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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佛 心***/華嚴經

華嚴經 80권본의 飜譯

by 산산바다 2019. 12. 31.

산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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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華嚴經 80권본의 飜譯

                              () 우전국삼장(??三藏) 반야(般若) 한역, 이운허 번역

대방광불화엄경은 석가세존께서 보리수 아래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신 지 2·7일이 되던 때에 말씀하셨다는 것과, 화엄경에는 여섯 가지 본()이 있다는 것과, 또 화엄경에 세 가지 번역이 있다.

이 화엄경은 당나라 중종 임금의 사성(嗣聖) 12년부터 16년까지(서기695699) 5년 동안에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것이니, 7처에서 9()에 말씀한 것으로 모두 3980권으로 되었다.

()나라 때 번역하였다고 해서 당본 화엄경이라 하고, 80권으로 되었다고 해서 80화엄이라고도 한다.

또 동진(東晋)시대 안제(安帝)의 의희(義熙) 14년부터 공제(恭帝)의 원희(元熙) 원년까지에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번역한 경(7834, 36)을 구역이라 함에 대하여 이 경을 신역 화엄경이라 한다.

 

 

. 글로 나누는 네 가지

 

이 화엄경의 내용을 말하는데, 당나라의 현수(賢首)대사부터 경의 대강령에 대하여, 글을 따라서는 네 가지로 나누고, 뜻을 따라서는 다섯 번의 원인과 결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1) 과보를 말하여 신심을 내게 하는[擧果勸樂生信分] 것이니, 1회에서 말씀한 여섯품(1권에서 11권까지)이 비로자나불의 원만한 과보를 말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좋아하는 욕망을 일으키고 믿는 마음을 내게 하는 것이요.

(2) 인행(因行)을 닦아서 과보를 얻음을 말하여

지혜를 내게 하는[修因契果生解分] 것이니, 2회에서 말씀한 여래명호품으로부터 제7회에서 말씀한 여래출현품까지 서른한품(12권에서 52권까지)은 십신과 십주와 십행과 십회향과 십지의 다섯 계단의 인행을 닦아서 부처의 과보를 이루는 일을 말하였는데, 원인과 결과가 서로 계속되며 차례차례 위의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을 말한 것으로, 인을 닦아서 과보를 받는 이치에 의지하여 지혜를 내게 하는 것이요.

(3) 수행하는 법에 의탁하여 닦아 나아가면 인행을 성취하는[託法進修成行分] 것이니, 8회에서 말씀한 이세간품(53권에서 59권까지)은 여러 계단의 수행하는 법에 의탁하여 2천 가지의 인행을 닦아서 성취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한 것이요.

(4) 사람에 의하여 증득하면 과덕을 이룬다는[依人證入成德分] 것이니, 9 회의 입법계품(60권에서 80권까지)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53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52계단의 인행을 닦아서 법계를 증득하고 훌륭한 덕을 성취하는 것이다.

 

 

. 뜻으로 나누는 다섯 번[五會]

 

이 경 내용의 뜻을 따라 다섯 번의 원인과 결과[五周因果]로 나눔

(1) 1회의 처음에 말한 세주묘엄품은 화엄경을 말하게 된 인연을 말한 서문이므로 그것은 제외하고, 2 여래현상품에서 제5 화장세계품까지는 비로자나불의 과상(果上)의 덕을 말하였고, 6 비로자나품에서는 옛적에 닦던 인행을 말하였으므로 이것을 믿을 인과[所信因果]라 하고

(2) 2회의 여래명호품에서 제7회의 보살주처품까지 스물여섯 품에서는 50위의 인행이 차별한 것을 말하였고, 다음의 불부사의법품과 여래십신상해품과 여래수호광명공덕품에서는 부처님 과상의 3덕이 차별한 모양을 말하였으므로 이것을 차별한 인과[差別因果]라 하고,

(3) 7회의 보현행품에는 보현의 원만한 인행을 말하고, 여래출현품에서는 비로자나불의 원만한 과상을 말하였는데, 앞에 있는 차별한 인과의 모양을 융통하여, 인은 반드시 과를 포섭하고 과는 반드시 인을 포섭하는 것이어서 인과 과가 서로 융통하여 둘이 아닌 것을 보이었으므로 평등한 인과[平等因果]라 하고,

