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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時調詩 ***/詩 공부

중국의 시

by 산산바다 2007. 3. 31.

산과바다

 

 

                          -중국의 시-

 

 

중국의 시는 민중 사이에서 불려지던 노래 속에서 탄생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은 〈시경 詩經〉인데, 이것은 BC 6세기에 공자가 그때까지의 가요를 편집, 정리하여 펴낸 것이라고 전해진다. 〈시경〉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풍'(風)은 주(周)나라 치하 여러 제후국의 민요이며, '아'(雅)와 '송'(頌)으로 불리는 부분도 전자는 주황실과 관련된 악가(樂歌), 후자는 주황실의 제사 때 불리는 악가이다. 또 〈시경〉의 가장 오래된 주석인 〈모시 毛詩〉의 서문에서도 시와 가요 및 춤과의 관련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시경〉은 후세의 중국의 시가 갖는 성격을 그 발생단계에서 이미 보여주는데, 첫째, 중국의 시는 서정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경〉의 작품은 대부분의 짧은 서정시이며, 그리스의 호메로스의 시 같은 서사시는 볼 수 없다. "시는 뜻[志]이 지향하는 바라, 마음에 있는 것을 뜻이라 하고, 말로 나타내는[發] 것을 시라 한다"라고 〈모시〉의 서문에서 정의하고 있다. 시란 작자의 감동이 언어라는 형태를 빌려 밖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둘째, 〈시경〉은 유가에 의해 5경(五經)의 하나로서 존중되었는데 그들은 〈시경〉을 정치·사회에 적용시켜 해석하려 했다. 즉 시가 민중이나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평성대에는 즐거운 시, 난세에는 원한이 담긴 시, 망국에 즈음해서는 서글픈 시가 생겨난다"라고 한 것도 〈모시〉의 서문에 있는 말이다. 〈모시〉는 언뜻 보면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작품이지만 정치적 풍자를 담고 있는데, 이것은 후세의 중국시가 정치나 사회에 강한 관심을 보인 점과 관련이 있다. 〈시경〉은 원칙적으로 4음절, 즉 네 글자를 한 구로 하여 각 구에는 대개 각운을 붙인다. 즉 4언(四言)이라는 음수율과 엄밀한 각운을 갖춘 정형시였다. 그러나 이 '4언시'라는 형식은 단조로운 리듬이었기 때문에 빨리 쇠퇴해버려 후세에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후 20세기에 근대시가 생겨나 반드시 압운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자유시형이 제창되기까지, 중국에서는 시라고 하면 〈시경〉 이후 거의 모두가 정형시였다.

〈시경〉 이후 전국시대말에 이르러 〈초사 楚辭〉라는 새로운 시가 대두했다. 〈시경〉이 북방 황허 강[黃河] 유역에서 발생한 데 반하여 〈초사〉는 남방 양쯔 강[揚子江] 중류의 초나라에서 생겨났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초사〉는 굴원(屈原)과 그의 제자 송옥(宋玉) 등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소 離騷〉는 대표적 작자인 굴원이 세상에서 참아내기 어려운 자신의 고민을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초나라의 가요를 바탕으로 한 특색 있는 시형을 구사했고, 그 표현은 다채로우며 비유가 풍부하고 격렬한 감정표현을 수반했다. 또 일상적인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 노래한 것이 아니고, 더러는 초자연의 세계가 묘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굴원 및 송옥 등을 실재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확증은 별로 없다. 역시 〈시경〉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집단적인 노래로 보는 쪽이 오히려 무난할 것이다. 〈초사〉의 시형은 3언(三言)을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리듬에 맞추어 조자(助字)인 '혜'(兮)가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형식, 즉 '사'(辭)는 한대에 들어와서 '부'(賦)라 불리는 장편의 미문(美文)으로 전화(轉化)하여 운문과 산문의 중간적 성격을 띠게 되자 전통적인 장르의 구분에서는 시 속에 넣을 수 없게 되었다.

대에 이르러 민간의 가요 속에서 5언 형식이 지식인들에 의해 채택되어 '5언시'가 성립되었다. 〈문선 文選〉에 수록된 작자 미상의 〈고시19수 古詩十九首〉는 5언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때부터 중국의 문학은 비로소 가요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시를 갖게 되었다. 이 5언시는 삼국·남북조 시대 및 수·당대에 이르기까지의 약 400년간 중국시의 주류를 이루었다. '7언시' 형식도 생겨나긴 했었지만 당대에 이르러 활발하지 못해 시라고 하면 5언시를 의미했다. 이런 가운데서 시는 점차 문학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후한말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조식(曺植)을 중심으로 한 문학집단이 형성되었고 5언시의 창작이 왕성해졌다. 이때에 비로소 개인의 서명이 들어간 작품집이 탄생했는데, 세상에서 '건안문학'(建安文學)이라 불리는 이 시기야말로 중국시 사상에 하나의 획을 그은 때로 보아야 할 것이다. 건안의 시인들에 이어 나타난 것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대표격이었던 완적(阮籍)과 혜강(康)인데, 그들의 시는 당시의 어두운 사회상을 반영한 진지하고 깊은 사색을 담은 철학적인 시였다.

