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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禪詩/涅槃頌

동산혜일(東山慧日) 열반송(涅槃頌)

by 산산바다 2022.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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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혜일(東山慧日)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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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산혜일(東山慧日)선사 (1890~1965) 열반송(涅槃頌)

 

 

元來未曾轉 : 원래 일찍이 바꾼 적이 없거늘

豈有第二身 : 어찌 두 번째 몸이 있으랴

三萬六千朝 : 삼만 육천 일

反覆只這漢 : 날마다 되풀이하는 다만 이놈뿐이니

 

1890년 충청북도 단양에서 태어난 동산선사는 13세 까지 고향에서 사서 삼경 등의 한학을 배웠다.

이어 고향의 익명 보통학교에 들어가 한글학자인 주시경 선생에게 배우니 자연히 민족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동산은 서울의 중동 중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으니 동산은 당시의 구식교육과 신식교육을 모두 받은 보기 드문 인재였다.

게다가 의사가 되려고 했으니 당시 최고의 치식인이라고 할수 있다.

그런데 동산은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자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마음의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기로 했다.

고모부인 오세창 선생에게서  용성 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부산 범어사에서 출가하니

24살 때의 일이다

1914년 한암선사를 찾아가 2년 동안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등을 배웠고 1916년부터 2년 동안은 범어사에서 영명 강백에게 화엄경을 배웠다.

이후 스승의 옥바라지 등 여러 가지 일이 많았지만 동산은 참선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직지사에서 3년 동안 전적으로 참선 수행만하는 결사를 한 다음 1927년 범어사에 돌아와 금어선원에서 수행을 계속하던 중에 대나무가 내는 소리에  궁극의 깨달음을 얻었다.

일반적으로 '참 나'를 소에 많이 비유하는데 동산은 그의 오도송에서 이를 고양이에 비유했다.

"그리고 또 그리기 몇 년 이던가, 붓끝 닿는 곳에 산 고양이! 하루 종일 창 앞에서 쿨쿨 자더니 밤이 되니 예전처럼 늙은 쥐를 잡는구나!"

동산이  자신이 얻는 경지를 곧 스승에게 보고하자 용성은 쾌히 동산을 인가했으니

1936년에는  우리나라 지리산 칠불계맥을 전하면서 전계증에 "정법안장을 동산에게

맡기니 잘 받아 지녀 끊이지 않게 하라"

는 내용을 넣어 동산이 자신의 법을 이었다는 것을 각별히 증명했다.

이후 동산이 스승의 뜻을 받을어 해마다 범어사에서 수계식을 거행하게 되니

범어사의 금강계단이 스님들에게 계를 내리는 권위 있는 의식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기뻐하기가 바쁘게 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이러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 때  많은 스님들이 범어사로 피난을 왔는데 동산은 쾌히 이들을 받아 들여 그 뒷바라지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52년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꾸짖게 되는데 이는 동산의 법력을 잘 보여 주는 이야기다.

동산뿐만이 아니라 혜월 선사나 만공 선사도  참나로 사는 사람에게는 권력이나 권력자 모두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선사들에게 권력은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것이고 권력자는 광대중의 광대에 불과 할뿐이다.

그러니 권력으니 권력자를 두려워하거나 영합하는 승려는 궁극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가 틀림없다.

동산은 "걸림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술, 고기, 여자를 취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걸림이 없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 범부가 이를  취하지 말아야 함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며 제자들이나 후학들에게 계를 지킬것을 강조했다.

공양, 예불, 운력 등 매일의 일과를 하루도 빼먹지 않고 철저하게 지킨  동산은 "터럭 끝만큼이라도 없애버릴 번뇌나 습기가 남아 있다면 아직도 마음을 뚜렷히 깨치지 못한 까닭이니 이런 사람 은 다시 분발하여 크게 깨쳐야 한다"며 깨달음에 관해서도 철저할 것을 요구 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정화 운동에 앞장서서 오늘의 한국 불교가 있게 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 동산은 세 번이나 종정직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동산은 1965323(음력)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일과를 다하고는 임종게를 남긴 뒤에 조용히 입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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