(4) 8회의 이세간품에는 처음에 2천의 수행하는 법을 말하여 인행을 밝히고, 다음에는 여덟 가지 모양으로 성불하는 큰 작용을 말하여 과위(果位)의 모양을 말하였으므로, 수행을 성취하는 인과[成行因果]라 하고,

(5) 9회의 입법계품에는 처음 본회(本會)에서는 부처님의 자유자재한 작용을 말하여 증득하는 과상을 보이었고, 다음에는 선재동자가 선지식들을 방문하면서 인행을 닦아서 법계의 법문에 들어가는 일을 말하였으므로 증득하는 인과[證入因果]라 한다

그러하여 이 경의 내용은 통틀어 다섯 번의 인과를 환히 보인 것이니, 이것을 앞에 말한 네 가지에 배대한다면, 네 가지는 신()과 해()와 행()과 증()4분인데, 믿을 인과는 신이요, 차별한 인과와 평등한 인과는 해요, 수행을 성취하는 인과는 행이요, 증득하는 인과는 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과 뜻이 이 네 가지에 일체하는 것이니 화엄경의 강령은 ()()()()의 넷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이 화엄경의 79 서른아홉 품과 설법한 이들과 다섯 번 인과(因果와 네 가지 부분을 아래에 표시한다

 

 

. 화엄경 번역본(華嚴經 飜譯本)

 

화엄경은 약 4백년에 걸쳐서 3번 한역(漢譯)됐으며 십지품(十地品)은 가장 일찍 성립된 것으로 그 연대는 1~2세기경이라고 한다.

독립된 십지경(十地經)으로 전해지고 있는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은 중관(中觀)철학을 확립한 용수(龍樹) 이전에 성립된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로 산스크리트 원전이 있는 것은 이 두 품뿐이다. 따라서 입법계품이나 십지품은 인도 문화권에서 성립되었다고 보이지만 그 외의 다른 경전은 또 다른 지역에서 성립되어졌다고 여겨진다.

예를 들면 신강의 위구르 자치구에 가면 대단한 불교유적이 있다. 옛날 코탄(Khotan, 지금의 和田)은 엄청난 불교사원이 많이 있었던 곳인데 중국의 현장법사도 인도로부터의 돌아오는 길에 이곳 코탄을 지나가고 있다. 여기에서 4세기 중엽까지 화엄경이 편찬되어 그것이 실크로드를 지나 돈황, 옥문을 지나서 장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의 편찬은 각각의 품별로 대단히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이루어졌고 그것이 4세기에 하나의 경전으로 집대성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 한역본(漢譯本)에는 40권본, 60권본, 80권본3가지가 있다.

 

40권본은 당()의 정원(貞元) 11(795) 남인도의 오타국(烏茶國) 사자왕(獅子王)이 반야 삼장(般若 三藏)에게 들려 보낸 화엄경의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을 반야 삼장이 번역한 것으로 입부사의 해탈경계보현행원품(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이라고 부르는 경이다.

이 번역(飜譯)에는 중국 화엄종의 제4조 청량징관(淸凉澄觀)대사도 참여하였다고 한다. 40권본은 60권본이나 80권본 중의 마지막 장인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화엄경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60권본(418420)은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369-429)가 한역한 것으로서 동진(東晋)시대에 번역되었다고 해서 진역화엄경(晋譯華嚴經)이라고 하며 가장 먼저 번역되었으므로 구역(舊譯)화엄경이라고도 한다. 이 경은 38천의 게송, 34()으로 짜여 있고 설법한 장소는 7곳이며 8번에 걸쳐 설하였으므로 이것을 78(七處八會)라고 한다.

법장(法藏, 643-712 : 중국 당()나라 때의 승려로 법호는 현수대사 또는 국일법사이며 중국 화엄종의 제3조로 이 종파의 교리를 집대성하였음)의 화엄교학(華嚴敎學)은 이 60권본을 바탕으로 조직되어 있다.

