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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Agra)의 타지마할(Taj Mahal)에 들어가 보다.

by 산산바다 2017.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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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Agra)의 타지마할(Taj Mahal)에 들어가 보다.

2017. 2. 16.

인도 아그라의 타지마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입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타지마할(Taj Mahal)은 인도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유적지 중 하나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입니다.

무굴 제국의 5대 황제였던 샤 자한황제가 아내였던 뭄타즈 마할에 대한 변치 않는 마음을 간직하고자 역사상 유례없는 화려한 무덤을 건설해 그녀에게 바치겠다는 계획이 무려 22년 동안 타지마할을 짓게 하였다.

 

아그라의 TAJ VILAS 호텔에서 편안하게 쉬고 아침 일찍 타지마할에 가기위해 6:30에 출발하는군요.

 

무굴제국의 안정과 번영을 이룬 제 5대 황제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아내 뭄타즈 마할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낳은 타지마할로 유명한 무굴제국 황제 샤자한은 그의 치세에 무굴제국은 안정과 번영을 구가했다.

 

타지마할 입장권

 

검문검색에 이상이 없으므로 안으로 들어왔군요.

 

이문을 통과하면 타지마할이 보이더군요.

 

드디어 타지마할이 보이는군요.

 

그의 궁정(宮廷)에 온 외국 사절들은 궁정(宮廷)의 화려함에 크게 놀라고, 고도로 체계화되고 질서 잡힌 통치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는 황위 계승을 둘러 싼 골육상쟁의 비극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요즘 돈으로는 720억원의 비용과 연간 20만명의 인원 그리고 1,000여 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어 1653년에 완성되었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타지마할(Taj Mahal)무굴 제국 황제인 샤 자한이 아내인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 영묘는 뭄타즈 마할('선택받은 궁전'이라는 뜻)이라고도 하는데, 이 이름이 와전되어 타지마할이라고 한다.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은 1612년에 황제와 결혼한 뒤 서로 떨어져 살 수 없는 반려자로 지냈으나 1631년 부란푸르라는 도시에서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타지마할은 인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온 건축가들의 공동 설계에 따라 1632년경에 착공되었다. 매일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1643년경에 영묘가 완공되었고, 1649년경에는 모스크·성벽·통로 등 부속건물이 완공되었다. 타지마할 전체가 완공되기까지는 22년의 세월과 4,000만 루피의 비용이 들었다.

 

 이 복합 건물은 너비 580m, 길이 350m인 직4각형으로, 남북으로 늘어서 있다. 이 중앙에는 한 변이 305m인 정4각형 정원이 있고, 그 북쪽과 남쪽에 그보다 약간 작은 2개의 직4각형 구역이 있다. 남쪽 구역은 타지마할로 들어가는 사암 출입구와 거기에 딸린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 구역은 야무나 강가까지 뻗어 있고 거기에 영묘가 있다.

 

위 사진은 동쪽의 자와브이고

 

영묘의 동서 양쪽에는 완전 대칭을 이루는 2개의 건물이 붙어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은 모스크이며 동쪽의 것은 미학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운 이른바 '자와브'이다. 모퉁이에 8각형 탑이 솟아 있는 높은 벽이 북쪽 구역과 중정을 둘러싸고 있으며, 남쪽 울타리 밖에는 마구간과 경비병 숙소가 있다.

 

아래 사진은 서쪽의 모스크입니다.

 

여기에서 신발 겉에 이런 덪신을 신어야 타지마할에 들어갈 수 있답니다.

 

타지마할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타지마할 내부에 장식된속에는 두개의 관이 놓여있는 영묘라는군요.

 

영묘는 높이 7m의 대리석 대좌 위에 지어졌으며 사방이 똑같은 모습으로, 모서리는 정교하게 깎여 있고 각 면마다 높이 33m로 우뚝 솟은 거대한 아치가 있다. 높은 원통형 벽(drum)으로 떠받친 양파 모양의 2중 돔이 이 건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무굴 제국의 건축 관행은 나중에 증축하거나 개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건축가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체로서 타지마할을 구상하고 설계했다. 이 복합체의 북쪽 끝에는 영묘·모스크·자와브 등의 가장 중요한 건물들이 모두 모여 있다.

이 대리석 무덤은 아름다운 돌로 장식되어 있으며, 여기저기에 보석을 박은 투각한 대리석 막이 둘러 처져 있다. 정원과 같은 높이에 있는 지하 납골당에는 진짜 석관이 있다. 타지마할은 무굴 제국 최고의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의 하나로 여겨진다.

 

붉은 시크리 사암으로 지은 모스크와 자와브에는 대리석을 두른 돔과 아키트레이브(평방)가 있으며 일부 표면이 단단한 돌(pietra dura)로 장식되어 있어, 순수한 하얀색 마크라나 대리석으로 지은 영묘와는 색깔과 감촉에서 대조를 이룬다. (피에트라두라).

 

영묘의 내부는 8각형 방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얕은 부조 무늬와 아름다운 돌로 장식된 이 묘실에는 황제 부부의 기념비가 있다.

 

타지마할의 내부를 관람하고 밖으로 나와 타지마할 건물을 한바퀴돌며 동쪽에 있는 자와브에 들려 나온다.

