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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佛祖正脈(釋迦如來 咐囑)/우리나라(東國祖師) 法脈 系譜

제 76조 혜월 혜명(慧月慧明)

by 산산바다 2022. 11. 21.

산과바다

혜월 혜명(慧月慧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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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6 혜월 혜명(慧月慧明) (1862~1937)

 

 

1862 6 19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신평리에서 태어났다.

이때가 철종 13년이며본관은 평산(平山(씨다.

나이 열두 살이 되던 1873년 고종 10년에 덕숭산의 정혜사(定慧寺)로 동진 출가하였는데 집에 있다가는 목숨을 연명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했다는 것이 출가 동기였다.

은사는 혜안(慧安)스님으로 친척 간이었는데친척에게 의탁시켜 자식을 절에 맡긴 것이므로 부모들이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3년 동안의 행자기간을 거쳐 열다섯 살이 되던 1876년 비로소 사미계와 더불어 혜명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로부터 정혜사에서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관음(觀音정진에 몰두하였다.

스님은 까막눈이었으므로 염불과 주력 이외의 수행 방법은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 해 은사가 속퇴 하면서 연암산 천장암에서 선풍(禪風)을 날리기 시작한 경허선사에게 스님을 보낸다.

이로써 당대의 최고 선지식이었던 경허선사와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천장암에서 살게 된 혜명스님을 위해 경허선사는 우선 글을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왔는데, 스물세 살이 되던 1884년부터 보조국사(普照國師지눌(知訥·11581210)수심결(修心訣)을 가르쳤다.

 

이때 혜명스님은 수심결서두에 인용되어있는 중국 임제종의 개조인 임제의현(臨濟義玄)선사의 법어인 "네 눈앞에 항상 뚜렷하여홀로 밝고 형상없는 그것이라야비로소 법을 말하고 법을 듣느니라."

하는 대목에서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라는 큰 의문을 갖게 된다.

이 무렵 어느 날 경허선사가 말했다.

"알겠느냐어느 물건이 설법하고 청법 하느냐형상이 없되 뚜렷한 그 한 물건을 일러라"

이 말씀을 듣고 의문이 더욱 깊어져서 앞이 캄캄했고 가슴속에는 체증 같은 의심 덩어리가 콱 뭉쳐있었다.

 

밥을 먹을 때나 밭에서 일할 때는 물론 잠잘 때까지도 이 한 생각을 가지고 일념으로 정진한지 6일째 되는 날 경허스님이 짚을 굴속으로 넣어주며 말했다.

내일은 길을 떠나야 하니 짚신을 하나 지어 놓거라.”

스승의 뜻에 따라 짚신 한 켤레를 삼은 다음 모양새를 내기 위해 틀에 넣은 후 신골을 치는 망치 소리에 이 한 물건(一物)이 무엇인가?’하는 의심이 환하게 해소된 혜명스님은 스승에게 달려갔다.

 

이때 사제 간에 나눈 법거량이다.

 

경허 : 참선은 무엇 하려 하는고?”

혜명 : 못에는 고기가 뛰고 있습니다.

경허 : 그래자넨지금 어디 있는가?”

혜명 : 산꼭대기에 바람이 지나갑니다.”

경허 : 목전(目前)에 고명(孤明)한 한 물건이 무엇인고?

혜명 : 저만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천성인(一千聖人)도 알지 못합니다.

경허 : 어떠한 것이 혜명인가?

이에 혜명 스님은 동쪽에서 걸어 서쪽에 가 섰다가다시 서쪽에서 걸어 동쪽으로 가 섰다.

이를 보고 스승이 말했다.

경허 : 옳다옳다.

혜명스님이 깨친 것을 안 경허선사께서는 혜월(慧月)이라는 법호(法號)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내리셨다.

스님의 나이 29세가 되던 1890년 봄의 일이다.

 

了知一切法(요지일체법) : 일체법을 요달 해 알 것 같으면,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 :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는 것.

如是解法性(여시해법성) : 이같이 법성을 깨쳐 알면

卽見盧舍那(즉견노사나) :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依世諦倒提唱(의세제도제창) : 세상 법에 의지해서 그릇 제창하여

無生印靑山脚(무생인청산각) : 문자와 도장이 없는 도리에 청산을 새겼으며

一關以相塗糊(일관이상도호) : 고정된 진리의 상에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

 

한 물건은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서 이 뭣고?’ 화두의 참구 대상이다.

