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강릉 오죽헌(江陵 烏竹軒)에 가보다
2016. 6. 23.
박종규 벗님과 강릉 오죽헌에 가보다.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죽헌동)에 위치
오죽헌은 조선시대의 대학자 율곡 이이와 관련하여 유명해진 강릉 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오죽헌은 조선 초기의 건축물로, 건축사적인 면에서 중요성을 인정받아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됐다. 이 곳 몽룡실(夢龍室)에서 율곡 이이(李珥)가 태어났다고 한다.
경내에는 오죽헌을 비롯하여 문성사(文成祠), 사랑채, 어제각(御製閣), 율곡기념관, 강릉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문성사는 율곡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며, 어제각은 율곡의 저서 격몽요결과 율곡이 유년기에 사용 하였던 벼루(용연)를 보관하기 위한 유품소장각이다. 한편 율곡기념관은 율곡의 저서와 신사임당의 유작을 비롯하여 매창·옥산 이우 등, 율곡 일가의 유품 전시관이다.
한편 강릉시는 1961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10월 25, 26일 율곡을 추모하는 율곡제전을 봉행하고 있다.
경포호의 서쪽 들녘 너머로 보이는 죽헌동에 오죽헌이 있다. 뒤뜰에 줄기가 손가락만하고 색이 검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시대의 가장 큰 학자로 손꼽히는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이다. 그러나 오죽헌은 그의 친가가 아니라 외가, 곧 신사임당의 친정집이었다.
오죽헌은 율곡 이이가 출생한 곳으로 우리나라 주거 건축으로는 가장 오래 된 건물에 속한다.
본래 사임당 어머니의 외할아버지인 최응현의 집으로 그 후손에게 물려져오다가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에게, 신명화는 또 그의 사위에게 물려주었다. 그후 1975년 오죽헌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화될 때까지는 이율곡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주거 건축으로는 역사가 가장 오래 된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오죽헌은 사임당이 율곡을 낳기 전에 용꿈을 꾸었다는 데서 이름 붙은 몽룡실이 대표가 되는데, 온돌방과 툇마루로 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순한 일(一)자형 집으로, 본살림채는 아니고 별당 건물이다. 본채는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붕은 양측면에 합각을 한 팔작지붕으로 내부는 연등천장이나 합각 부분만 우물천장으로 구성했다. 대청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온돌방은 벽과 천장을 모두 종이로 발랐다. 커다란 장대석을 한 층으로 쌓아 기단을 만들고 막돌 초석 위에 사각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는 익공으로 처리하였다. 주심포 양식에서 익공 양식으로 변해가는 주택 건축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로 보물 제165호로 지정돼 있다.
오죽헌 옆방 몽룡실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났다는군요.
* 율곡 이이(栗谷 李珥) 잉태에 얽힌 전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가 인천에서 수운판관으로 재직할 때 사임당을 비롯한 식솔들은 산수가 수려한 판관대에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하루는 이원수가 여가를 틈타 인천에서 봉평으로 오던 중이었다. 날이 저물어 평창군 대화면의 한 주막에서 여장을 풀게 되었는데, 그 주막의 여주인은 그날 밤 용이 가득히 안겨오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주모는 그것을 하늘이 점지해주는 비범한 인물을 낳을 잉태 꿈으로 생각하였다. 그날 주막의 손님은 이원수뿐이었다. 주모는 이원수의 얼굴에 서린 기색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고, 하룻밤 모시려고 하였으나 이원수의 거절이 완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무렵 사임당 신씨는 강릉의 친척집에 잠시 머물고 있었는데, 역시 용이 품에 안겨드는 꿈을 꾸었다. 언니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140리 길을 걸어 집에 돌아왔다. 대화면에서 주모의 간곡한 청을 뿌리친 이원수도 그날 밤이 깊어 도착하였다. 바로 이날 밤 율곡이 잉태된 것이다.
며칠 집에 머문 이원수는 인천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주막에 들러 이제 주모의 청을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모가 거절하였다. “하룻밤 모시기로 했던 것은 신이 점지한 영재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어르신의 얼굴에는 전날의 비범한 기가 없으니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번 길에 댁에서는 귀한 인물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허나 후환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원수는 주모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주모에게 혹 그 화를 막을 방도가 있느냐 물었더니, 주모가 이르기를 밤나무 1천 그루를 심으라는 것이었다.
