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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世宗大王) 영릉(英陵)에 가보다.

by 산산바다 2013. 11. 16.

산과바다


세종대왕(世宗大王) 영릉(英陵)에 가보다.

2013. 11. 14. 담음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陵西面)에 있음

 

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에 세종대왕의 동상이 보인다.

 

영릉(英陵)은 조선 제 4대 세종(世宗)과 그 비(妃) 소헌 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를 모신 능이다.

세종은 1397년(태조 6)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18년(태종 18)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에 22세의 나이로 조선 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대왕은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31년 6개월의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망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세종대왕 영릉가는길

 

 

왼쪽엔 세종전이 위치하는군요.

 

민본 정치를 중요시하였는데, 당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 역시 백성들과의 소통을 바라던 세종의 고민이 낳은 산물이었다. 유교 정치와 자주적인 문화의 융성을 통하여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번영을 가져왔다.

 

 

세종전 좌우에는 과학의 조형물들이 가지런히 정리디어 둘러보기 좋군요.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훈민문 들어서기 전 오른쪽엔 재실이 위치한다.

 

 

 

훈민문을 들어서니 넓은 잔디밭과 조경이 잘 되어있다.

 

 

금천교를 건너 홍살문이 있다.

 

 

 

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신도와 참도 구분이 되어있다.

 

 

정자각은 위에서 보았을 때 T자 모양이라 丁자와 같다하여 정자각이라 한다는 군요.

 

 

정자각 좌측에 수라간이 위치해있고

 

 

 

 

 

 

우측에는 수복방이 위치해 있군요.

 

 

 

정자각 뒤쪽 오른쪽에 영릉비가 세워져 있다.

 

 

 

영릉(英陵)은 조선 제 4대 세종(世宗)과 그 비(妃) 소헌 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를 모신 능이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세종대왕(世宗大王) 영릉(英陵)을 둘러보고 돌아나와 세종전에 들리어 과학이야기에 대한 내용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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