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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禪詩/禪是佛心

韓國佛敎의 法脈

by 산산바다 2015. 1. 28.

산과바다

 

구산선문 중의 성주산 성주사지이다.(충남 보령)

 

 

 

韓國佛敎의 法脈

 

대한불교조계종은 宗憲본종은 신라 현덕왕 5년에 조계 혜능조사의 증법손 서당지장 선사에게서 心印을 받은 道義國師(도의국사)를 종조로 하고 고려의 太古普愚(태고보우)국사를 중흥조로하여 이하 청허와 부휴 양법맥을 繼繼承承한다.“고 정하고 있다. 현재 조계종 법맥은 道義國師(도의국사)의 가지산문의 法脈을 승계하고 있다.

 

신라 도의국사(道義國師)-

원적도의(元寂道義)-억성염거(億聖廉居)-보조체징(普照體澄)-

선각형미(先覺逈微)-무위도수(無爲道修)-혜공정열(慧空定悅)-

월산경월(月山景月)-인각자흘(麟角自屹)-보림이익(寶林爾益)-

지산혜안(智山慧安)-향수혜함(香水惠含)-원응학일(圓應學一)-

홍원도태(弘圓道泰)-구산해안(龜山海安)-진전대웅(陳田大雄)-

보각견명(普覺見明)-보감혼구(寶鑑混丘)-진정청진(眞靜淸珍)-

회엄광지(檜儼廣智)-태고보우(太古普愚)로 이어진다.

 

고려

57태고 보우 (太古普愚) (보허(普虛)13011382)

58조 환암 혼수 (幻庵混修) (보각국사(普覺國師)13201392)

59조 구곡 각운 (龜谷覺雲) ( )

60조 벽계 정심 (碧溪淨心) ( )

61조 벽송 지엄 (碧松智嚴) (1464~1534)

62조 부용 영관 (芙蓉靈觀) (1485~1571)

63조 청허 휴정 (淸虛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1520~1604)

64조 편양 언기 (鞭羊彦機) (1581~1644)

65조 풍담 의심 (楓潭義諶) (1592~1665)

66조 월담 설제 (月潭雪霽) (1632~1704)

67조 환성 지안 (喚惺志安) (1664~1729)

68조 호암 체정 (虎巖體淨) (1687~1748)

69조 청봉 거안 (靑峰巨岸) (1730~ )

70조 율봉 청고 (栗峰靑古) ( ~1823)

71조 금허 법첨 (錦虛法沾) (1823~1783)

72조 용암 혜언 (龍岩慧彦) (17831841)

73조 영월 봉율 (永月奉律) ( )

74조 만화 보선 (萬化普善) (1850~1919)

75경허 성우 (鏡虛惺牛) (1849~1912)

 

76만공 월면 (滿空月面) (1871~1946)

77조 고봉 경욱 (古峰景煜) (1890~1962)

77조 전강 영신 (田岡永信) (1946~1974)

78조 숭산 행원 (崇山行願) (1927~2004)

78조 송담 정은 (松潭正隱) (1974~ )

79(2004~ )

 

76혜월 혜명 (慧月慧明) (1912~1937)

77조 운봉 성수 (雲奉性粹) (1937~1941)

78조 향곡 혜림 (香谷蕙林) (1941~1967)

79조 진제 법원 (眞際法遠) (1967~ )

 

 