이원수는 아들 생각에 주모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몇 해가 흐른 뒤 어느 날, 험상궂은 중이 시주를 청하며 어린 율곡을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원수는 주모의 예언을 떠올리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중은 밤나무 1천 그루를 시주하면 아들을 데려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원수는 ‘옳다’ 하며 쾌히 승낙하고 뒤뜰에 심은 밤나무를 모두 시주하였다. 그러나 밤나무는 한 그루가 모자랐다. 한 그루가 자라지 못하고 썩어버렸던 것이다.
이원수가 사색이 되어 떨고 있는데, 숲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 하며 크게 소리쳤다. 그 외침을 들은 중은 호랑이로 변해 멀리 도망치고 말았다. 그래서 나도밤나무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나무가 생겼다고 한다.
현재 오죽헌은 외부인에게 개방되어 건물 전면에 문을 열어놓고 『격몽요결』, 「자경문」 등의 명문장의 일부를 액자로 만들어 세워두었다. 오죽헌 옆 문성사 주위에 ‘오죽’이 자라고 있으며, 율곡 생전에도 있었다는 수령 600년의 배롱나무도 앞뜰에 있다. 문성사는 율곡의 시호 ‘문성’(文成)에서 따온 것이며, 여기에 모셔진 율곡의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린 것이다.
오죽헌 오른쪽의 작은 중간문을 지나면 안채 건물이 있다. 안채의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판각해놓은 것이다. 그 밖에 정조 임금이 1788년 율곡의 유품인 『격몽요결』의 원본과 벼루를 보관하도록 지어준 어제각도 있다.
안채는 샛담 서쪽에 있는 평범한 건물로 일각문으로 드나들게 되어 있다. 옛날에는 부엌이 딸려 있었다고 한다.
1975년에 대대적인 오죽헌 정화 사업이 있었는데, 이때 율곡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를 비롯해 자경문, 율곡기념관 등이 신축되었다. 오죽헌을 좀더 의젓하게 만들어 안팎에 내세우고 싶은 열의는 알 만하지만, 유난히 직선이 강조된 널찍한 마당이며 담장, 무엇보다도 관제의 냄새가 물씬 나는 기념관 같은 건물과 구획들이 눈에 거슬린다. 사임당과 율곡을 떠올리며, 또는 사임당의 그윽한 인품과 자태가 향긋이 배어 있는 시서화들을 연상하며 그윽한 분위기의 오죽헌을 찾는다면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오죽헌의 몽룡실과 문성사 주변에는 줄기가 검은 오죽이 자라고 있다.
그렇더라도 오죽헌 한쪽에 있는 강릉 향토사료관을 찾아 강릉 지역의 출토 유물을 돌아보고 사료관 앞마당에 늘어서 있는 비석과 석물들을 눈여겨보고 나면 다소나마 그 실망이 누그러진다.
사료관 안에 전시된 유물로는 진전사터 청동여래입상과 나란히 서 있는 한송사터 석불상(보물 제81호), 수막새나 명문 기와 같은 굴산사터의 유물, 신복사터에서 발굴된 암막새와 수막새, 명문이 새겨진 기와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남항진동의 한송사터에서 발굴된 불상은 비록 머리 부분과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가고 몸 구석구석이 깨진 불완전한 모습이지만 입체감이 풍부하여 뛰어난 예술성을 느낄 수 있다.
*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년~1551년)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이사온(李思溫)의 딸이다. 남편이 증좌한성 이원수(李元秀)이고,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시·그림·글씨에 능했던 여류 예술가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 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신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다.