중국시는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기교적인 면에서 발전을 이루었는데 그 하나가 대구(對句)의 기법이다. 또 하나는 시의 음율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인데, 중국어 고유의 4성조, 즉 사성(四聲)을 조화시켜 쓰는 데 주의를 기울이게 된 점이다. 그중에도 양나라의 심약(沈約)은 〈사성보 四聲譜〉를 지어 이 분야에 크게 공헌했다. 남조(南朝)의 시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은 남제(南齊)의 사조(謝)의 작품이다. 남조의 시는 기교면의 발전에 따라 섬세한 감각과 정밀한 묘사를 지향했는데 양대에 이르자 간문제(簡文帝)를 중심으로 하는 '궁체'(宮體)의 시인들을 탄생시켰다. 궁체란 주로 여성의 미를 읊은 것으로 관능적·퇴폐적인 측면을 지닌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작품을 모은 것이 〈옥대신영 玉臺新詠〉이라는 사화집(詞華集)이다. 한편 〈문선〉은 이러한 당시의 시풍에 대한 반발로 엮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동진(東晉)말부터 송대에 걸쳐 중요한 시인으로는 도연명(陶淵明)·사영운(謝靈運)이 있다. 도연명은 전원시인으로 시단의 주류 밖에 있었던 시인인데, 그의 시는 알기 쉽고 분명한 용어 속에 깊은 사색을 담고 있다. 사영운은 강남의 산수미(山水美)를 노래하여 산수시의 창시자가 되었다.

중국시는 대에 이르러 절정기를 맞는다. 당의 시인들은 위·진 나라로부터 남북조를 통해 발전해온 5언 형식을 이어받고 다시 7언 형식을 완성시켰다. 또 시에 고체(古體)와 금체(今體:또는 近體)의 구별이 정해진 것도 이 시대이다. 고체란 비교적 자유로운 형식의 시이며, 금체란 운율이 일정한 형을 따른 것으로서 율시(律詩)와 절구(絶句)가 이에 해당한다. 당대 최대의 시인은 이백(李白)·두보(杜甫)로 이백은 고시와 절구를 잘 지었고, 두보는 율시를 완성시켰다. 그밖에도 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왕유(王維), 호방(豪放)한 시풍의 한유(韓愈), 유려평이(流麗平易)한 시풍의 백거이(白居易), 7언절구에 뛰어난 두목(杜牧),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걸작품을 남긴 이상은(李商殷) 등이 유명하다.

대초에는 한동안 만당풍(晩唐風)의 감상적인 시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11세기 전반의 구양수(歐陽修)·매요신(梅堯臣)의 출현과 함께 보다 이지적·사변적으로 변하여 격렬한 감정을 그대로 토로하는 일은 적었고, 또 소재도 더욱 일상생활에 국한되기에 이르렀다. 송대의 시인들은 시형은 그대로 이어받아 두보와 한유 등으로 대표되는 당대의 시를 조술(祖述)했지만, 그들이 완성시킨 시풍은 당의 시와는 약간 다른 것들이었다. 송대에는 시인들의 숫자도 당대에 비해 비약적으로 증대했다. 당대까지만 해도 시는 거의 사회의 상류층, 고급 지식인들에 의해서만 지어졌는데 송대, 특히 12세기 남송시대가 되자 일반 민중 사이에서도 시인들이 배출되었다. 이것은 시와 사회·문화와의 관계라는 점에서 보면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시인은 북송의 소식(蘇軾)이며, 그밖에 왕안석(王安石)·황정견(黃庭堅) 등이 있다. 남송에서는 육유(陸游)·범성대(范成大)·양만리(楊萬里) 등이 두드러진 인물이다.

대에 들어와서는 당시와 송시 중에 어느 시풍을 계승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나 독자적이고 새로운 시풍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각 시대에 우수한 시인을 배출시키긴 했지만 당시나 송시 같은 빛을 발하는 작품을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20세기에 이르자 이른바 문학혁명(1917)이 일어나 신시(新詩:현대시), 즉 백화시(白話詩:구어에 의한 자유시)가 신문학(新文學) 장르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구시(舊詩), 즉 고전시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중국 문학사에서 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누려왔다. 한대에는 '부'가 성행했지만, 5언시가 성립되자 시는 점차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 가장 존중받기에 이르렀다. 그런 경향은 당대에 이르러서 시가 고급관료 자격시험인 과거에서 최고의 중요과목으로 간주된 일도 있으며 시작(詩作)은 관료가 되려는 지식인들에게는 필수적인 교양물이었다. 그러므로 중국 시인들의 대다수는 고급관료로서 국정에 참여했거나 또는 그것을 지향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중국 시는 언제나 시사적인 문제에 강한 관심을 나타내는 일면을 지니고 있으며 세상의 악덕이나 민중의 고통을 소재로 당국에 대한 비판이나 풍자를 가한다. 이는 앞에서 말한 〈시경〉 이후 전통과 한대의 '악부'(樂府)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인데, 그 전형적인 예를 두보의 작품 및 백거이의 〈신악부 新樂府〉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신악부〉란 명칭은 민간의 실정, 즉 정치적·사회적 병폐를 천자에게 알린다는 악부 본래의 취지로 되돌아간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중국문학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중국 시가 근대, 특히 문학혁명운동 이후 그동안 누리던 최고의 지위를 소설에 양보한 사실은 다른 현대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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