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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樂天 白居易 詩

백거이의 비파행

by 산산바다 2011. 4. 14.

산과바다

 

당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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琵琶行 幷序              

元和十年, 予左遷九江郡司馬. 明年秋, 送客湓浦口. 聞舟中夜彈琵琶者, 聽其音錚錚然有京都聲. 問其人, 本長安倡女. 嘗學琵琶於穆曹二善才, 年長色衰, 委身爲賈人婦. 遂命酒, 使快彈數曲. 曲罷憫然. 自敍少小時歡樂事, 今漂淪憔悴, 轉徒於江湖間. 予出官二年, 恬然自安, 感斯人言, 是夕始覺有遷謫意. 因爲長句, 歌以贈之, 凡六百一十二言, 命曰 <琵琶行>.

 

琵琶行을 지으며 序文을 쓰다

원화 10 년에 나는 구강군사마로 좌천되었다. 다음해 가을 손님을 배웅하러 분포강(湓浦江) 포구에 나갔다가, 배 속에서 비파 타는 소리를 들었다. 쟁쟁(錚錚)하게 울리는 그 소리를 들으니 전에 서울(京都)에서 듣던 소리였다. 그 사람을 찾아보니 원래 장안에서 노래하던 여자였는데, 일찍이 유명한  穆, 曹 두 선생에게서 비파를 배운 비파의 고수였다고 한다.

나이 들어 모습이 쇠퇴하게 되자 장사꾼에게 시집가서 의지하게 된 것이라 한다. 끝내 술상을 차리게 하고 몇 곡 청해 들었는데, 연주를 끝내고 참담해 졌다. 젊고 예뻤을 시절엔 웃고 즐기기만 하다가 이제는 시골구석으로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고.

나(백거이)도 이 시골로 쫓겨 온지 2년,  스스로 편안하게 마음먹으려 했지만, 오늘 밤 이 여인의 말에 끝내 감격해서 비로소 멀리 귀양살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긴 長句의 노래를 지어 이 여인에게 보낸다. 모두 612 字인데, <琵琶行> 이라 부른다.

 

향비파

 

琵琶行  비파에 붙여 - 白居易

 

*88句 616言

 

제1단 심양강 나루에 울려 퍼진 천하절창 비파소리

潯陽江頭夜送客   심양강 나루에서 밤에 손을 보내자니

楓葉荻花秋瑟瑟   단풍잎 갈대꽃에 가을바람 쓸쓸하다

主人下馬客在船   주인은 말에서 내리고 손은 배에 타면서

擧酒欲飮無管絃   술을 들어 마시려니 음악이 없구나.

 

醉不成歡慘將別   취해도 즐거움 없이 아픈 이별을 하려하니

別時茫茫江浸月   이별할 적, 아득한 강엔 달이 잠겨 있네.

忽聞水上琵琶聲   그 때 물 위로 비파 소리 들려오니

主人忘歸客不發   주인은 돌아갈 줄 모르고 손님은 출발을 잊고.

 

尋聲暗問彈者誰   소리 찾아 조용히 타는 이 누구인지 물으니

琵琶聲停欲語遲   비파소리 그치고 느릿느릿 말하더라.

移船相近邀相見   배를 옮겨 가까이가 자리를 청하며

添酒回燈重開宴   술 따르고 등 밝혀 술자리를 다시 폈네.

 

千呼萬喚始出來   부르고 또 청해 겨우 나타났는데

猶抱琵琶半遮面   비파 안고 얼굴을 반쯤 가리더라

轉軸撥絃三兩聲   축 돌려 현을 골라 두어 번 소리 내니

未成曲調先有情   곡조도 이루기 전 정 먼저 품었구나

 

絃絃掩抑聲聲思   줄줄이 가라앉아 가락마다 마음 실어

似訴平生不得志   평생에 못 다한 마음속 恨 호소하듯

低眉信手續續彈   눈섶을 내리깔고 손에 맡겨 비파 타니

說盡心中無限事   마음속 숱한 사연 모두 털어 놓는 듯

 

輕弄慢撚撥復挑   가벼이 누르고 비벼 뜯고 다시 퉁기니

初爲霓裳後六么   처음은 예상곡 뒤에는 육요구나

大絃嘈嘈如急雨   큰 줄은 소란스런 소나기 같이

小絃切切如私語   작은 줄은 가냘픈 속삭임 같이

 

嘈嘈切切錯雜彈   소란함과 가냘픔 섞어서 타니

大珠小珠落玉盤   큰 구슬 작은 구슬 옥 쟁반에 떨어지듯

間關鶯語花底滑   때로는 꾀꼬리 소리가 꽃가지 사이로 미끄러지듯

幽咽泉流氷下灘   샘물이 어름 밑을 흐느끼며 흐르는 듯

 

氷泉冷澁絃凝絶   찬물이 얼어붙듯 줄을 잠시 멈추니

凝絶不通聲漸歇   멈추는 그대로 소리 또한 멎었네.

