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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詩/涅槃頌

서암(西庵)선사 열반송(涅槃頌)

by 산산바다 2022.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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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西庵)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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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암(西庵)선사 (1917~2003) 열반송(涅槃頌)

 

 

나는 그런 거 없다. 정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해방 이후 제10대 조계종 총무원장,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조계종 종정 등을 역임한 승려.

 

속성은 송(), 이름은 홍근(鴻根). 부친 송동식(宋東植)과 모친 신동경(申東卿) 사이에서 3남으로 출생하였다. 동네 서당과 단양의 대강보통학교, 예천의 대창학원 등에서 한학과 신문학을 배우고, 1932년에 예천 서악사 화산(華山) 문하로 출가하였다. 1935년 김룡사에서 낙순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계하고. 1937년 김룡사 강원에서 수학하며 금오(金烏)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계하였다. 1938년에 김룡사 강원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일본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40년 폐결핵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3학년을 마치고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1년 동안 대창학원에서 학생을 지도하였고, 1942년에 김룡사 선원에서 참선 정진하고, 이듬해 봄부터 1년 동안 철원 심원사에서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1944년 여름에는 금강산의 마하연과 신계사에서 정진하여 병마를 물리쳤으며, 이해 가을 묘향산과 백두산을 거쳐 문경 대승사의 바위굴에서 승려 성철(性徹)과 함께 정진했다.

광복이 된 1945년에는 예천포교당에서 불교청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46년 계룡산의 나한굴(羅漢窟)이라는 천연동굴에서 용맹정진하여 본무생사(本無生死)를 깨달으니, 30세 때다. 계룡산에서 내려온 뒤에도 만공(滿空)의 회상인 정혜사와 한암(漢岩)의 회상인 상원사, 그리고 해인사, 망월사, 속리산 복천암, 계룡산 정진굴, 대승사 묘적암 등지에서 정진을 계속했다.

32세 되던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지리산 칠불암, 광양 상백운암, 보길도 남은암, 계룡산 사자암 등지에서 승려 금오를 모시고 결사 정진했다.

1952년부터 문경 원적사에 주로 주석하면서 수행했는데, 그를 흠모하여 모여든 많은 수좌들과 함께했다. 원적사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기도 했는데, 이는 범어사. 동화사, 함창포교당, 태백산 홍제암, 각화사 동암, 상주 청계산 토굴, 나주 다보사, 백양사, 지리산 묘향대, 천축사 무문관, 통도사 극락암, 제주 천황사, 김룡사 금선대, 상주 갑장사 등지에서 정진하였기 때문이었다.

54세 되던 1970년에 봉암사 조실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원적사를 오고갔다. 1975년에는 제10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아 어려운 종단 사태를 수습하고 2개월 만에 사퇴했다.

62세 때인 1978년 이후로는 봉암사 조실이 되어 승풍을 바로 잡고 가람을 중창했으며, 일반인에게 산문을 통제하여 수행 환경을 정화했다.

1991년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으로, 그리고 75세 대인 1993년에는 제8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이듬해 종정직과 봉암사 조실을 사임하고, 거제도, 삼천포, 팔공산 등지를 거쳐 태백산 자락에 가건물을 지어 무위정사(無爲精舍)라 이름하고 무위자적했다.

2001년에 봉암사 대중들의 간청에 의하여 이 절의 염화실에서 한거하다, 2003329일 염화실에서 입적했다. 세수 87, 법랍 72세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서암(西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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