 

80권본(695699)은 당())시대인 699년에 서역에 있었던 코탄(지금은 和田)국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한역한 것으로서 109,508구절 45천 게송, 39587,261자로 짜여 있고 설법한 장소는 7곳이며 9번에 걸쳐 설하였으므로 이것을 79(七處九會)라고 한다.

이 경은 구역인 진역화엄경보다 늦게 번역하였으므로 신역(新譯)화엄경이라고 하고 당대(唐代)에 번역되었으므로 당역화엄경(唐譯華嚴經)이라고 한다. 징관(澄觀, 738~839 : 화엄종 제4대조. 청량대사·화엄보살로 호칭된다)의 화엄교학은 80권본을 바탕으로 조직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80화엄경(실차난타 역)을 가지고 신행(信行)의 근본(根本)으로 삼는다.

 60화엄은 7곳에서 8번에 걸쳐 설해졌다고 하고, 80화엄은 7곳에서 9번에 걸쳐 설해졌다고 하여 번역에 따라 모임의 횟수에 차이가 있고 십정품(十定品)80화엄에만 있다. 또 제1의 모임에서 설해진 내용이 60화엄은 2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80화엄은 6장으로 되어 있고, 6회 타화자재천궁회(他化自在天宮會)의 구성과 7회 보광법당회(普光法堂會)의 구성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점 등에 비추어 이 두 경의 구성이 같지 않음을 말해 준다. 이것은 원전인 범본에 차이가 있음을 뜻하고 지엄이 화엄경공목장에 대자은사 화엄범본(大慈恩寺華嚴梵本)을 확인하고 그것을 조사한 기록을 남기고 있어 더욱 증거(證據)할 수가 있다.

지엄이 조사한 대자은사 화엄범본은 제1장의 품명이 60화엄의 제1장의 품명 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과 같으나 장역화엄(藏譯華嚴)1장의 품명은 80화엄의 품명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과 같은 일체세주묘엄출현품(一切世主妙嚴出現品)이다. 또 십정품(十定品)의 경우 60화엄과 대자은사 화엄범본에는 없으나 장역화엄경에는 있다. 따라서 60권본과 80권본의 두 화엄경은 각각 다른 계통의 범본(梵本)을 바탕으로 한역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60화엄의 경우, 60화엄의 후기(後記)나 경록(經錄)인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의 출경후기(出經後記) 등에 의하면, 지법령(支法領)이라고 하는 도인(道人)이 코탄(Khotan, 于闐)에서 화엄경의 범본을 입수하여 동진(東晋)의 의희(義熙) 14(418)에 양주(楊州)의 도량사(道場寺)로 가져와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각현(覺賢)으로 번역됨)에게 청해서 번역하였다고 한다. 번역은 4206월에 일단 끝났으나 42112월까지 1년 반에 걸쳐서 교정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번역은 원본인 범본 자체에 불비(不備)한 점이 많아서 당()의 영융(永隆) 원년(元年. 680) 지바카라(Divakara, 地婆訶羅)에 의해서 번역이 보충되었다.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 의하면 이때, 지바카라는 천축(天竺)의 여러 범본과 곤륜본(崑崙本), 그리고 코탄이 별행본(別行本)을 참조하여 그때까지 60화엄에 번역되지 않은 입법계품을 비롯하여, 상당한 분량을 번역해서 보충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안으로 미루어 볼 때, 4세기말 이전, 늦어도 5세기 이전에는 화엄경이 범본(梵本)이 어떤 형태로든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680년 지바카라에 의해서 60화엄이 보충 번역될 때까지는 여러 가지 범본이 성립되었음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80화엄은 대승불교에 깊이 귀의하여 불법을 널리 펼친 당의 여제 측천무후(則天武后)60화엄경의 미비함을 알고 이를 보완하려고 고심하던 중 코탄국(于闐國)에 범본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범본(梵本)과 사람을 모셔오게 하였고 그 사람이 바로 실차난타(實叉難陀)인데 범어 45천 게송을 가져와서 669년 서역에서 온 보리유지(菩提流支) 삼장(三藏)과 중국의 삼장 의정(義淨)의 도움을 받아 한역한 것이다.