別有幽愁暗恨生   그러자 깊은 근심 남모르는 원한 일어

此時無聲勝有聲   소리 없음이 소리보다 애절하네.

 

銀甁乍破水漿迸   갑자기 은병 깨져 술이 쏟아져 나오듯

鐵騎突出刀鎗鳴   무장한 騎馬가 돌진하여 칼과 창이 부딪쳐 울듯

曲終收撥當心畫   곡이 끝나 비파 중심을 한번 그으니

四絃一聲如裂帛   네 줄이 한 소리로 비단을 찢는 소리

 

東船西舫悄無言   강 위의 모든 배들 고요히 말을 잊고

唯見江心秋月白   오직 강 가운데 가을 달만 밝았더라.

 

 

제2단 늙은 창부의 회상과 하소연

沈吟放撥揷絃中   시름에 잠겨 있다 비파를 거두고

整頓衣裳起斂容   의상을 정돈하고 앉음새를 고친 후에

自言本是京城女   스스로 말하기를 본시 서울 여자로

家在蝦蟆陵下住   집은 하마릉 아래 있었답니다.

 

十三學得琵琶成   열 셋에 비파 타기 모두 배우고

名屬敎坊第一部   이름이 교방 제일부에 속해 있었는데

曲罷曾敎善才服   곡을 끝내면 늘 스승이 감복하였고

粧成每被秋娘妬   화장하면 미인들이 질투하였답니다.

 

五陵年少爭纏頭   오릉의 젊은이들 다투어 선물을 주어

一曲紅綃不知數   한 곡에 붉은 비단 수없이 받았었고

鈿頭銀篦擊節碎   자개 박은 은빗을 박자 맞추다 깨뜨리고

血色羅裙飜酒汚   붉은 비단치마 술로 얼룩지기도 했다오.

 

今年歡笑復明年   금년도 기뻐 웃고 명년도 그러하고

秋月春風等閑度   가을 달 봄바람을 한가로이 보냈다오.

弟走從軍阿姨死   동생은 군대 가고 양어머니마저 죽고

暮去朝來顔色故   어느덧 나이 들어 얼굴빛이 변하더이다.

 

門前冷落車馬稀   문 앞은 쓸쓸하고 찾는 손도 드물어

老大嫁作商人婦   늙어서 어쩔 수 없이 상인의 아내 되니

商人重利輕別離   상인은 이익보다 이별을 가벼이 여겨

前月浮梁買茶去   지난달 부량으로 차를 사러 갔답니다.

 

去來江口守空船   강어귀에 왔다 갔다 빈 배만 지키자니

繞船月明江水寒   배 비추는 밝은 달에 강물만 차가와

夜深忽夢少年事   밤이 깊어 문득 어린 시절 꿈을 꾸면

夢啼妝淚紅欄干   꿈에서도 울어 화장을 적신 눈물 온 얼굴에 퍼진다오.

 

 

제3단  백낙천의 좌천 생활 하소연

我聞琵琶已嘆息   비파 소리 듣고 이미 탄식 했는데

又聞此語重喞喞   여인의 말 듣고 나니 다시 한숨이 나네.

同是天涯淪落人   우리는 같은 천애의 불행한 신세

相逢何必曾相識   상봉이 어찌 아는 사이만의 일이랴

 

「我從去年辭帝京  나는 지난해에 서울을 떠나

謫居臥病潯陽城   심양성에 귀양와 병들어 누웠다네.

潯陽地僻無音樂   심양 땅은 외지고 음악도 없어

終歲不聞絲竹聲   한해가 다가도록 음악소리 못 들었소

 

住近湓江地低濕   분강 가까이 살아 지대는 낮고도 습해

黃蘆苦竹繞宅生   갈대와 대숲만 집을 둘러 자란다오.