육조대사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 땅을 괴었으며 밝기는 일월 같고 검기는 칠통(漆桶)과 같아서 항상 나의 동정(動靜)하는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라고 했었다.

 

이 한 물건은 그 어떤 언어로도 규정할 수 없고생각으로도 헤아릴 수 없어서 부처님과 조사도 입을 뗄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모른다는 뜻으로 ‘불식(不識)’이라 말했었고 육조의 인가를 받은 회양스님은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다

(設使一物也不中)” 했으며

 

숭산스님 역시 “오직 모를 뿐이라고 했었다.

마찬가지로 혜명스님은 ‘혜명의 본래면목을 묻는 질문에

역대 성인도 이치로는 알 수 없다고 답한 것이었다.

그렇듯이 이 ‘각성(覺性)’을 깨닫는 참선은 물고기가 물을 찾는 것처럼 자명한 평상(平常)의 일이다.

또 각성은 주객(主客)과 자타(自他)가 사라진 경지여서 찾으면 찾을 수 없지만 찾지 않으면 없는 곳이 없어서 산꼭대기의 바람이 지나가는 가운데도 있다.

 

 ‘한 물건은 무엇이라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작용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혜명스님은 ‘한 물건’ 자체가 되어 언어와 생각을 떠나 경허스님의 질문에 척척 대답을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수월 음관선사에 이어 두 번째로 경허의 선맥을 이은 혜월 혜명선사는 이후 출가본사인 정혜사로 돌아가 보임(保任)을 한 후 그곳에서 48세까지 머문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의 나라 형편은 혜월 선사가 출가를 할 당시보다 더 힘들어져 전국에서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할 정도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보니 굶어죽지 않으려면 도둑질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셈이었다.

 

이 무렵 어느 날 정혜사에 도둑이 들었다.

한 밤중에 찾아온 불청객은 쌀가마를 훔쳐내서 지게에 얹어 놓는 데까지는 성공을 하였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는데몇 날 며칠을 쫄딱 굶었던 도둑은 쌀가마를 지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낑낑거리며 용을 쓰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지게를 살짝 들어 올려 주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스님 한분이 나즈막히 말했다.

다른 스님들 깰라.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내려가고먹을 것이 떨어지면 애들 굶기지 말고 또 올라오게나.”

그렇게 지게를 올려주며 빙그레 웃고 있던 그 스님이 바로 혜월 혜명선사다.

 

48세 되던 1908년 스님은 활동무대를 영남지방으로 옮기는 결단을 내린다.

수월선사는 북으로 간 상현달이었다면혜월 스님은 남쪽으로 가서 하현달이 된 것이었다.

스님이 남쪽을 택한 것은 사제인 만공 월면스님이 편안한 가운데 고향 땅에서 행화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준 것으로 보여 진다.

사형의 배려로 만공스님은 중천에 뜬 만월이 된 것이었다.

그렇게 이들 세 달이 조선의 하늘에 떠올라 삼천리를 비추니 경허선사의 법맥이 꺼져가던 조선 불교를 일으켜 세운 것이었다.

 

스승 경허선사가 갑산의 도하동에서 입적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혜월선사의 나이 52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경허선사가 입적한 것은 1912 4월이었으며그 소식이 도착한 것은 이듬해인 1913 7월의 일이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어 있지 않은 때여서 그렇게 늦어진 것이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혜월스님은 선암사의 철우(鐵牛), 운봉(雲峰), 운암(雲庵)스님 등과 함께 갑산으로 향했다.

만공스님 일행과 합류하여 경허선사의 법구가 모셔진 산에 도착했는데 찌는 듯한 무더위 때문에 선뜻 법구 수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때 혜월스님이 “내가 하지라고 말한 다음 소매를 걷어붙였다.

당시 상황을 철우스님은 법어집에다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경허선사의 무덤을 파 화장을 하는데선사의 뼈는 장대한 황골이었고 장례 중에 혜월선사는 그냥 말없이 눈물만 흘리셨다.

나는 이날 혜월스님의 눈물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천장암 시절 스승인 경허선사께서 재를 지내려고 마련해 놓았던 음식을 헐벗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고인을 위한 보시를 했었는데 그것을 보고 혜월 스님은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우선이고 산 사람을 살리는 것이 고인을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무치게 배웠던 것 같다.

