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설악산 입구(가을에 찍음)
하조대[河趙臺]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에 있는 경승지.
봄마음 아쉬워
하조대 청간정 에는 바람 시원 하고
먼 산 높은 곳 아직 남아 흰 줄기 설악인데
꽃 마음 함께 산과바다 정취를 더하는 구나
흰 분홍 산벚 진달래 가까이 보이고
흰 붉은 조팝 복사꽃 사방팔방 보이니
저곳 물 따라 깊은 숲엔 무릉도원이 ...
푸른 솔 사이 연록색 멀리 보이고
꽃 지고 붉어진 벚나무에 푸른싹 돋아
가까이 멀리 온통 어울어저 야단법석이네
높은 곳 낮은 곳 온 천지 생명력 불러 모아
활기주고 흘러온 물소리 새소리 겹친 속에선
아....입 다물지 못하고 또 아....이구나
바닷가 솟은 바위 출렁이는 물결 보며
갈매기소리 파도소리 봄 마음 하나 되어
이리저리 둘러봄도 이곳 별천지세상 일세
흰 줄기 얼음 속에 가는 봄 아쉬워
멀리 와본 여기는 정기 주는 화사한 봄인가
입 다물지 못하고 감탄함이 화려강산인가
님과 함께이니 산과바다 얼씨구 좋을시고
그래도 봄 마음 아쉬워 눈을 못 떼고
짧은 세월 가는 봄 이곳엔 더 쉽게 가겠지
05.4.23 설악산에서 봄 배웅
-산과바다-
하조대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하조대(河趙臺)
조선의 개국 공신인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이곳에서 잠시 은거하였다. 하여 두사람의 성을 따서 하조대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정종때 정자를 건립하였으나 퇴락하여 철폐되었으며 수차례의 증수를 거듭하여 1940년에 8각정을 건립하였으나 한국 전쟁 때 불에 탄 것을 1955년과 1968년에 각각 재건 되었다.
하조대는 동해바다의 절경을 볼 수 있는 돌출된 만(灣) 의 정상부에 위치하여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현대의 건물은 1998년 해체 복원한 건물로 초익공 굴도리 양식의 육모정으로 지붕에 절벽통을 얹어 소나무와 함께 주위의 자연경관과 잘 어울리고 있으며 정자각 앞에는 조선 숙종때 참판 벼슬을 지낸 이세근 이 쓴 하조대 3자가 암각된 바위가 있다.
*하조대 북쪽편 절벽에는 등대 전망대가 있으며 이곳들을 출입하는데는 군사지역이라서 시간 제한을 받는다.
하륜(1347~1416 (태종 16년)): 이색의 제자. 최영의 요동정벌에 반대하여 유배되었으나 위화도 회군 후 복권되었다. 조선 건국 후 계룡산 천도를 반대하여 중지시켰고, 정도전과 대립하여 이방원을 적극 지지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이 즉위하자 정사공신 1등이 되었고, 이어서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등극하면서 좌명 공신 1등이 되었다. 70세로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중국 한나라의 장량(한고조 유방을 도운 지략가)에 비교하기도 한다.
왕자의 난:1398년 정도전 세력에 의해 자신의 기반인 사병이 폐지될 지경에 이르자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세자 방석과 방번 등 두 이복동생을 제거하였다. 그는 둘째 방과(정종)를 추대하고 사신은 1등 공신으로 국정에 참여했다. 1400년 형 방간이 주동한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뒤 세자에 책봉됨.
조준(趙浚 , 1346~1405)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 : 평양
호 : 우재·송당
별칭 : 자 명중, 시호 문충
활동분야 : 《송당문집》
출생지 : 평양
본관 평양(平壤). 자 명중(明仲). 호 우재(齋)·송당(松堂). 시호 문충(文忠). 평양 출생. 1374년(우왕 즉위) 문과에 급제한 뒤 좌우위호군 겸 통례문부사(左右衛護軍兼通禮門副使)가 되고, 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지제교(知製敎) 등을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랐다. 1382년 최영(崔瑩) 휘하에서 체찰사(體察使)로 왜구를 토벌하고, 그뒤 도검찰사(都檢察使)로 있을 때 왜구를 토평해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은퇴하였다. 1388년 허금(許錦) 등과 우왕의 폐위를 모의하고 이성계(李成桂)의 일파로 밀직사지사사 겸 대사헌(密直司知司事兼大司憲)에 올랐다.
이성계와 전제개혁(田制改革)의 필요성을 협의, 상소하였고,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조선군충의군(朝鮮郡忠義君)에 봉해진 뒤 전제개혁을 반대하는 조민수(曺敏修)를 탄핵, 유배케 한 뒤 1390년(공양왕 2) 문하부지사 겸 대사헌(門下府知事兼大司憲)이 되었다. 그 해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개국의 경제적인 기반을 닦고, 1392년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진 뒤, 오도도통사(五道都統使)로 병권을 장악하고, 이방원(李芳遠:太宗)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묵살당하자 사직하였다.
왕의 만류로 재차 문하좌시중을 지내다가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무고로 한때 투옥된 뒤 좌정승에 올랐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과, 그후에도 이방원의 책봉을 주장했으며, 그해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1400년 문하부판사(門下府判事) 때 태종을 옹립하여 영의정 부사에 오르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시문에 능했고, 토지제도에 밝은 학자로 하륜(河崙) 등과 함께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하였다.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송당문집(松堂文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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