 

영묘의 각 아치 위에 있는 난간과 각 모서리 위에 있는 장식 뾰족탑 및 돔을 덮은 원통형 정자는 영묘의 스카이라인에 율동감을 준다. 대좌의 각 모서리에는 3층 미나레트가 서 있는데, 대좌와의 대리석 접합부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영묘의 대리석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총애를 받은 셋째 아들

무굴제국 4대 황제 자항기르의 셋째 아들로 라호르에서 태어난 샤 자한(쿠람 시하브 웃 딘 무함마드)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가장 큰 총애를 받았다. 쿠람이라는 이름은 할아버지 악바르 대제가 직접 지어 준 것으로, 페르시아어로 기쁘게 한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부터 샤 자한은 폭넓은 교양을 쌓았고, 10대 중반부터 원정에 참가하여 군사적 능력도 보여주었다. 16살 때 그는 무굴제국 건국자 바부르가 세운 카불의 요새에 군사시설을 짓는 일을 이끌고, 아그라 성의 건물들을 새로 축조하면서 건축에서도 일찍부터 재능을 나타냈다.

무굴제국의 황위 계승은 장자에게 당연한 권리를 주는 방식이 아니었다. 전공(戰功)을 세우고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황자(皇子)가 황위를 차지했다. 황위 계승을 둘러싼 음모와 반란은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이었다. 샤 자한의 황위 계승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타지마할 뒤엔 야무나강이 있군요.

자항기르 치세 말기에는 자항기르의 스무 번째 아내 누르 자한(재혼)과 그 오빠인 페르시아계 귀족 압둘 하산 아사프 칸의 영향력이 막강했다아사프 칸은 샤 자한의 장인이기도 했다. 샤 자한은 15살 때 아사프 칸의 14살 난 딸 아르주만드 바누 베굼(뭄타즈 마할)과 정혼하고 1612년 혼인했다.

 

음모와 반란의 세월.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황제가 되다

샤 자한1617년 데칸 지역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어 제국의 남쪽 변경을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자항기르는 그런 아들에게 세계의 용맹한 왕’(샤 자한 바하두르)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로써 쿠람이라는 본래 이름 대신 샤 자한이 된 것이다.

 

타지마할 뒷쪽에는 야무나강이 있고 강건너에 아그라성이 있답니다.

 

그러나 자항기르가 노약해진 사이 권력 투쟁이 치열해졌다. 자항기르의 장자 쿠스라우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눈을 멀게 하는 벌을 받았고, 둘째 아들 바르비즈는 병약한데다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리고 셋째 아들이 샤 자한, 넷째 아들은 샤야르였다. 누르 자한은 처음에 샤 자한을 지지했지만 샤 자한보다 만만한 샤야르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타지마할을 들리고 한바퀴 돌아 나오면서 뒤돌아보며 또 담아보며 나오는군요.

 

누르 자한은 첫 번째 혼인에서 나은 딸을 샤야르와 혼인시켜 권력을 더욱 확고히 하려 했다. 결국 1622샤 자한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자항기르는 마하바트 칸을 보내 이듬해 아들의 군대를 물리쳤다. 샤 자한은 데칸 지역에서 도망 다니다가 1625년에 겨우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었다.

 

샤 자한은 아들 아우랑제브를 자항기르에게 인질로 보내고 자신은 사실상 은퇴했다. 샤 자한의 반란을 진압한 마하바트 칸의 위세가 높아지자 누르 자한 세력의 견제가 시작되었고, 마하바트 칸은 1626년 반란을 일으켜 자항기르 황제를 사로잡았고 누르 자한도 투항해왔다.

 

그러나 누르 자한은 마하바트 칸을 안심시키는 한편 다른 귀족들과 마하바트 칸 사이를 이간질하는 데 성공했다. 마하바트 칸은 반란에 성공한 지 100일 만에 도망쳐 예전의 적이었던 샤 자한에게 의탁했다 

 

누르 자한은 자항기르를 구한 공으로 더욱 막강한 권세를 누렸지만 1627년 자항기르가 세상을 떠났고, 아사프 칸은 여동생이 아니라 사위 샤 자한을 지지했다. 샤 자한이 등극한 뒤 누르 자한은 연금 당했으나 평안한 여생을 보냈고, 마하바트 칸은 아지메르와 데칸 지역의 지방장관으로 일했다. 

 

 

탑에 갇혀 아내의 묘만 바라볼 수 있었던 말년

황위 계승을 위한 권력 다툼은 샤 자한의 말년에 재현됐다. 1657년 샤 자한이 병고에 시달리는 사이 아들들이 피 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에 나선 것이다.

 

장남 다라 시코는 병든 샤 자한을 대신해 사실상 대리 통치를 하고 있었지만, 차남 샤 슈자, 삼남 아우랑제브, 막내 무라드 바크시 등 형제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합집산의 전쟁 끝에 1658년 최후의 승리는 아우랑제브의 몫으로 돌아갔다.

 

아우랑제브는 형 다라 시코를 공개 참수형에 처하고 아버지 샤 자한을 아그라 요새의 탑에 감금했다. 아우랑제브는 이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 탑에 갇힌 샤 자한에게는 사랑했던 아내가 묻힌 타지마할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이었을까. 실의에 빠진 샤 자한을 곁에서 돌본 것은 첫째 딸 자하나라 베굼 사히브였다.

 

샤 자한은 1666122일 코란의 구절을 암송하면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자하나라는 성대한 국장을 준비하려 했으나 아우랑제브는 허락하지 않았다. 샤 자한의 시신은 백단향 관에 안치되어 강을 통해 타지마할까지 운구 된 뒤, 아내 곁에 묻혔다.

 

인도 아그라의 타지마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이라는군요.

안으로 들어가서 한바퀴 돌아보고 아쉬움을 남기고 나오는군요. 다음은 야무나강 건너 아그라성에 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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