가지산문의 초조인 道義國師부터 오늘날 한국불교(韓國佛敎)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선사상(禪思想)입니다. 신라 후기 우리나라에 선사상이 우리나라에 수용된 후 선은 수많은 역사적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거치면서 현대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불교의 특색을 禪佛敎에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 우리나라에 유입될 당시에도 많은 불교적 전통들이 있었습니다. 그 전통들을 교학(敎學)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적 전통이었으며, 교학(敎學)은 국가의 신임을 얻으면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라 후기로 접어들면서 신라의 사회 상황은 많은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불교는 왕족과 귀족 중심의 불교였으며, 귀족내부의 많은 갈등을 겪고 있는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신라시대 선이 들어 온 것은 외국인의 전래가 아니라 신라인 자신이 입당하여 선을 전수받고, 돌아와 산문을 열어 선을 전수한 것입니다. 신라시대에는 당나라와의 일반적인 교역이 활발한 때였으며, 이러한 교역은 승려들이 당나라로 건너가 중국의 불교를 전수하게 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의 유입을 입당전심(入唐傳心)이라고들 합니다. , 외국인이 아니라 신라인 자신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선을 가져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중국의 선은 북종선과 남종선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종선은 그 맥이 끊어지고 남종선의 혜능 조사의 법을 받아 돌아왔기 때문에 대한불교조계종의 법맥이 육조 혜능조사를 잇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라에 선이 유입될 당시에 선의 형태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 이전에도 신라의 왕자 김화상(金和尙, 無相大師)이 당나라로 건너가 귀화하여 중국선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는 기록과 원효(元曉)스님이 쓰신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도 달마(達摩)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신라의 선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학자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식적인 선의 유입은 가지산(迦智山) 도의(道義)가 당으로 건너가 마조(馬祖)의 법사(法嗣) 서당(西堂)으로부터 선을 전수하고 돌아와 가지산(迦智山)에 산문(山門)을 연 것을 시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 말에 선종이 들어오면서 지방의 사찰을 중심으로 선문이 형성되는데 이것을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라시대 선의 유입을 한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어려우나 신라시대에 들어 온 선이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다른 나라의 불교와는 다른 한국불교만의 전통을 지니고, 그 흐름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라 말에 당나라에서 선을 전수하고 돌아 온 승려들은 자신들이 전수해 온 선을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그 당시 신라는 선종을 받아들이기에는 敎宗의 자리가 너무도 컸습니다. 그래서 선승들은 자신들의 제자와 함께 지방으로 내려가 절을 짓고 선문(禪門)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시작된 이유입니다.

 

우리나라에 들어 온 선종은 중국에 있던 남종선을 받아들인 것이며, 중국의 선종(禪宗)이라고 하는 것은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와서 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선종은 경전의 해석이나 말, 문자를 수단으로 삼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종()의 강격(綱格)으로 하고, 좌선(坐禪)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관찰하는 수행을 함으로써(내관자성(內觀自省)) 자성(自性)을 깨닫고, 자증삼매(自證三昧)의 묘경(妙境)을 요달함을 종요(宗要)로 하는 종파(宗派)입니다.

 

또한 선종(禪宗)이란 부처님의 교설(敎說)을 소의(所衣: 의지할 바 대상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에 의지한다는 것입니다.)로 삼는 교종(敎宗)에 대하여 좌선(坐禪)을 닦는 종지라는 뜻입니다. 선종(禪宗)은 부처님으로부터 정법(正法)을 유촉 받은 가섭존자(迦葉尊者)로부터 28보리달마(菩提達磨)가 있고, 28()인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중국에 건너와 2조 혜가(慧可, 487-593)에게 법을 전함으로부터 제 5조인 홍인(弘忍, 602-675)에 이르러 그 문하(門下)에서 혜능(慧能, 638-713)을 제6조로 하는 남종(南宗)과 신수(神秀, ?-706)를 제6조로 하는 북종(北宗)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그러나 신수(神秀)의 북종(北宗)은 오래지 않아 맥()이 끊어지고 혜능(慧能) 남종만이 5() 7()으로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선종(禪宗)이 들어 온 것은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5(784)에 당나라의 서당지장사(西堂智藏師)에게서 법()을 받은 도의선사(道義禪師)가 돌아와 법을 전하기 시작한 것을 그 초조(初祖)로 하고 있습니다.

 

서당지장 스님은 마조도일 스님의 법을 이었고, 마조도일 스님은 조계혜능 스님의 법을 이었으므로 우리나라의 조계종은 육조 혜능의 법맥을 이어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산문은 하나의 종파이며, 구산문으로 불리운 이유는 선문 가운데 선법을 널리 알린 아홉개의 선문이 있고, 이 선문을 말할 때 구산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산문은 선법을 크게 떨친 아홉개의 사찰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나라를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 전래된 선종은 기존의 기반을 잡고 있던 교종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한국불교의 사상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가 침체되어 말기에 이를 무렵 불교의 새로운 풍조라고 할 수 있는 이 중국에서와 山門을 열고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며, 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은 신라말부터 고려 초의 선종계(禪宗界)를 망라하는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구산문은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고도 하며,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지산(迦智山): 도의(道義)의 법손인 체징(804-880)이 보림사를 창건하고 도의의 종풍을 떨쳐 가지산파를 이루었습니다. 도의의 속성은 왕씨이며, 북한부 사람으로 그 법호는 처음 명적(明寂)이었으나 나중에 원적(元寂)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라 37대 선덕왕 5(784)에 당으로 건너가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 지장(西堂智藏)에게서 법을 얻고 도의라 호를 고쳤다고 합니다. 헌덕황 13(821)에 귀국하여 선법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당시 신라에서는 선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설(魔說)이라 비방하며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의는 설악산(雪岳山) 진전사(陳田寺)에 칩거하여 그 법을 제자 렴거(廉居)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렴거는 그 법을 다시 체징(體澄)에게 전하였습니다.

