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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禪詩/禪師들의 禪詩

중국 선종(禪宗) 法의 이음

by 산산바다 2008. 8. 8.

산과바다


중국 선종(禪宗) 法의 이음  

 

天人師 석가모니......→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禪宗의 法을 전함(일대조사 달마)→이조(二祖) 혜가(慧可)→삼조(三祖) 승찬(僧璨)→사조(四祖) 도신(道信)→오조(五祖) 홍인(弘忍)→육조(六祖) 혜능(慧能)에 이르도록 법이 전해짐

 

吾本來唐國  :  내가 당나라 와서

傳敎救迷情  :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을 구하니

一花開五葉  :  한꽃에 다섯 잎이 열리어

結果自然成  :  결과가 자연히 이루도다.

 

달마대사가 9년의 면벽에 들어있던 어느 날 신광(神光) 이라는 스님이 찾아와 말했다.
“제자는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했습니다. 조사께서는 부디 불안한 제 마음을 풀어 주십시오.”
“그대의 불안한 마음을 내게 가져오너라. 마음의 평화를 주리라.”
달마의 이 같은 응대에 신광은 다시 말했다.
“마음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찾을 수 있다면 어찌 그것이 그대의 마음이겠는가. 나는 이미 그대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었느니라.”
신광은 이 말에 크게 깨우쳤다. 그가 훗날 달마의 법을 이은 중국선종의 2조 혜가(慧可)대사다.


 

二祖 慧可(487 중국 뤄양[洛陽] 우라오[武牢]~593 중국)

 


 달마의 제자 도부, 도육, 총지는 달마로부터 법을 전수 받으면서 그 진수는 알지 못하고, 가죽과 살과 뼈로 비유되는 언어와 문자에 얽매인 답을 한 것이다.

  그러나 혜가는 법신을 보았기에 언어와 문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진수를 보여준 것이다. 이때부터 중국불교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전통이 이어져 왔고, 육조 혜능에 이르기까지 가사를 법을 전하는 법신의 상징으로 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혜가에게 <능가경>4권을 주어 중생을 교화하도록 했다. 한편 달마의 제자 담림曇林은 달마의 <입도사행>을 정리함으로써 중국 선종에 큰 업적을 남겼다.

 낙양 땅에 신광神光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본래 성은 희姬씨인데, 그 모친이 기이한 광채가 방으로 비추는 바람에 회임懷妊하였다고 하여 이름을 ‘신광神光’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세간의 모든 지식을 통달하였고, 향산 보정香山寶靜선사로부터 계를 받아 출가했다. 노자老子 장자莊子나 주역周易 공자孔子 등의 가르침에 부족함을 느꼈고, 당시의 불교 역시 원융하지 못해 늘 탄식을 해왔다.

 

 그러다가 달마에 대한 소식을 듣고, 소림사로 찾아가 그곳에 머물면서 조석으로 달마를 극진히 공양하였다. 그러나 달마는 여전히 벽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광은 이에 스스로 ‘옛사람들은 도를 구하기 위해 뼈를 두드려 골수를 내고, 살을 찔러 피를 내어 주린 이를 구제하였다고 했는데, 나는 아직 옛사람들의 정성에 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지 않는가?’라고 탄식했다.

 

 어느 날 신광이 달마가 면벽하고 있는 면벽동(面壁洞)앞에 서서 가르침을 구하고 있는데, 밤에 큰 눈이 내려 새벽에는 무릎까지 눈이 쌓였는데도 여전히 자세를 변치 않고 계속 서 있었다.

  마침내 달마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오랫동안 눈 속에 서있으니, 무엇을 구하기 위함인가?”

“대사님의 자비로 감로의 법문을 열어 널리 중생을 구제하기를 원하나이다.”

“불법은 무상의 묘법이거늘, 네가 이처럼 미약한 수고로움으로 대법을 취할 생각이란 말이더냐?”

 

 이 말을 들은 신광은 그 자리에서 예리한 칼로 자신의 왼팔을 잘라 대사 앞에 내려놓았다.

달마는 그가 법기임을 알고 ‘혜가慧可’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제 마음이 늘 불안하오니, 대사께서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그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러면 마음을 편하게 해주리라.”

혜가는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말했다.

“제 마음을 깊이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내가 네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느니라.”

혜가는 이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로써 혜가(487~593)는 29조이며 중국 선종의 2조가 된다.

 

중국 선종(禪宗)의 제 2대 조사.

속성(俗姓)은 희씨(姬氏), 이름은 신광(神光). 어려서부터 유교의 고전을 공부하고, 성장하여 불교 서적을 읽으면서 스스로 얻은 바 있어 향산(香山)의 보정(寶靜)에게 출가, 영목사(永穆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면서 공부했으며, 40세에 샤오린 사[小林寺]에서 보리달마를 만난 일화는 유명하다. 혜가가 가르침을 청했으나 달마대사는 오로지 벽을 마주하고 수행하며 외면했다. 큰 눈이 내리던 어느날 밤, 그는 눈 속에 서서 왼팔을 잘라 구도의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이어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간 다음과 같은 '안심(安心) 문답'을 계기로 혜가는 선종의 제2대조사가 되었다. "그래,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 "마음이 심히 편치 않습니다." "편치 않다는 그 마음을 어디 가져와 보라.""찾아보니 없습니다." "됐다. 그대 마음은 편안해졌다." 이렇게 하여 보리달마를 6년 동안 받들었으며 〈능가경 楞伽經〉과 전법의 증표로 스승이 제자에게 전하는 가사인 신의(信衣)를 받았다. 이후 552년 제자 승찬(僧璨)에게 법을 전하고 업도(鄴都)로 나가 34년 동안 설법했다. 말년에 시기하는 무리들의 무고로 가혹한 형을 받다가 107세에 입적했다. 당의 태조는 '정종보각대사'(正宗普覺大師)라 시호하고, 덕종은 다시 '대조선사'(大祖禪師)라 시호했다.