이에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19세에 덕수 이씨(德水李氏)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 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얼마 뒤 선조 때부터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1541년(중종 36)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 지금의 종로구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1551년(명종 6) 봄에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 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최고의 여성상인 태임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었는데,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이미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했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성격만큼이나 그림·글씨·시도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이 주된 화제(畫題)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다.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여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였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대여 명종 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 다음에 간다. ’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 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 뒤 최씨 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강릉시 두산동 최씨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윤종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만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사임당이 절묘한 경지의 예술 세계에 머문 중요한 동기는 환경이었다. 즉 첫째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 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 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 먼저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일상 생활과 자녀 교육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그녀는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
여자가 출가한 뒤에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한 유교적 규범 속에서도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 순수한 인간 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 속에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李芑)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조 1)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사임당은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도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은 셋째 아들 이이(李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했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매창(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작품으로는 「자리도(紫鯉圖)」·「산수도(山水圖)」·「초충도(草蟲圖)」·「노안도(蘆雁圖)」·「연로도(蓮鷺圖)」·「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초서병풍 등이 있다.
* 이이(李珥 1536~1584)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ㆍ석담(石潭)ㆍ우재(愚齋)이다.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 26일에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의 셋째 아들로 외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13세의 나이로 합격했으며, 조광조의 문인인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4년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으나, 이듬해 하산하여 외가인 강릉으로 돌아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자경문은 입지(立志)ㆍ과언(寡言) 등 11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세운 것이다.
22세(1557년)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고, 이듬해 예안(禮安)에 낙향해 있던 이황(李滉)을 찾아가 성리학에 관한 논변을 나누었다. 1558년(명종 13) 별시(別試)에서 천문ㆍ기상의 순행과 이변 등에 대해 논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1564년(명종 19년)에 실시된 대과(大科)에서 문과(文科)의 초시(初試)ㆍ복시(覆試)ㆍ전시(殿試)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삼장장원(三場壯元)으로 불렸다. 생원시(生員試)ㆍ진사시(進士試)를 포함해 응시한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사람들에게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대과에 급제한 1564년에 정6품 호조(戶曹) 좌랑(佐郞)으로 관직에 나선 뒤에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의 좌랑을 거쳐 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담당하던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등의 대간(臺諫)의 직위에 있었다. 1568년(선조 1)에는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 나라에 다녀왔으며, 1569년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로서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던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정철(鄭澈)과 함께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회개혁안에 대해 논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1570년(선조 3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571년 청주목사로 다시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로 낙향했다가 파주 율곡촌(栗谷村)으로 거처를 옮겼다. 1573년(선조 6)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ㆍ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했으며, 1574년(선조 7) 당시의 사회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논한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그해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하지만 다시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관직에 올랐고, 그 뒤 대사헌(大司憲),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했다.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1575년(선조 8) 선조에게 제왕학(帝王學)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술하여 제출하였고, 1577년(선조 10)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로 낙향하여 어린이 교육을 위해 <격몽요결(擊蒙要訣)>을 편찬했으며, 1580년에는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저술했다. 이 무렵 해주 석담(石潭)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社倉)을 실시하기도 했다.
1581년 대사헌과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을 겸임하며 다시 관직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거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1582년에 이조판서, 1583년에 병조판서가 되어 선조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바치며 십만양병설 등의 개혁안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다시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등으로 임명되었다. 1584년 음력 1월 16일에 49세의 나이로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었다. 죽은 뒤에는 파주 자운산의 선영에 묻혔으며, 1624년(인조 2)에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1682년(숙종 8)에는 성혼(成渾)과 함께 공자(孔子)를 섬기는 문묘(文廟)에 우리나라의 명현(名賢)으로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동호문답(東湖問答)>, <경연일기(經筵日記)>, <천도책(天道策)>, <역수책(易數策)>, <문식책(文式策)>, <격몽요결(擊蒙要訣)>, <만언봉사(萬言封事)>, <학교모범(學校模範)>, <육조계(六條啓)>, <시폐칠조책(時弊七條策)>, <답성호원서(答成浩原書)> 등이 있으며,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등의 문학 작품도 전해진다. 그의 저술들은 1611년(광해군 3) 박여룡(朴汝龍)과 성혼(成渾) 등이 간행한 <율곡문집(栗谷文集)>과 1742년(영조 18)에 이재(李縡)와 이진오(李鎭五) 등이 편찬한 <율곡전서(栗谷全書)>에 실려 전해진다.
오죽헌을 둘러보고 경포대로 향한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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