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現代 詩

현대시 감상(1)

by 산산바다 2006. 7. 27.

산과바다

 

 

 

 

1.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시집 우리가 물이 되어, 1986)




2. 꽃을 위한 서시

-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문학예술, 1957.7)




3.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의미가) 되고 싶다.

(현대문학 9호, 1955.9)




4. 처용단장(處容斷章) 

- 김춘수

1의 1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근골(筋骨)과 근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천(阡)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히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 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1의 2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南)쪽 바다,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시집 처용, 1974)

5. 능금   

- 김춘수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시집 꽃의 소묘, 1959)







6. 인동(忍冬) 잎  

- 김춘수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시집 타령조․기타, 1969)




7. 역마차

- 김철수


설움 많은 밤이 오면은

우리 모두들 역마차를 타자


반기어주는 이 없는 폐도(廢都) 여기 별없는 거리 자꾸 그리운 합창이 듣고파 내 오늘도 또 한 잔 소주에 잠겨 이리 비틀거리는 사내이구나


 흔들려 부딪치는 어깨 위에 저 가난한 골들이 형제요 동포이라는 나의 외로움 속에서는 우리 좀더 정다운 나그네여서 따뜻한 마을을 찾아가는 것이냐


이제는 통곡조차 잊어버린 사람들……

열리는 아침을 믿어 가는 길인가


그러면 믿븐* 사람이여 어디 있는가 높은 곳에 기다리는 공화국의 문이여 어디 있는가 절름거리는 궤짝 위의 차거운 꿈에서도 역마야 너와 나와는 원수이지 말자


 미친 채찍이 바람을 찢고 창살 없는 얼굴에 빗발은 감기는데 낙엽도 시월도 휘파람 하나 없이 이대도록 흔들리며 폐도의 밤을 간다

(신천지, 1948.2)


* 믿븐 : 믿음직한.




8. 국경의 밤

- 김동환


제 1 부


1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外套) 쓴 검은 순사가

왔다― 갔다―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密輸出) 마차를 띄워 놓고

밤 새 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

‘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北國)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 가는데.


2

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 나오는 듯

“어―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軍號)라고

촌민(村民)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처녀(妻女)만은 잡히우는 남편의 소리라고

가슴을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

눈보라에 늦게 내리는

영림창(營林廠)* 산림(山林)실이 벌부(筏夫)*떼 소리언만.


3

마지막 가는 병자(病者)의 부르짖음 같은

애처로운 바람 소리에 싸이어

어디서 ‘땅’ 하는 소리 밤하늘을 짼다.

뒤대어 요란한 발자취 소리에

백성들은 또 무슨 변(變)이 났다고 실색하여 숨죽일 때

이 처녀(妻女)만은 강도 채 못 건넌 채 얻어 맞는 사내 일이라고

문비탈을 쓰러안고 흑흑 느껴 가며 운다.

겨울에도 한삼동(三冬), 별빛에 따라

고기잡이 얼음장 끄는 소리언만.

4

불이 보인다, 새빨간 불빛이

저리 강 건너

대안(對岸)벌에서는 순경들의 파수막(把守幕)*에서

옥서(玉黍)장* 태우는 빠알간 불빛이 보인다.

까아맣게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호주(胡酒)*에 취한 순경들이

월월월, 이태백(李太白)을 부르면서.


5

아하, 밤이 점점 어두워 간다.

국경의 밤이 저 혼자 시름없이 어두워 간다.

함박눈조차 다 내뿜은 맑은 하늘엔

별 두어 개 파래져

어미 잃은 소녀의 눈동자같이 감박거리고,

눈보라 심한 강벌에는

외아지* 백양(白楊)이

혼자 서서 바람을 걷어 안고 춤을 춘다.

아지 부러지는 소리조차

이 처녀(妻女)의 마음을 핫! 핫! 놀래 놓으면서.


<이하 생략>

(시집 국경의 밤, 1925)


* 영림창 : 산림을 관리하는 관청.

* 벌부 : 뗏목을 타고서 물건을 나르는 일꾼.

* 파수막 : 경비를 서기 위해 만들어 놓은 막사.

* 옥서장 : 옥수숫대

* 호주 : 옥수수로 담가 만든 독한 술. 고량주

* 외아지 : 외줄기로 벋은 나뭇가지.



9. 눈이 내리느니

- 김동환


북국(北國)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느니,

회색 하늘 속으로 흰 눈이 퍼부을 때마다

눈 속에 파묻히는 하아얀 북조선이 보이느니.


