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진주성 촉석루(晉州矗石樓)를 둘러보며
2009. 01. 18.
동행자(곰나루모임)-이계도외 신현철님 장기영님 양문석님 김형기님 김현민님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聖地)이다. 본시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동 37년(1604)에는 합포(合浦, 마산(馬山))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성의 둘레는 1.7㎞이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聖地)이다.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 고려시대에는 촉석성, 조선시대 이래로는 진주성 또는 진양성으로 불리었다.
하륜(河崙:1347∼1416)의「촉석성문기」에 의하면 고려 말 빈번한 해구(海寇)의 침범에 대비하여 본시 토성이던 것을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石築)했다고 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는 왜변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동 37년(1604)에는 임진왜란 때 분탕이 된 합포(合浦, 마산(馬山))의 우병영을 형세가 험고한 진주성으로 옮겨 이래로 경상도 우병영이 있었다.
그리고 병사 이수일(李守一:1554∼1632)은 진주성을 보수하면서 김수가 쌓은 것이 매우 넓어 방어하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 좁히어 쌓았는데, 이것이 지금의 진주성 규모이다.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구름이 많이 덮여 있어서 방향을 모르겠네..... 서장대에 왔으니 남강쪽이 남쪽이겠군......어기기 좋아 하는이 들이라 이쪽이 동서남북 이라고 또 서로 우긴다. 분별없는 사람들 하고는?
이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 도청이 있었다. 1930년대에 왜정은 진영 못을 매축하면서 진주성 외성 모두와 내성 일부를 헐어 그 공사에 충당해 버렸다.
서장대에서 남강을 바라본 진주시가지
이러한 관계로 1969년부터는 진주성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촉석문 중건과 함께 1972년에 준공되고
1979년부터는 성내(城內)의 민가 751동을 철거하여 1984년에 마무리하였으며
1992년부터는 성 외각의 정비사업을 추진하여 2000년에 마무리하였고, 2002년에는 공북문(拱北門)이 준공되었다. 성의 둘레는 1.7㎞이다.
진주촉석루(晉州矗石樓)
촉석루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위치해 있는 누각이다.
남강에 접한 벼랑 위에 자리잡은 단층 팔작집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이다.
1241년 고려 고종 28년 축성 당시에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의 손으로 창건하여,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1593년 7월 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59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하였다.
1593년 7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의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
촉석루앞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의암이 있는데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물로 뛰어내렸다는데 하고 말하면서 왜장 이름이 뭐냐고 물어 보았더니? 또 우리 일행 몇 몇분은 항상 그러하드시 분분하네......잘 알지도 못하면서......내려가 보세요 했더니 아는체 하던이 들이 잠잠해지네! ............................ 왜장 게다니(主谷村六助)
1747년 영조 23년 1월 26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가 진상되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렬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을 찬송 하였다.
의암위에서 장기영님....촉석루에 처음와 본다며 관심을 많이가지고 둘러보네요.
追憶往事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百有餘年 1년여 년이 지났네.
幸得南江 다행히 남강에서 주웠던 도장에
印篆宛然 새겨진 전자가 완연하니,
矗石閫義烈 촉석루에서의 뛰어난 의열
想像愴先 상상하니 먼저 서글퍼지네.
命留嶺閫 영남의 병영애 보관토록 하여
以竪忠焉 충절을 기리게 하노라”
촉석루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논개의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의기사가 있다.
1780년 정조 5년 다산 정약용은 19세의 나이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부인과 함께 들렀다.
장인은 촉석루에서 악공과 가인을 불러 사위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다산 정약용은 팔검무(진주검무)를 추는 가인에게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 하였고,〈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사에 걸게 하였다. 그 후 10년 후인 1791년에 정조 15년에 30살의 나이로 진주목사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들러서〈재유촉석루기(再游矗石樓記)〉를 적었다.
촉석루 아래 계단을 통해 의암으로 내려갈 수 있게 작은 통로를 마련해 두었는데 중간 부분에 의암사적비가 있고,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르는 곳에 툭 튀어나온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진주성을 한바퀴 돌아 촉석루 의암이 있는곳에서 잠시 남강을 바라보며...
임진왜란당시의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산과바다의 효원 할아버지의 선조임금 호종 이야기를 나누며 나온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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