其間旦暮聞何物   그 간 아침저녁 들은 소리라고는

杜鵑啼血猿哀鳴   피맺힌 두견새와 원숭이의 슬픈 소리

 

春江花朝秋月夜   봄 강의 아침 꽃과 가을 밤 달빛 아래

往往取酒還獨傾   가끔 술을 얻어 홀로 잔을 기울이고

豈無山歌與村笛   어찌 산 노래와 초동의 피리 없으랴만

嘔啞嘲哳難爲聽   조잡하고 시끄러워 들어주기 어려워라2)


今夜聞君琵琶聲   오늘 밤 그대의 비파 소리 들고 나니

如聽仙樂耳暫明   신선 음악 들은 듯 귀 잠시 맑아지네.

莫辭更坐彈一曲   사양 말고 다시 앉아 한 곡조 들려주면

爲君飜作琵琶行」 내 그대 위해 비파행을 지으리라

 

 

제4단 동병상련의 눈물 -화려한 날들은 가고

感我此言良久立   나의 말에 감격하여 한 동안 서 있더니

卻坐促絃絃轉急   물러앉아 줄 당기니 곡조는 점점 급해져

凄凄不似向前聲   슬프기 그지없어 앞의 곡과 다르니

滿座重聞皆掩泣   듣는 모든 사람 소리 죽여 흐느끼네.

 

座中泣下誰最多   그 중 흘린 눈물을 누가 가장 많았는고?

江州司馬靑衫濕   강주사마의 푸른 적삼 흥건히 젖었구나.

 

❙ 注 疏

1)*篦(비):참빗. 2)哳(찰):새소리.

 

   [해설]

44세 때인 원화(元和) 10년(815년), 백낙천(白樂天)은 어처구니없는 죄명으로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었다.  강주(江州)는 지금의 구강시(九江市). 천하 명산 여산(廬山) 아래인 관계로 그리 싫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사마(司馬)란 관직은 요즘으로 이야기해서 군대의 문관(文官) 자리여서 역시 한적한 자리였다. 관청에 나가봐야 뚜렷하게 할 일이 없었던 그는 그냥 빈둥거렸다. 백낙천(白樂天)이 뒤집어쓴 죄명은 일종의 월권죄였는데 시말은 이러했다.

 

장안(長安)에서 역시 낮은 자리에 있었을 당시 재상 무원형(武元衡)이 자객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속히 서둘러 범인을 체포하지 않는 조정의 처사에 의분을 느낀 백낙천은 황제에게 상소했다. 그런데 그 당시는 상소(上疏)도 아무나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司諫 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가능했다. 백낙천은 의분에 못이겨 나섰던 것인데 평소 백낙천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반대파들은 간직(諫職)을 통하지 않고 직접 상소한 것을 빌미로 이역만리 객지로 폄적(貶謫)시켜 버린 것이다.

 

졸지에 장안(長安)에서 내쫒긴 백낙천은 혈혈단신 이역만리 객지로 추방당한 까닭에 울분을 삭이지 못한채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듬해 가을 어느 날 저녁, 마침 손님을 배웅하러 강주(江州) 나룻터인 분포구(湓浦口)에 나섰다가 마침 애절하게 들리는 비파(琵琶) 가락을 듣게 된다. 그 주인공을 찾아 자리를 함께 해보니 이미 나이가 들어 장안에서 물러난 퇴기(退妓)였다. 지금은 늙고 시들어 장사꾼의 아낙으로 전락했지만 한창 때는 장안(長安)에서 비파와 노래로 이름을 날렸던 여인이었다. 어쩐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며 좌중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다시 술자리를 마련하고 정중하게 한곡을 청하자 그녀는 비파 소리에 젖어 영고성쇠가 무상했던 자신의 신세를 떨어 놓았다. 유랑하는 그녀의 신세는 마침 2년째 객지에서 쓸쓸하게 지내는 백낙천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가슴에 저미는 동료의식을 못견딘 백낙천은 마침내 616자 장편 서사시 <비파행(琵琶行)>을 지어 그녀에게 바치게 된다. 백낙천은 작품에서 그녀와의 만남을 이렇게 서술했다:

 

同是天涯淪落人   우리는 똑같이 하늘가에 떠도는 신세

相逢何必曾相識   설령 초면인들 그게 무슨 상관이랴

 

바로 그날 밤 양자강 강나루엔 빨갛게 단풍이 불타고 하얗게 갈대가 흔들릴 때, 강물에 풍덩 명월(明月)이 잠겼고 더구나 소쩍새 피를 토하고 원숭이 슬프게 울었을 때임에랴. 자리를 함께 했던 나그네와 동료 관리들은 비파 소리에 얼굴 묻고 흐느꼈는바 그중에서도 소매자락이 가장 흥건했던 자는 누구였을까? 작품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座中泣下誰最多   座中에 어느 누가 가장 서럽게 울었느뇨?

