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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時調詩 ***/詩 공부

한국의 시

by 산산바다 2007. 3. 31.

산과바다

 

 

                         -한국의 시-

 

 

   • 개념

한국의 시를 시라는 용어 대신 향가·가사·시조·창가 등의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역사적 모습의 다양성과 용어의 다양성에 기인하며, 또 이들을 가리켜 '시가'라고도 하고 '시'라고도 하는 것은 입으로 노래했는가 또는 글로 써서 읽었는가 하는 향유방식의 차이에 기인한다. 그런가 하면 시를 가리켜 순수한 정서의 표출이라고도 하는 반면에 사람을 흥분·고양시키는 문학양식이라고도 하는 것은 시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데 따른 관점의 차이를 반영한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의 공통된 특성으로 간주되는 것으로 우선 노래로서의 성격을 들 수 있다. 예전에는 시가 입으로 구전되는 것을 전제로 했는데 그 구체적 사례는 상대시가·향가·고려가요·시조·악장·가사·창가 등이며 이 장르에 속하는 작품들은 구전되었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가 구전적 성격을 벗어나 글로 쓰고 눈으로 읽는 것으로 바뀐 것은 근·현대시이며 이 시들은 노래로서의 자취를 율격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므로 고전시대의 시를 시가라고 하여 근·현대의 시와 구분하기도 한다.

 

   • 전개


상대시가

아득한 옛날 우리 민족의 시가 어떠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살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시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추론이지만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다만 몇 가지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서 그 편린이나마 엿볼 수 있는 것은 BC 2세기경부터이며 작품의 수도 〈공무도하가〉(일명 공후인)·〈황조가〉·〈구지가〉 등 3~4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 노래들은 한자로 번역되어 전하므로 노래의 원모습은 알기 어렵고 그 노래들의 성격에 대해서도 해석이 구구하다. 다만 〈공무도하가〉는 흰머리를 풀어헤치고 강물에 빠져 죽은 남자를 뒤따르던 여인의 사연이고, 〈황조가〉는 두 아내 중 달아난 한 사람을 뒤쫓다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부른 노래여서 개인적인 정서를 드러낸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에 〈구지가〉는 개인적인 정서보다는 임금을 맞이하기 위한 집단의 노래로 의식이나 노동에 관계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향가

향가는 신라 때에 창작되어 고려 때까지 존속했던 장르로서, '사뇌가'(詞腦歌)라고도 부른다.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가 전하는데, 우리 문자가 없던 시대이기 때문에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쓴 향찰로 표기되어 있고, 형식은 4·8·10구체로 나뉜다. 향가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노동요로 짐작되는 〈풍요〉가 있는가 하면, 서정적 성격이 강한 〈원왕생가〉·〈제망매가〉·〈헌화가〉·〈처용가〉·〈모죽지랑가〉·〈찬기파랑가〉, 교훈적 성격이 강한 〈안민가〉·〈우적가〉 등이 있다. 또한 주술적 성격이 드러나는 〈도천수관음가〉·〈도솔가〉·〈혜성가〉·〈원가〉 등이 있는가 하면 〈서동요〉처럼 놀이적 성격이 강한 것도 있다. 반면에 〈균여전〉에 전하는 11수는 〈보현십원가〉라는 제목 아래 부처님께 10가지 기원을 하고 거기에 서시를 붙인 연작시로서 불교적 찬가의 성격이 강하다.

향가의 작자는 〈서동요〉를 지은 어린아이부터 〈풍요〉를 지어 부른 다수의 신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월명사(月明師)·충담사(忠談師)·신충(信忠)·영재(永才)처럼 승려나 벼슬아치들이 상당수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당시의 상층인이라서 기록으로 남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학자는 이 이름들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월명'은 달이 밝았다는 사실과 관계되며 '충담'은 충성스러운 말이라는 뜻으로 보아 보통명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헌화가〉처럼 작자가 '소 끌고 가던 노인'이라고 알려진 것도 있고, '동해 용왕의 아들'로 지칭되는 '처용'처럼 정체를 확실히 알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고려가요

고려 때 지어지고 불렸던 노래를 통틀어 고려가요라고 하는데 이들 노래가 민요적이라고 하여 '속요'라고도 한다. 고려가요의 노래말은 3, 4줄 정도로 짧은 길이를 가진 〈유구곡〉·〈상저가〉·〈가시리〉·〈사모곡〉 등이 있는가 하면, 〈처용가〉나 〈이상곡〉처럼 긴 길이를 가진 것도 있고, 〈서경별곡〉·〈청산별곡〉·〈만전춘〉·〈쌍화점〉·〈동동〉·〈정석가〉와 같이 4~5연에서 8연 또는 심지어 13연에 이르는 것도 있다. 또 작품명에 '별곡'이라는 말이 붙은 것에 주목해서 고려가요라는 명칭 대신에 '별곡'이라고 장르명을 붙이기도 하며, 그중에서도 〈한림별곡〉처럼 '위 경긔 엇더니잇고'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 작품들을 따로 나누어 '경기하여체가' 또는 줄여서 '경기체가'라고도 한다.