 

혜가대사(慧可大師)와 그 제자들

 혜가대사(487~593)는 무로(武牢) 사람이다. 성은 희(姬)씨이고 아버지는 적(寂)이다.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 기도하니 하루 저녁에는 이상한 광채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어린애를 낳았으므로 이름을 광(光)이라 하였다. 어릴 때부너 의지와 기상이 특이하고 시서(詩書)를 두루 보고 현묘한 이치에 밝았으며 집안 살림을 좋아하지 않고 산천에 놀기를 좋아하였다.

뒤에 불서를 보다가 초연히 얻은 바가 있어 바로 낙양 용문산에  있는 향산사(香山寺) 보정(寶靜)선사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영목사(永穆寺) 부유(浮游) 강사에게 대ㆍ소승의 모든 교법을 두루 배웠다. 32세가 되던 해 다시 향산으로 돌아와서 8년을 지내는데 어느 날 선정 가운데서 한 신인이 나타나 말했다.

“머지않아 과위를 얻을 것인데 왜 여기에만 있는가. 큰 도는 먼 곳에 있지 않으니 그대는 남쪽으로 가라.”

이로 인하여 그의 이름을 신광(神光)이라 고쳤다. 신의 도움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튿날부터 머리가 쑤시는 것 같이 아팠다. 그의 스승이 고치려 하니 공중에서 말하였다.

“이는 뼈를 바꾸는 것이다. 예사 아픔이 아니다.” 하였다. 신광이 드디어 신이 말한 사실을 고백하기 전 그 스승이 정수리를 살피니 과연 다섯 봉우리가 솟아나고 있었다. 스승께서 네상호가 길상하니 반드시 증득하는 바가 있겠다. 신인이 너를 남쪽으로 가라 한 것은 소림이니 반드시 달마대사가 네 스승이리라.

신광이 분부를 받고 소림으로 가 앞에서와 같이 법을 받았다. 달마대사가 소림에서 교화를 부탁하고 서쪽으로 돌아간 뒤에 혜가대사가 계승하면서 후계자를 구해보는데 북제(550~577)의 천평년 간에 40이 넘어 보이는 어떤 거사 한사람이 자기의 성명도 밝히지 않고 불쑥 와서 절을 하고 물었다.

“제자는 풍병이 걸렸사오니 화상께서 죄를 참회케 하여주소서.”

“죄를 가지고 오너라. 참회시켜 주리라.”

“죄를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대의 죄는 다 참회되었다. 앞으로는 불ㆍ법ㆍ승에 의해서 생활하라.”

“지금 화상을 뵈옵고 승보임은 알았으나 어떤 것을 불보ㆍ법보라 합니까?”

“마음이 부처요, 마음이 법이다,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요, 승보도 그러하다.”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이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지 않음을 알았아오니 마음이 그러하듯이 불보와 법보가 둘이 아니옵니다.”

대사가 매우 갸륵하게 여기어 곧 머리를 깎아주고 말했다.

“너는 나의 보배이다. 승찬(僧璨)이라 부르라.”

그해 3월 8일 복광사(福光寺)에서 구족계를 받으니 그로부터 병이 차츰 나아져서 2년 동안 시봉을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대사가 분부하였다.

“보리달마가 멀리 천축에서 와서 정법안장을 은근히 나에게 전하였는데 내가 이제 달마의 믿음의 옷과 함께 그대에게 주노니, 그대는 잘지켜 끊이지 않게 하라.”

고 하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본래연유지(本來緣有地) 본래부터 마음 땅이 있었기에

인지종화생(因地種華生) 그 땅에 씨를 심어 꽃이 피나

본래무유종(本來無有種) 본래 종자도 있는 것 아니며

화역불당생(華亦不當生) 꽃도 나는 것 아니다.


대사가 옷과 법을 전한 뒤에 다시 말했다.

“그대가 내 법을 받고는 깊은 산속에 들어앉아 얼른 교화에 나서지 말라. 머지않아 국난이 있으리라.”

“스승께 미리 아시니 가르쳐 주소서.”

“내가 아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달마대사께서 반야다라존자에게 예언하시되 마음속은 길하나 겉모양이 흉하다고 하였는데 내가 햇수를 따져보니 요즈음에 해당된다. 그러니 세상의 재난에 걸리지 않게 하라. 그러나 나도 전생의 허물이 있으니 지금 갚게 될 것이다.”

대사가 이렇게 법을 전한 뒤에 업도에서 형편에 따라 설법을 하니 한 마디을 연설하면 사부대중이 모두 귀의하였다. 이와 같이 36년을 지낸 뒤에는 드디어 자취를 감추고 겉모양을 바꾸어 술집에도 푸줏간도 찾고 거리의 잡담도 익히고 품팔이도 하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스님께서는 도인이신데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 라고 물으면 나는 내 마음을 길들이는데 왜 그대들이 관계할까 라고 하였다.