체징은 당으로 건너가 떠돌아다니며 고승을 찾았으나, 그의 조사(祖師)인 도의(道義)가 물려 준 것 이외의 법() 더 구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문성왕2(840)에 돌아왔습니다. 돌아 온 체징은 가지산(迦智山 전남 장흥)에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고 도의(道義)의 종풍을 크게 떨치게 되었습니다.

 

(2) 실상산(實相山): 전북 남원의 실상사가 실상산문의 근저가 되었습니다. 홍척(洪陟)이 흥덕왕 원년(826)에 귀국하여 실상사에서 선법을 일으켜 실상산파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홍척(洪陟)은 일찍이 입당하여 도의와 마찬가지로 서당 지장(西堂 智藏)의 문하에서 법을 얻어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홍척은 지리산 실상사에 있으면서 선법을 일으켜 많은 제자와 신도들이 귀의 했고, 그 중에서도 흥덕왕과 태자 선강(宣康)이 홍척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실상사에는 홍척의 제자였던 편운(片雲)의 부도와 수철(秀澈, 817-893)의 탑비가 남아 있으며, 편운(片雲)의 부도에는 그가 홍척의 제자라고 되어 있으며 수철의 탑비에는 실상사에서 스승 홍척에게 법을 얻었으나 심원사(深源寺)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홍척은 가지산문의 도의와 같은 스승인 서당지장에게 법을 받았으나 도의(道義)보다 늦게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산문(山門)의 터전은 가장 먼저 닦아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선맥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3) 동리산(桐裡山): 혜철(惠哲784-861)이 귀국한 후 문성왕 원년(839)에 태안사에 선지를 펴 동리산파를 이루었습니다. 혜철도 도의, 홍척과 더불어 서당(西堂)에게서 법을 받아 돌아와 선지를 펴는데 힘썼습니다.

 