 

혜월 스님은 아주 검소하고 순박하여 소지품이라고는 발우 한 벌에 약간의 옷가지와 작은 이불 하나가 전부였다.

그러니 밤에 잠을 잘 때 깔 요도 없었고고된 노동일을 마다하지 않았어도 맨바닥에 잠깐 눈을 붙였다가 뜨는 식으로 몸을 돌보지 않는 분이었다.

불쌍하거나 사정이 딱한 사람을 보면 가지고 있던 재물을 남김없이 보시했던 스님은 항상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꾸밈없이 행동하며근면탈속의 탐욕이 끊어진 격외(格外)의 자유를 누린 희유한 선사였다.

 

이후 혜월 스님의 발길은 영남 구석구석에 미쳤는데선산의 도리사(桃李寺),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양산 천성산(千聖山미타암(彌陀庵과 원효암, 통도사 극락암범어사 등등을 옮겨 다니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오늘날 영남인들의 불심이 어느 지방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융성하게 된 데에는 혜월 스님의 공이 큰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스님은 거처를 옮길 때마다 불모지를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는 일에 열심이어서 사람들은 스님을 보고 '개간(開墾)선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항상 손에서 괭이를 놓지 않고 논밭을 일구고곡식을 심어 가꾸는 한편 땔나무를 하고그러고도 틈이 나면 경내를 청소하고짚신을 삼고새끼를 꼬았다.

스님은 평생 동안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백장 청규를 몸소 실천에 옮긴 선사다.

스님이 무슨 벼슬인양 모시로 만든 옷을 입고 학처럼 고고하게 얼굴을 세우기를 좋아하는 요즈음 스님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었다.

 

당시 스님의 사제인 만공 월면선사는 사찰중창 불사에 매진하고 있었다.

조선조 5백 년 동안 계속된 숭유억불의 결과로 유서 깊은 고찰들이 거의가 다 법당에 물이 샐 정도로 세락 하였으므로 사찰 중건은 꺼져가던 불심을 되살리는 중요한 불사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백용성(龍城)스님은 역경(譯經)과 포교를 통해 불교 중흥을 이끌어내려고 진력한 바 있다.

불양답의 대부분을 유림들에게 빼앗겨버려 절 살림이 곤고한데도 굶지 않을 방법을 찾아 출가를 하는 사람들은 줄을 잇고 있던 때여서 혜월선사는 불모지 개간사업에 매진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당대의 3대 걸승(傑僧)으로 꼽는다.

 

무소유(無所有)와 천진(天眞)으로 생애를 일관하며 가는 곳마다 개간을 하던 혜월스님이 금정산(金井山선암사(仙巖寺)의 주지를 맡은 것은 1921년의 일이었다.

세수 61세로서 환갑을 맞은 나이임에도 다시 또 산을 개간하여 논을 만들기 위해 문전옥답 다섯 마지기를 팔아서 그 돈으로 일꾼들을 고용한 다음 산자락에다 다랑이 논을 만들기 시작했다.

잡목을 베어내고천수답을 개간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이 드는 것이었다.

일 하다기 지치면 일꾼들은 꾀를 내어 혜월스님에게 말했다.

큰스님 법문 한자리 해주이소?”

스님이 이 청을 물리치지 않고 법문을 해주면 이럭저럭 하루해가 저문다.

 

이런 식으로 개간을 하다 보니 문전옥답 다섯 마지기 판돈이 품삯으로 다 들어갔는데도 산골짜기 천수답은 겨우 세마지기 밖에 만들지 못했다.

그래도 스님은 매우 흡족히 여기시고 아침마다 산에 올라가 새 논을 내려다보며 즐거워하였다.

이를 본 제자가 한마디 했다.

스님문전옥답 다섯 마지기 팔아서겨우 산비탈에 자갈논 서마지기 밖에 못 만들었습니다.

이만저만 손해를 본 것이 아닌데뭐가 그리 좋으세요?”

그러자 혜월스님이 말했다.

 

문전옥답 다섯 마지기는 그대로 있지, 논 판 돈은 일군들이 품삯으로 가져가서 그 동안 잘 먹고 살았지, 산비탈에 없던 논 세마지기가 새로 생겼으니이거야말로 이윤을 보아도 크게 본 것이 아니란 말이냐?”

