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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고향 그리워/내고향 청양

청양 영모재(靑陽 永慕齋)

by 산산바다 2011. 11. 3.

산과바다

 

 

청양 영모재(靑陽 永慕齋)

충남 청양군 청양읍 장승리 73-1에 위치함

효원(效元)할아버지의 11세손 계도(啓道)가 올림

2011. 11. 2.(시제일 陰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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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원(李効元)

1549(명종 4)∼1629(인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성백(誠伯), 호는 장포(長浦). 우윤 관(瓘)의 아들이다.

1584년(선조 1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정랑·세자시강원사서·승지·한성부좌윤·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1603년 이조참판 재임시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선조 말년에 북인이 대북·소북으로 나뉘어 정권쟁탈이 치열할 때 그는 영상 유영경(柳永慶)의 소북파에 가담, 상소문을 올려 군부(君父)의 지친을 이간하려는 정인홍(鄭仁弘)의 흉모는 이이첨(李爾瞻) 등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 하여 대북파인 정인홍을 영변, 이이첨을 갑산에 유배시키고 세자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파가 집권함에 따라 이듬해 그는 삭직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유유자적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14년 만에 풀려나 충남 청양의 초가에서 청빈한 생활을 하였으므로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 집이 재신(宰臣)을 지낸 사람의 집인 줄 몰랐다. 인조반정이 있었던 그해 겨울,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촌로들과 산수를 즐기며 일생을 마쳤다.

 

 

 

함평(咸平) 이씨 좌찬성 이관(李瓘)과 아들 이효원(李效元, 1549∼1629, 호:長浦)을 향 사하는‘ㄱ’자 건물이다.『함평세가(咸平世家)』에 따르면, 1668년에 이해(李, ?∼1670, 호:聾翁)가 건립하였고 1882년에 고쳐지었다. 이관은 함평 이씨가 청양 지역에 처음 들어온 시조이고, 이효원은 선조 말년 대·소북 의 정권 쟁탈이 치열할 때 소북의 입장으로 대북이 집권하면서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된 인물이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이곳에서 청빈한 생활로 산수를 즐기며 일생을 마쳤다. 이 건물을 세운 이해는 광해군 때 아버지 이효원이 유배되고 형 이정(李瀞)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죽자 벼슬을 단념하였다.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올랐고 함릉부원군(咸陵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충정(忠靖)의 시호를 받았다가 숙종 때 충민(忠敏) 으로 다시 시호를 받았다. 재실 4칸, 협문 1칸, 곳간 2칸, 행랑채 9칸으로, 건립되어 340여 년이 지났으나 건립 당 시의 원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뒤쪽에는 이관과 이효원의 묘소가 있다. 청양 영모재(충남 유형문화재 제154호, ‘98.12.29지정)

 

 

 

 

 

 

 

원로 啓福님...... 재실에서 시제준비에 바쁘시다.

 

 

 

 

 

 

장포공(長浦公) 휘(諱) 효원(效元) (시조 16세, 장양공의 6세)

 

 

벼슬(官爵):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대사간(大司諫) 증 대광보국 승록대부 의정부영의정 함풍부원군

약기(略記): 자(字)는 성백(誠伯) 호(號)는 장포(長浦), 1550년(명종6년) 찬성공(贊成公) 휘 관(瓘)의 7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별시 문과(文科)에 급제, 임진란(壬辰亂) 시 호조와 예조좌랑으로 부친과 함께 선조대왕(宣祖大王)을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하여 원종(原從)1등 공신에 오르셨고 사간원 집의와 한성부좌윤을 지냈으며 대사간에 올랐을 때 광해군(光海君) 옹립을 꾀한 역신(逆臣)들에 의해 거제도(巨濟島)에 16년간 유배되셨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제수된 벼슬을 사양하고 청양에 은거하시다 1629년(인조7년) 조용히 생을 마치셨다. 시문에 밝으시고 평생을 엄격한 절제와 규칙적인 생활로 일관, 환란 중에도 호종일기(扈從日記)와 역면일기(歷面日記)등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슬하에 6남 5녀가 있다.

 

위쪽에 위치한 함평(咸平) 이씨 좌찬성 이관(李瓘)할아버지의 묘

 

 

 

 

한쪽에서는 시제 제물 준비에 바쁘군요.

 

 

 

회장 춘범(春範)님의 사회로 홀기에 따라 시제를 합니다.

 

택범님의 독축 장면

 

 

자손들이 음복을 하고......

 

아래에 위치한  장포공(長浦公) 휘(諱) 효원(效元)할아버지 묘소에 시제준비를 합니다.

 

 

홀기 순서에 의해 시제를 합니다.

 

전례로 자손이 많아 미성년들은 참례하지 못했는데 요즘은 외지에 나가 생활하며 일요일이 아니면 오기 힘들어서 인지 참례하는 자손들이 많지않아 항상 아쉽고 부끄러운 마음 이군요.

 

 

 

농옹(聾翁) 이해와 이종생 

 

1. 농옹 이해

 

농옹 이해는 조선 후기의 공신으로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자연(子淵), 호는 농옹(聾翁)으로 대사간 효원(效元)의 아들입니다. 현종 11년(1670년) 돌아가셨는데 정확한 출생년도는 전해지지 않네요.