(4) 봉림산(鳳林山): 현욱(玄昱787-868)의 제자 진경 심휘(854-895)가 경남 창원에 봉림사를 세워 봉림산파를 이루었습니다. 현욱(玄昱)의 속성은 김씨이며, 일찍이 출가하여 헌덕왕 때 당나라로 가서 마조(馬祖)의 문인(門人) 장경(章敬) 회휘(懷暉)에게 배워 법을 얻었다고 합니다. 현욱은 희강왕 2(837)에 귀국하여 처음에는 지리산 실상사에 안거(安居)하다가 혜목산(慧目山) 고달사(高達寺)로 옮겨 그의 법을 펼쳤다. 그래서 현욱(玄昱)을 혜목산화상(慧目山和尙)이라고 합니다. 현욱이 크게 선풍을 떨치다 경문왕 8(808)82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그의 제자인 진경 심희(眞鏡 審希, 854-923)가 봉림사(鳳林寺)를 세워 봉림산의 선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5) 사자산(獅子山): 도윤(道允800-868)의 제자 징효절충(831-895)이 헌강왕 때 강원도 영월에 사자산사를 세워 사자산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도윤은 헌덕왕 17(825)에 입당하여 남천 보원(南泉 普願)에게서 법을 얻고 돌아와 동악(棟岳)에 머물다가 다시 쌍봉사(雙峯寺)로 자리를 옮겨 종풍을 크게 떨치게 되었고, 그래서 도윤을 쌍봉화상(雙峯和尙)이라고 합니다. 문경왕 8(868)71세로 세상을 입적하셨고, 익호(謚號)를 철감(哲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 징효 석중(澄曉 析中, 831-895)이 흥령사(興寧寺)를 세우고 수백명의 제자와 더불어 사자산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6) 성주산(聖住山): 무염(無染, 800-888)의 속성은 김씨이며 태종 무열왕의 8대손입니다. 일찍이 출가하여 처음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 득도(得道)하였고, 부석사(浮石寺)의 석징(釋澄)에게서 화엄경을 배웠습니다. 821년 당나라로 가서 마조도일의 제자인 마곡보철에게 법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그를 동방대보살이라 존경하였으며, 귀국 후 성주사(성주사지:충남 보령)에서 법을 펴다가 경문왕과 헌강왕의 국사가 되었으며 무설토라는 독특한 선법의 법문으로 2천명의 문하를 이루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제자 가운데는 심광, 현휘, 대통, 여엄 등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7) 사굴산: 사굴산문은 문성왕 때 범일(810-889)선사가 강릉의 하구정면에 굴산사에서 개창한 선문입니다. 범일은 태어날 때부터 육계가 정수리에 있었다고 합니다.(육계란 부처님의 정수리가 솟아 상투모양을 이룬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15세에 출가하여 831년 당나라로 가서 염관제안의 법을 전수 받고 847년에 귀국하여 굴산사에서 법을 폈습니다. 이곳에 살면서 40여 년 동안 한 번도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하며, 역대 국왕의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범일은 특히 특이한 진귀조사설을 남겼는데 그것에 의하면 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에게서 나왔으나, 선법(禪法)은 진귀조사로부터 부처님이 받아서 전하였다는 것입니다.(이것은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설()이며, 그 사실도 인정되고 있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청허휴정이 이를 인정한 후 조선후기 선논쟁의 근거가 되었고, 여래선보다 보사선을 우위에 두는 조사선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의 제자로는 개청(835-930), 행적(832-916)등이 유명하고 고려 때까지 번성하여 구산선문 중에서 가장 위세를 떨쳤다고 합니다.

 

(8) 수미산(須彌山): 이엄(利嚴, 870-936)의 속성은 김씨이며, 12세 때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출가하였습니다. 그 뒤 진성왕 10(896)에 입당하여 운거 도응(雲居道膺)의 문하(門下)에서 6년을 수행하고 법인(法印)을 얻었습니다. 그 후 널리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보고 효공왕(孝恭王) 15(911)에 귀국하였습니다. 고려 태조가 그의 법이 높음을 듣고 궁중으로 맞아 들여 법을 받았으며, 태조 15년에는 수미산(須彌山, 황해도 해주군 귀산면)에 광조사(廣照寺)를 지어 그를 있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로써 그의 휘하에 모이는 많은 학인(學人)들을 가르치며 도화(道化)를 떨치다가 태조 19(936)6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는데 그의 시호(謚號)를 진철대사(眞澈大師)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문하(門下)에 처광(處光), 도인(道忍), 정능(貞能), 경숭(慶崇)등 수 백명이 있어 그의 법을 전승하였는데 수미산(須彌山)에서 선의 일파(一派)를 이루었으므로 수미산이라고 합니다.

 

(9) 희양산(曦陽山): 경북 문경의 봉암사, 도헌(道憲)이 봉암사를 창건하고 법손인 경양(競讓, 878-956)이 봉암사를 중건하고 희양산문을 이루었습니다. 경양(878-956)은 속성이 왕씨이며, 일찍이 출가하여 공주(公州) 남용원(南 院) 여해(如海)에게 득도하였습니다. 효공왕 4(900)에 중국으로 가서 곡산의 도연(道緣)에게서 크게 깨달은 뒤 고려 태조 7(924)에 돌아왔습니다.강진 백엄사에사 법을 펼 때 경문왕이 글을 보내어 그 덕을 칭찬하고 봉종대사(奉宗大師)라는 호를 주었습니다. 그 뒤 법을 닦기에 좋은 장소를 찾아 나섰다가 두 호랑이의 안내로 도착한 곳이 희양산 이었고, 이곳이 그의 법사(法師)인 도헌(道憲)이 창건한 봉암사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많은 제자들과 선의 일파(一派)를 이루었으며, 이 산문을 희양산문이라 합니다.

