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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거이(白居易)의 삶과 詩

by 산산바다 2012.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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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居易의 삶과 詩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자는 낙천(樂天), 만년에는 호를 취음선생(醉吟先生) 또는 향산거사(香山居士)라 하였다. 그의 이름 거이(居易)는 중용(中庸)의 군자는 편안한 위치에 서서 천명을 기다린다(君子居易以俟命)는 말에서 취했고, 그의 자 낙천(樂天)은 역(易)·계사(繫辭)의 천명을 즐기고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樂天知命故不憂)는 말에서 취했다.

천명에 순응하고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행하는(順天與素位而行) 유가의 처세사상 이 그의 이름과 자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백거이는 당(唐) 대종(代宗) 대력(大曆) 7년(722) 정월 20일에 정주(鄭州) 신정현(新鄭縣)에서 계당(季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관한 자료는 구당서(舊唐書) 권166 백거이전(白居易傳), 신당서(新唐書) 권119 백거이전,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백거이의 집안은 비록 명문귀족은 아니었지만 대대로 학문을 하며 관리를 지내온 학자집안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출생한지 6~7개월만에 비록 말은 못하였지만 무(無)자와 지(之)자를 구별할 수 있었으며, 5~6세 때에 시 짓는 법을 배우고, 9세에 성운을 알았으며, 15~16세에 진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정원(貞元) 3년(16세)에 그는 장안(長安)에 가서 대시인 고황(顧況)의 현실주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지도를 받고, 부득고원초송별(賦得古原草送別)이라는 시로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정원 10년(23세)에 그의 부친이 양주(襄州)에서 세상을 떠난 후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정원 16년(29세)에 비로소 고영(高郢)이 주관한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관리로 진출하였다. 그후 그는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 32세)을 거쳐, 원화(元和) 원년(35세)에 원진(元稹)과 함께 제책(制策) 시험에 응시, 4등으로 합격하여(원진은 3등) 주질현위(盩厔縣尉)에 임명되었다.(원진은 좌습유 左拾遺) 이해 겨울 12월에 유명한 <장한가(長恨歌)>를 지었다.

원화 2년(36세, 807)에는 황제의 부름을 받아 집현교리(集賢校理),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4월에는 황제를 가까이 모시면서 백관을 탄핵하고 황제에게 간언을 올리는 좌습유(左拾遺)에 임명되어 신하된 임무를 다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때부터 강주(江州)로 좌천되기 전까지 그는 어려운 백성들의 편에 서서 곤궁에 처해있던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고 조정의 부패를 폭로하는 풍유시(諷諭詩)를 많이 썼다.

전술한 바와 같이 문인으로서 그는 단번에 고위관직에 올라 영화로운 지위에 이를 수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경력은 문인의 생애 중에서 상당히 보기 드문 경우에 속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그가 소년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좌절하지 않고 각고의 인내로써 노력한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 개혁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새로운 인사제도로 그처럼 빈천한 신분 출신의 인사들도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새로운 인사제도는 구관료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되어 신구 관료 간에 빈번한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백거이는 풍유시로 인한 구관료들의 반발을 견디지 못하고 무원형(武元衡) 사건으로 간관(諫官) 보다 먼저 상소했다는 것 등을 이유로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유명한 <비파행(琵琶行)>은 바로 이때 지은 것이다.

그 후 충주자사(忠州刺史, 원화 13년, 47세), 상서사문원외랑(尙書司門員外郞, 원화 15년 49세), 조산대부(朝散大夫, 장경 원년, 50세), 항주자사(杭州刺史, 장경 2년, 51세), 소주자사(蘇州刺史, 장경 5년, 54세), 비서감(秘書監, 대화 원년, 57세), 형부시랑(刑部侍郞, 대화 2년, 57세), 태자소부(太子少傅, 대화 9년, 64세) 등을 역임하다가, 회창(會昌) 2년 71세 때 병으로 태자소부를 사임하고 그의 생애 최고 벼슬인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오른 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그는 나이의 노쇠와 정치적 실망, 불교의 영향 등으로 은둔생활을 하다가 개성(開城) 4년(68세) 겨울에 중풍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하면서 향산사(香山寺)의 승려인 여만대사(如滿大師)와 향화사(香火寺)를 짓고 스스로 호를 향산거사(香山居士)라 하였다.

이듬해 목종(穆宗) 회창 6년(844) 8월에 중풍이 재발하여 낙양(洛陽) 이도리(履道里)에서 한적한 시간을 보내다가 시주(詩酒)와 탄금(彈琴), 참선으로 조생히 일생을 마치니 그의 나이 향년 75세였다.

 

新製布裘(신제포구) 새로 지은 겨울옷을 입고 / 白居易(백거이)

 

桂布白似雪(계포백사설) 계림에서 나는 무명베는 눈처럼 하얗고,

吳綿軟于雲(오면연우운) 소주의 비단 솜은 구름같이 부드럽다네.

布重綿且厚(포중면차후) 좋은 베에 부드러운 솜 두텁게 넣어,

爲裘有餘溫(위구유여온) 겨울옷 만드니 넉넉히도 따습구나.

朝擁坐至暮(조옹좌지모) 아침에 입고서는 저녁까지 껴 앉고,

夜覆眠達晨(야복면달신) 야밤에 덮고서는 새벽까지 잠 잘 든다.

誰知嚴冬月(수지엄동월) 그 누가 알리오! 이렇게 매서운 겨울에,

肢體暖如春(지체난여춘) 온몸 사지육신이 봄처럼 따뜻함을!

中夕忽有念(중석홀유념) 한밤중 문득 떠오른 생각 있어,

撫裘起逡巡(무구기준순) 일어나 겨울옷 어루만지며 서성거린다.

丈夫貴兼濟(장부귀겸제) 사나이 대장부 세상 구제하는 일 귀히 여겨,

豈獨善一身(개독선일신) 어찌 이내 한 몸만 위할 소냐?

安得萬里裘(안득만리구) 어찌하면 만리를 덮을 수 있는 큰 옷 구하여,

蓋裹周四垠(개과주사은) 천지사방을 두루 감쌀 수가 있을까.

穩暖皆如我(온난개여아) 모두들 나처럼 편안하고도 따뜻하여,

天下無寒人(천하무한인) 온 세상사람 모두 추위에 떠는 이 없이 할까나!

 

그는 당시로서는 장수에 속하는 75세를 일기로 한 바와 같이 그의 작품세계도 대단히 다양하여 젊어서는 유가적 이상사회사상에 입각하여 당시 사회의 병폐를 예리하게 파헤친 사회고발시를 많이 썼고, 중년에는 취음선생이라는 그의 호에서도 나타나듯 무위자연의 도가사상 심취하여 전원자연시를 즐겨 썼으며, 말년에는 불가에 귀의(향산거사)하여 당시의 불교탄압정책을 풍자한 글을 많이 남겼다.

그의 시는 생전에 이미 널리 애송되어 그의 시를 모르는 당나라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한다. 작품집으로 (白氏長慶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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