또 대사가 완성현(莞城縣) 광구사(匡救寺)의 3문 밑에서 위없는 도를 연설하니 듣는 이가 숲같이 많았다. 이때에 변화법사(辨和法師)가 그 절에서 열반경 강의를 하였는데 그의 학도들이 대사의 설법을 듣고 차츰 차츰 끌려오니 변화는 분함을 참지 못하여 고을 재상 적중간(翟仲侃)에게 무고하였다. 중간이 그 삿된 말에 속아서 대사에게 그릇된 법을 가하였으나 대사는 태현히 목숨을 마치니 진실을 아는 이는 옛 빛을 갚는다고 하였다. 그 때의 나이는 107세요 수의 문제 개항 13년 계축 3월 16일이었다. 뒤에 자주(滋州) 부양현(釜陽縣) 동북쪽 70리에 장사지내니 당 덕종이 대조선사(大祖禪師)라 시호를 내리었다.

 

1) 승나선사(僧那禪師)와 향거사(向居士)

스님의 성은 마(馬)씨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많은 서적에 통달하여서 나이 20세에 동해(東海)에서 예기와 주역을 강의하니 듣는 이가 저자를 이루었다.

그가 남쪽으로 떠나려 할 때에 상부(相部)의 학인들이 따라 왔는데 때마침 2조의 설법을 만나 동지들 18인과 함께 2조에게 출가하였다. 그로부터 다시는 손에 붓을 잡지 않고 세속의 경전을 영원히 떠나 옷 한 벌 발우 하나로 한자리에 앉고 한 끼니만 먹는 두타행(頭陀行)을 하였다.

조사의 심인은 고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를 도우는 데 있을 뿐이다. 만일 본심에 계합하여 마음대로 하는 참 광명을 얻으면 고행은 흙을 뭉쳐서 금을 이루는 것 같거니와 고행만을 힘쓰고 본심을 밝히지 못하고 사랑과 얽매이면 고행은 그믐밤에 험한 길을 가는 것 같다. 네가 본심을 밝히고자 하거든 자세히 살피고 관찰하라. 색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에 마음이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이미 있음에도 없음에도 속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음 구슬이 분명히 밝아 항상 세간을 비치되 한 티끌만한 간격도 없고 잠깐사이의 끊임도 이어짐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 초조께서 능가경 4권을 겸하여 전하면서 나의 스승인 2조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단을 관찰하건대 이경만 있으면 마음을 깨칠 수 있다. 그대가 의지하여 수행하면 세상을 제도하는 법을 자연히 얻으리라고  하셨다. 또 2조께서 늘 설법을 마치시고는 말씀하시기를 이경이 4세 뒤에는 이름과 형상이 변하리라.고 하셨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전하노니 잘 간직하여서 그릇된 사람에게는 전하지 말라.

전해준 뒤에 대사는 교화를 떠났는데 그의 임종은 알 수 없다

 

향거사는 숲속에 살면서 나무 부치를 먹고 시냇물로 목을 축였다. 북제(北齌)의 천보(天保)년간에 2조의 교화가 번성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그림자는 형상에 의하여 일어나고 메아리는 소리에 따라 일어나는데 그림자를 버리고 형상을 쫓는 것은 형상이 그림자의 근본임을 모르기 때문이요, 소리를 내면서 메아리를 없애려 함은 소리가 메아리의 뿌리임을 모르기 때문이니 번뇌를 제하고 열반에 나아가려는 것은 형상을 버리고 그림자를 찾는 것 같고 중생을 떠나서 불과를 구하려는 것은 소리를 내지 않고 메아리를 찾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미혹함과 깨달음이 한 갈래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다르지 않습니다. 이름이 없는데 이름을 지으면 이름에 의하여 시비가 생기고 이치가 없는데 이치를 지으면 이치에 의하여 논쟁이 일어납니다. 허환하고 참되지 않거늘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허망하고 진실이 없거늘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으리요. 얻어도 얻는 바가 없고 잃어도 잃은 바가 없음을 알고자 하나 나아가 뵈올 겨를이 없으므로 애오라지 이 글월을 올리오니 바라옵건대 회답해 주소서.”

2조가 필생(筆生)에게 분부하여 이렇게 답장을 썼다.

“보내는 글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가 여실하다. 참되고 그윽한 이치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본래는 마니주를 잘못 알아 자갈이라 하였으나 활연히 깨고 보니 진주임에 틀림없다.

무명과 지혜가 차별 없이 같으니, 만법이 모두가 그러한 줄 알아라. 두 소견의 무리를 가엾이 여기어 부르는 말 쓰게 하여 이 글을 짓노니, 몸과 부처가 다르지 않음을 관찰하면 남음 없는 열반은 찾아서 무엇하랴.“

거사가 2조의 게송을 받아 절을 한 뒤에 펴 보고 2조의 인가를 은밀히 받았다.

 

2) 혜만선사(慧滿禪師)

그의 성은 장(張)씨다. 처음 본사 융화사(隆化寺)에서  승찬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뒤에 검약에다 뜻을 두어 바늘 두 개만을 가지고 다니면서 겨울에는 걸식과 누더기 깁기를 하다가 여름이 되어서야 버렸다.

그는 스스로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몸에는 이(里)가 없고 잘 때는 꿈을 꾸지 않고 항상 걸식을 하고 한 자리에서 이틀 밤을 묵지 않고 가는 절에서 마다 장작을 패고 신을 삼았다

정관 16년 겨울 낙양 회선사(會善寺) 곁에 있는 옛 무덤 틈에서 자다가 큰 눈을 만났는데 새벽에 절로 들어가서 담광법사(曇壙法師)를 만나니 광법사가 그의 온 곳을 괴이히 여기자 법이 온 곳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또 언젠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법문을 하였다.