스님그게 손해가 아니라 이득을 본 것이란 말씀이세요?”

인석아너는 어찌 중이 되어가지고 계산법이 그 모양이냐?

나는 이득을 보아도 아주 크게 보았느니라.”

천하의 도인인 혜월선사의 눈에 나의 것남의 것을 가름하는 소유권등기의 개념은 가당치 않은 것이었다.

 

내원사 시절 혜월스님은 다시 대중들과 더불어 몇 해에 걸쳐 황무지 2,000여 평을 개간 훌륭한 논을 만든 적이 있었다.

이것을 욕심낸 마을 사람의 청에 따라 그 가운데 세마지기를 팔게 되었다.

교활했던 매입자는 값을 제대로 처주지 않고 혜월스님의 천진한 마음을 속여서 두마지기 값만 치렀다.

제자들이 그를 힐책하였다.

이때도 혜월스님은 이렇게 말했었다.

"논 세 마지기는 그대로 있고여기 두마지기 논 값이 있으니 논이 다섯 마지기로 불어버렸는데무엇이 불만인고?

장사는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니라.”

 

혜월스님의 자갈밭 개간과 논 값에 얽힌 일화는 그의 세간적인 소유욕을 넘어선 대승적 계산법과 천진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농사 이외에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산업이 달리 없던 때 땅이 차지하는 비중은 쌀이 남아돌아 처치 곤란인 지금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생명줄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욱 혜월스님의 계산법이 돋보인다.

누가 먹어도 먹고 사는 사람이 있으면 되기에 개간을 한 것이지 자신만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개간선사라는 것은 그가 농부처럼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동력을 구하기 어려운 때 농사를 짓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소다.

그래서 스님은 가는 곳마다 소를 길렀다.

그래서 소와 얽힌 일화도 많은데혜월스님이 출타 중인 틈을 타서 고봉스님이 몇몇 스님들을 꼬드겨 절에서 키우던 소를 팔아 그 돈으로 곡차를 실컷 사 마셨다.

남은 돈으로는 맛있는 반찬을 장만해 대중공양을 했다.

혜월스님이 돌아와 보니 소는 없어졌고 스님들은 예불도 안올리고 모두 술에 떨어져 자고 있었다.

스님은 대중을 다 깨운 다음 물었다.

"소를 어떻게 했느냐?"

 

제자들은 겁이 나서 말도 못하고 고봉스님만 바라보고 있었다.

혜월스님은 이내 고봉스님의 소행인 줄 알았지만 모른 체 다시 고함을 쳤다.

"소를 어떻게 했느냐?"

그러자 고봉스님이 일어나서 옷을 벗고 혜월스님 앞에서 네 발로 기어 다니며 "음매! " 하고 소 우는 흉내를 냈다.

그러자 스님은 고봉스님의 볼기짝을 한 대 후려치고는 말했다.

"내 소는 어미소이지 이런 송아지가 아니다."

혜월스님 전법제자 운봉(雲峰)스님의 손법제자 진제스님은 “깨달음을 찾는 납자들의 세계에서는 소를 판 ‘엄청난 일도 공부의 방편이라고 말했다.

 

1924 11 15일 일제강점기하의 선학원(禪學院)에서 제 3회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 정기총회를 열었을  63세의 혜월선사가 법주로 추대되었다.

당시 선우공제회는 통상회원 203인과 특별회원 162인의 선승들이 회원이었는데 선풍(禪風진작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1935 3 7일과 8일 선학원의 바뀐 이름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에서 조선불교 수좌대회를 개최할 때는 조선불교 선종의 종정(宗正)으로 74세의 혜월선사와 만공선사한암선사 세 사람이 추대되었다.

세수로 보나 경허선사로 부터 법을 받은 순서로 보나 혜월스님이 세 사람 중 첫째로 꼽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부산 선암사에 계실 때 혜월스님께서 대중법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설법을 하셨다.

나에게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활인검(活人劍)과 사인검(死人劍등 두 자루의 명검이 있다

그러나 스님은 사람을 살린다는 활인검도사람을 죽인다는 사인검도 어느 누구에게 실제로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혜월스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두 자루의 명검은 신비의 베일 속에 쌓여 있었다.