江州司馬靑衫濕   江州司馬의 푸른 소매자락이 제일 흠뻑 젖었어라.

 

<비파행>의 배경이자 현장이던 심양 강가에 당나라 때 강주(江州) 사람들은 비파정(琵琶亭)을 지어 백거이 명작의 산실을 기념했다. 이 비파정은 1천여년 강물을 굽어보며 백거이 문학을 증언하다가 청나라 말기 병란(兵亂)에 소실되었다. 그후 새로 건립한 비파정(琵琶亭)이 양자강 장강대교(長江大橋) 옆에 서있다.

 

 

 

 

백거이(中唐時代:766~826)의 시인)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시호는 문(文). 허난 성[河南省] 신정현[新鄭縣] 사람이다.

중당시대에는 과거제도가 효과를 거두어 그 시험에 통과한 진사 출신의 신 관료 집단이 진출하여 구 문벌을 압도했는데, 백거이가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은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백거이는 800년 29세 때 최연소로 진사에 급제했다. 이어서 서판발췌과(書判拔萃科) · 재식겸무명어체용과(才識兼茂明於體用科)에 연속 합격했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학사(翰林學士)·좌습유(左拾遺) 등의 좋은 직위에 발탁되었다. 〈신악부 新樂府〉·〈진중음 秦中吟〉 같은 풍유시와 〈한림제고 翰林制誥〉처럼 이상에 불타 정열을 쏟은 작품을 창작한 것도 이때이다. 808년 37세 되던 해에 부인 양씨(楊氏)와 결혼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편 시 〈장한가 長恨歌〉에는 부인에 대한 작자의 사랑이 잘 반영되어 있다.

