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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禪詩/禪是佛心

禪宗과 敎宗

by 산산바다 2015. 1. 28.

산과바다

 

 

禪宗敎宗

 

禪宗 선종

 

禪是佛心 敎是佛語인데 서산대사는 禪敎一致를 강조하였고..... 구분된 禪宗敎宗의 의미를 알아본다.

 

禪宗교종(敎宗)에 대립하는 명칭이며 선불교라고도 한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을 내세우며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한다. 참선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요시하는 불교의 한 종으로 내적 관찰과 자기 성찰에 의하여 자기 심성의 본원을 참구(參究)할 것을 주창한 불교 종파.

 

* 不立文字(불립문자) : 선종에서 법은 마음으로 마음에 전하는 것이므로, 따로 언어문자를 세워 말하지 않는데 참 뜻이 있다고 하는 것

* 敎外別傳(교외별전) :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

* 直指人心見性成佛(직지인심견성성불) : 선종에서 오도(悟道)를 보이는 말. 좌선하여 자기의 본성을 밝게 볼 때에 본래의 면목이 나타나서 마음밖에 부처가 없고 자기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아는 것. 심성을 철저히 본 뒤에 성불한다는 뜻이 아님

 

禪宗은 교외별전(敎外別傳:부처가 설법한 경전이나 말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에서 사람으로 깊고 오묘한 가르침을 전하는 것), 불립문자(不立文字: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므로 말이나 글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를 표방하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자기 본래의 성품인 자성을 깨달아 부처가 됨)을 지향하는 종파로, 남인도 출신의 달마에 의해 개창되었다. 후에 점수(漸修)를 주장하는 북종선과 돈오(頓悟)를 주장하는 남종선으로 나누어졌다.

 

道義國師를 비롯한 신라 하대 구산선문의 개산조들은 그중 육조 혜능(六祖慧能), 남악 회양(南岳懷讓), 마조도일(馬祖道一), 서당 지장(西堂智藏)으로 이어지는 남종선을 신라 땅에 전하였다. 서당 지장의 법을 이어받아 821(헌덕왕 13)에 귀국한 도의가 가지산문의 개산조가 된 것을 비롯하여, 실상산문의 홍척과 동리산문의 혜철 역시 서당 지장의 법문을 이었다. 남천 보원(南泉普願), 장경 회휘(章敬懷暉)로부터 법을 받은 도윤, 현욱도 각각 사자산문과 봉림산문을 개창하였다. 그런데 남천과 장경도 역시 서당과 함께 마조도일의 제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말여초의 구산선문은 남종선의 마조도일과 그 문하에서 배출된 선승들에 의해서 개창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구산선문의 성립은 중국과 신라의 불교가 긴밀한 관련을 맺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禪宗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참구하여 본래 지니고 있는 성품이 부처의 성품임을 깨달을 때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언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처의 마음을 중생의 마음에 전하므로 불심종(佛心宗)이라고도 하며, 수행법으로 주로 좌선을 택한다. 그런데 선종은 좌선을 중시하나 그것만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 깨달음의 종교로서 일상의 모든 동작에서도 선을 실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집단노동을 중시하고 속어를 구사하는 일상의 문답으로 그 종지를 선양했다. 이때문에 각인각색의 수많은 어록이 남아 있고, 유교·불교·도교를 일관하여 민족문화의 재편을 구하는 전통도 형성되었으며 독자적인 선문화를 창출하기도 한다.