측천무후는 번역 사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80화엄경의 서문을 직접 쓰기까지 하였으며 중국 화엄종의 제3조 현수 법장(賢首法藏)도 그 번역에 참여했다고 한다. 모두 80권으로 7() 9() 40()으로 당나라 때에 번역되었다고 하여 당경(唐經) 또는 신경(新經)이라 한다.

80화엄은 60화엄에 비해서 문장이 유창(流暢)하고 뜻도 명료하였으며 60화엄을 구역(舊譯), 80화엄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40화엄은 80화엄이 번역된 지 100년 후에 남천축에서 보내온 범본을 반야(般若) 삼장(三藏)이 당()나라 정원(貞元)년간 795~798년에 번역(飜譯)한 것이다. 40화엄경(華嚴經)은 중국 화엄종의 제4조 청량 징관(淸凉澄觀)대사도 참여했다고 한다. 내용은 다른 3가지 화엄경의 마지막 장()에 상당하는 입법계품(入法界品)이 현저하게 증폭(增幅)되고 개정된 것으로서 40권 전체가 입불가사의 해탈경계 보현행원품(入不可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 입법계품)1품만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화엄경의 완본(完本)이 아니고 일부분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 3가지 화엄경이 한역(漢譯)되기 이전, 60화엄이 한역된 420년 이전, 2세기 후반의 후한(後漢)시대 이후에 이미 60화엄이나 80화엄에 수용된 품과 같은 내용의 경들이 한역되어 있었으며, 이와 같은 경들이 한역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2세기 후반 이전에 그 범본들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화엄경의 품 중에서 특히 중요한 품은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立法界品)이다. 이 두 품은 중관철학(中觀哲學)을 확립한 용수(龍樹, 150250)이전에 인도에서 성립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용수의 저서 중에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화엄경은 이 2품이 오늘의 코탄(Khotan, 우전국)에 전해져 모태(母胎)가 되어 이루어졌다고 한다.

화엄종(華嚴宗)을 대성(大成)한 법장의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에 의하면 60화엄이 한역되기 이전에 한역된 화엄경에 속하는 경전은 상당한 수에 달하였다고 한다따라서 오늘날 화엄경의 완본으로 꼽히는 60화엄이나 80화엄은 일시에 성립된 것이 아니라, 오늘의 완본 화엄경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품이 이미 성립되어 있었고, 이품들을 일정한 의도(意圖)와 구상(構想)을 바탕으로 집성(集成)하고 거기에다 이들과 공통된 성격을 가진 다른 새로운 대승경전을 첨가해서 체계적으로 편집하여 하나의 경으로 완성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설(傳說)에 의하면 화엄경에는 3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상본(上本)으로서 대부사의해탈경(大不思議解脫經)이라고도 불리며 티끌같이 많은 무수한 게송으로 되어있고, 부사의(不思議)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헤아리거나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뜻이다. 둘째는 중본(中本)으로서 4988백의 게송(偈頌)12백품()으로 엮어졌으며, 셋째는 하본(下本)으로서 10만의 게송이 38품으로 엮어졌다고 한다. 3가지의 화엄경은 본래 용궁(龍宮)에 있었는데 인간이 받아들이도록 가장 수준을 낮춘 하본 화엄경만 용수에 의해서 지상에 전해져 오늘의 화엄경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전설은 화엄경과 바다와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 준다. 실제로 입법계품에 상당하는 범본 간다뷰하(Gandavyuha)에는 남인도(南印度)에 대한 기사가 많이 등장하며 랑카(오늘의 스리랑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고 바다()를 뜻하는 사가라(sagara)의 단어가 상당히 많이 동원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입법계품이 남인도를 배경으로 해서 성립하였다는 추정을 낳게 하고 있다.

 

 

. 華嚴經種類

 

우리나라 화엄종의 근본이 되는 불교경전. 원명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현재 한역본(漢譯本)으로는 권수에 따라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60화엄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80화엄, 반야(般若)가 번역한 40화엄 등 세 가지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60화엄에는 34(), 80화엄에는 39이 들어 있으며, 그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40화엄은 60권본과 80권본의 마지막 장인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화엄경의 완역본은 아니다.

