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산에는 꽃이 피네
**여행이 좋아**/사찰 여행

운악산 현등사(雲岳山 懸燈寺)

by 산산바다 2012. 8. 18.

산과바다


운악산 현등사(雲岳山 懸燈寺)

2012. 8. 14.

경기도 가평 운악산에 위치

곰나루-신현철 장기영 양문석 이계도 김현민 동행

 

 

 

 

 

 

 

三忠壇-삼충신(최익현 민영환 조병세)을 모신 壇

* 최익현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이항로의 제자이다.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抱川郡) 가범리(嘉范里)에서 대(岱)의 둘재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字)는 찬겸(贊謙)이며 호(號)는 면암(勉庵)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초명(初名)을 기남(奇男)이라고 하였다. 면암은 집안이 가난하여 4세때 단양(丹陽)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지방으로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다. 14세때에 부친의 명에 따라 성리학의 거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 되어, 수학하였다. 그는 스승인 화서 이항로로부터 우국애민(憂國愛民)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 받아 그것을 위국여가적(爲國如家的)인 충의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23세 때에 명경과(明經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 중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화서 이항로 계열의 위정척사였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王道政治) 구현을 이상으로 하였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 1833~1906)은 14세부터 21세까지 화서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일찍부터 벼슬길에 나갔다. 그는 중암 김평묵과 더불어 스승의 심주리론(心主理論)을 끝까지 지지한 제자였으며 화서의 문인 가운데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올라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었다.

포천에서 태어난 그는 4세 때 단양으로 이주하였고 다시 11세 때 화서가 살고 있던 양평으로 이사하였다. 이를 계기로 14세부터 화서 문하에서 수학하게 되었는데, 화서는 그의 탁월한 자질을 사랑하였고 15세 때는 훗날 그의 호가 된 ‘면암(勉菴)’이라는 글을 써 주기도 했다. 면암은 22세 때 포천 고향으로 이사를 온 후부터 성균관에 들어가 과거공부에 열중하여 23세에 명경과에 급제하였으며 24세 이후 성균관전적을 거쳐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원, 이조정랑에 올랐다. 30세 때 신창 현감으로 재직 중 상관인 충청감사에게 항의 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고, 32세부터 다시 부름을 받고 벼슬에 나가 예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그는 30대까지 대체로 평탄한 관료생활을 하였으나 중년인 40대부터는 대원군의 정책에 반대하고 일본을 배척하는 주장을 펴면서 파란을 겪게 되었으며 그 뒤로는 스스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과격한 상소는 조정 대신들의 공격을 받게 되어 두 차례에 걸친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면암은 60대 이후의 만년(晩年)에도 계속하여 도학적(道學的) 척사론(斥邪論)에 입각한 척왜상소를 올렸으며 의병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1906년 74세의 노구로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 지 열흘 만에 체포되어 쓰시마 섬에 구금되었고, 4개월 후인 11월 17일(음) 감옥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최익현 동상은 충남 청양 칠갑산에 설치되어있다.


* 민영환(閔泳煥)

민씨정권의 세도 속에서 관직에 진출했고, 2차례의 해외여행으로 견문을 넓혀 왕에게 개혁정책을 권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기울자 자결로 일제에 항거했다. 본관은 여흥.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출신 및 초기 관직생활>-아버지는 선혜청당상을 지낸 겸호(謙鎬)이며, 뒤에 큰아버지인 태호(台鎬)에게 입양되었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이 되었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정자·검열·수찬·장령 등을 거쳐, 1881년(고종 18)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대사성과 도승지를 지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생부 겸호가 피살되자 벼슬을 내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뒤 도승지·이조참판·한성우윤·예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윤·독판내무부사 등을 지냈다. 1895년 8월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민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부임하지 못했다. 친러파가 축출되고 친일적 경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낙향해 두문불출했다.

<외교활동>-1896년 특명전권대사로 학부대신 윤치호(尹致昊), 2등서기관 김득련(金得鍊), 3등서기관 김도일(金道一) 등과 함께 4월 1일 인천을 출발해 상하이·나가사키·도쿄·밴쿠버·뉴욕 등을 거쳐 유럽 대륙의 신문명을 보고 5월 20일 모스크바에 도착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뒤 약 3개월 동안 러시아 각지를 둘러보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10월 21일 귀국했는데, 그의 여행은 독립신문에 그 내용이 소개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1897년(광무 1) 1월에는 다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3등서기관 이기(李琦), 서기 김조현(金祚鉉)·김병옥(金秉玉)·손병균(孫炳均) 등과 함께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했다. 도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러 니콜라이 황제에게 국서와 고종의 밀서를 전달했다. 2차례에 걸친 해외여행을 통해 유럽의 제도를 모방해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을 신장해 국가의 근본을 공고히 할 것을 여러 번 고종게 건의했는데, 그중 군제에 관한 건의가 받아들여져 원수부(元帥府)에 의한 육군통솔이 이루어졌다. 그뒤 서재필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를 측면에서 후원하다 원로대신들의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참정대신·탁지부대신·장례원경·헌병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며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太極章)을 받기도 했다. 1904년 이후 내부·학부 대신을 역임했으나, 일제의 침략을 맹렬히 반대하다가 시종무관장이라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1905년에는 참정·외부 대신을 역임했으나 다시 시종무관장이 되어 순국할 때까지 그 직위에 머물렀다.