 

광해임금 때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하여 아버지가 절도(絶島)에 유배되고 형인 한림 정(瀞)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죽자, 벼슬을 단념했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함릉군(咸陵君)에 봉해졌습니다. 반정하던 날 심기원(沈器遠)이 궁중에 쌓여 있는 물건을 나누어 가지자고 하였으나 거절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신에게 지급되는 토지를 나라에 반납하고 청백하게 살아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1649년 인조임금께서 돌아가시자 장릉(長陵:인조릉)의 수릉관(守陵官)이 되었으며, 이어서 형조판서를 지내다가 1652년(효종 3)에 병으로 사임하셨습니다. 판중추부사로 있던 중 동지겸성절사(冬至兼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1653년에 함릉부원군(咸陵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1669년(현종 10)에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충정(忠靖)으로 시호를 받았다가, 숙종 때 충민(忠敏)으로 개시됐습니다.

 

 

2. 이종생(李從生;1423∼1495) 장군

 

이종생(李從生;1423∼1495) 장군은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계지(繼之)로 선략장군 호분위호군(宣略將軍虎賁衛護軍)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된 극명(克明)의 아들입니다.

 

1460년(세조 6)7월 별시에서 무과의 을과 제3인에 뽑혀 창신교위(彰信校尉)에 초수(超授)되었고 같은 해 10월 북정(北征)도원수 신숙주(申叔舟)의 군관(軍官)으로 공이 있어 선략장군에 올랐고, 1461년 5월 도시(都試)에서 1등하여 선절장군(宣節將軍)이 되어 수직(守職)으로 의흥위대호군(義興衛大護軍)이 되었습니다.

 

1464년 어모장군(禦侮將軍)이 되어 동관진첨절제사(潼關鎭僉節制使)가 되고, 1466년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습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 토벌 때에 북청 만령(蔓嶺)에서 적(賊)을 대파하는 데 위장(衛將)으로서 선봉이 되었던 공으로 개선 후에 적개공신(敵愾功臣)2등에 책록되고 함성군(咸城君)에 봉해졌습니다.

 

이듬해 건주위(建州衛)야인을 친 공으로 영변대도호부사가 되었으며, 1469년(예종 1)한성좌윤이 되었다가 평안동서중3도절도사(平安東西中三道節度使)가 되었고, 1471년(성종 2)도총관을 겸했습니다. 1473년 내금위장이 되었다가, 이어 충청도병사가 되었습니다.

 

1479년 윤필상(尹弼商)의 건주위 정벌 때 호분위장(虎賁衛將)이 되어 출전하여 선봉으로 싸워 공을 세우고 부상을 입었습니다.

 

1481년 영안남도병사 겸 북청도호부사에 제배되었으며, 1485년 경상우병사가 되었습니다.

 

1491년 겸사복장(兼司僕將)이 되었고, 1495년(연산군 1)에는 부총관을 겸하였다.

 

이종생 장군은 성품이 정직하고 후덕했다고 합니다. 직무를 맡으면 대세를 따르고, 사람을 화기애애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술도 잘 드셔서 명장으로 주덕(酒德)을 겸하였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시호는 장양(莊襄)입니다.

 

 

장승개에서 바라본 청양읍

 

장승개 재실에서 바라본 마을앞의 수구막이

 

 

마을 앞에는 수구막이가 있지요

 

청양의 중심지 청양읍내사거리에서 보령방면으로 길을 잡아 3km 지점. 청양군 청양읍 장승1리의 마을 어귀로 들어서면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에 13그루의 소나무가 줄지어 숲을 이루며 나란히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를 두고 ‘수구막이’라 하여 마을의 소중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이 마을의 수구막이숲은 수구를 막아준다는 의미와 보완한다는 비보의 의미를 갖고 있다. 풍수형국상 마을의 지세가 북쪽이 트여있어 허한 곳을 막고자 처음 마을을 조성할 당시 마을 어귀에 조성 한 이 숲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비보풍수의 장치로서 마을로 들어오는 물을 길하다고 보고, 마을에서 나가는 물길을 흉한 물길로 보아 물이 마을에서 나가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여 물길을 막는다는 추상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허한 곳을 막아 마을의 기운을 가둔다는 의미 또한 담겨있다.

 

이와 같은 풍수사상은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가 중국에서 비보풍수설을 들여 온 때부터 유래되는데, 이 사상을 모든 사찰의 택지법에 적용하게 된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불교가 민속화 과정을 밟으면서 택지법이 고을과 마을까지 적용범위가 넓어지게 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자연촌이 확산 되면서 마을들에도 불교의 택지법이 적용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그러므로 함평이씨 좌찬성 이관과 아들 이효원(1549~1629)의 제사를 지내는 건물 영모재가 있는 이 마을은 함평이씨가 청양으로 들어 온 시조가 이관이라 하고 영모재의 최초 건립연도가 1668년이라 하므로 그 즈음하여 마을도 수구막이숲도 유래되었을 것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도선국사로부터 유래 된 민속을 오늘에 전하고 있는 이 마을의 340년 된 재실을 찾아 가는 길은 수구막이 숲을 지나면서 낮은 뒷동산이 아늑하게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는 장승개(長承開)에 다다른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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