, 수법(受法)이 곧 나이다"라고 하기도 하고, 혹 어떤 사람은 "()도 나라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것도 수가 아니며, 수법도 나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애()가 나이다"라고 하기도 한다.

 

 

阿難彼見我者言受是我當語彼言如來說三受樂受苦受不苦不樂受當有樂受時無有苦受不苦不樂受有苦受時無有樂受不苦不樂受有不苦不樂受時無有苦受樂受所以然者阿難樂觸緣生樂受若樂觸滅受亦滅阿難苦觸緣生苦受若苦觸滅受亦滅不苦不樂觸緣生不苦不樂受若不苦不樂觸滅受亦滅阿難如兩木相攢則有火生各置異處則無有火此亦如是因樂觸緣故生樂受若樂觸滅受亦俱滅因苦觸緣故生苦受若苦觸滅受亦俱滅因不苦不樂觸緣生不苦不樂受若不苦不樂觸滅受亦俱滅阿難此三受有爲無常從因緣生盡法滅法爲朽壞法彼非我有我非彼有當以正智如實觀之阿難彼見我者以受爲我彼則爲非

 

아난아,

저 나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이 "수가 바로 나이다"라고 하거든 너는 마땅히 그들에게 "여래께서 고수(苦受)낙수(樂受)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이 세 가지 수()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낙수가 있을 때는 고수와 불고불낙수는 있을 수 없고, 고수가 있을 때는 낙수와 불고불낙수는 있을 수 없으며, 불고불낙수가 있을 때는 고수와 낙수는 있을 수 없다고 하셨다"라고 말하라. 왜냐 하면 아난아, 낙촉(樂觸)을 연으로 하여 낙수(樂受)가 생겨나나니, 만일 낙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하기 때문이다.

 

아난아,

고촉(苦觸)을 연으로 하여 고수가 생겨나나니, 만일 고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한다. 불고불락촉을 연으로 하여 불고불락수가 생겨나나니, 만일 불고불락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한다.

 

아난아,

비유하면 마치 두 개의 나무를 서로 비비면 곧 불이 일어나지만 각각 딴 곳에 두면 불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이것도 또한 그와 같다. 낙촉을 연으로 하여 낙수가 생겨나는 것이므로 만일 낙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한다. 고촉을 연으로 하여 고수가 생겨나는 것이므로 만일 고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한다. 불고불락촉을 연으로 하여 불고불락수가 생겨나는 것이므로 만일 불고불락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한다.

 

아난아,

이 세 가지 수()는 작용이 있는 것[有爲]이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 아니고 연을 따라 생겨나나니, 다하는 법이요 멸하는 법이요 썩어 무너지는 법이다. 저것들은 나의 소유도 아니요 나 또한 저것의 소유가 아니다. 마땅히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그것을 관찰하라. 아난아 저들이 나[]라는 견해를 가지는 것은 수()를 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잘못이다.

 

 

阿難彼見我者言受非我我是受者當語彼言如來說三受苦受樂受不苦不樂受若樂受是我者樂受滅時則有二我此則爲過若苦受是我者苦受滅時則有二我此則爲過若不苦不樂受是我者不苦不樂受滅時則有二我此則爲過阿難彼見我者受非我我是受彼則爲非阿難彼計我者作此說受非我我非受受法是我當語彼言一切無受汝云何言有受法汝是受法耶對曰非是是故阿難彼計我者受非我我非受受法是我彼則爲非

 

아난아,

저 나라는 것이 있다고 보는 사람이 "수는 나가 아니고 나라는 것이 수이다"라고 말하거든 너는 마땅히 그에게 "여래께서 고수낙수불고불락수 이 세 가지 수()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만일 낙수가 나라면 낙수가 멸할 때에는 곧 두 개의 나라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잘못이다. 만일 고수가 나라면 고수가 멸할 때에는 곧 두 개의 나라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도 잘못이다. 만일 불고불락수가 나라면 불고불락수가 멸할 때에는 곧 두 개의 나라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도 잘못이다"라고 말하라. 아난아, 저 나라는 것이 있다고 보는 자가 "수는 나가 아니요, 나라는 것이 곧 수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잘못이다.