 

 

 

성주산 성주사지(충남 보령)

 

구산문의 완성은 종래 이엄의 수미산문 개산(태조15, 932)으로 여겨져 왔으나, 도헌을 개산조로 하는 희양산문이 경양대에 이르러 실질적인 산문의 형태를 띠게 된 것으로 보아(태조18, 935) 희양산문의 개산을 마지막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미산문과 희양산문의 성립에 의하여 비로소 구산선파가 형성되었던 당시 나말여초에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어 9산으로 이루어진 선문가풍을 이어 나갔습니다. 이것은 구산선이 신라 말에 다 형성이 된 것이 아니라 고려 초에 걸쳐 형성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나 구산선이라고 하면 신라의 선문을 말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성격은 모두 육조 혜능의 법을 잇는 남종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산문은 아홉군데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모두 조계(曹溪,<혜능(慧能)>)을 조()로 삼고 그 선법(禪法)인 조계선(曹溪禪)을 참구(參究)하였으므로, 고려 초에 확립된 조계(曹溪)를 조()로 하는 해동(海東)의 선종(禪宗)이라는 것입니다.

선종의 등장은 단순히 중국의 선불교를 옮긴 차원이 아니라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우리 민족과 한국 불교의 새로운 사상으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선종은 고려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며, 오교양종으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 1902년 무렵 경허 스님이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등등상속(燈燈相續)>(사진)에는 '청허휴정-편양언기-풍담의심-월담설제-환성지안-호암체정-청봉거안-율봉청고-금허법첨-용암혜언-영월봉률(永月奉律)-만화보선(萬化普善)-경허성우(鏡虛惺牛,1846~1912)'로 법맥이 밝혀져 있다. 스님은 자신을 청허휴정의 13세손, 환성지안의 7세손임을 스스로 선언했다.

 

 

 

경허 스님의 법제자에 대해서는, '경허성우선사 법어집간행회'가 편찬한 경허법어, 수월음관(水月音觀,1855~1928), 혜월혜명(慧月慧明,1862~1937), 용성진종(龍城震鐘,1864~1940), 침운현주(枕雲玄住,?), 만공월면(滿空月面,1871~1946), 혜봉(慧峰,?~?), 한암중원(漢巖重遠, 1876~1951)으로 되어 있다. 경허 스님은 <등등상속>에서 자신의 상수제자로 혜월혜명 스님을 올려놓았다.

 

-출처 : 만불신문 제137호 불기254986일자 서현욱 기자-

 

 

 

경허 선사 밑에서 훌륭한 제자들이 배출되어 네 분이 법을 전해 받았으니, 혜월(慧月), 만공(滿空), 침운(枕雲), 한암(漢岩) 선사입니다.

 

그 가운데 상수(上首) 제자인 혜월 선사의 법맥(法脈)이 운봉(雲峰) 선사로 내려와서 향곡(香谷) 선사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 해운정사 조실,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로 계신 진제 대선사로 불조의 법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임제정맥(臨濟正脈)의 전법게

 

 

1. 경허선사의 오도송(悟道頌)

 

  75조 경허 성우 선사

 

 

忽聞人語無鼻孔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頓覺三千是我家   문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 세계가 다 나의 집일세.

 

六月燕岩山下路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野人無事太平歌   들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2. 경허선사께서 혜월선사에게 법을 전한 전법게

 

 

76조 혜월 혜명 선사 경허 선사께서 혜월 선사에게 법을 전하는 증서(전법게)

 

付 慧月慧明            혜월 혜명에게 부치노니,

 

了知一切法             일체법을 요달해 알 것 같으면
自性無所有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음이로다.
如是解法性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깨쳐 알 것 같으면
卽見盧舍那             곧 노사나 부처님을 보리라.
依世諦倒提唱           세상법을 의지해서 그릇되게 불법을 제창하였고
無文印靑山脚           문장과 도장이 없는 도리에 청산을 새겼으며
一關以相塗糊           고정된 진리의 상에다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

 

水虎中春下澣日         임인년 중간 봄 그믐일에
萬化門人  鏡虛說       만화 문인  경허 설함.

 

        

 

 

3. 혜월선사께서 운봉선사에게 법을 전한 전법게

 

 

77조 운봉 성수 선사        혜월 선사께서 운봉 선사에게 법을 전하는 증서(전법게)

 

 

 

 雲峰性粹                       운봉 성수에게 부치노니,

 

一切有爲法                        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本無眞實相                        본래 진실한 상이 아님이라.
於相若無相                        저 상에 만약 상을 여의면
卽名爲見性                        곧 견성이라 이름 함이로다.