천하 명검에 대한 소문은 신도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져 나갔다.

이 무렵 경상도 전역을 관할하고 있던 일본인 헌병대장이 이 명검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을 죽이는 명검은 당연히 있을 수 있겠지만사람을 살리는 명검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궁금증을 견딜 수 없었던 헌병대장은 참지 못하고 선암사로 올라갔다.

이때 혜월스님은 산에 나무를 하러 가고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니 허름한 차림의 스님이 지게에 나뭇짐을 지고 내려왔다.

시자스님으로부터 그가 활인검사인검을 가지고 있는 혜월선사라는 말을 들은 헌병대장은 적잖이 실망했다.

명검을 지닌 선사라면 풍모부터 그럴 듯 하리라고 상상했었는데 나뭇짐을 지고 내려온 혜월선사의 모습은 너무도 오종종한 중늙은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헌병대장은 실망감을 감추고 물었다.

스님께서 활인검사인검을 가지고 계신다기에 그걸 구경하러 왔습니다.”

그러신가그럼 보여줄 테니 나를 따라 오시게.”

혜월스님은 섬돌 축대위로 성큼 올라섰다.

헌병대장도 스님의 뒤를 따라 섬돌 축대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스님이 돌아서더니 느닷없이 헌병대장의 뺨을 후려쳤다.

헌병대장은 순식간에 축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가까이 다가온 스님이 한 손을 내밀어 헌병대장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방금 전 당신의 뺨을 때린 손이 죽이는 칼이요,

지금 당신을 일으켜 세우는 손은 살리는 칼이오.”

 

혜월스님은 조선 선종을 대표하는 종정으로 추대된 뒤에도 손수 솔방울을 주우러 다녔다.

솔방울은 자신의 기관지염 치료를 위해서 채취한 것이라는 말도 있고,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도 있다.

1937 6 16일 혜월스님은 평소처럼 산에 가서 솔방울을 주운 다음 절로 돌아오고 있었다.

늘 쉬어가던 곳에서 한숨 돌린 스님은 백양산과 마을을 바라본 후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더니 그대로 원적에 드시었다.

세수 76법랍은 62세였다.

 

길에서 열반에 든 부처님처럼 혜월스님은 집착하지 않는 삶의 가르침을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주었다.

스님의 유훈에 따라 법구는 화장후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고 한줌의 재가 되어 백양산에 뿌려졌다.

부도와 비를 세우지 않은 것도 스님의 뜻을 따른 것이다.

 

제자 운봉(雲峰)을 통해 남긴 임종게다.

 

付雲峰性粹 운봉 성수에게 부치노니,

 

一切有爲法(일체유의법) : 일체의 변하는 법은

本無眞實相(본무진실상) : 본래 진실한 실체가 없네.

於相若無相(어상약무상) : 그 모습을 보고 무상한 뜻을 알면

卽名爲見性(즉명위견성) : 그것을 일러 견성이라 하네.

 

世尊應化 二九五一年 四月  세존응화 2951년 사월

鏡虛門人 慧月(혜월   경허문인 혜월 설

 

무주상 보시의 자비도인이요, 무소유의 무심도인(無心道人)이며 천진무구했던 천진불(天眞佛) 혜월스님법맥은 이후 운봉스님을 통해 향곡스님진제스님에게 계승되었다

 

일제 강점기. 부산 선암사에는 많은 대중이 모여 들었다.

 ‘남방의 도인인 혜월스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선농일치(禪農一致)의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따르는 이유도 있었지만, 농사를 짓지 않고는 대중 외호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선암사에서는 소를 키워 농사일을 거들도록 했다. 지금처럼 농사를 기계로 짓지 않던 시절에 소는 가장 큰 재산이었다. 소에게 우순(于順)라는 이름까지 지어준 혜월스님은 너무 일만 시켜 미안하다. 다음 생에는 사람 몸 받아라. 농사철만 지내면 편히 쉬도록 해줄게라며 아꼈다고 한다.

