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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친구와 함께/곰나루

강화고려궁지(江華高麗宮址)

by 산산바다 2010. 2. 2.

산과바다



강화고려궁지(江華高麗宮址)-사적 제133호 궁궐터 

소재지-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 

2010.1.31.

곰나루모임(이계도 신현철 장기영 양문석 김형기 김현민 최한용)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이곳은 고려가 몽고(蒙古)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抗戰)하던 39년간의 궁궐터(宮闕址)이다.

 

1232년 6월 고려(高麗) 고종(高宗)(1213∼1259, 재위)은 자주적(自主的)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旗幟)를 높이 든 고려 무인(武人)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江華島)에 도읍을 옮겼으며 1234년에 궁궐과 관아(官衙)의 건물을 완성하였다.


1270년 몽고와의 강화(講和)가 성립되어 개성(開城)으로 환도(還都)한 뒤 궁궐과 성은 무너졌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행궁(行宮)이 있었으나 1637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성이 청군(淸軍)에게 함락(陷落)되었고


그 후 고려 궁터에는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의 건물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동헌(東軒)과 이방청(吏房廳)만이 남아 있다.

 

이곳은 1977년에 보수(補修) 정화(淨化)되어 우리 민족(民族)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 주는 국민교육의 터전이 되어 있다.

 


강화고려궁지 앞에서 바라본 강화읍소재지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강화인삼센터와 풍물시장을 들려갈 예정이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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