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독사술구장(讀史述九章) 第六章 屈賈(굴가) – 도연명(陶淵明)
사기를 읽고 나서 지은 시
第六章
屈賈(굴가) : 굴원(屈原)과 가의(賈宜)
進德修業(진덕수업) : 도덕(道德)에 힘쓰고 학업을 닦는 것은
將以及時(장이급시) : 장차 때가 오면 세상 위해 일하려는 것이네.
如彼稷契(여피직설) : 순임금 때 후직(后稷)과 설(契)과 같은 이들
孰不願之(숙불원지) : 누가 그들을 원하지 않았겠는가?
嗟乎二賢(차호이현) : 아아, 굴원(屈原)과 가의(賈宜) 두 현자(賢者)는
逢世多疑(봉세다의) : 의심 많은 세상을 만났네.
候瞻寫誌(후첨사지) : 굴원은 정첨윤(鄭詹尹)에게 점을 보며 자신의 뜻을 토로했고
感鵩獻辭(감복헌사) : 가의(賈宜)는 느끼는 바가 있어 복조부(服烏賦)를 지었네.
* 굴원(屈原) :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이며· 정치가이다. 성은 미(羋), 씨는 굴(屈), 이름은 평(平)이며 자는 원(原)이다. 초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나 초나라의 회왕 때 좌도에 임명되었다. 학식이 높고 정치적 식견도 뛰어난 정치가였으며, 회왕의 상담역으로 국사를 도모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으나, 모함을 받아 신임을 잃고 끝내 자살하였다. 그는 이러한 아픔을 시 ‘이소(離騷)’에 담아내었다.
* 가의(賈誼) : 전한(前漢)의 학자이며 정치가로 낙양(洛陽) 사람으로 나이 20여 세에 한 문제(漢 文帝)에게 발탁되어 박사(博士)가 되고, 다시 1년 동안 여러 번 직위가 파격적으로 올라 약관에 태중대부(太中大夫)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대신들의 참소로 장사왕(長沙王)의 태부로 좌천되었다. 한 문제(漢 文帝) 4년(기원전 176년)에 상수(湘水)를 건너다 굴원을 추모하고 비분강개의 뜻을 담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어 상수에 띄웠다.
* 稷(직) : 후직(后稷)을 말한다. 이름이 기(棄)이며, 주(周)나라의 시조로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좋아해 즐겨 온갖 곡식을 심었으며 백성들이 그를 본받았다. 순임금은 기를 태(邰)에 봉하고 후직이라 부르는 한편 희씨(姬氏) 성을 별도로 내렸다.<사기(史記) 권4. 주본기(周本記)〉
* 契(설) : 상(商:殷)나라의 시조이다. 설은 장성해서 우의 치수에 공을 세웠다. 제순이 설에게 “백관이 친목하지 않고 오륜이 어지러우니 그대가 사도(司徒) 벼슬을 맡아 오륜을 가르치되 경건하고 너그럽게 하시오”라고 명했다. 상(商) 땅에 봉하고 자씨(子氏)라는 성을 내렸다. 설은 당요, 우순, 대우 때 흥하여 백성들에게 공업을 드러내니 백성이 평안했다.<사기 권3. 은본기(殷本紀)>
* 候瞻寫誌(후첨사지) : 굴원이 태복(太卜) 정첨윤(鄭詹尹)에게 점을 쳐 자신의 뜻을 토로하다. 誌는 志와 통하여 ‘뜻’.굴원은 한때 왕의 총애를 받아 고위 관직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주위의 시기와 참언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는 태복(太卜) 정첨윤(鄭詹尹)에게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면서 끝까지 충정을 지켜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뜻을 굽히는 것이 좋은지 점을 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정첨윤은 “무릇 척(尺)도 짧을 때가 있고, 촌(寸)도 길 때가 있으며, 물건도 부족할 때가 있고, 지혜도 밝지 못할 때가 있으며, 점복(占卜)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고, 신령함도 통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夫尺有所短, 寸有所長, 物有所不足, 智有所不明, 數有所不逮, 神有所不通.)”라고 대답하여, 점을 쳐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일렀다. <척단촌장(尺短寸長)> <굴원(屈原) : 초사(楚辭)·복거(卜居)〉
* 感鵩獻辭(감복헌사) : 가생(賈生)이 장사왕의 태부가 된 지 3년이 되었을 때 가생의 집에 부엉이가 날아들어 방석 가장자리에 앉았다. 초나라 사람들은 부엉이를 ‘복(服)’이라 불렀다. 당시 가생은 좌천되어 장사에 머물면서 장사 지역이 지형이 낮고 습한 까닭에 스스로 자신의 목숨이 길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를 애석히 여겨 ‘복조부(服烏賦)’를 지어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鵩(복)은 부엉이로 옛 사람들은 상서롭지 못한 새로 여겼다.
독사술구장(讀史述九章)은 동진(東晉)이 멸망(420년)한 직후 남송(南宋) 영초(永初) 원년(420년)에 도연명의 56세 때 지은 시로 도연명(陶淵明)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읽은 감회를 적은 시이다. 이 시의 서문에 “내가 사기를 읽고 느낀 바가 있어 이 시를 지었다(余讀<史記>, 有所感而述之.)”라고 기록하였다.
제6장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에 대한 평가이며 충신이었던 굴원(屈原)과 가의(賈誼)를 칭송하였다. 사마천은 “내가 굴원의 이소(離騷), 천문(天問), 초혼(招魂), 애영(哀郢)을 읽으니 그 내용이 슬펐다. 장사(長沙)에 가서 굴원이 빠져 죽은 깊은 못을 보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의 사람됨에 대해 생각하였다. 가생이 굴원을 애도한 글을 읽고 굴원이 그의 재능으로 다른 제후에게 유세했더라면 어느 나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리가 없었을 터인데 스스로 이같이 생을 마친 것이 또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그의 복조부(服鳥賦)를 읽고는 삶과 죽음을 동일시하고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을 가볍게 여긴 사실을 알게 되자 또 망연자실하였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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