 

아난아,

저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수는 나가 아니고 나라는 것은 수도 아니며, 수법(受法)이 나이다"라고 말하거든 너는 마땅히 그에게 "모든 것에는 수가 없는데 너는 어떻게 수법이 있다고 하는가? 네가 바로 수법이냐?" 하고 말하라. 그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저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수는 나가 아니요, 나는 수도 아니며, 수법이 곧 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阿難彼計我者作是言受非我我非受受法非我但愛是我當語彼言一切無受云何有愛汝是愛耶對曰非也是故阿難彼計我者受非我我非受受法非我愛是我彼則爲非阿難齊是爲語齊是爲應齊是爲限齊是爲演說齊是爲智觀齊是爲眾生阿難諸比丘於此法中如實正觀於無漏心解脫阿難此比丘當名爲慧解脫如是解脫心比丘有我亦知無我亦知有我無我亦知非有我非無我亦知何以故阿難齊是爲語齊是爲應齊是爲限齊是爲演說齊是爲智觀齊是爲眾生如是盡知已無漏心解脫比丘不知不見如是知見

 

아난아,

저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수는 나가 아니요, 나는 수도 아니며, 수법도 나가 아니다. 오직 애()가 나이다"라고 말하거든, 너는 그에게 "모든 것은 수가 없는데 어떻게 애가 있겠느냐? 네 자신이 곧 애이냐?"라고 말하라. 그러면 그는 "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저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수는 나가 아니요, 나도 수가 아니며, 수법도 나가 아니다. 애가 바로 나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곧 잘못이다.

 

아난아,

이렇게 가지런하게 말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대답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한계를 짓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연설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지혜로 관찰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중생을 위하느니라. 아난아, 모든 비구는 이 법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를 바르게 관찰하여 번뇌가 없어진 마음의 해탈을 얻으면 아난아, 이 비구는 마땅히 지혜의 해탈을 얻었다고 한다. 이렇게 마음의 해탈을 증득한 비구는 나[]라는 것이 있는 것도 알고 나라는 것이 없는 것도 알며, 나라는 것이 있는 동시에 나라는 것이 없는 것도 알고, 나라는 것이 있지도 않고 나라는 것이 없지도 않은 것도 또한 안다. 무슨 까닭인가? 아난아, 이렇게 가지런하게 말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대답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한계를 짓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지혜로 관찰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 알아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을 얻은 비구는 알지도 않고 보지도 않으며 다만 이렇게 알고 볼 뿐이다.”

 

 

佛語阿難彼計我者齊已爲定彼計我者或言少色是我或言多色是我或言少無色是我或言多無色是我阿難彼言少色是我者定少色是我我所見是餘者爲非多色是我者定多色是我我所見是餘者爲非少無色是我者定言少無色是我我所見是餘者爲非多無色是我者定多無色是我我所見是餘者爲非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저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똑같이 모두 결정적으로 말한다. 저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혹은 소량[少量]의 색()을 나라고 하고 혹은 무량[無量]의 색을 나라고 한다. 혹은 소량의 무색(無色)을 나라고 하고 혹은 무량의 무색을 나라고 한다.

 

아난아,

저 소량의 색을 나라고 하는 자는 "소량의 색이 나이다. 내가 보는 것은 옳고 다른 이가 보는 것은 그르다"고 단정하여 말한다. 무량의 색을 나라고 하는 자도 무량의 색을 나라고 하여 내가 보는 것은 옳고 남이 보는 것은 그르다고 한다. 소량의 무색을 나라고 하는 자도 소량의 무색을 나라고 하며 내가 보는 것은 옳고 남이 보는 것은 그르다고 하며, 무량의 무색을 나라고 하는 자도 무량의 무색을 나라고 하여 내가 보는 것은 옳고 남이 보는 것은 그르다고 한다.”

 

 

佛告阿難七識住二入處諸有沙門婆羅門言此處安隱爲救爲護爲舍爲燈爲明爲歸爲不虛妄爲不煩惱云何爲七或有眾生若干種身若干種想天及人此是初識住處諸沙門婆羅門言此處安隱爲救爲護爲舍爲燈爲明爲歸爲不虛妄爲不煩惱阿難若比丘知初識住知集知滅知味知過知出要如實知者阿難彼比丘言彼非我我非彼如實知見或有眾生若干種身而一想梵光音天是或有眾生一身若干種想光音天是或有眾生一身一想遍淨天是或有眾生住空處或有眾生住識處或有眾生住不用處是爲七識住處或有沙門婆羅門言此處安隱爲救爲護爲舍爲燈爲明爲歸爲不虛妄爲不煩惱阿難若比丘知七識住知集知滅知味知過知出要如實知見彼比丘言彼非我我非彼如實知見是爲七識住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7식주(識住)2입처(入處)에 대해서 모든 사문 바라문은 "이곳은 안온하여 구제가 되고 보호가 되며 집이 되고 등불이 되며 밝음이 되고 귀의처가 되며 허망하지 않고 번뇌가 없는 곳이다"라고 말한다.

 

*識住: 과보를 따라 생()을 받아 태어나서 그 세계에 머무는 것을 그 심식(心識)이 좋아하는 일곱 가지 처소.