 

世尊應化二九五一年 四月      세존 응화 29514
鏡虛門人 慧月說                  경허 문인  혜월 설함.

 

 

 

 

4. 운봉선사께서 향곡선사에게 법을 전한 전법게


78조 향곡 혜림 선사        운봉 선사께서 향곡 선사에게 법을 전하는 증서(전법게)

 

 

 

 香谷蕙林丈室       향곡 혜림 장실에게 부치노니,

 

西來無文印            서쪽에서 온 문자와 흔적이 없는 진리는
無傳亦無受            전할 수도 없고 또한 받을 수도 없나니,
若離無傳受            만약 전하고 받음이 없는 그 자체를 여읠 것 같으면
烏兎不同行            까마귀와 토끼는 동행하지 못함이로다.

 

世尊應化 二九六七年 八月 日      세존 응화 29678
雲峰門人  香谷說                      혜월 문인  운봉 설함.

 

 

 

 

5. 향곡선사께서 진제선사에게 법을 전한 전법게


79조 진제 법원 선사        향곡 선사께서 진제 선사에게 법을 전하는 증서(전법게)

 

 

 

 眞際法遠丈室              진제 법원 장실에게 부치노니,

 

佛祖大活句                     부처님과 조사의 큰 산 진리는
無傳亦無受                     전할 수도 없고 또한 받을 수도 없나니
今付活句時                     이제 산 진리를 부치는 때에
收放任自在                     거두고 놓는 것을 그대에게 맡김이로다.

 

世尊應化二九九三年八月十日      세존응화 2993810
雲峰門人 香谷說                       운봉 문인  향곡 설함.

 

  

 

 

향상일로(向上一路)로 이어진 법맥

 

경허 선사로부터 혜월-운봉 선사로 전해 내려오던 등등상속의 임제정맥의 법맥이 향곡-진제 선사로 이어지는 전법(傳法)의 기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향곡 선사의 수법기연

 

향곡 혜림(香谷蕙林 : 1912~1978) 스님은 16세에 내원사로 출가하여, 그 곳에서 조실(祖室)이신 운봉(雲峰) 선사의 법문을 접하고 도무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한시도 의심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과를 마치면 밤잠을 물리치고 정진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늦가을 어느 날 정진하던 중에 갑자기 산골짝 돌풍이 몰아쳐서 문짝을 때리는 소리에 홀연히 마음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 때가 아직 사미계도 받지 않은 행자시절이었는데, 행자(行者)는 곧장 조실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행자의 거동이 사뭇 다르므로, 운봉 선사께서 간파(看破)하시고 대뜸 목침을 가리키시며,

 

"한 마디 일러라!“

 

하시니, 행자는 즉시 발로 목침을 차버렸습니다.

 

"다시 한번 일러라!“

 

"천마디 만마디가 모두 꿈 속에서 꿈을 설()한 것이니, 모든 불조(佛祖)께서 나를 속이신 것입니다."

 

이에 운봉 선사께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혜림 스님은 줄곧 운봉 선사를 시봉(侍奉)하면서 탁마(琢磨)받으며 정진하셨습니다.

 

운봉 선사께서는 1944, 열반에 드시기 전에 혜림 스님에게 향곡(香谷)이라는 법호와 전법게(傳法偈)를 내려서 임제정맥(臨濟正脈)을 부촉하셨습니다.

 

지금부터 50여 년 전 정해년(1947) 당시에 문경 봉암사에서 종전에 안 것은 다 덮어두고 대오견성을 하기 위해 용맹정진을 하자고 해서 향곡, 성철, 청담, 자운, 월산, 혜암, 법전스님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발심한 납자들이 20여 분 모여들어 정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성철 선사께서 향곡 선사께 말씀하시기를,

 

“‘죽은 사람을 죽여 다하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봄이요, 산 사람을 살려 다하여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본다하는 옛 도인의 법문이 있는데 이 무슨 뜻이냐?”

 

하니 향곡 선사께서 답을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향곡 선사께서 그 화두를 들고 여름 석 달 동안 오매불망 정진을 거듭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정진을 했던지 하루는 폭우가 쏟아졌는데 탑 난간에 기대어 폭우가 쏟아지는 줄도 모르고 화두일념에 푹 빠져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삼칠일 동안을 화두일념삼매에 푹 빠져 자기의 몸뚱이까지도 다 잊어버렸다가, 하루는 도량을 걷는 중에 당신 손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하셨습니다.