이 종파는 인도 승려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다(517/527). 인도로부터의 전승 계보를 따지면 보리달마는 28대 조사라고 하나 역사적 사실로는 분명하지 않다. 중국 선종의 전승 계보에서는 달마를 초조(初祖)로 삼고 혜가(慧可) 이하 세 선사를 거쳐 제5조 홍인(弘忍) 밑에서 남북 양종으로 나누어진다. 5조 홍인 문하에서 혜능(慧能 : 638~713)이 남종선을 열었고, 신수(神秀 : 606~706)는 북종선을 열었다. 이 양분을 '남능북수'(南能北秀)라 한다. 또한 남종 혜능의 계보에서 청원(靑原)과 남악(南嶽)의 두 계통이 출현한다. 다시 청원의 후계로 조동종을 비롯한 운문종(雲門宗)과 법안종(法眼宗), 남악의 후계로 임제종과 위앙종(潙仰宗)의 여러 종파가 출현하여 선종의 융성은 극에 달한다. 개괄하면 당나라에서 송나라에 걸쳐 임제·조동·위앙·운문·법안의 5가로 나누어지고, 다시 임제로부터 황룡(黃龍양기(楊岐)2파가 나누어지는데, 이를 모두 합하여 57(五家七宗)이라 한다. 이후 선종은 원대와 명대에도 그 위세가 유지되었다.

 

禪宗 명칭당나라 중기부터 그 종풍이 크게 흥성하여 교종과 대립하기에 이르자 사용되었다. 그 시초는 8세기 말엽 티베트 왕에게 초빙되어 인도 승려와 대론했던 중국 승려 마하연(摩訶衍)이 스스로 돈오선종(頓悟禪宗)이라 칭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는 혜능으로부터 비롯된 남종 돈오의 입장이며, 대승불교의 여래선(如來禪)으로부터 중국 종교로서의 조사선(祖師禪)으로 전화된 것임을 의미한다. 북종은 8세기 말엽에 쇠멸했으나 여기서는 우두종(牛頭宗)이 분파되었다. 또 남북 양종과는 별도로 홍인 문하의 혜안(慧安)을 시조로 하는 정중종(淨衆宗)이 있었고, 이 계통을 이은 무상(無相)의 제자 무주(無住)는 보당종(保唐宗)을 열었다. 이밖에 남종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북종을 공격했던 신회(神會 : 668~760)는 하택종(荷澤宗)을 열었다. 8세기에 번창했던 하택종이 쇠망한 이후 회양(懷讓 : 677~744) 문하에서 홍주종(洪州宗)이 형성되었다. 이처럼 여러 파로 나누어지면서 발전한 중국 선종 형성의 사상적 배경에는 노장사상(老莊思想), 특히 장자(莊子)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장자의 사상을 정신적 풍토로 함으로써 인도 불교의 반야·공 사상이 중국적으로 변용되어 정착·형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돈황에서 발견된 이입사행론장권자 二入四行論長券子는 달마와 혜가를 대표로 하여 초기 선종을 담당한 인물들의 어록인데, 이에 의하면 그들의 선은 철저히 반야를 실천해가려는 것이었다. 이 전통은 우두종이나 홍주종의 선과 직결되는 요소를 지닌다. 4조 도신(道信 : 580~651)과 맥을 잇는다고도 간주되는 우두법융(牛頭法融 : 594~657)의 우두종은 삼론에 근거하는 공관(空觀)의 실천을 그 특색으로 한다. 즉 그는 삼론종의 계통을 받고 있어서 반야·공의 사상적 실천을 전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에 중국 선사상은 홍주종에 이르러 독자적인 전개를 맞았고, 이 전통을 최대한으로 전승한 것이 임제종이다. 홍주종은 모든 언어동작이나 선악도 불성 전체의 작용이라 하여 모든 행위가 다 진실이라 간주한다. 화엄 교학이 그 사상적 배경이다. 임제종의 사상적 특질은 온갖 속박을 벗어나 자유로운 '무위(無位)의 진인(眞人)'을 추구하는 인간관에 있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되, 자유로운 절대 주체의 생활방식을 행동을 통해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중국 선종이 신조처럼 표방하는 불립문자·교외별전·직지인심·견성성불 등도 이런 전개 과정에서 주장된 것으로 이해된다. 경전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주체는 불립문자·교외별전을 표방하고, 인간의 근저에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인정하는 사상은 직지인심을 주장하게 되며, 나아가 내부에 있는 자기의 본성을 봄으로써 깨달음을 연다는 사고방식은 견성성불로 표현되었다.