<을사조약과 순국>-당시 국내정세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대한제국정부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고, 그해 8월에는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해 재무·외교 부문에 고문정치를 시작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한국에서의 정치·경제·군사 상의 우월권을 인정받은 상태에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이 체결되자 원임의정대신(原任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조약에 찬동한 5적을 성토하고 조약의 파기를 주장했으나 조병세의 체포로 실패했다. 이어 2차 상소를 전개했으나 나라의 운이 이미 다했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해 국민을 각성시킬 목적으로 그해 11월 30일 오전 6시경 2,000만 동포와 고종 및 주한 외국사절에게 보내는 3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의 자결 소식이 알려지자 조병세·김봉학(金奉學)·홍만식(洪萬植)·이상철(李相喆) 등이 그의 뒤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했다. 저서로는 〈민충정공유고 閔忠正公遺稿〉·〈해천추범 海天秋帆〉·〈사구속초 使歐續草〉·〈천일책 千一策〉 등이 있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세부정보 확인


* 조병세 (趙秉世)

1827(순조 27)~ 1905. 한말의 문신·순국열사.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아버지는 홍천현감 유순(有淳)이다.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급제, 사관(史官)이 되어 1864년(고종 1) 실록청 도청낭청(都廳郎廳)으로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874년 함경도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호조참판에 임명되고 동지사은부사(冬至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한성부좌윤을 거쳐 승지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을 지냈다. 1887년 공조판서를 거쳐 1889년 우의정에 오르고 1893년 2월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후 정치적 변동이 크게 일어나자 잠시 정계를 떠나 가평에 은퇴했다. 1896년에는 총호사(摠護使)가 되었고 민비 국장 때 만장제술관(輓章製述官)으로 참여했으며 뒤에 다시 원로대신으로서 중추원의장과 의정부의정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으로 활동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하여 79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상경하여, 을사5적의 처형을 주청(奏請)하려고 했으나 처음부터 일본군의 방해로 고종과의 면담이 거절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1월 26일 심상훈(沈相薰)·민영환(閔泳煥)·이근명(李根命) 등과 함께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와 5적을 처형하고 새로 충량(忠良)한 사람을 뽑아서 외부대신에 임명하고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5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했다. 또한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 및 5개국 공사에게 각각 글을 보내어 독립과 영토보존의 원조를 요청하고 조약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각국 공사들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종도 듣지 않고 다만 물러가라고 하자 다시 대한문(大韓門) 앞에서 고종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궁중을 물러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거적을 깔고 계속해서 을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 일본헌병에 강제연행되었다. 이후 민영환이 대신 소두(疏頭)가 되었으나 민영환도 잡혀 평리원(平理院)에 연금되었다가 특명으로 풀려난 뒤 비분을 참지 못해 29일 자결했다. 가평 향제(鄕第)에 강제 추방되었으나 30일 다시 서울로 돌아와 표훈원(表勳院)에서 여러 사람과 다시 상소했다. 또다시 일본군이 가마에 태워서 강제 추방하자 가마 안에서 음독하여 조카 민희(民熙)의 집에 당도하여 죽었다. 이때 각국 공사관에 독립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도록 요청하는 투서와 함께 국민들에게는 충의로서 독립의 기초를 다질 것을 촉구하는 유서를 남겼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삼충단을 지나 일주문이 보인다.

 

 

 

 

한참 오르다 보니 민영환 암각서가 보인다.

 

 

 

 

 

 

 

 

 

 

 

현등사는 경기도 가평 운악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신라 법흥왕 때 인도에서 온 승려 마라가미(摩羅訶彌)를 위하여 창건한 후 중창과 재건 몇 번의 중수를 거친 천년고찰입니다. 고려시대에 폐허가 된 절터의 석등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보고 현등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는 유래가 있다. 가평군 운악산은 경기의 소금강이라 불리우며 남동쪽의 산 중턱에는 고찰 현등사[懸燈寺]가 자리 잡고 있다. 雲岳山이란 이름은 망경대를 중심으로 높이 솟구친 암봉들이 구름을 뚫을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현등사의 이름을 빌려 현등산 이라고도 한다.

 

 

 

 

 

 

 

 

 

 

 

 

 

적멸보궁에 올라본다.

 

적멸보궁의 오른쪽으로 운학산의 험한 능선이 내려오고.....

 

적멸보궁이 좁은 바위에 올라 지어졌다.

 

현등사에서 108계단쪽으로 내려 오면서 현등사삼층지진탑이 있다.

 

 

108계단을 내려오니 불이문이란다. 곁에 백팔번뇌의 진리 간판을 읽어본다.

 

108계단을 내려오니 불이문에 108번뇌의 진리를 적어놓았군요.

내려오면서 민영환의 암각서 바위위에서 준비한 올갱이무침과 막걸리 음료수를 마시며 쉬어 내려온다.

 

가평과 연관된 인물을 기리는 현등사 입구에 삼충단이 설치된것이 특이하다.

 

 

 

청주로 돌아오면서 길가의 음식점에 들리어 메밀로 만든 메밀막국수로 늦은 점심을 시장기에 맛있게 먹고 내려온다. 

 

다음에 만날때는 좀 참아가며 말씀을 언성을 높이지말고.... 늙어서 개성이 강한것도 참아보고, 잘났어도 들어내지 말아보며, 잘 아는것도 숨기고, 고집이 아집인가?

참아가며......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것도 좋지만 상대방의 의견도 조금은 ...바보

싸우는것이 어디 한두번이던가? 매번 만날 때 마다 그러니 원참...... 공통화제가 그렇게도 없나요? 대화술공부도 좀 하시지!

 

다음에는 불참하고싶구나.

 

그래도 1박2일동안 곰나루 벗님들과 함께 했군요. 김현민 벗님 여행주선에 운전에 알뜰살림하느라 수고했어요.

벗님모두 매일매일 즐거우세요. 

 

산과바다 이계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