고려가요의 주된 특징은, 대체로 작자를 알 수 없다는 점과 남녀간의 애정이나 욕망을 거리낌없이 표현했다는 점, 그리고 민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법이 많이 보인다는 점이다. 고려가요는 주로 〈악장가사〉·〈악학궤범〉·〈시용향악보〉 등에 기록되어 전하는데, 이 문헌들이 모두 음악책인 것으로 미루어 고려가요는 모두 가창되었음이 분명하며, 문헌의 성격이나 음악의 특성으로 보아 궁중의 음악 또는 적어도 상층인이 즐기던 음악이었음이 확실하다. 따라서 노래말의 적나라함이나 형식적으로 민요에 가까운 하층민의 노래가 어떤 계기로 궁중 또는 상층민의 음악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런 특성이 '남녀상열지사'로 지탄을 받으면서 노래말을 바꾸거나 더이상 향유되지 못한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악장

악장이란 조선 초기에 나라의 공식행사인 제례나 의식에서 악곡에 맞추어 부를 목적으로 지어진 노래이다. 조선 건국의 필연성과 신성성을 정당화하고 강조한 〈용비어천가〉와 불교찬가라 할 수 있는 〈월인천강지곡〉이 두드러지며, 그밖에 조선 왕업을 송축한 정도전의 〈신도가〉, 작자 미상의 〈감군은〉·〈유림가〉 등이 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창작되었기 때문에 정도전·정인지를 비롯해 수양대군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왕조의 주인의식을 가진 사대부와 왕족이 작자의 주를 이루었다. 형식을 보면 〈용비어천가〉는 125장, 〈월인천강지곡〉은 580여 장의 길이를 가진 데 비해 다른 작품들은 4~8장에 불과하여 형식상으로는 차이가 많다.


 

시조

시조는 고려 말엽에 창작되기 시작했으나 주로 향유된 시기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시조라는 명칭은 '고조'(古調)에 상대되는 뜻을 가진 음악의 명칭이었다. 용어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시조는 음악에 맞추어 부르던 노래로 향유되었는데, 음악으로는 가곡창과 시조창의 두 종류가 있었다. 시조는 초장·중장·종장의 3장으로 되어 있고, 각 장은 4개의 마디로 되어 있어서 전체가 대체로 45자 안팎이다. 또한 각각의 마디는 대체로 3~4자로 되어 있는데, 다만 종장의 첫 마디는 3자를 반드시 지켰으며 둘째 마디는 5자 이상으로 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그밖에 각 마디는 글자 수에 엄격한 제한을 두지 않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잘 정돈된 균형미를 지니는데, 이러한 정형을 지닌 것을 가리켜 평시조라 하고, 그런 정형을 갖추면서 하나의 제목 아래 여러 수의 시조가 모인 것을 연시조라고 한다. 연시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주세붕의 〈오륜가〉, 이황의 〈도산십이곡〉, 이이의 〈고산구곡가〉, 윤선도의 〈오우가〉 등이 있다. 또한 이러한 기본형을 깨뜨린 것을 사설시조라 하는데, 초장·중장·종장의 어느 한 장 이상이 제한 없이 자유롭게 길어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사설시조는 잘 짜여진 형식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온 파형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주제는 평시조에 담아내기 어려웠던 파격적인 것이나 긴 사연인 경우가 많고, 그런 탓인지 사설시조에는 작자를 밝히지 않은 작품이 많다.