“부처님들이 마음을 말씀하신 것은 마음의 형상이 허망한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인데 이제 마음의 형상을 더 보태니 부처님의 뜻을 매우 어기며 또 논의를 더 보태니 자못 큰 치를 어긴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항상 <능가경> 네 권을 가지고 다니면서 마음의 길잡이로 삼고 말씀대로 행하라. 이는 대체로 지난 여러 대에서 법을 전하는 법칙에 따른 것이다. 뒤에 후배들을 교화하는 도중에 질병 없이 앉은 대로 입적하니 수명은 70세였다.


 

삼조승찬 게송 (三祖僧璨 偈頌) (?~606)


至道無難 지도무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唯嫌攔擇 유혐난택 오르지 밉다 곱다 가릴 뿐이니

但莫憎愛 단막증애 다만 마음에 사랑과 증오를 두지 말라

洞然明白 통연명백 마음을 바로 하여 꿰뚫어 알면 그 빛이 밝으리라

   

승찬 요약(僧璨 要約)

문둥병으로 가족에게까지 버림을 당한 승찬혜가의 심인(心印)을 얻었으며 혜가는 천인사[天人師] 석가모니 부처님 법을 승찬에게 전했다.

 

-중국 선종의 제 3조인 승찬(僧璨 ; ?~606)-

대사는 가계(家系)가 분명하지 않다. 혜가 대사에게서 법을 이어받은 후 서주(西周)의 환공산에 은거하였다.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불교를 탄압할 때는, 일정한 주거지 없이 태호현(太湖縣)의 사공산(司空山)을 왕래하며 사람들 모르게 10여년을 지냈다. 승찬 대사가 많은 대중들을 모아 놓고 설법할 적에 한 사미가 있었다. 나이는 겨우 14세이고 이름은 도신(道信)이라 했다.
도신이 승찬 대사 앞에 나와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의 마음입니까?"
이때 승찬 대사가 되물었다.
"그대의 지금 마음 상태는 어떠한가?"
"저는 지금 무심(無心)입니다."
"그대가 무심이라면 부처님에게 무슨 마음이 있겠느냐?"
승찬 대사의 말이 끝나자 도신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스님, 저에게 해탈(解脫)의 법을 일러주십시오."
승찬 대사는 다시 되물었다.
"그대를 속박하는 이가 있는가?"
"아무도 속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속박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대는 해탈한 사람인데 어째서 해탈을 구하는가?" 도신은 이 말에 크게 깨달음을 얻고 스승 곁에 8, 9년 동안 있다가 길주(吉州)로 가서 구족계를 받고 돌아왔다. 이때
승찬 대사가 도신에게 법을 전해 줄 것을 선언하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花種雖因地 꽃은 땅을 인연하여 피어난다
從地種花生 땅에서 꽃이 피기는 하지만
若無人下種 씨를 뿌리는 이가 없으면
花種盡無生 꽃이 피어날 수가 없다

승찬 대사는 수양제(隨煬帝)의 대업(大業) 2년 (606)에 입적했다. 그 후 당나라 현종이 감지(鑑智) 선사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탑호(塔號)를 각적(覺寂)이라 하였다. 그가 남긴 저술에는
<신심명>(信心銘)이라는 명저가 있다. <신심명>에는 그의 선사상이 단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서두에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란 구절이 나오는데 '지극한 도는 걸림이 없다. 오직 시비를 가리는 것을 싫어한다.' 는 뜻이다. 도라는 것은 �아 다닌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묻는 것 자체가 큰 잘못이다.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길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길인가. 저 길인가'하고 따진다면 이미 도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만다. 도는 이상적인 어떤 세계가 아니라 바로 시장 바닥의 평범한 움직이는 삶 속에 있다. 단지 어리석음에 덮인 중생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따름이다.
승찬 대사는 또 말한다. "2는 1에 의해 있으며, 1도 또한 지키지 말라."
선악이라든가 시비 등의 분별은 근본으로 돌아가면 하나이다. 그 하나라는 것은 절대, 영원, 공(空)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승찬 대사는 그 하나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집착하면 단견과 독선주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그대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

 