이 한역본이 나타난 이래 우리나라 및 중국에 화엄사상을 형성했을 뿐 아니라, 그 회통적인 철학성은 동양사상 속에서 하나의 강력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이 경은 60화엄의 경우 7(경을 설한 장소) 8(경을 설하는 모임) 34, 80화엄의 경우는 7939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을 설한 장소를 60화엄에 의해서 살펴보면, 1 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와 제2 보광법당회(普光法堂會)는 지상(地上)이고, 3 도리천회(忉利天會)와 제4 야마천궁회(夜摩天宮會), 5 도솔천궁회(兜率天宮會), 6 타화자재천궁회(他化自在天宮會)는 천상(天上)이며 제7은 다시 지상의 보광법당회와 제8 중각강당회(重閣講堂會)에서 설한다.

이 여덟 회좌(會座) 중 보광법당회가 두 번 있으므로 7처가 되고, 80화엄의 경우는 보광법당회가 세 번 있기 때문에 9회가 된다.

그 내용을 보면, 1회는 석가모니불이 마가다국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이제 막 대각(大覺)을 이루고 묵묵히 앉아 광채를 발하고 있다. 그 둘레에는 많은 보살들이 있어 한 사람씩 일어나 부처님의 덕을 찬양한다. 이 때 석가모니는 이 경의 교주(敎主)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일체가 되어 있다.

2회에서는 석가모니가 자리를 옮겨 보광법당의 사자좌(獅子座)에 앉아 있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먼저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四諦)의 법을 설한 뒤 10명의 보살들이 각각 열 가지의 심오한 진리를 설한다.

3회부터는 설법 장소가 천상으로 옮겨진다. 3회에서는 십주(十住)의 법을 설하고, 4회에서는 십행(十行), 5회에서는 십회향(十廻向), 6회에서는 십지(十地)를 설한다. 이 제6회는 현재 범어의 원전이 남아 있는 십지품(十地品)이며, 화엄경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이 품은 십지경(十地經)으로 따로 편찬되었다.

 

화엄경십지경은 고려 및 조선 시대 승과(僧科)의 교종선(敎宗選) 시험과목으로 채택된 중요 경전이기도 하다. 이 십지품에서는 보살의 수행발전 단계를 열 가지로 나누어 설하고 있다.

십지의 1은 환희지(歡喜地), 깨달음이 열려 기쁨이 넘쳐 있는 경지이다. 2 이구지(離垢地)는 기본적인 도덕의 훈련 과정이며, 3 명지(明地)는 무상(無常)의 성찰을 통하여 점차 지혜의 빛을 나타내며, 4 염지(焰地)는 진리를 향한 열의로 그 지혜가 더욱 증대하며, 5 난승지(難勝地)는 평등한 마음을 갖추어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지배를 받는 일이 없는 경지이다.

6 현전지(現前地)는 십평등지(十平等地)를 갖추어 일체가 마음의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 허망한 것임을 깨달아 아는 경지이다.

7 원행지(遠行地)는 일체불법(一切佛法)을 일으키는 경지로서 열반(涅槃)에도 생사(生死)에도 자유로이 출입하며, 8 부동지(不動地)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는 경지로서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의 움직임이 자연히 솟아나오며, 9 선혜지(善慧地)는 훌륭한 지혜를 성취하고 무애행(無碍行)이 이룩되는 경지로서 부처님의 법장(法藏진리의 창고)에 들어가 불가사의한 큰 힘인 해탈의 지혜를 얻으며, 10 법운지(法雲地)는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은 번뇌의 불길을 모조리 꺼 버린 해탈의 경지이다.

 

또한 이 십지품은 그 전체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서 노력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한다는 이타행(利他行)의 수행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십지는 지혜와 자비가 완성됨에 따라 나타나는 여래성(如來性)의 흥기(興起)와 성기(性起)의 외적인 표현이며, 그에 관한 이론적 체계화로 평가되고 있다.