가끔가다가 당나귀 울리는 눈보라가

막북강(漠北江)* 건너로 굵은 모래를 쥐어다가

추위에 얼어 떠는 백의인(白衣人)의 귓불을 때리느니.


춥길래 멀리서 오신 손님을

부득이 만류도 못하느니,

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러 온 손님을

눈 발귀*에 실어 곱게 남국에 돌려보내느니.


백웅(白熊)이 울고 북랑성(北狼星)*이 눈 깜박일 때마다

제비 가는 곳 그리워하는 우리네는

서로 부등켜 안고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 얼음 벌에서 춤추느니.


모닥불에 비치는 이방인의 새파란 눈알을 보면서,

북국은 추워라, 이 추운 밤에도

강녘에는 밀수입 마차의 지나는 소리 들리느니,

얼음장 트는 소리에 쇠방울 소리 잠겨지면서.


오호, 흰 눈이 내리느니, 보오얀 흰 눈이

북새(北塞)*로 가는 이사꾼 짐짝 위에

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

(금성 3호, 1924.5)


* 막북강 : 고비 사막 북쪽을 흐르는 강.

* 발귀 : ‘발구’의 함경도 사투리로 마소가 끄는 운반용 썰매.

* 북랑성 : 큰개자리별(시리우스, sirius).

* 북새 : 북쪽 국경 또는 변방.



10. 북청(北靑) 물장수

- 김동환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쏴 ―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동아일보, 1924.10.24)

 

 

 

 

 

 

11. 산(山) 너머 남촌(南村)에는

- 김동환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南)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나.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나.


3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오는 가는 노래는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조선문단 18호, 1927.1)




12. 송화강 뱃노래

- 김동환


새벽 하늘에 구름장 날린다.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구름만 날리나

내 맘도 날린다.


돌아다보면은 고국이 천 리런가.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온 길이 천 리나

갈 길은 만 리다.


산을 버렸지 정이야 버렸나.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몸은 흘러도

넋이야 가겠지.


여기는 송화강, 강물이 운다야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강물만 우더냐

장부(丈夫)도 따라 운다.

(삼천리, 1935.3)




13. 파초(芭蕉)

- 김동명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렬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 「朝光」 1936년 1월호 -




14. 수선화

- 金東鳴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 위를 날으는

애달픈 마음.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 다시 죽는

가여운 넋은 아닐까.


부칠곳 없는 정열을

가슴 깊이 감추이고

찬바람에 빙그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


그대는 신의 창작집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불멸의 소곡.


또한 나의 적은 애인이니

아 아 내사랑 수선화야!

나도 그대를 따라서 눈길을 걸으리.




15. 내 마음은

- 金東鳴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 이오.

그대 저 문을 닫어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최후의 한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귀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조광, 1937.6)



 

 

 

 


16.

- 金東鳴


밤은

푸른 안개에 싸인 호수,

나는

잠의 쪽배를 타고 꿈을 낚는 어부다.

(시집 하늘, 1948)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밤은 호수요, 나는 어부이다.”라는 내용으로, 2개의 명제를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 단형의 작품이다. 그러나 4행 27자에 불과한 이 시가 제시하고 있는 공간은 아득한 우주까지 확장되어 있다. ‘밤은 / 푸른 안개에 싸인 호수’로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深淵)의 신비를 지닌 곳으로, ‘푸른 안개’라는 아늑한 밤의 이미지와 함께 상서러운 느낌까지도 준다. 이렇게 밤마다 ‘잠의 쪽배를 타고’ 그 곳에 가서 ‘꿈을 낚는 어부’가 되는 화자는 바로 이상을 추구하는 낭만주의자로서의 시인의 풍모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17. 봄은 간다

- 김  억


 

밤이도다

봄이다.


밤만도 애닲은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깊흔 생각은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슯히운다.


검은 네 떠돈다.

죵소리 빗긴다.


말도 업는 밤의 셜음

소리 업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태서문예신보 9호, 1918.11)




18. 물레

- 김  억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어제도 오늘도 흥겨이 돌아도

사람의 한 생(生)은 시름에 돈다오.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외마디 겹마디 실마리 풀려도

꿈 같은 세상(世上) 가두새 얽히오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언제나 실마리 감자던 도련님

언제는 못 풀어 날 잡고 운다오.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원수의 도련님 실마리 풀어라

못 풀 걸 왜 감고 날다려 풀라나.