신심명(信心銘)
 옛부터 <신심명>은 중국 선종사에서 제3조인 승찬감지(僧璨)선사의 저술로 되어 있다. 선사는 제2조인 혜가(慧可, 487~593) 스님의 선맥을 잇고 서주(舒州) 환공산에 은거하다가 후주(後周)의 무제가 불교를 크게 탄압할 때(574년~)에는 대호현 사공산에 왕래하며 일정한 주소 없이 10여 년을 지냈다고 하나 그 생애를 자세히 알 수는 없다고 한다. 그리고 593년에 제4조인 도신(道信)을 만나 의발(衣鉢)을 전하고 나부산(羅浮山)에 가서 있다가 2년 뒤에 다시 환공산에 돌아와 대중을 교화하다가 606년 10월에 입적하였으며, 나중에 당 현종(玄宗)이 감지선사(鑑智禪師)라 시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승찬 스님의 생애에 대한 개요는 9세기 초에 성립된 <보림전(寶林傳)> 이후에 전형화된 것이다. 적어도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하택신회(荷澤神會)가 제3조로 승찬을 기정사실화하려는 현창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신회는 친구인 관료 방관(房琯)에게 부탁해 3조 승찬의 비명(碑銘)을 쓰게 했다. 이 비명에 의해 다음은 신회가 관료인 이상(李常)과 함께 <보림전>(권8 부기)의 내용처럼 3조 현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시켰다. 그 결과 승찬의 생몰연대도 606년으로 잡혀졌으며, 이로 인해 선종에서는 완벽하게 선종 제3조로 승찬이 자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승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당 도선(道宣)의 <속고승전(續高僧傳)> (645~667년 성립)에 이름만 전한다. 이것을 보충하려는 자료가 돈황에서 발견된 <전법보기(傳法寶紀)>(712년 성립)와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713~716년 성립)이다. 당말에 이르자 소위 선종의 법맥을 설립하려는 조통설(祖統說)이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앞의 미비한 자료들을 더욱 확대시켜 놓은 것이 <보림전>이하 <전등록>같은 승찬의 전기이다.
 백장선사의 이 같은 설법은 후대를 내려오면서 ‘
<신심명>은 승찬 스님의 저술’로 인정되게 하였다. 황벽희운(黃檗希運)의 <전심법요(傳心法要)>를 비롯하여 <임제록(臨濟錄)>, <조주록(趙州錄)> 등 여러 어록에 <신심명>의 구절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하여 후대에서는 모든 것이 기정사실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비록
<신심명>이 제3조 승찬 스님께 가탁(仮託)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사실 여부를 떠나 선학사상에 아주 중요한 것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신심명>에 선이 중국적인 선학으로 완전히 소화된 상태에서 배회된 사유배경이자 선학의 바탕을 이루는 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전체가 146구 584자로 된 짧은 시이지만, 그 행간에 흐르는 선율은 가히 조사선의 정통이라 할 수 있다. 그 정신이란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에 인도선이 접목된 것인 양, 도가의 초월성과 유가의 현실성, 그리고 불교의 정신성이 고도로 농축된 사상이라고 하겠다.
 중국 선종사에서 그토록 중요시되었던
<신심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현실에 즈음해서 거기서 늘 주체적 일을 하는 행위를 강조한다. 선이란 생활을 떠나 한낱 관념적 유희로만 뇌까릴 수 없다. 반드시 의식주 속에서 선의 정신이 드러나야 한다. 지금 <신심명>은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으로 그런 선의 정신을 표명하고 있어서 우리에게 긴요한 관심이 되는 것이다.

1. 지극한 진리(至道)
지도무난(至道無難) : 지극한 진리란 어렵지 않나니,
유혐간택(有嫌揀擇) : 취사선택을 꺼릴 뿐이다.
단막증애(但莫憎愛) :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명백(洞然明白) : 훤하게 명백하리라.
호리유차(毫釐有差) :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천지현격(天地懸隔) : 하늘 땅 만큼이나 벌어진다.
욕득현전(欲得現前) : 눈앞에서 체득하려면
막존순역(莫存順逆) : 간사한 분별을 갖지 말지니라.

2.-1 쓰고 달다는 것(違順)
위순상쟁(違順相爭) : 거슬림과 따름은 서로 다투니,
시위심병(是爲心病) : 이는 마음병이 된다.
불식현지(不識玄旨) : 깊은 뜻을 모르면
도로염정(徒勞念靜) : 여태껏 이룬 공마저 무너진다.
원동태허(圓同太虛) : 큰 허공처럼 원만하면
무흠무여(無欠無餘) : 부족도 넘침도 없다.
양유취사(良由取捨) : 그러나 취사간택 때문에
소이불여(所以不如) : 원만하지 못하는 것이다.

2.-2 거슬리고 따르는 것(違順)
막축유연(莫逐有緣) : 차별상을 따르지 말고
물주공인(勿住空忍) : 허무에도 빠지지 말라.
일종평회(一種平懷) : 한결같이 대립을 초월하면
민연자진(泯然自盡) : 저절로 드러나리라.
지동귀지(止動歸止) : 마음의 움직임이 정지되더라도
지갱미동(止更彌動) : 그 정지된 만큼 또 동하게 된다.
유체양변(唯滯兩邊) : 오로지 정과 동에 걸려서야
영지일종(寧知一種) : 어떻게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2.-3 거슬리고 따르는 것(違順)
일종불통(一種不通) : 한결 함을 뚫지 못하면
양처실공(兩處失功) : 양쪽에 있는 공력을 잃는다.
견유몰유(遣有沒有) : 유(有)를 좇으면 유를 잃고
종공배공(從空背空) : 공을 따르면 공을 놓친다.
다언다려(多言多慮) : 말 많고 분별의식이 많아 봐야
전불상응(轉不相應) : 사실과는 맞지 않는다.
절언절려(絶言絶慮) : 말이 끊기고 분별의식이 없어야
무처불통(無處不通) : 곧 통하는 법이다.
귀근득지(歸根得旨) : 근원에 돌아가야 뜻을 얻는데,
수조실종(隨照失宗) : 밖을 비춰봐야 실체를 놓친다.
수유반조(須臾返照) : 조금이라도 안을 비춰봐야
승각전공(勝却前空) : 눈앞의 것이 다 진실을 드러낸다.

2.-4 거슬리고 따르는 것(違順)
전공전변(前空轉變) : 눈앞의 세계가 변천하는 건
개유망견(皆由妄見) : 망령된 견해 때문이다.
불용구진(不用求眞) : 애써서 진리를 구하려 하지 말고
유수식견(唯須息見) : 오로지 망견을 쉬도록 하라.