*入處: 안주하는 두 곳. 즉 무상입(無想入)과 비상비무상입(非想非無想入)을 말한다.

 

어떤 것을 일곱 가지라고 하는가?

어떤 중생은 몸도 각각 다르고 생각도 각각 다른데 곧 하늘과 사람 세계가 그것이니, 이것이 초식주(初識住)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이곳은 안온하여 구제가 되고 보호가 되며 집이 되고 등불이 되며 밝음이 되고 귀의처가 되며 허망하지 않고 번뇌가 없는 곳이다"라고 말한다. 아난아, 만일 비구로서 초식주를 알되 그 원인을 알고 그 멸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허물[初識住過患]을 알고 그 벗어나는 방법을 알면 그는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되리라. 아난아, 그 비구는 "저는 나라는 것이 아니요 나도 저라는 것이 아니다. 진실 그대로를 보아 안다"고 말하리라

 

어떤 중생은 몸은 각각 다르나 생각은 한가지인데 각기 다르니 범광음천(梵光音天)이 그것이며, 어떤 중생은 몸은 같으나 생각은 각기 다르니 광음천(光音天)이 그것이다. 어떤 중생은 몸도 같고 생각도 같은데 변정천(遍淨天)이 그것이며, 어떤 중생은 공처(空處)에 머물고 어떤 중생은 식처(識處)에 머물며, 어떤 중생은 불용처(不用處)에 머무르나니 이것을 7식주처라고 한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곳은 안온하여 구제가 되고 보호가 되며 집이 되고 등불이 되며 밝음이 되고 귀의처가 되며 허망하지 않고 번뇌가 없는 곳이다"라고 말한다.

 

아난아,

만일 비구로서 7식주를 알되 그 원인을 알고 그 멸을 알고 그 맛을 알며 그 허물을 알고 그 벗어나는 방법을 알면 그는 진실 그대로를 알고 보게 되리라. 그 비구는 "저는 나[]가 아니요 나도 저가 아니다. 사실 그대로를 알고 볼 뿐이다"라고 말하리니, 이것이 7식주이다.

 

 

云何二入處無想入非想非無想入是爲阿難此二入處或有沙門婆羅門言此處安隱爲救爲護爲舍爲燈爲明爲歸爲不虛妄爲不煩惱阿難若比丘知二入處知集知滅知味知過知出要如實知見彼比丘言彼非我我非彼如實知見是爲二入

 

어떤 것이 2입처(入處)인가?

무상입(無想入)과 비상무상입(非想無想入)이 그것이다. 어떤 사문 바라문이 "이곳은 안온하여 구제가 되고 보호가 되며 집이 되고 등불이 되며 밝음이 되고 귀의처가 되며 허망하지 않고 번뇌가 없는 곳이다"라고 말한다. 아난아, 만일 비구로서 2입처를 알되 그 원인을 알고 그 멸을 알며 그 맛을 알고 그 허물을 알며 벗어나는 방법을 알면 그는 사실 그대로를 알고 사실 그대로를 보게 되리라. 그 비구는 "저는 나가 아니요 나도 저가 아니다. 사실 그대로를 알고 볼 뿐이다"라고 말하리니, 이것이 2입처이다.

 

 

阿難復有八解脫云何八色觀色初解脫內無色想觀外色二解脫淨解脫三解脫度色想滅有對想不念雜想住空處四解脫度空處住識處五解脫度識處住不用處六解脫度不用處住有想無想處七解脫滅盡定八解脫阿難諸比丘於此八解脫逆順遊行入出自在如是比丘得俱解脫

 

아난아,

8해탈이 있다.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에 대하여 색으로 관하는 것이 첫 번째 해탈이고,

마음속으로 색()을 생각하여 바깥의 색을 관하는 것이 두 번째 해탈이며,

깨끗한 것을 관하여 해탈하는 것이 세 번째 해탈이요,

색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상대가 있다는 생각[有對想]을 멸하고 잡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공처에 머무르는 것이 네 번째 해탈이다.

공처(空處)를 초월하여 식처에 머무르는 것이 다섯 번째 해탈이고,

색처(色處)를 초월하여 불용처(不用處)에 머무르는 것이 여섯 번째 해탈이며,

불용처를 초월하여 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에 머무르는 것이 일곱 번째 해탈이고,

멸진정(滅盡定)이 여덟 번째 해탈이다.

 

아난아,

모든 비구가 이 여덟 가지 해탈에서 역순으로 노닐면서 드나들기를 자재로이 한다면 그러한 비구는 구해탈(俱解脫)을 얻는다.”

 

 

爾時阿難聞佛所說歡喜奉行

그 때 아난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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