 

한국의 禪宗은 법랑(法朗)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했다가 선덕왕·진덕왕 무렵에 귀국했다. 중국 선종 4조인 도신(道信)의 법을 이은 법랑이 신라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의 선법은 당에 유학하여 북종선(北宗禪)을 계승한 신행(神行)과 제자인 삼륜(三輪) 선사에 의해 중앙에 알려졌다. 이후에 활동이 뚜렷하지 않다가 준범(遵範혜은(慧隱)을 거쳐 도헌(道憲)에 이르러 산문을 형성했다가(曦陽山門) 도헌의 손제자(孫弟子)인 긍양(兢讓)에 이르러 법계를 바꾸었다. 즉 남종선 위주의 당시 불교계 분위기로 인해 남종선을 받아온 쌍계사 혜소(慧昭)를 도헌의 스승이라 일컫게 되었다. 그리고 희양산파 이외의 8개 선문은 남종선을 수용했다. 도의(道義)821년에 귀국했는데, 신라 불교계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했고, 후일 염거(廉居)를 거쳐 체징(體澄)에 이르러 가지산에 보림사(寶林寺)를 세워 선풍을 떨쳤다(迦智山門). 홍척(洪陟)826년 귀국한 후 지리산에 실상사를 세워(實相山門) 흥덕왕과 선강(宣康) 태자의 귀의를 받았으며 수철(秀澈)이 계승했다. 혜철(惠哲)839년 귀국해 선법을 전했다. 태안사(泰安寺 : 전남 곡성)를 중심으로 선법을 폈으며(桐裡山門), 도선(道詵경보(慶甫여대사(如大師윤다(允多) 등이 계승했다. 한편 무염(無染)845년 귀국하여 성주사(聖住寺 : 충남 보령)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聖住山門), 대통(大通여엄(麗嚴) 등이 계승했다. 현욱(玄昱)839년 귀국하여 혜목산(慧目山 : 경기 여주) 고달사(高達寺)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그중 심희(審希)가 봉림사(鳳林寺 : 경남 창원)를 세우고 선법을 전했으며(鳳林山門) 찬유(璨幽) 등에게 이어졌다. 도윤(道允)과 범일(梵日)847년 귀국하여 선법을 전했다. 도윤의 제자인 절중(折中)은 사자산 흥녕사(興寧寺 : 강원 영월)에 머물며 제자를 양성했으므로 사자산문(師子山門)이라 칭했다. 그리고 범일은 굴산사(崛山寺 : 강원 강릉)에 머물렀는데, 제자 개청(開淸) 때에 이르러 사굴산문(闍崛山門)을 형성했다. 가장 늦게 성립한 산문은 수미산문(須彌山門)으로, 911년 귀국한 이엄(利嚴)이 고려 태조의 귀의를 받아 932년 수미산 광조사(廣照寺 : 황해도 해주)에 머물며 법을 전했다. 그밖에도 범패를 전한 쌍계사 혜소와 중국 위앙종의 선풍을 전한 순지(順之) 등도 있었지만, 뚜렷한 산문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고려초 선종의 특징은 법안종 수입에 있다. 법안종은 선사상을 중심으로 다른 불교사상을 종합하려는 것이다. 고려 중기 이후 다소 침체되다가 지눌(知訥)과 보우(普愚)의 출현으로 중흥을 맞았다. 13세기 초 지눌이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寺)를 열고 선풍을 크게 진작시키면서 선종 내에 조계종파가 성립되었다. 14세기 중엽에는 태고 보우가 국왕으로부터 승정권(僧政權)을 위임받아 불교계를 장악하면서부터 사실상 조계종이 불교계를 주도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던 시기에는 조계종의 나옹(懶翁자초(自超) 계통이 조선 왕실의 후원을 받아 불교계를 주도했다.