평시조의 내용은 멸망한 고려왕조에 대한 회고(이색·원천석·길재 등), 새로운 왕조에 대한 찬양과 포부(맹사성·김종서 등), 새로운 조선왕조가 내걸었던 경건주의적인 삶의 고무(이현보·이황·정철 등), 그러한 삶의 모습인 강호에서의 안빈낙도(이이·윤선도·박인로 등) 등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와는 달리 압축된 형식에 개인적 정서의 표출(황진이·임제 등)도 다른 한 주류를 이루었다. 내용이 이러한 것은 시조가 주로 상층인인 사대부에 의해 향유되었던 데 기인하며, 그 계층과 긴밀했던 기녀나 가객들에 의해 창작되고 불렸던 전통과 관계가 깊다. 시조는 문자보다는 노래로 지어지고 전해졌는데, 이것이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 〈청구영언〉·〈해동가요〉·〈가곡원류〉 등의 가집이 만들어지면서였고 작품의 수는 3,500여 수에 이른다. 현재 전하는 시조의 노래말이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게 되어 있음은 시조의 구전문학적 성격을 입증해준다.


가사

가사는 3~4자로 된 마디가 2개씩 짝을 이루어 내용에 따라 제한 없이 길어질 수 있는 형식을 가진 장르로서, 길이가 길다는 특성과 관련하여 시조를 '단가'(短歌)라 하고 가사를 '장가'(長歌)라 부르기도 한다. 가사는 고려말에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지은 〈서왕가〉나 조선 성종 때 정극인이 지은 〈상춘곡〉을 효시로 삼으며, 조선시대에 등장, 소멸했기 때문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시가 장르 가운데 하나로 손꼽는다. 가사의 내용은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정극인의 〈상춘곡〉, 이이의 〈낙빈가〉, 허전의 〈고공가〉, 이원익의 〈고공답주인가〉, 박인로의 〈누항사〉, 남도진의 〈낙은별곡〉 등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린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 박인로의 〈사제 곡〉 등이 또다른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가 하면 비교적 긴 체험이나 깨달음을 알리기 위한 기행가사나 종교가사가 상당수에 달했는데, 김인겸의 〈일동장유가〉를 비롯한 일본 기행이 있고, 홍순학의 〈연행가〉, 유인목의 〈북행가〉 등은 중국 체험을 노래한 것이다. 또한 종교가사로는 나옹화상의 〈서왕가〉를 필두로 사명대사의 〈회심곡〉으로 이어지는 많은 불교가사가 전해지고, 천주교에 관련된 이벽의 〈천주공경가〉 등 상당수의 작품이 있으며, 최제우의 〈용담유사〉로 대표되는 동학가사가 있다. 이밖에도 실용의 관점에서 농가의 할 일을 노래한 정학유의 〈농가월령가〉나 여성들의 놀이를 묘사한 〈화전가〉류와 시집가는 딸에게 주는 교훈을 적은 〈계녀 가〉류의 가사도 상당수에 달한다. 그밖에 조선시대의 역사를 노래한 〈한양가〉가 있는 반면, 이와는 달리 정서적인 감회를 노래한 정철의 〈사미인곡〉 또는 〈속미인곡〉을 비롯해 허난설헌의 〈규원가〉 등도 있어 가사야말로 무슨 내용이든 노래할 수 있는 장르로서의 특성을 보인다.

시대적으로 볼 때 임진왜란 이전의 가사가 두 마디로 된 구가 200구 안팎의 짧은 형식임에 반해 임진왜란 후에는 길이가 제한없이 길어지는 변화를 보였고, 대체로 사대부들이 작자로 밝혀진 경건한 내용에서 점차 대상을 해학적으로 묘사하면서 좀스러운 것들을 주제로 삼는 경향으로 바뀌어 간 점은 작자를 밝히지 않는 경향과 더불어 새로운 변화였다. 이러한 후기적 경향을 나타낸 작품으로는 〈우부가〉·〈용부가〉·〈노인 가〉·〈노처녀가〉·〈규수상사곡〉·〈과부가〉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장형화 및 희화화는 가사의 속성이 노래하는 장르로부터 읽는 장르로 변해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개화기 시가

한국에서 개화기에 해당되는 시기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를 말한다. 서양 문물의 전래와 국제정치의 갈등 속에서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오자 시도 그에 따라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일본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양식의 실험으로 신체시창가가 등장하고, 인쇄 매체인 신문과 잡지의 발간으로 개화시와 개화가사가 지어지는 등 새로움을 추구하는 경향과 옛 것에의 집착이 뒤섞여 나타났다. 신체시는 주로 최남선에 의해 잡지 〈소년〉을 중심으로 〈해에게서 소년에게〉·〈꽃두고〉 등의 작품이 실험되었는데, 개화라는 목적을 지향하되 자유로운 율격을 시도했으나 더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그 대신 최남선은 일본의 음수율인 7·5조를 채용한 창가라는 형식을 도입하여 〈경부철도가〉·〈세계일주가〉 등을 지어 선각자로서의 교훈적인 의도를 드러냈다. 반면 개화사상의 강조와 민족보존의 고취라는 이중적 목적을 담은 개화시조, 개화가사 및 개화창가는 〈독립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중심으로 독자 투고란에 실리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개화기는 노래하는 시가에서 쓰고 읽는 시로 변화해가는 과도기라 할 수 있다.


