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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테푸르 시크리성(Fatehpur Sikri Fort)에 가보다

by 산산바다 2017. 3. 26.

산과바다

판츠 마할(Panch Ma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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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테푸르 시크리성(Fatehpur Sikri Fort)에 가보다

2017. 2. 16.

시크리성은 무굴제국의 3 황제였던 악바르 대제가 아들을 낳을 것을 예언해준 슬림지스키 성자의 신통력에 감탄하여 아그라에 있던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기 위하여 지었던 성이다. 불과 14년간의 수도 이전에 불과하였지만 붉은 사암과 대리석을 이용한 건축물은 현대에 보아도 경이로울 뿐이다.

 

디완이암(Diwan-I-Am) : 황제의 집무실 

 

아그라성에서 버스로 1시간 30여분 달려 시크리성으로 향합니다.

보이는 곳마다 거리는 사람이 많고 복잡하더군요.

 

아그리성에서 1시간 30여분 만에 시크리성에 도착하였군요.

파테푸르라는 말은 <승리의 도시>라는 의미인데 파테푸르 시크리는 <승리의 도시 시크리> 되겠는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도 파테푸르 시크리 등재되어 있다.

 

시크리성은 아그라의 남서쪽 35km 지점에 위치하여 붉은 사암으로 만든 이슬람 양식의 성으로서 일부만 복원이 되어 있는데  성은 아크바르 대제의 후사와 관련이 깊은 성이다.

건물 대부분은 사암으로 이루어졌으며, 각종 조각으로 기둥··천장 등을 장식하였다.

파테푸르 시크리는 1986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후마윤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를 잇게  악바르는 당시 13세의 어린 나이였다. 더구나 그는 어린 시절을 사막에서의 유랑생활로 보내다 보니 글을 배우지 못한 무식한 황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악바르는 총명하였다.

 

자신의 무지를 훌륭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40년간이나 훌륭히 무굴제국을 통치하며 무굴의 아소카로 불리게 된다.

 

 그는 혼인 정책 같은 것도 써서 라자스탄의 라지푸트 왕족의 딸인 조다바이를  부인으로 맞아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1576 뱅골까지 진출하며 1580 대에는 인도의 북남부 까지를 점령하게 된다그는 종교를 초월하여 통합을 이루고 지배체제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악바르는 인재를 발굴하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는데 대표적인 예가 군대의 총사령관을 맡긴 만싱 1세였다. 만싱 1세는 거의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거대한 무굴제국의 완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악바르황제는 3명의 부인을 두었다.

첫 번째 부인 조다바이는 힌두교둘째 부인 마리엄은 기독교셋째 부인은 이슬람교 신자였다고 하니 그는 혼인뿐만 아니라 부인들까지도 이용하여 종교의 융화를 꿰했는지 모른다.  증거로 그는 3명의 부인에게 종교의 선택을 강제하지 않았으며 자신은 1582 <디네일라히>라는 자신의 신성 종교를 만든 것을 보면   있다. 물론 그의 사후 그가 만들었던 디네일라히는 곧바로 소명되어 버리지만...

 

아직 왕자를 보지 못한 악바르는 어느 날 기도를 하기 위하여 맨발로 아즈메르라는 이슬람 성지로 갔는데 그의 시종이 "여기에서 가까운 시크리에 사는 슬림지스키라는 성자에게 물어보면 언제쯤 왕자를   있는지   있다"라고 하여 그에게 찾아가 물으니 "1 안에  부인에게서 아들을   있다"라고 예언하였다. 1 왕비 조다바이는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자항기르라고 지었다.

 

악바르 황제는 시크리의 성자 슬림지스키를 지극히 신뢰하게 되고 그에게 소원을 물으니 시크리를 번성하게 해주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악바르 황제는 아그라에서 37km 떨어진 시크리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이것이 시크리성이 생긴 이유이다.

악바르 황제는 유난히 붉은색을 좋아하여 붉은 사암을 사용하여  시크리성을 건설하였고 14년간 이곳에서 무굴제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시크리는 제국의 수도가 들어 오기에는 부족한 땅이었다.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3 명의 왕비가 거처했다는 궁궐이 나오는데 아들을 낳은 첫째 왕비 조다바이의 궁전은 넓고 화려하였다. 아름다움은 더욱 심화된다.

 

고기를 먹지 않은 힌두교인이었던 그녀를 위한 전용 요리실까지 갖춘 대단한 궁전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아들을 생산하지 못한 둘째와 셋째 부인의 궁전은 초라했다.

 

비밀통로까지 두고 수많은 궁녀들을 상대했던 황제...  틈바구니에서 둘째와 셋째는 별을   있는 하늘이나   있었을까?

 

항상 주인공은 안보이더라!

판츠마할(Panch Mahal) : 5층으로 된 건물로 왕의 시녀들이 지냈던 곳이다. 파테푸르 시크리에서 가장 개성적인 건물이다.

층마다 칸막이가 쳐진 좁은 방이 줄지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칸막이의 흔적으로 1층에는 대략 84개의 방이 있었다고추정한다.

기독교 신자 왕비가 거처하던 건물의 모습이라고 한다.  건물의 기둥에서 아크바르 대제의 관용적인 종교관을    있으며 기둥의 맨 아래에는 십자가를 넣었고 가운데는 힌두교 문양에다 맨 위는 이슬람 문양을 새겨 넣었다.

우선 식수가 부족하여 많은 인원이 거주하기 불편하였고 성자도 죽었기 때문에 다시 악바르는 아그라로 돌아간다.

 

수도를 옮긴  폐허가  시크리성, 재미있는 건물 양식을  기도소를 보면 종교의 자유를 주장한 그의 뜻대로 건물에는 힌두교를 상징하는 연꽃무늬와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그리고 이슬람교를 상징하는 아치가 어우러져 있다.

 

디완이암(Diwan-I-Am) : 황제의 집무실 

 바깥쪽으로 부족했던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당시로서는 거대한 물탱크도 보이고, 7 번의 커다란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여 전리품을 보관하였다는 건물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의 우아함과 왕의 침실궁녀들의 수영장궁녀들이 모여 화장을 했다는 방과 화장  왕의 부름에 따라 왕의 침실로 가는 비밀통로  모두 대단한 건축물이다. 

 

여기는 주인공이 보이네! 오른쪽 끝

궁녀들을 말로 사용하여 인도판 장기 놀이인 파치시(pachisi , Parcheesi)게임을 했다고 전해지는 디완이암의 광장에는 열십자 모양으로 그려져 있는 게임판의 무늬가 남아 있다. 왕이 궁녀들에게 말의 역할을 시키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뒤에 보이는 누각인 판차 마할에서는 많은 여인들이 구경을 하면서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 게임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궁녀가 판차 마할의 5층 누각에서 보름달이 뜰 때 왕을 모시는 영예를 누렸다고 한다.

 

5층으로  건물 판츠마할(Panch Mahal) 황제를 기다리던 후궁들이 살던 곳이며 아래 마당에서 황제가 시녀들을 체스의 말로 세워두고 인도 장기를 즐겼다고 한다.

 

디완이암(Diwan-I-Am) : 황제의 집무실 

 

디완이암(Diwan-I-Am)에서 돌아 나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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