그러나 조선 왕조가 억불정책을 실시하면서 조계종단도 타격을 받았다. 조계종 승려 성민(省敏)은 불교계를 대신하여 조선의 억불정책에 항의했지만, 결국 1424(세종 6)에 천태종·총남종(摠南宗)과 함께 선종으로 강제 통합되었다. 그후 조선 중기 서산대사 휴정(休靜)이 교선일치를 주장한 이래 한국 불교의 주류를 형성해왔다.

조선 세종 때 모든 종파의 폐합에서 남은 두 종파 중의 하나이다. 1424(세종 6) 예조의 지시에 따라 7종파를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두 종파로 폐합할 때,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총남종(摠南宗) 등 세 종파는 선종이란 이름으로 단일화되었다.

선종은 전국에 18개 사찰 및 4,250()의 전답과 1,970명의 승려를 가지게 되었다. 사찰의 수는 교종과 같았으나 전답(교종 3,700)과 승려의 수(교종 1,800)는 교종보다 많은 편이었다.

 

선종은 흥천사(興天寺)를 도회소(都會所總本寺)로 하여 모든 종무(宗務)를 집행하였다. 세종의 종단폐합 이후 성종 때에 척불정책이 심하였으나 양종(兩宗)과 승과(僧科)의 제도는 형식적이나마 존속되고 있었다. 연산군 때는 유학의 총본산인 성균관을 기악의 장소로 삼았는가 하면, 선종의 도회소인 흥천사와 교종의 도회소인 흥덕사(興德寺), 그리고 성안의 절들을 모두 공해(公廨)로 삼았고, 사사(寺社)의 토지와 노비를 관에서 몰수하였다.

선종은 광주(廣州)의 청계사(淸溪寺)를 도회소로 삼아 종단의 명맥을 가까스로 부지하게 되었다. 중종의 즉위와 함께 승과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선종과 교종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1550(명종 5) 12월 당시 섭정하던 문정대비(文定大妃)에 의하여 다시 선·교 양종이 부활되었고, 선종은 봉은사(奉恩寺)를 본사로 삼고 허응당(虛應堂)보우(普雨)가 판선종사도대선사봉은사주지(判禪宗事都大禪師奉恩寺住持)를 맡았다.

 

1565년 문정대비가 죽자 양종제도가 폐지되어 선종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국가의 권력에 의하여 선종이라는 이름이 박탈되어 종도 없고 파도 없는 산승(山僧)의 불교로 숨어 살아야 했지만, 선종(특히 조계종 계통)에는 적지 않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산중불교시대라고 할 수 있는 어두운 시기에 산속 깊숙이 숨어 살면서 불경과 선법을 부지런히 닦고 전하여 많은 제자와 법손을 배출시킨 인물로 지엄(智嚴)을 들 수 있다.

지엄은 일찍이 북방의 야인을 토벌할 때 종군하여 전공을 세운 바 있었으나, 28세에 출가하여 수선(修禪)과 지계(持戒)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연희(衍熙)로부터 능엄경 楞嚴經을 공부하고, 정심(正心)으로부터 선법의 인가(印可)를 받았다. 그의 문하에 영관(靈觀일선(一禪설은(雪誾원오(圓悟) 등의 고승이 배출되었다. 특히, 영관은 조선시대 불교의 중흥조라 할 수 있는 휴정(休靜)의 스승이라는 점에서 더욱 유명하다.

영관에게는 휴정·선수(善修법융(法融영응(靈應정원(淨源) 등 제자가 많았다. 이 중에서 휴정과 선수는 암흑기의 조선불교를 중흥시킨 고승이었다.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널리 알려진 휴정은 사실상 조선 중기 이전의 불교암흑기를 딛고 일어서서 그 이후의 불교계에 새로운 장을 연 장본인이다. 사실 그는 조선 중기 이후의 불교, 즉 종명 없는 선종의 시조격인 고승이었다.

