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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우리나라(東國祖師) 法脈 系譜

제 77조 운봉 성수(雲峰性粹)

by 산산바다 2022. 11. 21.

산과바다

운봉 성수(雲峰性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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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7 운봉 성수(雲峰性粹) (18891946)

 

 

운봉선사는 13세의 나이로 출가를 하여 경율론 삼장(經律論三藏)을 두루 섭렵하셨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진리의 본체에 한걸음도 다가서지 못함을 절감하고 참선을 시작하게 된다. 참선정진에 몰두하기 10여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두일념이 현전(現前)하는 경계를 쉽게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세수35세 때 심기일전(心機一轉)하기 위해 부처님전에 대 발원을 세워 100일 기도를 한 후 사생결단의 각오로 백양사 운문암 동안거 정진에 들어갔다. 밤낮의 구별이 있을 수 없는 대분심(大憤心) 이었던 터라 자연히 화두 한 생각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섣달 보름이 되어 우연히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녘에 문 밖을 나서는데 그 순간 홀연히 마음 광명이 열려 가슴에 막혀있던 의심이 완전히 해소가 되었다.

 

운봉스님은 영남 안동사람으로, 성은 씨이고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태어날 때 흰 빛 서기(瑞氣)가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

이름을 성수(性粹)라 하였고 어린 나이에 향교에 들어가 학문을 익힘에 그 총명함이 남달랐다.

13세 살에 부친을 따라 은해사로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문득 발심을 하여 세속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김일하(金一荷)스님께 의지해 출가를 하였으며 15세에 머리를 깎고 계를 받은 다음 강원에 입학을 하여 경율론 삼장(經律論三藏)을 두루 섭렵한 후 선()을 시작하였다..

 

스님은 어린 나이에 출가시어 20여 세에 경율론 삼장을 두루 배우셨지만, 그것으로는 진리의 본체(本體)에 한걸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것임을 통감하여, 참선에 몰두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운봉스님은 전국의 명산제찰(名山諸刹)을 두루 행각(行脚)하며 선지식을 참예(參詣)하고 공부에 혼신을 기울였다. 그렇게 참선정진에 전력하시기를 10여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두일념(話頭一念)이 현전(現前)되는 경계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님의 세수 35세되던 1923년 심기일전(心機一轉)하기 위해 부처님전에 대발원(大發願)을 세워 100일 기도를 한 후, 사생결단(死生決斷)의 각오로 백양사 운문암에서 동안거 정진에 들어갔다.

 

밤낮의 구별이 있을 수 없는 대분심(大憤心)이었던 터라 자연히 화두 한 생각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섣달 보름이 되어 우연히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녘에 문 밖에 나서는데, 그 순간 홀연히 마음 광명이 열리면서 가슴에 막혀 있던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깊이 참구해오던 화두공안이 새벽녘 문 밖 차거운 공기 속에서 활연히 타파되었던 것이다. 이에 오도송을 읊으시기를

 

出門驀然寒鐵骨 : 문을 열고 나서자 갑작스레 찬 기운이 뼈에 사무침에

豁然消却胸滯物 : 가슴 속에 막혔던 물건 활연히 사라져 버렸네.

霜風月夜客散後 : 서릿바람 날리는 밤에 객들은 다 돌아갔는데

彩樓獨在空山水 : 단청 누각은 홀로 섰고 빈 산에는 흐르는 물소리만 요란하더라.

 

그리고 깨친 바를 점검받고자 당시 남방제일(南方第一)의 선지식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혜월(慧月)선사를 참예하여 여쭈었다. 그 당시 부산 선암사에 주석하고 계신 혜월선사께서는 운봉스님을 처음 접하고는 운봉스님이 훌륭한 법기(法器)임을 간파하고 계셨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 스님들은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하고 계십니까?“

이에 혜월선사께서 양구(良久)하고 계시므로, 운봉스님이 냅다 한 대 치며 다시 여쭈었다.

"산 용이 어찌하여 죽은 물에 잠겨있습니까?“

"그럼 너는 어쩌겠느냐?“

운봉스님이 문득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시니 혜월 선사께서는,"아니다."라며 부정하셨다.

이에 운봉스님이 다시 응수(應酬)하시기를

"스님, 기러기가 창문 앞을 날아 간지 이미 오래입니다.“하자

혜월선사께서는 크게 한바탕 웃으시며,

"내 너를 속일수가 없구나."하고 매우 흡족해 하셨다.

 

여기에서 혜월선사께서는 운봉스님을 인가하시고는 임제정맥(臨濟正脈)의 법등(法燈)으로 부촉하여 전법게를 내리셨다.

 

付雲峰性粹 : 운봉 성수에게 부치노라

一體有爲法 : 일체 함이 있는 법은

本無眞實相 : 본래로 진실한 상이 없는 것

於相若無相 : 모든 현상이 실상 없는 줄을 알면

卽名爲見性 : 곧 그대로가 견성이니라.

諸相本非相 : 모든 현상은 본래로 상이 아닌 것

無相亦無住 : 모양이 없고 또한 머무름도 없나니

卽用如是理 : 이와 같은 이치를 바로 쓴다면

此是見性人 : 이것이 바로 견성한 사람이니라.

 

이후 제방에서 납자를 제접 하시며 선()의 종지(宗旨)를 크게 펼치시니, 도법(道法)의 성황함이 당대의 으뜸이었다

경숙국치 당시 운봉선사께서는 선()의 진리를 깨달아 혜월선사께 인가를 받으신 후 행각(行脚)을 나섰다.