3. 두 가지 견해(二見)
다시 인간의 고질적 병인 이분법적 논리구조에 대해 궁구되고 있다. 선학에서 가장 싫어하고 금기되는 논리구조이기 때문이다.

이견부주(二見不住) :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신물추심(愼勿追尋) : 삼가 더듬어 생각지도 말라.
재유시비(纔有是非) : 조금이라도 시비를 두면
분연실심(紛然失心) : 분연히 마음을 잃고 만다.
이유일유(二由一有) : 둘은 하나를 말미암아 있으나
일역막수(一亦莫守) :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일심불생(一心不生) :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무구(萬法無咎) : 만상에 허물이 없게 된다.
무구무법(無咎無法) :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불생불심(不生不心) : 생하지 않으면 마음도 없다.
능수경멸(能隨境滅) : 주체는 대상 따라 멸하고
경축능침(境逐能沈) : 대상도 주체 따라 사라진다.
경유능경(境由能境) : 대상은 주체로 인해 대상이고
능유경능(能由境能) : 주체는 대상 때문에 주체이다.
욕지양단(欲知兩段) : 양쪽을 알려고 하면
원시일공(元是一空) : 원래가 하나의 공이고
일공동량(一空同兩) :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으며
제함만상(齊含萬象) : 만물을 내포함을 알라.
불견정추(不見精麤) : 정밀하고 거친 따위를 안 보면
영유편당(寧有偏黨) : 치우친 견해가 있을 수 없다.

4.-1 좁은 시각(小見)
근원에 도달하려면 넓은 시각을 가져야 하는데, 일단 좁은 시각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좁은 시각이란 의심하는 생각들이다.

대도체관(大道體寬) : 대도를 체관함은
무이무난(無易無難) : 쉽지도 어렵지도 않다.
소견호의(小見狐疑) : 좁은 시각은 여우 의심처럼
전급전지(轉急轉遲) : 급하기도 하고 더디기도 하다.
집지실도(執之失度) : 여기에 탐착하면 도를 잃어
필입사로(必入邪路) : 반드시 거짓된 길에 들어선다.
방지자연(放之自然) : 그것을 놓으면 자연스러우니
체무거주(體無去住) : 본질은 가고 머묾이 없는 까닭이다.
임성합도(任性合道) : 본성에 맡기면 도에 접하고
소요절뇌(逍遙絶惱) : 소요하면 번거로움을 끊는다.
계념괴진(繫念乖眞) : 생각을 가다듬어 진실을 드러내라.
혼침불호(昏沈不好) : 혼침은 좋지 않다.
불호뇌신(不好惱神) : 안 좋으면 정신만 피곤하다.
하용소친(何用疎親) : 어떻게 소친을 쓰랴.
욕취일승(欲趣一乘) : 일승에 나아가려면
물오육진(勿惡六塵) : 육진을 꺼리지 말라.
육진불오(六塵不惡) : 육진을 꺼리지 않으면
환동정각(還同正覺) : 돌이켜서 정각과 같이 된다.
지자무위(智者無爲) : 지혜 있는 자는 함이 없고
우인자박(愚人自縛) : 어리석은 이는 스스로 묶인다.

4.-2 좁은 시각(小見)
법무이법(法無異法) : 법에는 다른 법이 없는데
망자애착(妄自愛着) : 헛되이 스스로 애착한다.
장심용심(將心用心) :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기비대착(豈非大錯) : 어찌 큰 착오가 아니랴!
미생적란(迷生寂亂) : 미혹되면 적란을 생하고
오무호오(悟無好惡) : 깨치면 호오(好惡)가 없다.
일체이변(一切二邊) : 모든 이변에
양유짐작(良由斟酌) : 헛되이 매달리면서
몽환공화(夢幻空華) : 몽환과 공화를
하로파착(何勞把捉) : 뭣 때문에 붙잡으려고 애쓰는가?
득실시비(得失是非) : 득실이나 시비 등을
일시방각(一時放却) : 한꺼번에 놓아버릴지니라!

5. 한결같음(一如)
안약불수(眼若不睡) : 눈이 만약 졸지 않으면
제몽자제(諸夢自除) : 꿈들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요,
심약불이(心若不異) : 마음이 다르지 않다면
만법일여(萬法一如) : 만상이 한결같다.
일여체현(一如體玄) : 한결같음을 체현하면
올이망연(兀爾忘緣) : 하나 되어 외연을 잊는다.
만법제관(萬法齊觀) : 만법을 제관하면
귀복자연(歸復自然) : 근본에 돌아가 자연스러우리라.
민기소이(泯其所以) : 그 까닭을 물어서
불가방비(不可方比) : 비교하지 말지니라.
지동무동(止動無動) : 동함을 멈추면 동함이 없고
동지무지(動止無止) : 멈춤을 동하면 멈춤은 없도다.
양기불성(兩旣不成) : 양쪽이 벌써 이루어지지 못하면
일하유이(一何有爾) : 하나가 어찌 있으리오.
구경궁극(究竟窮極) : 구경이 궁극이면
부존궤칙(不存軌則) : 궤칙이 있지 않다.
계심평등(契心平等) : 마음의 평등에 계합되면
소작구식(所作俱息) : 지은 바도 다 쉬게 되리니
호의정진(狐疑淨盡) : 여우의심이 다 맑아지면
정신조직(正信調直) : 바른 믿음이 곧아지리라.
일체불류(一切不留) : 일체에 걸리지 않으면
무가기억(無可記憶) : 기억될 것도 없다.
허명자조(虛明自照) : 깨끗하고 밝아 스스로 비추니
불로심력(不勞心力) : 전혀 거리낄 것도 없도다.
비사량처(非思量處) : 생각되지 않는 곳은
식정난측(識情難測) : 정량하기 어려운 것이다.