 

그에게는 유정(惟政일선·인영(印英원준(圓俊법견(法堅해일(海日언기(彦機태능(太能인오(印悟) 등 이름있는 제자가 70여 명이었고, 그의 문하에서 배운 제자가 1,000여 명이나 되었다. 휴정의 그 많은 제자 중에서도 후대에까지 법손이 크게 성하였던 대표적인 제자로는 유정·일선·언기·태능 네 사람을 꼽으며, 이들을 서산문하 4대파라고 한다. 간략하게 각 문파의 계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명파(四溟派)사명은 유정의 당호로서 흔히 사명당이라고 부른다. 유정의 법을 이은 제자가 응상(應祥)이며, 그에게는 명조(明照쌍언(雙彦천오(天悟) 등이 있었는데, 그 중 법을 이은 제자는 명조이다. 명조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 전공을 세운 이름난 의승장(義僧將)인데, 그 점에서는 유정과 비슷한 데가 있다.

명조에게는 의흠(義欽학흠(學欽숭헌(崇憲상민(尙敏시승(時勝) 등의 제자가 있었다. 또 의흠의 제자로는 계휴(繼休일종(一宗)이 있었고, 계휴에게는 지원(智圓계언(繼彦)이 있었으며, 지원에게는 선언(善彦자환(自還능문(能文) 등이 있었고, 선언에게는 국선(國禪청매(靑梅)가 있었으며, 국선에게는 사준(思俊혜심(慧諶금호(錦灝)가 있었고, 혜심에게는 치흡(致洽명규(明奎임성(任性), 임성에게는 처종(處宗초율(初律) 등이 법을 이어 내려왔다.

편양파(鞭羊派)편양은 언기의 호이다. 언기는 처음 출가하여 인영에게서 배웠으나 나중에 휴정의 문하로 가서 그 법을 얻었다. 그의 법을 이은 제자는 의심(義諶)이며, 그 밖에도 석민(釋敏홍변(弘辯계진(契眞의천(義天혜상(惠常천신(天信) 등이 있었다. 이들은 각기 문파를 이루어 편양문하 7파라고 하는데 각기 법손들이 흥성하였다. 서산문하에서는 이 편양파의 문손(門孫)이 가장 성한 편이었다.

언기의 뒤를 이은 의심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정원(淨源도안(道安설제(雪霽서운(瑞雲찬영(贊映원휘(圓輝풍열(豊悅삼인(三印운밀(雲密명찰(明察자징(自澄도정(道正법징(法澄장륙(藏六) 등이 있어서 14파를 이루었다. 풍담문하 14파 중에서 가장 성한 문파가 도안 계통이다. 도안에게도 많은 제자가 있어서 추붕(秋鵬처호(處湖설형(雪泂영담(靈湛수일(守一금하(錦霞선웅(善雄진수(振秀대청(大淸) 등이 각각 문파를 이루었다.

이 중에서 추붕의 문파가 가장 성하였다. 추붕의 아래에는 낙하(落霞원조(圓照법종(法宗새봉(璽篈) 등 많은 제자가 그 법을 이었다. 풍담문하에 문손이 성하였던 또 하나의 문파로 설제파를 들 수가 있는데, 거기에는 지안(志安지점(智霑형오(泂悟삼인(三印청일(淸一만회(萬回개혜(開慧만기(萬機성초(性草) 등이 배출되어 각기 문파를 이루었다. 이 중에서도 지안이 유명하며 그 문손이 매우 성하였다.

소요파(逍遙派)소요는 태능의 호이다. 그의 문하에도 수백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현변(懸辨계우(繼愚경열(敬悅학눌(學訥처우(處愚천해(天海극린(克璘광해(廣海사순(思順뇌운(雷運수일(守一정현(靜玄탁옥(琢玉) 등이 각각 문파를 이루었다.