그 당시, 경기도 양주 망월사(望月寺)에서는 제방에서 발심(發心)한 수좌(首座)들이 용성(龍城)선사를 조실로 모시고 30년 결사(結社)를 맺어 용맹정진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운봉선사께서 입승(立繩)을 한 철 보시는데, 하루는 용성선사께서 상당(上堂)하여 이러한 법문을 하셨다.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도 산승(山僧)을 보지 못하고, 역대(歷代)의 모든 조사(祖師)들도 산승을 보지 못하거늘,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어느 곳에서 산승을 보려는고?“

 

이때 운봉 선사께서 일어나 답하시기를, "유리 독 속에 몸을 감췄습니다[琉璃瓮裏藏身]." 하니

용성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즉시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그 후 운봉선사께서 덕숭산 수덕사에서 만공(滿空)선사를 조실로 모시고 공부하실 때였다. 하루는 만공선사께서 '양생고자화(孃生袴子話)'를 들어 법문하시기를, 옛날에 운거(雲居)도인께서 출세(出世)하여 회상(會上)을 여시니, 각처에서 운수납자(雲水衲子)와 단월(檀越)들이 모여들어 법문을 듣고 지도를 받았다.

당시에 운거도인께서 주()하시던 산 내(山內)에 있는 어느 암자에는 수십 년 동안 혼자 정진해오던 한 스님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암자승(庵子僧)은 운거도인께서 주산(住山)하여 여러 해 동안 법을 펴도 한 번 내려와서 인사를 한다거나 법문을 듣는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운거도인께서 그 암자승을 점검해보고자 시자에게 이르셨다.

 

"네가 암자에 올라가서 암자승이 참선하고 앉아있거든, 동쪽에서 서쪽으로 갔다가 다시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거동을 한 번 해보여라.“

시자가 암자에 올라가 운거도인께서 시키는 대로 행하여 보였는데, 암자승은 좌선(坐禪) 상태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자가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는 물었다. "산 중 큰절에는 운거도인께서 회상을 열어 여러 해 동안 대중을 위해 법()을 설하고 계시는데, 스님은 어찌하여 한 번도 내려오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암자승은, "설령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세 하셔 온갖 법문을 설()하시더라도 나는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시자가 내려와서 운거도인께 사실대로 말씀을 드리니 그 때가 마침 여름철인지라 운거도인께서는 잘 지은 삼베옷을 한 벌 싸주시면서 암자승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다. 시자가 다시 그 암자에 가서, "이것은 큰 절 조실스님께서 주시는 옷입니다."하며 옷을 전하자 암자승은, "부모에게 받은 옷만 해도 일생 입고 남는데 어찌 이것을 입을까보냐?" 하면서 옷을 내밀어 버렸다. 시자가 돌아가 또 사실대로 아뢰니 운거도인께서 다시 이르셨다.

"그러면 네가 걸음을 한 번 더해라. 가서 '부모에게 나기 전에는 무슨 옷을 입었습니까?' 하고 물어보아라!“

 

시자가 또 다시 암자에 올라가서, "부모에게 나기 전에는 무슨 옷을 입었습니까?" 하고 묻자, 암자승은 여기서 그만 말문이 막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운거도인께서는 그 사실을 전해 들으시고는, "내 일찍이 그 놈을 의심했노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암자승이 앉은 상태에서 몸을 벗어버려 산 중(山中) 대중들이 화장을 했는데 이때 오색광명의 사리(舍利)가 나왔다. 이 일로 인하여 온 산중이 떠들썩했다.

 

만공스님께서 이러한 운거도인 회상의 법문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암자승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기 전의 옷을 알았다면 어찌 답을 못하겠으며, 몰랐다면 죽은 뒤에 어떻게 오색사리가 나왔겠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셨다.

이에 운봉선사께서 일어나셔서, "여름에는 안동포를 입고 겨울에는 진주 목화옷을 입습니다." 라고 멋진 답을 하셨다.

 

그 후로는 제방 산중 선방에서 운봉선사를 조실로 서로 모시려고 하였다.

운봉선사께서 내원사(內院寺) 조실로 계시던 중 훗날의 법제자인 향곡스님을 만나셨다. 열반에 드시기 전에 향곡스님에게 전법게를 내리셔서 임제정맥을 부촉하셨다. 그 후 제자 향곡스님께서는 스승의 노환을 걱정하며 곧 입적하시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쭙기를, "큰스님, 언제 입적하시렵니까?“

"토끼 꼬리 빠지는 날 가련다.“

그 후 몇 달이 지나 임종일에 좌우에 제자들을 다 불러놓고, "오늘은 내가 가리라." 하셨는데, 이날이 바로 2(卯月) 그믐날이었다.

 

향곡스님께서 묻기를, "어떤 것이 도()입니까?“

운봉선사께서 답하시기를,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님일세.“

"스님께서 돌아가시면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그러자 운봉선사께서는 다음과 같은 육자배기를 읊으셨다.

 

저 건너 갈미봉에

비가 묻어오는구나.

우장 삿갓을 두르고서

김을 매러가야겠다.

 

향곡스님이 다시, "스님!" 하고 부르자,

"날 불러서 뭣 하려고?“

"스님 법신이 무엇입니까?“

"부처와 조사가 지옥으로 거꾸러져 갔나니라.“

 

그리고는 조용히 열반에 드셨다. 운봉선사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신 대로 음력 2월 그믐날 열반에 드셨다. 그때가 세수 56, 법랍 4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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