6. 진실로 그러한 것(眞如)
진여법계(眞如法界) : 진실로 그러한 세계는
무타무자(無他無自) : 남도 나란 것도 없다.
요급상응(要急相應) : 급히 상응하려고 하면
유언불이(唯言不二) : 오직 말하자니 둘이 아니다.
불이개동(不二皆同) : 둘이 아니면 다 같나니
무불포용(無不包容) : 그러면 포용되지 않음이 없도다.
시방지자(十方智者) :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이
개입차종(皆入此宗) : 모두 이 종에 들어온다.
종비촉연(宗非促延) : 종은 짧고 길지 않으나,
일념만년(一念萬年) : 한 생각이 만년이나 된다.
무재부재(無在不在) : 있고 없고가 없으니
시방목전(十方目前) : 시방이 그대로 눈앞이로다.
비고지금(非古之今) : 옛날과 지금이 아니니
삼세일념(三世一念) : 삼세가 다만 한 생각이로다.
극소동대(極小同大) : 극소는 대와 같나니
망절경계(忘絶境界) : 경계를 망절하고
극대동소(極大同小) : 극대는 소와 같아서
불견변표(不見邊表) : 치우침을 보지 않는다.
유즉시무(有卽是無) : 있음은 곧 없음이요
무즉시유(無卽是有) : 없음은 곧 있음이다.
약불여시(若不如是) :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불필수수(不必須守) : 반드시 지키려고 하지 말라.
일즉일체(一卽一切) : 하나가 일체요
일체즉일(一切卽一) : 일체가 하나니라.
단능여시(但能如是) : 단 그렇다면
하려불필(何慮不畢) : 무엇 때문에 끝내지 못했다 하는가?
신심불이(信心不二) : 믿음과 마음이 둘이 아니요
불이신심(不二信心) : 둘이 아님이 믿음과 마음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 : 말의 깊이가 끊기고
비거래금(非去來今) : 과거, 미래, 현재도 아니다.


사조 도신 게송(四祖 道信 偈頌) (580~651)

    

華種有生性 화종유생성  꽃의 종자에는 태어나는 성품이 있고

因地華生生 인지화생생  땅의 인연으로 태어나 자라고 피는 것

大緣與性含 대연여성함  큰 인연의 성품이 더불어 합해지면

當生生不生 당생생불생  마땅히 생하고 생하면 다시 생하지 않으리

 

꽃의 종자에는 남(生)의 성품이 있고
꽃은 땅을 인연으로 해서 피고 피는 것.
큰 인연과 성품이 합해지면
마땅히 나고 남이 인연은 짓지 않으리

 

 

도신 요약[道信 要約]

 

나이7세에 출가하여, 14세에 승찬 문하에 들었다. 50여 년을 장좌불와 했다고 하며 도적들을 법력으로 제도했으며 제4조가 되었다.

 

-중국 선종의 제4조 도신-

기주[蘄州] 광제[廣濟] 사람으로 속성은 사마[司馬] 593년 14세에 승찬을 뵈옵고 스승으로 섬기기 9년 마침내 의발을 받았다. 대중을 거느리고 여산[廬山]의 대림사[大林寺]에 살았다. 624년 기주에 돌아가 파두산[破頭山]에서 사부대중을 교화 태종[太宗]이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영휘[永徽] 2년에 죽었다.

나이72세, 시호 대의선사[大醫禪師],  오조홍인[五祖弘忍]에게 법을 전하였다.


 

오조 홍인 게송 (五祖 弘忍 偈頌)


 

有性來下種 유성내하종  꽃과 종자는 나는 성품이 있나니

因地果還生 인지과환생  땅에 의하여 꽃은 나고 또 난다

無情亦無種 무정역무종  정이 없으면 씨 또한 없어

無性也無生 무성야무생  부처의 성품도 태어남이 없느니라

 

홍인 요약[弘忍 要約]

도신이 성과 이름을 물으니 성은 불성[佛性]이요, 이름은 공[空]이라 답을 하였다고 하는 홍인은 일곱 살 때이다. 홍인이란 이름은 도신이 내려준 것이며 9척 장신이다.


-중국 선종의 제5조, 홍인스님(弘忍大師, 601∼674)-

성은 주(周)씨이고, 태어난 곳은 호북성(湖北省) 황매현(黃梅縣)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무성(無性)이라고 불렀는데 하루는 4조 도신스님이 황매현으로 볼일이 있어 가던 중 길 에서 무성이를 만났다. 남달리 빼어나고 총명해 보여서 아이에게 물었다.
"너의 성이 무엇이냐?"
어린애가 대답했다.
"성은 있으나 보통 성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성인데,,,?"
" 불성입니다."
" 너는 성이 없다는 말이냐?"
" 예, 불성은 공하기 때문입니다."
도신은 이 아이가 큰 법의 그릇이 될 것임을 알고 부모를 찾아가서 허락을 얻어 제자로 삼고 불명을 홍인이라 지어주었다.

홍인은 전생에 4조 도신 스님이 쌍봉산에 주석하여 법을 펴고 있을 때 70이 넘은 노인의 몸으로 법을 구하기 위해 찾아갔다. 4조가 보기에 안목은 비록 훌륭하지만 법을 전하기에는 너무 늙어서 법을 전해도 오래 펼칠 수 없으므로 몸을 바꾸어 오라고 했다.
그 길로 산을 내려오는데 마을 어귀의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주씨 성을 가진 처녀를 만났다. 그는 처녀에게 공송하게 부탁했다.