7회는 다시 지상의 보광법당에서 지금까지의 설법을 요약해서 설한다. 8회는 입법계품으로 이 또한 범어 원전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는 선재(善財)라는 동자가 53인의 선지식을 찾아 도()를 구하는 과정을 적어 정진이 곧 불교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만나는 선지식 중에는 뛰어난 보살만이 아니라 비구·비구니·소년·소녀·의사·장자(長者창부(娼婦외도(外道) 등 갖가지 직업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다.

이는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보리심의 유무가 문제라는 대승불교의 수행 이상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이 경에는 십현연기무애법문(十玄緣起無碍法門사법계설(四法界說육상원융론(六相圓融論) 등 불교의 세계관 및 인생관 등의 주요 사상들이 함축성 있게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의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이 경을 가져와서 강설한 이후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경이 화엄사상으로서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 이 경을 연구하고 화엄종을 창종함에 따라 본격화되었다.

그 뒤 우리나라 불교 교학(敎學)의 중심은 이 경과 법화경(法華經)을 중심으로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이 경은 선종(禪宗)에서도 그 연구가 활발하여 소의경전으로 삼았으므로, 선종이 주류를 이루었던 조선시대에도 선승들이 한결같이 이 경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특이한 흐름을 보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승려가 편찬한 이 경의 판본으로는 신라시대의 화엄사석벽각판(華嚴寺石壁刻板) 1098(숙종 3)의 수창판(壽昌板) 25종이 현재 전해오고 있다.

 

화엄경은 삼국시대에 유통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로 넘어오면서 신라 화엄학이 정립되었다. 아울러 화엄종이 성립되어 화엄사찰이 건립되기에 이르렀고, 화엄사상도 정립되었다.

현재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화엄경은 구례 화엄사에 있는 화엄석경(華嚴石經)이다. 이 석경은 세 종류의 화엄경번역본 중 어느 것을 새긴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새긴 연대도 677(문무왕 17)886(정강왕 1)의 두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국보로 지정되어 호암미술관(湖巖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백지묵서사경(新羅白紙墨書寫經)754(경덕왕 13)에 필사된 주본(周本)의 일부이다. 여기에서 이 당시에 이미 공덕경(功德經)으로 필사된 것으로 보아 754년보다 훨씬 이전에 전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통일신라시대 후기에는 이미 세 종류의 화엄경이 모두 전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도 균여(均如의천(義天) 등의 고승에 의해 화엄경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많은 연구 주석서가 전해 오고 있다.

이 당시에 간행된 것으로는 1020(현종 11)에 현화사(玄化寺)에서 삼본화엄경(三本華嚴經)을 판각한 기록이 있으며, 해인사에는 1098년에 판각된 삼본화엄경판과 1200년대에 판각된 것이 섞여 보존되어 있다.

이 밖에도 해인사에서 판각된 1098년 간기(刊記)가 있는 진본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이와 같은 시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진본·주본·정원본이 여러 종 보존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시대의 간본으로 추정되는 증륜사(拯倫寺) 판본도 전해지고 있다. 이를 보면 고려 숙종 때 삼본화엄경이 모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주 부석사에도 삼본화엄경판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들은 매행 34자씩 배열되어 있는 경판으로 13세기경에 판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엄경은 다른 경에 비해 권수가 많아 한번 판각하기란 쉽지 않다.

이 밖에 국가에서 판각한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에 이들 삼본화엄경이 포함되어 있고, 고려 초 의천에 의하여 화엄경에 대한 연구 주석서들이 대부분 전래되었다. 속장경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鈔)40권으로 현재 일본 나라(奈良)에 전해지고 있다.