811년 모친상을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는 814년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왔으나,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라는 한직밖에 얻지 못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발생한 재상 무원형(武元衡) 암살사건에 관하여 직언을 하다가 조정의 분노를 사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은 백거이가 관계에 입문한 이래 처음 겪은 좌절이었으며, 또한 그의 시심(詩心)을 '한적'·'감상'(感傷)으로 향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820년 헌종(憲宗)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백거이는 낭중(郎中)이 되어 중앙으로 복귀했고, 이어 중서사인(中書舍人)의 직책에 올라 조칙(詔勅) 제작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같은 천자의 배려에 감격하여 국가의 이념을 천명하는 데 진력했다. 822년 이후 항저우자사[杭州刺史]·쑤저우자사[蘇州刺史]를 역임했다. 뤄양[洛陽]으로 돌아온 뒤에는 비서감(秘書監)·형부시랑(刑部侍郞)·하남윤(河南尹) 등의 고위직과 태자빈객분사(太子賓客分司)·태자소부분사(太子少傅分司)와 같은 경로직(敬老職)을 거쳤으며, 842년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했다. 한림학사 시절의 동료 5명은 모두 재상이 되었으나 백거이는 스스로 '어옹'(漁翁)이라 칭하며 만족해했다. 이 같은 성실하고 신중한 태도로 인해 그는 정계의 격심한 당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백거이는 문학 창작을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이라고 하는데, 문학 작가와 작품의 수가 크게 증가한 중당시대라 하더라도 이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형식이 다양하여 고체시(古體詩)·금체시(今體詩:율시)·악부(樂府)·가행(歌行)·부(賦)의 시가에서부터, 지명(誌銘)·제문(祭文)·찬(贊)·기(記)·게(偈)·서(序)·제고(制誥)·조칙·주장(奏狀)·책(策)·판(判)·서간(書簡)의 산문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형식을 망라했다. 또한 그는 훌륭한 친구를 많이 사귀었는데, 친구들과 서로 주고받은 시문에는 친애의 정이 물씬 배어 있다. 특히 원진(元稹) 및 유우석(劉禹錫)과의 사이에 오간 글을 모은 〈원백창화집 元白唱和集〉과 〈유백창화집 劉白唱和集〉은 중당시대의 문단을 화려하게 장식한 우정의 결실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에는 정치이념을 주장한 것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있는데, 모두 평담한 언어로 알기 쉽게 표현되었으며, 시에 봉급의 액수까지 언급하는 등 매우 당당했다. 때문에 평이하고 속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비상한 노력과 식견에 의해서 달성된 것이었다. 그는 1편의 시가 완성될 때마다 노파에게 읽어주고 어려워하는 곳을 찾아 고치기까지 할 정도로 퇴고(推敲)를 열심히 했다. 백거이가 자신의 시문에 일상어를 유효적절하게 구사한 것도 그의 표현을 간명하게 한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가 일상어를 사용한 것은 구어문학(口語文學)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문언(文言)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구어를 자신의 언어 속에서 활용하려 했을 따름이었다. 또한 그는 어휘를 매우 신중하게 선택했다. 고금문학(古今文學)에 나타난 어휘를 천지(天地)·산천(山川)·인사(人事)·조수(鳥獸)·초목에 이르기까지 1,870개 부문으로 분류하여 〈백씨육첩 白氏六帖〉 30권을 펴냈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어휘를 선택하고 그 의미를 확인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이백(李白)·두보(杜甫)·한유(韓愈) 등 백거이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시인의 작품에는 송대이래 많은 주석서가 있는 데 반해, 〈백씨문집 白氏文集〉에는 그러한 주석서가 없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종래의 주석서는 난해한 말에 관한 출전을 찾아내어 설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백거이의 작품에는 이러한 주석서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백거이는 문학을 2가지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그는 초기에 왕자(王者)의 정치이념은 문학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위정자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이상에 불타던 젊은 시절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신악부서 新樂府序〉에서 "글은 임금·신하·백성·만물을 위해 짓는 것이지 글을 위해 짓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본래 천하의 정치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작품은 백성의 뜻을 군주에게 전달함과 동시에 정치의 옳고 그름을 풍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경 詩經〉이야말로 이같은 문학의 본질을 잘 나타낸 작품이며, 후세 특히 육조(六朝) 이후의 문학은 기교만을 중시한 나머지 본래의 이념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809년에 완성된 통렬한 풍유시 〈신악부〉 50편을 비롯하여 〈백씨문집〉에 수록된 100분야에 대한 '판'(判)과 75편의 '책'(策), 200편의 〈한림제고〉, 233편의 〈중서제고 中書制誥〉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백거이가 지은 '조'(詔)·'칙'(勅)·'제'(制)·'고'(誥) 등은 한림학사들에게 〈육전 六典〉보다도 더 존중받았다. 〈육전〉은 칙명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당대 관계에서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글을 짓는 궁극적인 목적은 천자 대신 천자의 세계관과 이념을 그에 걸 맞는 전아(典雅)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고, 조·칙·제·고 등은 그 주요한 서술형식 이었다. 칙명을 받아 그러한 글을 짓기 위해서는 정확한 식견과 웅장한 필치를 지녀야만 했다. 뛰어난 작가는 '대수필'(大手筆)이라 하여 커다란 영예를 부여받았는데, 백거이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백거이는 문학으로써 정치이념을 표현하고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여 실제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을 문학 활동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815년 강주사마로의 좌천과 목종의 죽음은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정치 문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인생의 문학을 추구하게 되었다. 장경(長慶) 4년(824) 목종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 원진에 의해 〈백씨장경집 白氏長慶集〉 50권이 편찬되었다. 당시 백거이의 나이는 53세였으며 '장경'은 목종의 죽음과 동시에 새로이 바뀐 연호였다. 따라서 〈백씨장경집〉은 죽은 천자의 후한 대접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835년 백거이는 60권본의 〈백씨문집〉을 강주 둥린 사[東林寺]에 봉납했고, 이듬해 65권본을 뤄양의 성선사(聖善寺)에, 3년 후 67권본을 쑤저우의 남선사(南禪寺)에 봉납했다. 842년 이전의 50권 이외에 '후집'(後集) 20권을 정리하고 이어서 845년 5권의 '속후집'(續後集)을 편찬함으로써 합계 75권의 '대집'(大集)을 완성했다. 846년 8월, 75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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