        (백민, 1947)






19. 오다 가다

- 김  억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

그저 보고 그대로

예고 말건가


산(山)에는 청청(靑靑)

풀 잎사귀 푸르고

해수(海水)는 중중(重重)

흰 거품 밀려 든다.


산새는 죄죄

제 흥(興)을 노래하고

바다엔 흰 돛

옛 길을 찾노란다.


자다 깨다 꿈에서

만난 이라고

그만 잊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십리 포구(十里浦口) 산(山) 너머

그대 사는 곳

송이송이 살구꽃

바람에 논다.


수로 천리(水路千里) 먼 길

왜 온 줄 아나?

옛날 놀던 그대를

못 잊어 왔네

- ‘조선 시단’ 창간호(1929. 11)




20. 봄을 맞는 폐허에서

- 김해강


어제까지 나리든 봄비는 지리하던 밤과 같이

새벽바람에 고요히 깃을 걷는다


산기슭엔 아즈랑이 떠돌고 축축하게 젖은 땅우엔 샘이 돋건만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안은 어이도 이리 쓸쓸하여……


볕 엷은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어

깨어진 새검파리*로 성을 쌓고 노는

두셋의 어린 아이


무너진 성터로 새어가는

한떨기 바람에

한숨지고 섯는 늙은이의

흰 수염은 날린다


이 폐허에도 봄은 또다시 찾어 왔건만

불어가는 바람에

뜻을 실어 보낼 것인가

오- 두근거리는 나의 가슴이여!

솟는 눈물이여!


그러나 나는

새벽바람에 달음질치는

동무를 보았나니

철벽을 깨트리고

새 빛을 실어오기까지

오― 그 걸음이 튼튼하기만 비노라 이 가슴을 바쳐 ―

(조선일보, 1927.5.10)


*새검파리 : 깨어진 사기그룻 조각.


 

 

 

 

 



21. 새 날의 기원

- 김해강

1

새해라, 첫 아침

동녘 한울엔 붉은 햇살이 뻗혀오르나이다

무릎꿇고 정성을 구을려 비옵는 마음 한껏 떨리옵니다

이 땅 겨레의 가슴에도

이 땅 겨레의 가슴에도

새로운 붉은 해가 돋아오르사이다

새로운 힘이 뛰고, 새로운 기쁨이 피어날

가장 경건한 아침이 열려지이다

2

해마다 첫새벽이 오면 비옵는 마음

이해라 다름이 잇사오리까마는

팔짚고 정성을 구을려 비옵는 마음 더욱 두근거리옵니다.


주먹을 놓고 맹서하오니

주먹을 놓고 맹서하오니

적은 일이옵든 큰일이옵든

하고 많은 가운데 한 가지일지라도

이 해에만은 뜻대로 일우어짐이 있어주소서


3

새해를 맞이하옵는 마음

가슴이라도 베여 정성을 다하고 싶으옵거든 ―

어깨라도 끊어 정성을 다하고 싶으옵거든 ―


오오 새 날이여!

이 땅에 열리소서. 힘차게 열리소서.

이 땅에 빛나소서. 아름다이 빛나소서.

-계유원단(癸酉元旦)에

(동아일보, 33.1.8)




22.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문학 예술」(1956.11) / (시집 김현승 시초, 1957)




23. 눈물

- 金顯承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시집 김현승 시초, 1957)




24. 플라타너스

-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오늘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플라타너스

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문예, 1953.6)




25. 창(窓)

- 김현승


창을 사랑하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은 우리게

오늘의 뉴우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도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12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이게---.

 ---첫시집「김현승 시초(金顯承詩抄)」(1957)---

 

 

 

 

 

26. 절대 고독(絶對孤獨)

- 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나의 시(詩)는.

(시집 절대 고독, 1970)




27. 가을

- 김현승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깍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첫시집 「김현승 시초」(1957)---




28. 견고(堅固)한 고독

- 김현승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神)들의 거대(巨大)한 정의(正義)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堅固)한 칼날 ―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懷柔)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木管樂器)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쓸한 자양(滋養)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현대문학 130호, 1965.10)




29. 파도

- 김현승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이빨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 ― 바다의 글라스여.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아, 여기 누가

성(性)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아,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 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이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떨기를 7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현대문학 154호, 1967.10)




30.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시집?절대 고독, 1970)

 

 

 

산과바다 이계도

 

'*** 詩 *** > 現代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해인의 시  (0) 2006.12.07
현대시 감상(4)  (0) 2006.07.27
현대시 감상(3)  (0) 2006.07.27
현대시 감상(2)  (0) 2006.07.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