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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우리나라(東國祖師) 法脈 系譜

제 78조 향곡 혜림(香谷慧林)

by 산산바다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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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곡 혜림(香谷慧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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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8 향곡 혜림(香谷慧林) (19121978)

 

 

향곡 혜림(香谷 蕙林) 스님은 불교정화의 시기에 우리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 어른 중의 한분이다. 재단법인 선학원 제11대 이사장을 역임하신 스님의 법호는 향곡(香谷)이고 휘는 혜림(蕙林)으로, 운봉성수(雲峰 性粹, 1889~1946) 스님의 문하이다.

 

스님은 서기 1912년 정월, 경북 영일군 신광면에서 출생하였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속명은 진탁(震鐸)이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신식 교육을 받지 않고 15세까지 서당에 다니며 전통적인 훈육을 받아 43경을 통독하였다.

나이 열여섯 되던 해, 스님은 입산하기로 결심, 출가한 형을 찾아 영일에서 거리가 제법 떨어진 양산으로 향했다. 스님의 출가 이전, 불교신행에 독실한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이미 속가의 형(仲兄)은 내원사(內院寺, 양산)에 출가한 상태였다.

양산의 천성산 내원사에서는 운봉 성수(雲峰 性粹, 1889~1946) 스님이 조실로 계시며 여러 운수납자를 제접하고 계셨다.

향곡 스님은 깨달음의 길을 인도하는 길잡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자신의 구도에 철저했을 뿐 아니라 후학을 대하는 데도 남다른 면을 보였던 인물이다. 특히 납자 제접에 있어 향곡 스님을 능가하는 이는 없을 뿐더러 앞으로도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절 집에서 회자되는 것은 선풍을 진작시키려는 그의 뜻과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향곡 스님은 불심이 깊은 집안에서 성장한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자주 절을 찾아 불공을 드리거나 고승을 친견하는 등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러던 스님은 나이 16세 되던 해 이미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던 둘째 형님을 만나기 위해 양산 내원사를 찾으면서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당시 내원사에 주석하던 운봉 스님을 친견한 것. 향곡 스님은 그 자리에서 출가의 뜻을 세우고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2년 간의 철저한 행자 생활을 마친 스님은 성월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스물 살 되던 해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운봉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법명은 혜림(惠林)이었다.

 

이후 10여 년간 스승 운봉 스님을 시봉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던 스님은 어느 날 산골짜기에서 인 돌풍이 선방의 문짝을 부술 듯 흔드는 순간 문득 눈앞이 환하게 밝아옴을 느꼈다. 뛸 듯한 기쁨이 한 순간에 몰려오자 스님은 스승을 찾아 자신의 경계를 점검 받고 운봉 스님으로부터 향곡이라는 법호와 함께 경허-혜월-운봉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잇는 전법게를 받았다.

 

운봉 스님은 경율론 3장을 두루 섭렵하였고, 전국의 명산제찰을 행각하며 선지식을 참예하며 정진에 힘 쏟으셨던 어른이다. 향교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던 중 가족과 함께 불공을 드리던 차 발심(發心)하여, 나이 열 세살에 동진 출가하였다. 세수 35세가 되던 1923, 대발원을 세워 운문암(雲門庵, 백양사)에서 동안거 정진 끝에 오도(悟道)하여 혜월 혜명(慧月 慧明, 1862-1927) 스님에게 인가를 받았다.

 

운봉스님에게 나아가, 열여섯 나이의 소년 진탁(향곡스님)은 출가의사를 말씀드렸다. 하지만 어린 나이를 들어 반드시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함을 이유로 처음에는 운봉스님은 이를 만류하였다. 내원사로 찾아 온 부모의 읍소에도 불구하고 출가 의사를 접지 않고 거듭 출가를 간청, 결국 입산이 허락되어 용맹정진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공양주 소임을 맡아 정진 하던 중 18세인 1930년 경, 조성월(趙性月)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사미5계를 받아 득도, ‘혜림(蕙林)’을 법명으로 받게 된다. 득도 후 약 2년여 기간 동안 내원사 강원에서 사미과 사집(四集)을 이수, 선정삼매에 들기를 즐겨하였다.

세수 20세인 1932,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동래) 금강계단에서 운봉화상을 전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조실 운봉선사의 문하에서 10여 년간 시봉하였다.

운봉스님은 1944, 법등의 부촉을 위해 건당식을 베풀고 법호를 내리니, 이때의 법호가 바로 향곡(香谷)’이다.

향곡스님은 내원사와 은해사를 비롯하여 전국의 여러 선방에서 안거하였다. 당시 용맹정진하시던 수좌스님들과 서로 지우하였고, 그 중 한 분이 평생의 도반 퇴옹 성철(退翁 性徹, 1912~1993) 스님이다. 평전(향곡큰스님평전, 1994)에 의하면 1947, 봉암사(문경)에 주석하던 도반 성철스님의 권유로 입방하여 함께 정진하였다.