어느날 고봉(古峰)스님을 비롯한 수좌(首座)들이 양산시장에 가서 소를 팔아 버렸다. 절로 돌아온 수좌들은 원주에게 대중공양 때 맛있는 반찬을 해 달라며 소판 돈을 건넸다고 한다. 시장에 다녀온 혜월스님이 소를 찾았지만 있을 리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공양을 마치고 대중공사가 벌어졌다. 아무리 천진불이라지만 소를 팔아버렸으니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혜월스님은 꾸중대신 살던 소 갖고 오너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때 소를 판 주모자인 고봉스님이 앞으로 나와 네발로 기어 다니며 음매 음매라고 소 울음을 냈다. 이를 본 혜월스님은 내 소는 애비소요, 애미소이지, 이러한 송아지가 아니다라고 했다. 혜월스님 전법제자 운봉(雲峰)스님의 손법제자 진제스님(조계종 원로의원.부산 해운정사 조실)깨달음을 찾는 납자들의 세계에서는 소를 판 엄청난 일도 공부의 방편이라고 말했다.

 “스님, 옷 좀 우리에게 보시하십쇼.” 혜월스님이 마을에 나타나면 동네 거지들이 뒤를 따라 다녔다. 마음 좋기로 소문난 스님이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기 때문이다. 옷을 달라면 옷을 주고, 먹을 것을 달라면 먹을 것을 주니, 거지들에게 스님은 부처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승복을 벗어준 스님은 더럽고 낡은 거지 옷으로 갈아입고 선암사로 돌아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도들이 스님 옷 대주기 바빴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온다. 일제가 수탈을 일삼던 시기로 먹고 사는 일이 너무 어려워 많은 사람이 유랑하던 시절, 중생의 아픔을 보듬어 준 스님은 보살이었다.

 절에 재()가 들어오면 상좌나 신도와 함께 장을 보러갔다. 하지만 장을 온전하게 보고 오는 일은 드물었다.

어느 날 시장에서 콩나물 한 독(광주리)을 샀다. 대중들이 많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옆에서 장사하는 또 다른 상인들이 시님. 우리 콩나물도 사 주세요라고 하면, 스님은 주저 없이 그래요. 그럼 주시오라며 모두 샀다. 한동안 선암사 대중들은 콩나물을 재료로 한 반찬과 국을 질리도록먹어야 했다.

 

스님은 차별을 두지 않고 대중을 맞이했다. ,재가를 분별하지 않았고, 재산, 명예, 지위도 스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깨달음을 이뤄야 할 수행자이며 중생일 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누구든 절에 왔다 돌아가면 문밖까지 나와 공손하게 합장하며 배웅했다고 한다. 부산 원효정사 회주 법산스님은 보살행을 하셨지만 도인이라는 상()을 내지 않으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혜월스님은 법을 전해준 경허(鏡虛)스님이 북방에서 입적해 마을 뒷산에 법구를 모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월(水月)스님이 만공(滿空)스님에게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경허스님 입적은 19124월이었으며, 소식이 도착한 것은 이듬해 여름으로 추정된다. 혜월스님은 철우(鐵牛), 운봉(雲峰), 운암(雲庵)스님 등 선암사 대중 5~6명과 함께 갑산으로 향했다. 만공스님 일행과 합류한 혜월스님은 경허스님 법구가 모셔진 산에 도착했다. 찌는 듯한 무더위로 법구 수습에 선뜻 나서기 어려웠다.

이때 혜월스님은 내가 하지라며 법구를 모셨다. 철우스님 법어집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혜월선사는 철우스님을 앞세우고 다른 스님 몇 분과 수덕사의 만공스님을 모시고 가서 경허선사의 무덤을 파 화장을 하게 되었다. 경허선사의 뼈는 장대한 황골이었고 장례 중에 혜월선사는 그냥 말없이 눈물만 흘리셨는데, 철우스님은 그날 혜월선사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혜월스님 열반 상황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백양산에서 솔방울을 주워 자루에 담고 내려오는 길에 산기슭에서 입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또 하나는 마을에 다녀 올 때면 백양산 중턱 길에서 한 번씩 쉬었는데, 그곳서 입적했다는 것이다. 19372월 어느 날. 그날도 스님은 평소처럼 장을 보고 절로 돌아오고 있었다. 늘 쉬어가던 곳에서 한숨 돌린 스님은 선암사와 마을을 한번 바라본 후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는 자세를 취하다 원적에 들었다. 가고 옴이 따로 없는 선지식의 열반을 혜월스님이 보여준 것만은 사실이다. 길에서 열반에 든 부처님처럼 혜월스님은 집착하지 않는 삶의 가르침을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주었다.