'처녀의 집에서 좀 쉬고 갈수 없겠소?"

처녀가 대답했다.

"부모의 승락을 받아야 합니다."

노인은 처녀의 태속에서 아기로 태어날 생각으로

"부모님 생각은 말고 처녀의 생각만 말해 주시구려."

라고 간절하게 쉬어가기를 거듭 부탁하여 허락을 얻어서 원력으로 몸을 받으니 홍인대사의 아버지는 따로 없다.

그런 연유로 홍인 조사가 오래 주석하여 대중을 가르치던 오조사(五祖寺)에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성모전(聖母殿)이 있는데 이 성모전은 홍인 조사의 어머니를 모신 곳으로 동정녀의 몸에 들어서 잉태한 뜻을 기리기 위함이다.

전생부터 특별한 사연이 있는 법기인 때문인지 홍인은 스승의 가르침을 한번 듣고 알아들어 두 번을 다시 질문하는 일이 없었다. 걷거나, 앉거나, 일상에 모든 것이 진리를 배우고 실천하는 장소로 생각하여 말과 행동이 바르고 법에 어긋남이 조금도 없었다. 후에 도신의 법을 이어받은 5대 조사가 되었으며 문하에는 승속을 가리지 않고 항상 많은 대중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나이74세 당 상원2년 죽다. 태종이 시호를 대만선사[대만선사]라 하고 황매산 동산에 탑을 세웠다.


 

육조 혜능 게송(六祖 慧能 偈頌) 638~713

    

菩리本無樹 보리본무수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아니요

明鏡亦非臺 명경역비대  거울 또한 거울이 아니라내

本來無一物 본래무일물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何處惹塵埃 하처야진애  어느 곳에서 때가 끼리요

 

홍인 요약[弘忍 要約]

장작을 팔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란 말을 듣고 황매현 동산선원 홍인스님을 만나 8개월간 방아를 찢고, 홍인이 전해준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받으니, 후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중국 선종(禪宗)의 제6대 조사(혜능 638~713)-

638 중국 광둥 성[廣東省] 신흥[新興] 중국 광동 성.동아시아 선불교의 대표적 계통으로 발전한 남종선(南宗禪)을 창시했다.

혜능의 널리 알려진 저작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의하면, 혜능은 젊었을 때 가난하고 무식했으며 장작을 팔아서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장작을 지고 시장에 나갔다가 한 객승이 〈금강경 金剛經〉을 독송하는 것을 듣게 된 혜능은 불교에 귀의할 뜻을 굳히고, 당시 중국 불교의 중심지였던 중국 북부로 가서 선종의 제5대 조사로서 명망이 높은 홍인(弘忍)의 문하에 들어갔다. 〈육조단경〉에 따르면 661년 혜능이 그의 문하에 들어온 지 8개월가량 지났을 때 홍인은 자신의 법맥(法脈)을 이을 제자를 뽑기 위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시를 짓도록 했는데, 가장 뛰어난 제자로 꼽히던 신수(神秀:605경~706)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티끌이나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하라"라고 읊었다. 그러나 이를 본 혜능은 "밝은 거울은 언제나 깨끗하니/어느 곳에 먼지나 티끌이 끼겠는가?"라고 읊었다. 혜능의 시를 들은 홍인은 그에게 자신의 법을 전했다.

다른 제자들의 시기로 인하여 비밀리에 홍인의 법맥을 잇게 된 혜능은 676년 중국 남부의 광둥 성으로 돌아가〈열반경 涅槃經〉의 대가 인종법사(印宗法師:627~713)로부터 구족계를 받았으며, 그 뒤 37년 동안 널리 가르침을 폈다. 〈육조단경〉에 의하면 혜능은 모든 사람에게 불성(佛姓)이 있으며 사람의 본성은 원래 순수하다고 선언한다. 경전을 읽거나 사찰을 건립하거나 재물을 바치거나 부처의 이름을 암송하거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등의 일보다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하니, 그 안에 모든 석가모니 및 부처의 가르침이 갖추어져 있다. 자기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려면 마음이 고요하고 지혜로워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인위적 사고와 사물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앉아서 명상하는 등의 전통적 수행법은 무익한 것이니, 진정한 마음의 고요란 움직임이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본성이 혼란되지 않는 상태이며 도착된 사고가 없는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누구든 자기 자신의 본성을 보면 어떠한 외적인 도움도 없이 즉각적으로 깨달음에 이른다. 혜능은 이처럼 즉각적인 깨달음, 곧 돈오(頓悟)에 대한 혁명적인 선언을 하여 온갖 전통적인 불교개념·경전·수행법 등을 철저히 배척함으로써 점진적 깨달음, 곧 점오(漸悟)를 옹호하는 신수의 북종선과 그의 남종선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생기게 했다. 당 선천 2월8일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혜능의 한마디>

홍인이 물었다. 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고?

“영남 신주에 사는 미혹한 중생입니다.”

이름은 무엇인가?

“혜능입니다.”

그 먼 곳에서 무엇 하러 왔는고?

“스님을 뵙고 부처가 되는 법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하하하, 무엇을 구한다고?

네 이놈, 너는 영남의 오랑캐로서 감히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느냐? “하하하”

“스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사람은 비록 남북이 있어 다름이 있을 수 있으나 부처의 성품에는 남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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