1920년대 시

1918년 〈태서문예신보〉에 김억이 '상징주의'를 소개하고 〈봄〉이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시는 새로운 전환을 맞이한다. 서구의 근대시로부터 배워들인 '읽는 시', 그리고 '우리'가 아닌 '나의 정서로서의 시'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경향은 〈창조〉(1919)라는 동인지에 발표된 주요한〈불놀이〉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이 작품은 시가에서 시로의 전환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에 대한 인식이 이처럼 변화한 것과 3·1운동의 실패로 더욱 암담해진 현실은 병적인 개인의 정서 표출의 시로 몰아갔고, 〈백조〉·〈폐허〉 등의 동인지를 중심으로 황석우의 〈석양은 꺼진다〉, 오상순의 〈방랑의 마음〉,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박종화의 〈오뇌의 청춘〉, 박영희의 〈월광으로 짠 병실〉 등이 보여주는 바와 같은 병적인 어조의 슬픔을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김기진의 〈백수의 탄식〉,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 등과 같이 식민지의 현실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민족적인 것에 매달려 식민지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김억의 〈신미도 삼각산〉으로 대표되는 민요적 정서를 담은 시와, 변영로의 〈논개〉 등과 주요한·이광수 등이 중심이 된 민요시 운동도 있었으며 양주동·이병기 등에 의해 시조부흥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그러나 이 시기의 가장 훌륭한 시는 김소월한용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김소월은 〈진달래꽃〉·〈먼 후일〉·〈접동새〉·〈못잊어〉·〈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등에서 한국적인 역설의 정서를 적절한 율조에 담아냈고, 한용운은 〈님의 침묵〉·〈알 수 없어요〉·〈복종〉 등 불교적 발상법에 근거하여 삶의 본질을 꿰뚫는 시들을 발표해 한국시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1930년대 시

1930년대는 정지용·김영랑·김광균·이상·김기림 등 시의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시인들이 등장함으로써 현대적인 시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지용은 〈백록담〉·〈향수〉로 대표되는 시들에서 절제된 언어와 형상성을 추구했으며, 김영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등에서 개인적 정서의 절실한 표현을 추구했고, 김광균은 도시의 풍경을 회화적으로 그려낸 〈와사등〉·〈기항지〉 등을 발표했으며, 이상은 〈오감도〉로 대표되는 다다이즘 경향의 시를 발표했는가 하면, 김기림은 〈바다와 나비〉 등을 통해 신비한 이미지로 대표되는 참신성을 구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경향은 시창작의 방법에 대한 혁신을 통해 순수시의 예술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식민지 현실의 참혹함에 대한 인식을 이야기하듯 드러낸 시도 있었다. 임화의 〈제비〉, 이용악의 〈낡은 집〉 등을 비롯해 백석·오장환 등의 시는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강화될수록 민족과 민중의 열망이 강화됨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오랫동안 한국문학사에서 금기시되었다가 1980년 이후 논의되었다.

 

1940년대 시

1940년대는 8·15해방을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해방 이전의 시는 다음과 같은 4가지 경향으로 전개되었다. 첫째, 1930년대 후반에 등장한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된 순수 서정시로서, 서정주의 〈화사〉·〈자화상〉·〈귀촉도〉, 유치환의 〈깃발〉·〈일월〉·〈광야에 와서〉 등은 순수 서정을 추구하면서도 근원으로서의 생명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뜻에서 '생명파'로 불리기도 한다. 둘째, 민족의 현실을 전환된 표현으로 형상화한 시로서, 이육사의 〈청포도〉·〈절정〉, 윤동주의 〈자화상〉·〈또다른 고향〉 등이 있다. 셋째,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한 시로서, 박두진의 〈향현〉·〈해〉, 조지훈의 〈고풍의상〉·〈봉황수〉, 박목월의 〈길처럼〉·〈나그네〉로 대표되는 이른바 '청록파'의 시이다. 넷째, 일본 식민지 정책에 굴복하여 친일을 강조한 시로서, 김동환의 〈미영장송곡〉, 이광수의 〈새해가 왔네〉, 김기진의 〈가라, 군기 아래로, 어버이들을 대신해서〉, 노천명의 〈부인근로대〉 등이 있다. 해방과 더불어 시집의 출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과 함께 새로이 전개된 시의 경향은 우선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순수시를 지향하던 시인들이 서정과 지성을 강조한 데 반해, 이용악의 〈오랑캐꽃〉, 박아지의 〈심화 心火〉, 오장환의 〈병든 서울〉과 〈나 사는 곳〉, 임화의 〈찬가〉 등의 시집에서는 전투성과 이념성을 강하게 부르짖었고, 이러한 경향은 뒤에 남북이 분단되면서 시인들의 활동무대를 달리하게 했다.