 

혜월스님이 공양을 마치고 양치하는데 치사리(齒舍利)가 나와 방광(放光)을 했다고 한다. 이를 본 혜월스님은 바닥에 떨어진 치사리를 발로 깔아뭉개면서 말했다. “에이, 고약한 놈.” 스님의 유훈에 따라 법구는 화장후 사리를 수습하지 않고 백양산으로 돌아갔다. 부도와 비를 세우지 않은 것도 스님의 뜻을 따른 것이다.

진제스님은 입적에 들기 전 혜월선사는 백양산에 올라 떨어진 솔방울을 주워 불 때는 일로 소일 하셨다면서 일생을 무심도인의 경지에서 수행정진하신 선지식이라고 했다.

 

운봉스님에게 내린 전법게

혜월스님의 법맥은 운봉스님을 통해 향곡, 진제스님에게 계승됐다. 또한 철우스님에게도 게송을 지어주었다. 절도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혜월스님의 필체는 평생 무심도인으로 자유 자재했던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1902년 쓰인 운봉스님의 전법게 한글풀이는 진제스님 법어집 <고담녹월(古潭月)>을 인용했다. 한글풀이는 다음과 같다

付雲峰性粹 운봉 성수에게 부치노니,

 

一切有爲法(일체유의법) : 일체의 유위법은 본래

本無眞實相(본무진실상) : 진실 된 모양이 없으니

於相若無相(어상약무상) : 저 모양 가운데 모양이 없으면

卽名爲見性(즉명위견성) : 곧 이름 하여 견성이라 함이라.

 

世尊應化(세존응화) : 세존응화

二九五一年(2951) : 2951

四月(사월) : 4

鏡虛門人(경허문인) : 경허문인

慧月(혜월) () : 혜월 설함

 

 

천장암 바위굴서 짚신 만들다 깨달음 성취

1862619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신씨(申氏)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13세에 덕숭산 정혜사로 입산해, 15세에 혜안(慧眼)스님을 은사로 출가사문이 됐다

 

관음정진을 하던 혜월스님은 24세 되던 해에 경허스님을 만나면서 새롭게 발심했다.

얼마나 열심히 수행 정진하는지 경허스님이 혜명(혜월스님의 법명)이의 화두일념은 마치 새끼 잃은 어미 소가 새끼소를 생각하는 것과 같고, 3대 독자를 잃은 홀어머니가 죽은 아들 생각하듯 하는구나.”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산 천장암 근처 바위굴에서 7일간 정진하며 정각(正覺)을 성취했다.

정진 6일째 되는 날 경허스님이 내일은 길을 떠나야 하니 짚세기나 하나 지어주게라며 짚을 굴에 넣어주었다. 스승의 뜻에 따라 짚신 한 켤레를 삼아놓고, 다른 짚신을 틀에 넣은 후 하고 두드리는 망치소리에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 같은 일을 전해들은 경허스님은 인가(印可)를 하고 혜월이라는 법호를 지어 주었다. 경허스님혜월스님에게 법을 전하며 한 게송이다. (경허스님 혜월스님)

 

了知一切法(요지일체법) : 일체법을 요달해 알 것 같으면,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 :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는 것.

如是解法性(여시해법성) : 이같이 법성을 깨쳐 알면

卽見盧舍那(즉견노사나) :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依世諦倒提唱(의세제도제창) : 세상 법에 의지해서 그릇 제창하여

無生印靑山脚(무생인청산각) : 문자와 도장이 없는 도리에 청산을 새겼으며

一關以相塗糊(일관이상도호) : 고정된 진리의 상에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

 

깨달음을 이룬 후 혜월스님은 27년간 덕숭산에 머물다 51(1913년 무렵)에 남방으로 주석처를 옮겨 정진했다. 양산 미타암과 내원암 등 선방을 유력하던 스님은 부산 선암사에 머물며 납자들을 지도했다.

 

1937년 어느 날 가고 옴이 없는 경지를 보여주며 원적에 들었다. 세수 75. 법납은 63세였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운봉(雲峰), 호봉(虎峰), 운암(雲庵), 철우(鐵牛) 스님 등이 있다. 부산 안양암 성공(性空)스님도 10년간 혜월스님을 시봉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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