 

 

오도송을 읊으시기를,

 

忽見兩手全體活          홀연히 두 손 보고 전체가 드러나니

 

三世諸佛眼中花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이 눈 가운데 꽃이로다.

 

千經萬論是何物          일천 경과 만 가지 논문이 이 무슨 물건인고

 

從此佛祖總喪身          부처님과 모든 도인이 이를 좇아 생명을 잃는다.

 

 

이렇게 오도송을 읊은 후에 즉시 성철 선사를 찾아가서,

 

"'죽은 사람을 죽여 다하여야 산 사람을 보고, 죽은 사람을 살려 다하여야 비로소 죽은 사람을 볼 것이다.'하는 법문의 뜻을 네가 물었으니 한 번 일러 보아라!”

 

하고 향곡 선사께서 성철 선사께 물으니 성철 선사께서 우물쭈물 답을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멱살을 잡고 절 대문 밖으로 성철 선사를 끌어내시고는,

 

이것을 답을 못하면 절 대문을 들어올 수 없다.”

 

이렇게 명을 내리시고는 대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그때가 두 분이 서른여섯 살 때였습니다. 20대부터 절친한 십 년 도반의 서릿발 같은 명을 순수히 받아들이고는 며칠간 먹고 자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밤낮으로 이 화두와 씨름해서 일념삼매가 지속이 되어 화두가 타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돌멩이를 가지고 절 대문을 치니 온 산이 쩡쩡 울렸습니다. 절 대중들이 공비가 내려온 줄 알고 다 일어났는데 향곡 선사께서 절 대문에 이르러 말씀하시기를,

 

일러라!”

 

하니 성철선사께서 척 답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문을 열어 주고는 두 분이서 춤을 추시며 좋아하셨습니다.

 

지금은 두 분 다 고인(故人)이 되셨지만 한국 선종사의 안목에 위대한 진일보를 나투신 그러한 위대한 대선사이셨습니다.

 

향곡 선사께서는 이로부터 천하 노화상(老和尙)들의 공안(公案) 법문에 속지 않고 걸림없이 임의자재(任意自在)로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하셨습니다.

 

-2002년 국제무차선대법회 법문 중 발췌-

 

이렇게 봉암사에서 향상(向上)의 진리를 깨치신 후 제방 선지식들을 두루 참방하여 거량(擧揚)하시니, 비로소 불조(佛祖)의 정문정안(頂門正眼)이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선종사에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정안(正眼)의 장()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진제 선사의 수법기연

 

그러던 중에 선사의 세수 56세이던 정미년(1967) 하안거(夏安居) 해제일에 제자 진제(眞際) 스님과 법거량이 있었습니다.

 

선사께서 상당(上堂)하시어 묵좌(默坐)하고 계시는데 진제 스님이 나와 여쭈었습니다.

 

"불조(佛祖)께서 아신 곳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불조께서 아시지 못한 곳을 스님께서 일러 주십시오.“

 

"구구는 팔십일이니라.“

 

"그것은 불조께서 다 아신 곳입니다.“

 

"육육은 삼십육이니라."

 

이에 진제 스님이 예배드리고 물러가니, 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법상에서 내려오셨습니다.

 

다음날 진제 스님이 다시 여쭙기를,

 

"불안(佛眼)과 혜안(慧眼)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衲僧)의 안목입니까?"
하니, 향곡 선사께서 답하셨습니다.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니라.“

 

그러자 진제 스님이,

 

"오늘에야 비로소 큰스님을 친견하였습니다.“

 

하니, 향곡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

 

이에 진제 스님이

 

"()."(: 대문 잠그는 빗장)

 

이라고 답을 하자 향곡 선사께서는

 

"옳고, 옳다.“

 

하시며 인가하시고 전법게를 내리셨습니다.

 

여기에서 향곡 선사께서 진제 선사에게 전법게(傳法偈)를 내리시며 임제정맥(臨濟正脈)을 부촉하시니, 태고 보우 선사의 22세 손()이며 불조정전(佛祖正傳) 79()로서 오늘에까지 당당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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