이와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사경공덕(寫經功德)을 위한 화엄경의 사경이 금과 은을 사용하여 상당히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선(() 양종이 되면서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화엄종이 역사적인 특성을 잃어버려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화엄경은 여전히 선교합일사상에서 선·교를 막론하고 주된 자리를 유지하였으나, 다른 경전에 비해서 화엄경의 판각은 한동안 침체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인악(仁嶽)과 연담(蓮潭)이 나와 화엄학에 대한 연구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여전히 불경 가운데 왕좌를 누리면서 간행도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 유통된 화엄경은 한동안 당나라 징관(澄觀)의 소초(疏鈔)에 정원(淨源)이 다시 주석(注釋)을 붙인 120권짜리 화엄경이 유행하다가, 징관의 화엄경수소연의초가 채택되어 오늘날까지 화엄경하면 징관의 소초 80권으로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화엄경은 워낙 분량이 많은 데다 조선 초기에는 사찰경제가 많은 핍박을 받아 간행이 매우 벅찬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 당시는 주로 해인사 대장경판 등 고려 때 목판에서 인출하여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조선 중기에 내려와 불교전문강원에서 화엄경이 교재로 채택되어 화엄경주석본을 참고하게 되었을 것이며, 아울러 화엄경주석본 판각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판본으로는 1556(명종 11)에서 1564년까지 9년이 걸려 황해도귀진사(歸眞寺)에서 한강 이북에 있는 20여 개 사찰의 협력을 받아 징관의 소초에 정원이 주석을 붙인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120권본을 판각한 것이 있다.

그 뒤 1633(인조 11)에서 1635년까지 3년 동안 순천 송광사에서 귀진사 판본을 복각(覆刻)하였는데, 이 때 판각한 경판이 아직도 송광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 판은 경상도서봉사(栖鳳寺)와 전라도 여러 사찰의 협조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황해도 귀진사 판본은 거리 관계로 구해 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686(숙종 12)에는 영각사(靈覺寺)에서 또 한 차례 복각하였다. 이후 이 120권짜리 화엄경소는 더 이상 판각되지 않고 화엄경소초가 판각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120권짜리보다 80권짜리 화엄경소초가 더 간결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화엄경소초는 성총(性聰)에 의하여 1689년부터 1692년까지 전라남도 순천시징광사(澄光寺)를 중심으로 판각되었다. 이 판각도 대원암(大源庵)과 범어사 등 남쪽 사찰의 협조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 중 화엄현담(華嚴玄談)이 빠졌으므로 1700년에 범어사에서 판각하여 보충하였다.

그 뒤 징광사판이 불타 버려서 상언(尙彦)이 영각사를 중심으로 1773(영조 49)부터 1775년까지 3년이 걸려 징광사판의 오류를 바로잡아 복각하였다. 이 판도 역시 영각사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내원정사·묘각사 등 전라도·경상도 사찰의 협조로 이루어졌는데, 1948년 지리산 공비들에 의하여 불타 버렸다.

이후 영각사판이 낡아 1855(철종 6)에서 1856년 사이에 영기(永奇)가 중심이 되어 봉은사에서 통도사·범어사의 협조로 판각한 경판이 현재까지 봉은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 판은 영각사판을 복각한 것으로, 현재 각 강원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화엄경 판각은 여러 사찰에서 힘을 합쳐서 판각한 것과 다른 경전처럼 동시대에 여러 사찰에서 판각한 것이 없고, 경판이 소실된 뒤에 복각한 것이 특징이다.

화엄경은 워낙 양이 많으므로 판각이 성행하지 않았고, 대신 각 품별(品別) 판각이 상당히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도 보현행원품판각이 제일 성행하였다.

1245(고종 32)에 정안(鄭晏)이 판각한 해인사본을 비롯하여 1449(세종 31)의 간본, 1469(예종 1)의 안성 청룡사판, 1721(경종 1)의 운흥사판, 1736(영조 12)의 동화사판, 1742년의 성산 쌍계사판(경판은 해인사에 있음), 1760(영조 36)의 은진 쌍계사판, 1774(영조 50)의 지리산 대암난야판(臺岩蘭若板), 1898년의 표충사판과 대둔사판(大芚寺板)이 있다. 특이한 점은 이들 판본이 모두 반야의 번역본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밖에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는 고려시대 목판으로는 1331(충혜왕 1)관음지식품(觀音知識品), 1349(충정왕 1)약신중(略神衆)·정행품(淨行品)·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觀自在菩薩所說法門別行疏)등이 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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