 

1950년대 시

1950년대는 6·25전쟁으로 시작되었으므로 남한과 북한의 시로 갈라져 전개되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모윤숙〈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유치환〈보병과 더불어〉와 같이 반공 애국의식을 고무함으로써 승전의식을 고취하는 시와, 조지훈의 〈다부원에서〉처럼 전쟁의 비극성과 자유의 소중함을 노래한 시가 씌어졌고, 구상의 〈초토의 시〉처럼 전쟁의 참상과 분단의 비극을 고발하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조향·박인환·김경린·김규동·김수영·김춘수·김광림 등 이른바 '후반기' 동인을 중심으로 한 시인들은 〈현대의 온도〉(1957)와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1957) 등의 시집을 발간해 도시와 문명과 전쟁 후의 현실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고민을 그려냈다. 이러한 경향은 순수시와 모더니즘적인 경향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외에도 이 시기에는 이동주의 〈강강수월래〉, 박재삼의 〈피리〉와 〈춘향이 마음〉, 서정주의 〈귀촉도〉로 대표되는 전통적 정서를 아름답게 읊은 시와 한하운의 〈보리피리〉처럼 천형의 병을 앓는 고통을 담아낸 시도 나왔다.


 

1960년대 시

1960년대는 4·19혁명5·16군사정변으로 설명되는 시대로서, 이 시기의 시 또한 이러한 정치적 사건과의 깊은 관련 속에서 전개된다. 먼저 4·19혁명은 많은 격려시를 낳았는데, 박두진의 〈우리는 아직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5·16군사정변은 그러한 흥분을 가라앉히는 사건이었고 그결과 시는 서정과 언어의 탐구라는 현실 외면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발표된 박남수의 〈새〉, 김춘수의 〈처용〉, 황동규의 〈삼남에 내리는 눈〉, 오세영의 〈불〉 등은 감수성의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언어의 아름다움과 이미지의 깊이를 통해 시의 순수한 세계를 추구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현실을 고발하고 인간의 삶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노래한 이성부의 〈전라도〉, 조태일의 〈국토〉 등은 억눌린 자의 울분과 자유민주주의의 시련 등을 드러낸 작품이다.

 

1970년대 시

1970년대의 시는 정치적 경직성과 산업화가 불러온 모순에 대한 반동으로서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었다. 김지하의 〈오적〉은 당대 사회의 정치와 경제에 나타난 부조리를 풍자하고 야유함으로써 시를 통한 참여를 보여주었고, 신경림의 〈농무〉, 고은의 〈빈집을 지나면서〉는 산업화에 따른 농촌의 실상을 고발했으며, 김광규는 〈묘비명〉을 통해 현실의 모순을 풍자했다. 이 시기에도 순수 서정의 추구에서 문학성을 옹호하려는 노력이 송수권·나태주 등에 의해 지속되었으며 많은 시인들이 이러한 경향의 시를 썼다.

 

 

 

 


1980년대 시

1980년대의 시는 1970년대의 고발과 풍자의 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중을 옹호하고 대변하면서 이념을 지향하거나, 또는 기존의 예술에 대한 관점을 부정하고 노동자 스스로가 창작에 나선다는 노동시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였다. 시는 시인이 아니라 일하는 노동자가 써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혼자서 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동 창작해야 한다는 구호도 등장했다. 그러한 주장이 구체적 성과를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지만 김정환의 〈언 땅을 파내며〉나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등은 새로운 경향의 시임이 분명하다. 그밖에 현실의 질곡과 뒤틀림을 고발하면서도 방법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인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등은 또 다른 새로운 경향의 시이다.

金大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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