현변의 문하에는 호연(浩然문신(文信옥균(玉均태의(太義종륵(宗勒약휴(若休) 등이 있었다. 태능의 제자인 경열의 문하에는 운학(雲學삼성(三省삼우(三愚) 등이 있었고, 삼우의 뒤를 문신이 이었으며, 문신에게는 회정(懷淨), 회정의 뒤는 각훤(覺喧), 각훤에게는 즉원(卽圓), 즉원 밑에는 혜장(惠藏) 등이 있어서 그 문파를 이었다.

정관파(靜觀派)정관은 일선의 호이다. 정관에게는 충언(沖彦태호(太浩계훈(戒訓충휘(沖徽성희(性熙충인(沖忍) 등의 제자가 있었다. 충언에게는 각민(覺敏영신(英信영운(靈運지근(志勤) 등의 제자가 있었고, 지근에게는 천승(天勝경뢰(敬雷철웅(哲雄행수(行修태충(太沖태감(太鑑유문(有文) 등이 있었으며, 유문의 법은 자수(子秀관문(貫文혜영(惠永) 등이 이었고, 자수에게는 설영(雪瑛처우(處愚영봉(靈峯회경(懷瓊청휘(淸輝취일(就一) 등의 제자가 있었다.

정관 문하의 하나인 충휘에게는 일여(一如영서(靈瑞보철(普哲지문(志文석숭(釋崇희안(希顔) 등의 제자가 있어서 그 뒤를 이었다.

부휴(浮休) 및 벽암(碧巖)문파휴정과 더불어 조선 중기 이후의 불교계에 쌍벽을 이루었던 선수의 호가 부휴이다. 그의 문하에 700여 명의 제자가 배출되었다. 그 중에서도 각성(覺性계익(戒益응묵(應默희옥(希玉성현(聖賢희언(希彦선택(善澤혜일(惠日인문(印文담수(淡守) 등이 유명하였다.

특히, 각성·응묵·희옥·성현·희언·인문·담수 등은 각 파를 형성하여, 부휴문하 7파라고 한다. 그러나 부휴문파가 더욱 흥성하였던 것은 그 제자 각성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각성에게도 휴정처럼 뛰어난 제자가 많았다.

그에게는 수초(守初처능(處能정특(挺特진언(震言혜원(慧遠정현(正玄인욱(印旭율계(律戒응준(應俊인영(印英천연(天然청순(淸順현일(玄一승준(勝俊성오(性悟) 등 뛰어난 제자가 매우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수초·처능·정특·진언·혜원·인욱·정현·율계 등은 각각 문파를 이루어 벽암문하 8파라고 불렸다.

벽암문하에서 가장 성하였던 파가 수초의 취미파(翠微派)였다. 수초에게는 성총(性聰해란(海瀾민기(敏機철조(徹照천해(天海각현(覺玄처신(處信) 등 훌륭한 제자들이 매우 많이 배출되었다. 수초의 법을 이은 성총의 제자에 수연(秀演명안(明眼만훈(萬訓전각(雋覺전익(雋益) 등이 있었으며, 수연에게는 약탄(若坦)이 있었고, 약탄에게는 세찰(世察), 세찰의 뒤를 최눌(最訥)이 계승하였다.

최눌의 문하에 낙현(樂賢장언(莊彦교평(敎萍관혜(冠慧도일(道一선기(禪機혜학(慧學전령(展翎) 등이 있어서 그 문풍을 이었다. 비록, 종명은 없었지만 그와 같이 휴정과 선수 이후의 법손들이 선법의 계통, 즉 선종을 흥성하게 이어와서 포교활동이 자유로워진 한말에 원종(圓宗)에 이어서 임제종(臨濟宗)의 이름을 붙였다. 다음에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이라 이름 하다가 1941년에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확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敎宗 교종

 