알려진 바대로, 성철스님은 한 번 깨치고 나면 수행이 무슨 필요이며 점수로 보충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입장이다. 향곡스님은 확철대오를 하더라도 끝없는 수행정진을 통해 보임(保任)해야만 그 경계를 능히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전부터 두 분 스님께서는 동년배로 선방에서 함께 정진하던 친애로운 도반이었다. 풍채 마저 비슷한 두 분 중 한 분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성철스님) 하셨으며 다른 한 분은 어떤 때는 산이라 해도 산이 아니요, 물이라 해도 물이 아니다’(향곡스님) 하셨다. 옛 고인(古人)들의 게송을 들어 제접하는 바, 향곡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주제로 아래와 같은 법좌(동화사, 1976)를 베푼 적이 있다.

 

이 법은 대신심(大信心)과 대의심(大疑心)과 대용맹(大勇猛)으로 공부해야 성취하는 것이어서 이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우리가 본래 출가한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고 견성성불하기 위해서다그러니 가람을 짓고 수리하는 일체 불사도 견성 성불하기 위해 공부하는 공부인을 위해서 해야지 거기에 명예나 욕심이 있어서 다른 생각으로 하면 죄만 짓게 되는 것이다. 공부를 자꾸 늦추어서 내생(來生)에 한다는 생각을 내면 절대로 안 된다. 금생에 이 몸뚱이 있을 때에 해결할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스님께서는 수행자라면 끊임없이 참선을 통한 선수행에 몰두해야 하며, 반드시 수행을 해야만 자기완성을 위해 한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고, 그렇지 않고 세세생생 선수행에 몰두치 않게 되면 출가승으로서의 근본이 무너진다고 항상 강조하셨다.

정화운동 당시, 스님께서는 조선왕조 5백년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크게 위축되고 왜곡된 한국불교의 본래 모습을 되찾기 위한 사명감을 늘 강조하셨다. 그리하여 형식적인 정화보다 마음의 정화가 우선이라 여겼고정화운동 당시 중앙종회의장을 역임하며 불교의 수행풍토를 올곧게 세우기 위해 헌신했다.

승풍진작의 반영으로 월내포에 묘관음사(妙觀音寺, 해운대) 길상선원을 세워 무차대회를 열었고, 흥륜사(신라 최초의 사찰)를 중창하고 선암사 조실을 맡았다. 스님께서는 불교홍포를 위해 불국사 주지 소임을 맡아 다시 불법흥기의 기운을 약동시켰으며,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 선학원 이사장, 선학원 중앙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며 여러 납자를 제접하는 한편 현대 한국불교 최대의 불사인 불교 정화운동에 청담스님, 동산스님 등과 함께 앞장섰다.

 

향곡스님께서는 1971년부터 ‘73년까지 선학원 제 11대 이사장을 역임하시다 말년에 묘관음사에 주석하며 후학을 제접하셨고 19781218일 인시(寅時)에 입적하셨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없던 곳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하셨던 것일까. 열반 3일전 향곡스님은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기셨다.

 

木人嶺上吹玉笛 : 목인은 잿마루에서 옥피리를 불고

石女溪邊亦作舞 : 석녀는 시냇가에서 춤을 추네.

威音那畔進一步 : 위음왕불 이전으로 한 걸음 나아가니

歷劫不昧常受用 : 역겁에 불매하고 언제나 수용하리.

 

이 때가 스님의 법랍 50년이고, 세수 67세이시더라. 스님은 스승에게 받은 전법(傳法)의 증표(證票)로 흰색의 말총과 나무 자루로 된 백불(白拂, 흰 말의 꼬리털로 만든 불자)을 묘관음사 조실 방 벽에 걸어 두셨다. 관련 자료(한국향토문화대전, 묘관음사)에 의하면 83길이의 이 불자는 2008, 9월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46호로 지정된 것으로 혜월 혜명(慧月 慧明) 스님에게서 운봉 성수(雲峰 性粹) 스님을 거쳐 향곡 혜림(香谷慧林) 스님에게 전법의 증표로 전해진 것이라 한다. 백불(白拂)을 이어주신 스승 운봉스님과의 각별한 인연과 수행 정진 당시의 여러 일화는 여럿 전해지는 바, 눈에 띄는 한 대목이 있다.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이지만 스님께서 잠을 줄여 정진에 매진하던 가을이었다. 내원사 깊은 산골에 몰아치는 돌풍이 갑자기 몰아치더니 문짝을 때리는 소리가 크게 난 적이 있었다. 이에 스님은 홀연히 마음의 눈이 열렸다. 눈 여겨 보시던 운봉스님께서 급히 목침을 가리키며 향곡스님을 향해 입을 여셨다.

한마디 일러라!” 그랬더니 스님은 대뜸 발로 목침을 차버렸다.

이를 보시고는 운봉스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다시 한 번 일러라.” 이에 스님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천마디 만마디가 모두 꿈 속에 꿈을 설한 것이니, 모든 불조께서 나를 속이신 것입니다.”

 

운봉대종사행화비(雲峰大宗師行化碑)를 지은 퇴옹 성철(退翁 性徹) 스님께서는 운봉스님과 혜월스님의 사제지간의 법거량을 들어 창 끝과 화살 끝이 마주치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대장부간의 그 기상은 향곡스님과 운봉스님 사이에서도 역시 예외가 아닐 듯싶다. 기백 넘치고 활연한 사제지간의 법거량이거니와, 깨달음의 문제는 생사지간의 절박함이 달린지라 어찌 스승과 제자가 따로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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