敎宗조선시대의 불교종파. 조선조에 들어오기 이전까지는 교종이라는 특정한 종파가 없었으며 고려 후기에는 오교(五敎)라는 이름으로 통칭되었다. 고려말에는 조계종(曹溪宗) 총지종(摠持宗)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 천태법사종(天台法事宗) 화엄종(華嚴宗) 도문종(道門宗) 자은종(慈恩宗) 중도종(中道宗) 신인종(神印宗) 남산종(南山宗) 시흥종(始興宗) 등의 11종파가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조계종은 선종(禪宗), 총지종은 진언종(眞言宗), 천태소자종과 천태법사종은 천태종(天台宗), 도문종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화엄종(華嚴宗)의 일파이고, 중도종은 삼론종(三論宗), 신인종은 밀교(密敎), 남산종은 율종(律宗)이며, 시흥종에 대하여는 정토종(淨土宗)으로 보는 의견과 천태종 또는 열반종(涅槃宗)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을 채용하였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이들 각 종파는 자율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한 채 정부에 의하여 강제로 통폐합을 당하게 되었다.

조선의 태종은 배불정책(排佛政策)을 실시하여 왕사(王師) 국사(國師)제도를 폐지하고 도첩제(度牒制)를 강화한 다음 1407(태종 7)에는 고려말의 11개 종파를 통폐합하여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총남종(摠南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시흥종(始興宗) 7종으로 축소시켰다. 이 과정에서 도문종은 화엄종에 흡수되었고, 중도종과 신인종이 합하여 중신종이 되었으며, 총지종과 남산종이 합하여 총남종이 되었다. 그리고 천태종은 천태소자종과 천태법사종을 합하여 하나로 만든 것이다. 이들 가운데 나중에 교종에 편입된 종파는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 등으로 모두 119개소의 사찰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1424(세종 6)에는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총남종(摠南宗)을 합하여 선종(禪宗)으로 하고,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시흥종(始興宗)을 합하여 교종(敎宗)으로 하여 모든 종파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정리하였으며, 각각 18개소의 사원만을 인정하여 다른 사찰들은 이의 지배를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양종에 각각 도회소(都會所)를 두고 당대의 고승을 판교종사(判敎宗事)에 임명하여 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교종을 총괄하였던 교종도회소(敎宗都會所)는 서울의 동대문 밖의 흥덕사(興德寺)에 있었으며, 세워질 당시에는 18개소의 사찰과 3,790결의 전답, 1,800명의 승려들을 관장하였다.

도회소에서는 승과(僧科)가 치러지기도 하였는데, 교종에서는 화엄경 華嚴經십지론 十地論을 시험과목으로 삼았다. 이후 연산군(燕山君)이 도회소의 노비와 토지를 몰수하자, 원래 서울 정릉 동쪽의 흥천사(興天寺)에 있던 선종도회소와 함께 광주(廣州)의 청계사(淸溪寺)로 도회소를 옮겨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중종(中宗)의 즉위와 더불어 승과제도가 폐지되면서 실질적으로 교종은 그 존립기반을 잃고 사라지게 되었으나, 1550(명종 5) 당시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하여 선종과 함께 다시 부활하였다. 이때에는 도회소라는 명칭 대신 본사(本寺)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교종본사는 광릉 봉선사(奉先寺)에 있었으며, 판교종사는 수진(守眞)이었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죽음과 더불어 양종제도가 폐지되었으며, 이에 따라 교종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듯이 교종의 탄생은 불교 자체 내의 발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속권력의 강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진언종 계통의 총지종과 율종 계통의 남산종을 합하여 총남종으로 하고, 삼론종 계통의 중도종과 밀교 계통의 신인종을 합하여 중신종을 만든 것 또는 교종의 성격이 강한 천태종을 선종에 통합한 사실 등을 통해 볼 때 이러한 통합과 선교양종의 구별이 불교 내부적인 근거를 갖지 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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